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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포럼]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종말론 [카테고리]
  • 김창락
    조회 수: 8061, 2003.10.07 13:42:16
  •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

    김 창 락 | 전 한신대학교 교수, 신약학


    1.1 서양의 정신 문명사를 전후(前後)로 나누는 엄청난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그것은 독일 나치 정권이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철학자 아도르노(Th. Adorno)는 선언하기를 "아우슈비츠 이후에 인간은 시를 쓸 수 없다." 하였다. 시의 생명은 진실과 아름다움이다. 아우슈비츠 사건을 외면한 채 시를 쓴다는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재생산하는 추악한 짓거리일 따름이다. 아우슈비츠 사건은 정신병적 광기에 사로잡힌 어느 한 사람 또는 특수한 집단이 우발적으로 저질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근 2000년의 기간에 걸쳐서 서양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정신 밑바탕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 사상이 낳은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아우슈비츠 사건 이전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 된다. 아우슈비츠 사건을 서양 문명사의 한 분계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신학적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로 Auschwitz: Beginning of a New Era라는 제명의 책이 1977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신학부에서는 1979/80년 겨울학기에 이 주제에 대한 윤번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그 강의 내용은 Auschwitz-Krise der christlichen Theologie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신약성서 도처에 발견되는 반유대교적 언명이 서양의 반유대주의 사상의 뿌리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유대인 문제와 관련하여 아우슈비츠 이전 신학과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성서해석 방법론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1월에 독일의 라인 지구 교회 총회는 그리스도교회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만행을 방조한 공범자였다는 죄책을 고백하는 신학적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대하여 본(Bonn) 대학 신학부 교수단은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대학 신학부 교수단은 라인 지구 교회 총회의 성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두 성명에는 그리스도교 측에서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화해를 이룩하고 우호 관계를 수립할 방안이 제시되었다.

    1.2 이 두 성명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로 이 두 종교의 신앙 고백에서 다음과 같은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가)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은 똑 같이 히브리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나) 그들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한 하나님을 똑 같이 믿는다.
    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똑 같이 믿는다.

    1.3 이 두 종교의 신앙 고백상의 이러한 공통점은 그들을 우호 관계로 결속시켜야 함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이 두 종교 사이에 우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글은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이 품고 있는 종말론적 희망이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 위하여 이 글은 이른바 세 가지 종말론, 즉 히브리 성서의 예언서의 종말론과 묵시문학의 종말론과 신약성서의 복음서의 종말론이 전승사적으로 어떠한 연장선에 서 있는지와 각각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을 주요 과제로 한다.

    1.4 이러한 종류의 연구는 출발점에서부터 극복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친다. 첫째로 예언서에는 묵시문학과 신약성서가 전제하는 바 역사가 끝장난다는 그러한 의미의 종말 개념이 없다. 둘째로 이른바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예언적 종말론과 비교할 때에 그 내용이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 전승사적 연속 관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학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셋째로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역사적 예수의 종말관 사이에 연속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지극히 어려운 물음이 가로 놓여 있다. 우리의 과제는 2차방정식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2차방정식을 푼다는 것은 기지수와 미지수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를 근거로 해서 미지수인 x와 y의 값을 기지수와 동일한 차원의 수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에 관한 문제에는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 너머에 놓여 있는 미지의 항목 두 개가 개재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미지수와 '종말'이라는 미지수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적인 언어 체계 속으로 송두리째 환원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사에 종말이라는 마침표가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있다. 이러한 모든 난관을 단 번에 뛰어넘는 방법은 세 가지 종말론에 진술된 내용의 세부 사항을 과감히 간과하고 그 대신에 이 세 가지를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미래 희망의 표현이라는 최소공약수로 묶는 것이다. 미래 희망의 표현이라는 이 최소공약수는 이 세 가지 종말론의 본래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이 셋의 최대공약수가 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2.1 예언적 종말론,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문서 예언자들의 미래 예언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시기별로 분류해서 검토해야 한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유다 왕국이 멸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신앙에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으며 이것을 전환점으로 하여 예언자들의 예언의 기조가 획연히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538년에 바빌론 포로 생활로부터 본국으로 귀환한 일과 515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일도 예언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히브리 성서의 예언자를 587년 이전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와 587년 이후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로 대별한다면 587년 이전 예언의 내용은 심판 예언으로, 그 이후 예언의 내용은 구원 예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예언의 내용이 이렇게 변하는 과정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을 다음과 같이 시기별로 좀 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
    가) 기원전 8세기 중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제1이사야
    나)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587년 직전: 스바냐, 나훔, 예레미야, 하박국
    다) 기원전 587년 직후: 에스겔, 오바댜
    라) 기원전 538년경에서 515년경: 제2이사야, 제3이사야, 학개, 스가랴
    마) 기원전 5세기 전반과 4세기 전반: 말라기(500-450), 요엘 (400-350)
    각 예언서의 본문 가운데서 후대에 삽입된 전승층을 구별해 내는 작업은 예언자들의 종말 사상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미가 4-5장과 7장 8-20절, 이사야 24-27장과 33-35장은 500년 이후에, 스가랴 9-14장은 기원전 4세기 또는 3세기에 첨가된 전승층으로 분류된다.

    2.2 기원전 8세기 후반기는 유대 민족이 남북으로 분열된 지 2세기가 흐른 시기이다. 이 시기에 유대 민족 공동체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의 팽배로 말미암아 내부적으로 붕괴 위기에 처해해 있었으며 남북의 두 왕국은 약소국가로 전락하여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탄압을 당해야 했다. 유대 사회가 야웨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 신을 섬겼다는 것은 평등 공생 공의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버리고 재물 권력 차별을 지향하는 이기주의적 가치 질서에 지배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조상 전래의 야웨 신앙은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예언자들이 등장한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경제적 불의를 맹렬히 규탄했다. 동시에 그들은 이러한 불의에 대하여 장차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통고했다. 이러한 심판이 일어날 시기를 가리켜 '야웨의 날', '그 날', 또는 '그 때'라 했다. 이 심판의 날은 멸망의 날이다. 그렇지만 이 날은 역사의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 했다. 이 시기의 예언자들에게는 아직 '역사의 종말'이라는 의미의 종말 사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예언자들의 예언은 미래의 확정된 멸망을 미리 고지하는 데 역점이 놓인 것이 아니라 미래의 필연적 멸망을 예고함으로써 현재의 사태 진행에 대하여 경고를 내리는 데 역점이 놓여 있었다.

    2.3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유다 왕국이 멸망한 사건은 구약성서에서 종말 사상의 발전에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이룬다. 이 사건은 청천벽력처럼 돌발한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이고 쌓인 유다 왕조의 실정과 사회적 부패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7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예언자들 가운데서 특히 스바냐는 가장 맹렬하게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그는 이 멸망이 닥치는 시기를 '그 날'(19회)이라 일컬었다(3장 14-20절은 후대의 첨가이며 여기에 사용된 '그 날'은 예루살렘에 구원이 베풀어지는 날을 뜻한다). 나훔은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유다의 구원을 예언한 1장 12-13절, 15절은 후대의 첨가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약 627년부터 예루살렘 멸망 때가지 활약한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의 예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에게 내릴 징벌을 예고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박국은 유다 왕국이 바빌론 제국으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강대국의 횡포를 고발한다. 그는 절망에 빠진 유다 백성에게 '정한 때' 즉 '종말'(2:3)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증시키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라고 격려한다(하나님이 강력한 전사로서 등장하여 그의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모습을 노래한 3장은 후대의 첨가로 보아야 한다). 특이하게도 에스겔은 예루살렘 멸망의 전후에 걸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따라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고발과 그 멸망에 대한 예고가 담긴 전반부(1-24장)는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생긴 것이며(물론 여기에는 이른바 '사후 예언'도 많이 첨가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예언과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그리는 후반부(33-48장)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생긴 것이다. "끝(=종말)이 왔다"(7:2,3, 6,) 거나 "그 날이 왔다"(7:7, 12)거나 "그 날이 가까이 왔다"(7:7)거나 "그 때가 왔다"(7:7,12)거나 하는 표현은 유다 백성이 징벌을 당하는 심판의 날이 닥쳤다는 것을 뜻한다. 오바댜는 예루살렘 멸망 직후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오바댜서의 전반부(1-16절)는 에돔이 저질은 죄에 대한 고발과 심판, 모든 민족에게 내릴 멸망을 예언한 것이며 후반부(17-21절)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오바댜가 선포하는 '야웨의 날'은 모든 민족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15-16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승리의 날이 된다(17-21절). 제2이사야(40-55장)는 포로기가 거의 끝날 무렵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곧 귀국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2.4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587년 사이의 예언자들과 포로기(기원전 587-538년)의 예언자들의 예언의 성격은 판이하게 구별된다.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 멸망을 예고함으로써 그들을 경고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포로기의 예언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고발이나 멸망 선언은 전혀 없다(오바댜는 다만 에돔의 죄에 대한 고발과 그 멸망, 그리고 모든 민족이 심판받는 야웨의 날을 예언했다). 포로기의 예언자들은 고난 속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위로 격려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들은 나라도 망하고 없고 성전도 파괴되고 없고 백성도 흩어지고 없는 마당에 불의를 고발하고 멸망을 경고한다는 것은 허공을 향하여 외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상처에 초산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는 짓일 것이다.

    2.5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바야흐로 본국에 이상적인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벅찬 꿈을 품고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루살렘과 그 주민이 누릴 영광을 예언한 제2 이사야의 예언이 전혀 실현되지 아니한 냉엄한 현실 속에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만 하면 유다 왕국이 그 옛 영광을 되찾게 되리라고 그 예언의 성취 시점을 뒤로 미루었으나 그것도 결국 허사로 드러났다. 포로기 종료 직후부터 귀환 초기 시기 (기원전 530-500년)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구원의 소식을 선포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예언자는 제3이사야이다. 그의 예언에는 죄악에 대한 규탄도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대표되는 우주적 차원의 장엄한 구원 드라마가 전개된다. 그 때에는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온 땅을 지배할 것이며 이방 민족들도 구원받은 백성의 대열에 참여할 것이다. 미가 4-5장과 7장 8-20절, 스가랴 1-8장도 이 시기에 첨가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이사야 56-66장과 유사하다. 학개는 기원전 520-518년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 동안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 사업을 소홀히 한 것을 질책하고 그 때문에 농사에 소출을 올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독려하여 성전 재건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높이 세워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스가랴와 학개는 이 구원이 실현되는 때를 가리켜 '그 날'이라 했다(슥 2:11; 3:10; 학 2:23).

    2.6 기원전 500-333년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는 말라기, 요엘, 제2 스가랴(9-14장)이다. 말라기는 약 500-450년 사이에 살았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의 죄를 고발하고 심판의 날이 올 것을 예언했다. '그 날'은 악한 자들에게는 멸망의 날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3:2; 4:1,2,3).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오는 길을 예비하도록 사자를 앞서 보내시겠다는 것(3:1)과 야웨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것(4:5)을 예언했다. 기원전 400-350년에 활동한 요엘의 예언과 기원전 4세기 또는 3세기 경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스가랴 9-14장은 구약의 모든 예언 가운데서 묵시문학적 색채를 가장 많이 띠고 있다. 요엘은 자연의 대 재난과 천체의 대 격변과 더불어 내리는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는 동시에(1-2장) 전원적 풍요와 평화가 넘치는 구원의 시대를 예언했다(2:21-24; 3:18). '그 날' 또는 '야웨의 날'은 멸망의 날이기도 하며(1:15; 2:1,2,11,30,31; 3:14) 또한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3:1,18). 스가랴 9-14장은 아마도 그리스 지배 시대에 생겼을 것이다(9:13 참조). 범세계적 전쟁이 발발할 것과 예루살렘이 약탈당할 것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이 구원받을 것과 범민족적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했다.

    2.7 기원전 332년에 유대 사회는 그리스 제국의 지배로 넘어갔다. 이제 유대 사회는 페르샤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나마 누리던 반자치권마저도 박탈당했다. 특히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의 통치 기간인 기원전 175-163년 사이에 유대 사회는 그의 강제적 헬레니즘화 정책 때문에 그 종교적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을 송두리째 상실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극심한 박해를 당해야 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박해 상황 속에서 저술된 것인데 그 연대는 164년경으로 추정된다. 다니엘서(특히 7-12장)는 전형적인 묵시문학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다. 다니엘은 기괴한 형상의 네 가지 짐승이 잇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상을 본다. 그 다음에 그는 사람들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나라를 수여받는 환상을 본다. 네 가지 짐승은 역사에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질 강대한 네 제국 또는 그 제국을 대표하는 왕을 상징한다. 이 네 제국은 바빌론, 메대, 페르샤, 그리스 제국에 해당한다. 다니엘서의 저작 시기가 164년경이라면 이 네 마리 짐승 환상은 사후예언(事後豫言)인 셈이다. 넷째 번에 나타난 가장 흉측스러운 짐승은 다니엘서 저작 당시의 안티오쿠스 4세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영원한 나라를 수여받는 환상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속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저자는 네 제국이 하나님께서 미리 짜놓으신 역사 운행의 시간표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처럼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다스리는 이상적인 나라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줌으로써 박해 속에서 절망할 위험에 처해 있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기 위하여 이것을 저술했다.

    2.8 기원전 8세기 중엽에 등장한 예언자 아모스로부터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활동한 묵시문학적 환상가인 다니엘서 저자에 이르기까지 히브리 성서의 다양한 모든 예언자들을 관통하는 공통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시대별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가게 운영에 비유하여 서술해 보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가게 운영을 위탁받았다. 예언자는 각 시대에 하나님을 대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가게 운영의 실태를 감찰하는 감독관으로 등장한다. 유대 민족의 역사 경영을 가게 운영에 비유하여 연극의 한 장면으로 무대 위에 연출해 보려고 하는 경우에 부닥치는 최대의 난관은 하나님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일단 하나님을 이 연극의 대본 작가 또는 연출자로 설정하기로 하자. 대본 작가 또는 연출자는 연극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지만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연기를 실연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운행에 어떠한 방식으로 관여하시느냐 하는 문제는 예언서를 해석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이다. 예언서에는 하나님을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서 활동하시는 분으로 서술된 곳이 많다.

    제1 막: 시기는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587년까지의 기간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게 운영은 부실하다. 마치 계리사가 기업의 대차 관계를 조사하여 기업 경영의 실태를 폭로하듯이 이 시기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게 운영의 부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경영을 개선하지 않으면 가게가 파산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현재의 실태에 대한 진단을 근거로 하여 미래를 예고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임박한 파산을 예언하지만 그들은 결코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의 파산 예고는 파산이 숙명적으로 정해졌다는 것을 고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실을 개선하도록 경고하는 데 역점이 있다.
    제2 막: 시기는 포로기 기간이다. 기원전 587년에 나라는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없어졌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역사 운영권, 즉 가게를 경영하는 권리를 이방 민족에게 박탈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포로기에 등장한 예언자들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과 씨름해야 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방 민족의 신들보다 약하다는 것을 뜻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스스로 거기에서 떠나셨다는 것을 뜻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잠시 이방 민족에게 붙이셨다는 해답을 내렸다. 에스겔(33-48장)과 제2 이사야(40-55장)는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등장하여 하나님이 바야흐로 행하실 구원 행위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동포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제3 막: 시기는 귀환 이후의 약 한 세대간의 기간이다. 귀향민들은 그들이 품고 돌아온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찬란한 꿈에 정비례하여 크나큰 실망에 빠졌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기약 없이 궁핍한 삶을 계속해야 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공동체를 건설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더 완벽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삶의 형편이 점점 개선될 것이라는 뚜렷한 전망도 않는다. 비유하자면 수입도 별로 없고 장래성도 없어 보이는 아주 초라한 노점상 가게를 차려놓은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예언자들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죄악을 고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구원 사건에 대한 희망의 소식을 전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과는 달리 심판 예언은 하지 아니 했다. 또 포로기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건을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회복에 국한시킨 것과 달리 이 시기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건을 범세계적 원대한 지평과 모든 창조 질서의 궁극적 회복이라는 거대한 구도에 넣어서 해석했다. 제3 이사야의 예언이 바로 이러했다.
    제4 막: 시기는 기원전 500-350년경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는 예언사적으로 특수한 시기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활동한 두 예언자 말라기와 요엘을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역사 무대에서 퇴장한 후에 예언자가 영원히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등장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야웨 신앙이 사제 중심의 의식 종교로 탈바꿈함에 따라 예언자의 역할이 불필요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예언과 같은 정상적인 비판 활동이 허용될 수 없을 정도로 지배층의 억압 장치가 극심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언 활동은 환상적, 상징적, 우화적, 암호적 표현 형식을 구사하는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학 장르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어야 했다.
    제5 막: 시기는 기원전 2시기에서 기원후 1세기 말까지 약 300년 기간이다.이 시기에는 이른바 묵시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작품이 양산되었다. 이 시기에 산출된 묵시문학 작품 가운데 다니엘서만이 히브리 성서에 정경으로 채택된 것은 특이하다. 묵시문학의 개념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며 여기서는 꼭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다니엘서에서 후대에 충분히 발전한 모든 묵시문학적 작품들 속에 들어있는 묵시문학의 여러 가지 특색을 다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묵시문학의 주요한 내용적 특징은 선악 이원론적 세계관과 역사를 현재의 때와 오는 때로 이분하는 종말론적 역사관이 할 수 있다. 현재의 인간 사회에 악이 팽배한 까닭은 악신이 그것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며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은 인간 사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현재 전 우주적 차원에서 선신과 악신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선악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악이 지배하는 현재의 역사는 그 끝날 시점이 정해져 있으며 그 다음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고 보는 것이 종말론적 역사관이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질서 안에서는 즉 현존의 제도와 기구 안에서는 구원의 희망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극악한 위기 상황에서 산출되었다. 현실은 전적으로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송두리째 사라져야 하며 역사의 무대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짜여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묵시문학의 역사관이다. 역사를 건물에 비유하고 예언자와 묵시문학가를 건축 설계자에 비유하여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자면 예언자는 역사라는 건축물을 수리해서 사용하려는 이른바 리모델링(remodeling) 설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묵시문학가는 역사라는 현재의 건축물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전적으로 새로운 건축물을 세우려는 재건축 설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라는 건축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 이 둘의 공통 관심사이고 단지 처리의 목표에 대해서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현실에 대한 그 특수한 이해 때문에 두 가지 정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 하나는 도래해야 할 세상에 대한 희망을 무기로 삼아 현재의 상태를 변혁하기 위하여 악의 세력에 용감하게 저항하는 급진적 역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을 도피하여 극도의 환상적 사변(思辨)에 빠지는 것이다. 문학 장르로서의 묵시문학의 문학 양식적 특징은 계시의 수령 방식에 있다. 즉 묵시문학가는 꿈 또는 환상을 통하여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나 피안의 세계의 비밀을 보게 되고 그 후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 본 것들에 대한 의미를 해석해 준다. 꿈 또는 환상에 나타난 것들은 기괴할 정도로 상징적 표현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해석을 붙이지 않으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묵시문학의 세계가 연출되는 무대는 이 지상에 한정되지 아니 하고 필연적으로 초월적 세계로서의 피안의 세계에까지 확장되며 출연하는 배역은 인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천사와 같은 신적 존재들도 포함하게 된다. 이 시기의 사정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나타낼 수 있다. 가게의 규모가 범세계적, 우주적 범위로 확대되었다. 이 가게에서 취급하는 상품도 다양해졌다.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가게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한 삶과 관련된 물품만 취급했었는데 이제는 상품의 종류가 세계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개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된 물품도 진열해 놓았다. 찾아오는 고객은 세계 만민이며 천사들도 빈번하게 드나든다. 그런데 깡패의 방해 때문에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처지이다. 깡패의 두목은 악신이며 그 부하들은 이 세상의 권력을 쥔 자들이다. 선신은 이 세상을 떠났으며 지금 우주적 차원에서 선신과 악신 사이에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정한 때가 되면 지금의 이 세상은 완전히 부셔져 없어지고 전적으로 새로운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

    2.9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언자들의 활동을 7막으로 구성된 연극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이제는 그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와 그 위에 출연하는 배역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우리의 초대 관심은 '하나님'은 이 연극에서 역할을 하는 분이시냐는 물음이다. 하나님은 이 연극을 연출하는 분이시냐 무대 위에 직접 출연하는 하나의 배역을 맡은 분이시냐? 이 물음은 한 마디로 답하기 어렵다.
    제1 막에서는 하나님은 마치 극작가나 연출자처럼 무대 배후에 숨어 계신 분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행위를 무대 위에 등장하여 행위를 몸소 실연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철을 따라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는 말은 하나님이 비를 부어내리는 동작을 수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고 비 내림 현상은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겠다."(암 1:12)와 "그러므로 내가 랍바 성벽에 불을 놓겠다."(암 1:14) 하는 말씀은 이와 같은 표현법에 속한다. 하나님이 랍바 성벽에 나타나서 불을 지르는 행위를 몸소 실행하시겠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랍바 성벽이 불타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계획대로 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할 따름이다.
    그러나 제2 막에서는 무대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뀐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곧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출연하시는 것으로 서술된다. "광야에 야웨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하여라."(사 40:3), "만군의 야웨 하나님께서 오신다.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릴 것이다. 보아라 그가 백성에게 줄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사 40:10), "너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 52:7), "야웨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사 52:8), "보아라, 야웨께서 화염에 싸여 오실 것이다."(사 66:15), "만군의 야웨께서 왕이 되실 터이니....야웨께서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사 24:23), "만군의 야웨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사 25:6),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사 35:4), "야웨께서 시온에 속량자로 오시고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죄를 회개한 사람들에게 오신다."(사 59:20). "화려한 옷차림으로 권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 분은 누구신가? 바로 나다"(사 63:1). "야웨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면...야웨께서 친히 내려오셔서...."(사 64:1,4). "보아라 야웨께서 화염에 싸여 오실 것이다"(사 66:15). "야웨께서 군왕들을 죄수처럼 토굴 속에 모으시고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어두셨다가 처형하실 것이다"(사 24:22). "나 야웨가 그들을 시온 산에서 다스리겠다."(미 4:7), "그 날이 오면 야웨께서 예루살렘 맞은 편 동쪽 올리브 산 위에 발을 디디고 서실 것이다."(슥 14:4), "야웨 나의 하나님이 오신다. 모든 천군을 거느리고 너희에게로 오신다."(슥 14:5), "야웨께서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슥 14:9) 등등.
    제3 막에 이르러서는 무대의 이쪽 끝에는 현 세상의 장면이고 저쪽 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져 있다.
    제4 막은 무대의 분위기가 전래의 예언자적 풍취에서 이국적인 묵시문학적 풍취로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예언자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5 막에 이르러서는 무대의 광경이 완전히 묵시문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무대의 규모는 범세계적, 우주적 범위로 확대되었다. 배역들도 완전히 바뀌었다. 무대 위에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짐승들, 천사들, 악신의 두목과 그의 졸개들이 더 자주 등장한다.

    3.1 공관복음은 예수의 선포 내용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로 압축하여 표현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 대신에 '하늘(의) 나라'라는 어구를 주로 사용했다. 그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을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으로 '하늘'(복수형)이라는 낱말이 사용되었다.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의 나라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 어구이다. 이 밖에도 '당신의 나라', '그분의 나라', '그 나라'라는 어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한다. 이러한 어구들이 공관복음에 무려 80여회나 사용되었다. 이 모든 곳에서 이 어구들은 단 하나의 똑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곳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한 함의(含意)로 사용되었다. 이 어구들이 모든 곳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하여 사전적(辭典的)인 개념 정의를 내리는 것이 꼭 필요하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의 강연 주제인 종말론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구명하는 것이다. 즉 역사적 예수가 그의 선교 활동에서 또는 복음서 기자가 예수의 선포 내용을 보도하는 데에 하나님 나라라는 어구를 사용한 것은 그 당시에 편만해 있던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지, 단절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지, 또는 변형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중간기 문서들과 기원후 1세기의 유대인들의 일상적 어법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3.2 모든 중간기 문서들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으며 사용된 경우에도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다. 경외서(Apocrypha)에 속하는 문서인 <토빗> 13장 1절에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다. 그 분의 나라는 만세에 지속하는도다." 하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의 '그 분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한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존속하는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권을 뜻한다. 심지어 묵시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문서들 속에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놀랍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명백하게 묵시문학적 하나님 나라의 출현에 대하여 말하는 유일한 구절을 <모세의 유언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때에 그의(=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전 피조물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그 때에 악마는 끝장이 날 것이다. 그렇다. 슬픔은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10:1). 또 이 <유언서>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종말에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하는 표현이 있다. "하늘에 계신 분이 그의 옥좌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렇다. 그 분은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분노와 진노로써 그의 거룩한 거처에서 나서실 것이다"(10:3). <솔로몬 시편>은 비묵시문학적 문서에 속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작성된 차명문서(Pseudepigrapha)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한 문서는 유일하게 이 <솔로몬 시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심판 속에서 영원히 민족들 위에 군림한다"(17:3).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으로 세워질 그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저 위에 존재하는 그 나라를 지칭한다. 종말에 지상에 세워질 유대 민족의 민족주의적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다윗 자손인 메시야라고 했다(17:32). <열두 족장의 유언> 가운데 있는 <베냐민의 유언> 9장 1절에 '주님의 나라'가 혼음으로 간음하는 너희들 가운데서 제거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경우의 '주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져 있는 구원의 현실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단의 유언> 5장 13절에는 묵시문학적 하나님의 통치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겸비와 가난으로 그들을 통치하실 것이며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늘에서 진리로 다스릴 것이다."

    3.3 경외서와 차명문서에는 하나님이 왕으로 지칭되는 곳이 많이 있다(희년서 1:28; 제1에녹서 9:4; 12:3; 25:3-5,7; 27:3; 63:4; 84:2; 솔로몬의 시편 2:30; 17:1). 그러나 이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왕권을 행사하심으로써 왕위에 등극하시는 종말적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신분을 뜻할 따름이다.

    3.4 사해 문서 가운데서 <전쟁 두루말이>에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 아주 가까운 표현들을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그 나라가 귀속될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그의 백성인 성도들을 통하여 권능을 발휘하실 것이다"(1QM 6:6). 12장 7-17절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순결해진 이스라엘 민족의 지상적, 정치적 나라가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실 것이며 그의 천사들을 지상의 왕국들과의 전쟁에 투입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정의와 복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1QM 12:10,12)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에 대한 지상적 통치권을 갖게 될 것이다(1QM 12:16-17). 사해 문서에는 미래적, 종말적 하나님 나라 및 무시간적, 영속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세울 종말적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언급도 있다(1QM 12:3,6; 19:8).

    3.5 <시빌라의 신탁>에는 하나님을 '위대하신/거룩하신/영원하신/불사하시는 왕'으로 일컫는 곳이 많다(3:47,50,55,499,560,616,716,808).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 때에야말로 불사하시는 왕께서 위대한 나라를 세워 백성들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왕께서 온 땅에 영원히 권세를 잡으시고 다스리실 것이다"(3:47-50). "그 때에야말로 그 분은 사람들 위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다"(3:767-769).

    3.5 <제4 에스라서>는 기원후 1세기 말 경에 생긴 작품으로서 가장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에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고 심판이 행해지는 종말적 사건에 관하여 말한다. 이 때에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시러 나타나시는 분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때에 땅은 그 속에 잠자는 자들을 토해낼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 심판석에 나타나실 것이다"(7:32-33).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때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때이다. "보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때가 온다"(13:29). 13장은 다니엘 7장에 예언된 사람의 아들의 출현과 활동을 기술하며 하나님은 그 사람의 아들을 '나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하신다(13:32,37). 두 세대 사상은 묵시문학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제4 에스라서>는 이 두 세대 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진술한 문서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세상을 하나가 아니라 둘로 만드셨다"(7:50). 이 세상은 시간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두 때, 즉 두 세대, 두 시대로 구분지어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 세상은 낡은 세대가 끝장이 나고 그 다음에 새 세대가 오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래할 새 세대는 새 시대, 새 세상, 새로운 구원의 질서이다. 이 새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관계인지 언급하지 아니 했다. 하나님은 다만 자기가 정해 놓으신 시간표에 따라 역사를 운행하고 관리하는 분이시다. "그 분은 때와 때의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을 지배하신다"(13:58). <제4 에스라서>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사용되지 아니한 것은 종말적 역사 개입이라는 일회적 특수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하나님의 우주적, 무시간적 세계 운영 체제 속에 매몰되는 길을 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1세기의 바리새적-랍비적 정통 유대교에 유포되었을 것이다.

    3.6 <솔로몬의 지혜서>는 특이하게 묵시문학(1:1-6:11; 10-19)과 지혜문학(6:12-9:18)을 결합하고 있다. 이 문서는 지혜를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영원한 질서로 강조한다. 묵시문학적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과 통치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은 "통치자들의 왕좌를 뒤엎어실"(5:23) 것이며 부활한 의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며 민족들을 "다스리실"(3:8; 5:16)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서>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이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일어날 구원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원한 참된 현실을 뜻한다. 세상의 왕들은 통치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그 분의 나라의 종들로서 올바로 통치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행하지 못한 자들이다(6:3-4).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로서 지혜를 제시한다. "지혜에 대한 열망은 나라로 인도한다"(6:20). 이 경우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10장 10절에는 더 분명하게 "지혜는 의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었다"라고 표현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요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불사(不死)를 확신하는 것이요 불사는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 간다(6:18-19). <솔로몬의 지혜서>는 다니엘서의 묵시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혜, 의, 평화, 불사와 같은 구원의 내용물과 동일시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아마 헬레니즘 세계의 통속적 철학 사상의 영향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3.7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예수와 동시대 유대인이다. 그의 저작물은 헬레니즘적 통속 철학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헬레니즘적 철학 사상에서 '나라'라는 용어는 '지혜' 또는 '덕'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된다. 지혜 또는 덕에 일치하여 사는 삶은 '현자의 나라'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래서 필로는 "하나님은 현자의 나라를 수여하시고 고매한 사람은 그것을 받는다"(Abr 261) 라고 말했다. 필로도 '하나님의 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가르쳐주는 영원한 삶의 질서와 동의어이다(Abr 97; Sacr 49; Somn II,244; Spec Leg 4.164). 필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철저히 윤리화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덕론(德論)의 일부로 축소되었다.

    3.8 A.D. 1세기의 정통 유대교의 종말 사상에 관해서는 그 당대의 직접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후대의 랍비 문헌이나 신약성서를 근거로 해서 추론할 따름이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 당시의 일반 유대인들은 다윗 자손인 메시야 왕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지상적-정치적-민족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할 것을 고대하기도 하고 초월적 존재인 사람의 아들의 강림, 죽은 사람들의 부활, 최후 심판, 영생과 평화의 새 세계의 임박한 도래를 대망하는 묵시문학적-종말론적 희망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민족적-정치적 종말 사상과 묵시문학적-우주적 종말 사상은 체계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병존해 있었다.

    3.9 기원후 1세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한 유대교의 종말 사상은 그 당시에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던 두 가지 기도문인 카디쉬(Kaddish)와 18기도문(Eighteen Benedictions)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카디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하나님의) 나라를 여러분의 생전에...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집의 생전에 속히 그리고 가까운 때에 세우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잘 대변한다. 이 기도문은 다만 기원후 6세기 이후의 랍비 문헌에만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기도문의 사용이 과연 1세기의 회당 예배에까지 소급하느냐는 물음에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18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확한 표현은 사용되지 아니했다. 그렇지만 제11 청원은 이스라엘이 외국의 지배를 더 이상 받지 아니 하고 하나님만이 그들 위에 왕 노릇하실 미래의 때도래하기를 간구한다. 제14 청원은 다윗 가문에서 메시야의 왕국이 나타나기를 간구한다.

    3.10 랍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율법과 관련지어 해석했다. "하늘의(=하나님의) 나라의 멍에를 짊어지다/하늘의(=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지다"라는 표현이 1세기의 정통적 랍비 유대교에 유통되었다고 한다. 이 경우의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의 멍에'라는 어구는 율법의 요구를 뜻했다. 그러므로 "하늘의(=하나님의) 나라의 멍에를 짊어지다/하늘의(=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지다"라는 말은 율법의 요구를 이행/실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랍비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철저히 윤리화했다. 또 스가랴 14장 3절과 9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이 온 세상에 오직 한 분으로 인정받으실 때에 그 분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질 것이라고 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주권(universal sovereignty)을 뜻한다.

    3.11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중간기 문서와 랍비 문헌에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표현이 종말론적 사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탈굼(Targum)은 히브리어 성서에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행위를 뜻하는 것을 '야웨의 나라/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번역했다(사 24:23; 31:4; 40:9; 52:7; 겔 7:7,10; 옵 21; 미 4:7,8; 슥 14:9).

    (사 24:23)
    <히브리어>: "만군의 야웨께서 시온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리실 것이다."
    <탈굼>: "야웨의 나라가 시온 산에 나타날 것이다."

    (사 31:4)
    <히브리어>: "나 만군의 야웨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탈굼>: "만군의 야웨의 나라가 나타나서 시온 산 위에 거할 것이다."

    (사 40:9)
    <히브리어>: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탈굼>: "너희의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다."

    (사 52:2)
    <히브리어>: "너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탈굼>: "너의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다."

    (미 4:7)
    <히브리어>: "나 야웨가 그들을 시온 산에서 다스리겠다."
    <탈굼>: "너에게 여호와의 나라가 올 것이다."

    (겔 7:7)
    <히브리어>: "그 날이 가까이 왔다."
    <탈굼>: "그 나라가 너희에게 나타났다."

    (옵 21)
    <히브리어>: "나라가 여호와의 것이 될 것이다."
    <탈굼>: "야웨의 나라가 땅 위의 모든 거민에게 나타날 것이다."

    (슥 14:9)
    <히브리어>: "야웨가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탈굼>: "야웨의 나라가 장차 모든 인간에게 땅 위에 나타날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과 탈굼 번역문을 비교해 볼 때에 의미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히브리어 원문은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몸소 나타나셔서 어떤 행위를 수행하신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현한다. 이와 달리 탈굼 번역문은 어떤 행위를 수행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하시는 것을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그 무엇 즉 그의 나라/통치/왕권이 출현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원문의 역동적 성격이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정태적 성격의 사물로 변질되었다. 탈굼이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행위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은 종말론을 강화하는 작용을 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을 약화시키거나 비종말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3.11 이제 우리는 난제 중의 난제를 다루어야 할 차례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 이것은 마가복음 기자가 예수의 선포 내용을 요약하여 보도한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큰 어려운 물음에 직면해 있다. 첫째는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의미론적 물음이고 둘째는 "이 말씀은 사실로 판명되었느냐? 허위로 판명되었느냐?" 하는 역사학적 물음이다. 이 두 물음은 절대로 간단하게 답변할 수 없다. 의미론적 물음과 관련해서는 '나라'라는 낱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하고 '하나님의'라는 2격명사가 '나라'라는 명사와의 관계에서 어떤 문법적인 기능을 하느냐를 규정해야 하며 이 말씀은 어떤 맥락에서 언명된 것인지를 구명해야 한다. 둘째 물음은 긍정적 답이나 부정적 답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답을 내리는 경우에는 그것에 필연적으로 뒤따라 나오는 반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하며 부정적 답을 내리는 경우에도 역시 그것에 필연적으로 뒤따라 나오는 반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말씀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정하는 것 자체가 해석학적으로 타당하냐 하는 물음에 올바른 답을 내리는 것이다. 또 이 말씀은 사실적 표현인지, 상징적 표현인지, 신화적 표현인지를 규정해야 하며 그에 알맞은 해석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3.12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에 대한 골치 아픈 언어적, 문법적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쉬운 예문을 다루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a) "이 파티에 공주의 참석이 예상됩니다."
    a') " 참석자들에게 공주의 선물이 수여될 것입니다."

    b) "박보라 씨의 춤이 곧 공연되겠습니다."
    b') "김선아 씨의 춤이 곧 공연되겠습니다."

    c) "이 화랑에는 대통령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c') "이 화랑에는 대통령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c'' "이 화랑에는 대통령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a의 현장에는 공주가 몸소 나타난다. a'의 현장에는 공주 자신이 반드시 나타날 필요가 없고 단지 내리는 선물이 나온다. b와 b'의 현장에 무엇이 나타나느냐는 박보라 씨와 김선아 씨의 직업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박보라 씨가 무용가라면 박보라 씨가 무대에 등장하여 춤을 출 것이며 김선아 씨가 안무가(按舞家)라면 김선아 씨가 창작한 춤을 추는 다른 어떤 무용가가 무대에 등장할 것이다. c-c''의 대통령의 그림은 1) 대통령을 그린 그림(=대통령의 초상화), 2) 대통령이 그린 그림(=대통령의 작품), 3) 대통령이 소유한 그림(=대통령의 소장품)을 뜻한다.

    3.12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예수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뜻하는가? '나라'라는 낱말은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를 번역한 것인데 '바실레이아'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왕국'이다. 왕국은 왕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이러한 의미의 왕국은 지리상의 일정한 영역(domain, realm, region, area)을 차지하고 있는 통치 제도이다. 이러한 왕국 개념에는 공간적 의미가 필수 요소이다. 이러한 개념의 '나라'라는 낱말과 '하나님의'라는 낱말이 결합하면 그 어구는 왕이신 하나님께 속한 나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뜻한다. 이러한 해석에는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따른다. 공간적인 개념의 나라가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 '가까이 왔다' 또는 '도래할 것이다'라는 동사는 이동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토 자체가 이동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달만(G. Dalman)이 1898년에 이 낱말의 의미를 면밀하게 분석한 저서를 출판하기까지 학자들은 이 낱말의 의미를 일률적으로 공간적 개념으로 정의했다. 달만은 '바실레이아'라는 낱말은 '통치/다스림'(rule, reign)이라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는 하나님의 통치/다스림,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심,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뜻한다. 달만의 연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의 이론을 따른다. 그렇지만 달만의 이 해답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해석학적인 모든 문제점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바실레이아'라는 낱말은 위의 두 가지 의미 이외에도 '왕권/주권'(king's power, king's sovereignty)라는 추상적 개념과 '왕위/왕 됨'(kingship)이라는 신분적 개념을 나타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의 올바른 의미는 '하나님의'라는 2격명사와 앞에 제시된 '바실레이아'라는 낱말의 네 가지 개념 정의의 어느 하나와 기계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3.13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선언은 "때가 찼다." 하는 선언과 병행구조로 결합되어 제시되었다. "때가 찼다." 하는 말은 전형적인 묵시사상(apocalypticism)의 종말관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말도 묵시사상의 종말관을 나타낸다. 하루의 끝남과 다른 하루의 시작이 서로 맞물리듯이, 임신의 달이 차는 것과 분만의 때가 다가오는 것이 맞물리듯이 현재의 세상에 할당된 시간이 다 차는 것과 그 다음에 올 종말론적 구원의 새 시대가 가까이 이른 것은 같은 동전의 양면 관계와 같다. 이렇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이 예언한 종말론적 구원의 시대를 뜻한다. 이러한 해석은 아주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곤란한 문제가 뒤따른다. 현재의 역사가 끝장이 나고 전혀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밤이 낮으로 교체되듯이 정해진 자연 법칙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듯이 발전 과정의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초월자로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여 구원 사건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현재의 역사가 끝장이 나고 종말적 구원의 새 시대가 열리는 그 현장에는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종말적인 구원 행위를 수행하심으로써 역사가 끝장이 나고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3.14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말에서 종말적인 구원 행위를 수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를 하나님의 통치하심,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이해하는 경우에 그러한 가능성이 열린다. "하나님의 통치하심/다스리심이 가까이 왔다." 하는 말은 "이제 곧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다스리신다."를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간섭하신다는 것, 역사의 현장에 출현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3.15 "때가 찼다"는 것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때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눈금이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의 의미를 세계내적인 어떤 가치로 대체하지 않고 그 본래적 의미 그대로 종말론적 구원 사건으로 간주해야 한다면 역사라는 틀 속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인간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평선에 발을 디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예수의 선포는 참인가, 거짓인가? 아니 이러한 물음 자체가 옳은 것인가, 그릇된 것인가?

    3.16 히브리 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역사에 등장하시는 종말적 구원 사건을 예언했다. 다니엘서에서 묵시문학적 환상가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서 영원한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러한 모든 예언은 역사적 예수가 선교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 성취되지 아니 했다. 예수는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내용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로 요약했다. 그리고 그러한 종말론적 구원이 이루어질 때가 이르렀다고 선포했다. 지금 우리는 이 선포가 참이었느냐, 거짓이었느냐는 물음을 제기한다. 예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조처의 한 가지를 취해야 한다.
    가) 이 선포는 예수의 진정한 말씀(ipsissima verba Jesu)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선포한 분이 아니라 유대교의 갱신운동을 벌인 분이거나 사회전복적 지혜를 가르친 방랑 설교자이다(비종말화 하기).
    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를 상징적 표현으로 보아서 세계내적인 윤리적 가치로 환원시킨다(바꿔치기 하기).
    다) 이 선포의 핵심을 실존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름말로 해석한다(비신화화 하기).
    라) 예수의 활동과 인격 안에서 이미 부분적으로는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already...not yet라는 도식을 이용하기).

    3.17 우리는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적 환상가들의 예언은 미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다. 그들은 미래사를 투시하는 점술가도 아니며 현재의 사태에 근거하여 미래의 사태를 예측하는 미래학자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신앙인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리 극도로 암담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절대로 절망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펼쳐 보인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에 대한 환상에는 현실에 대한 그들의 비판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심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현재의 지배 질서에 대한 항거, 이 두 가지는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구성하는 기본 골격이다. 본래적 의미의 예언자와 묵시문학가는 염세적 현실도피주의자도 아니며 오직 개인의 구원에만 열중하는 이기주의적 몽상가가 아니다. 그들이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괴상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자기의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한 환각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후세 사람들에게 미래사에 대한 시간표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함께 박해를 받으면서 절망에 빠져 있는 자기의 동시대 사람들을 격려하여 현재의 위기를 용감하게 극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미래의 희망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기상청의 일기 예보가 적중했는지 빗나갔는지를 점검하는 식으로 종말론의 내용을 값매김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종말론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후세의 역사적 사건들과의 일치 여부가 아니고 현실에 대한 그들의 진단이 옳았느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심이 건전한 것이었느냐, 그들의 메시지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느냐 이다.

    3.18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예수의 선포 속에는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예언적 종말론이 용해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예언적 종말론을 단순히 재방송한 것이 아니다. 예언과 묵시문학이 종말적인 구원에 대한 희망과 환상을 제시하는 데 반해서 이것은 그러한 종말론적 구원을 현실의 사실로 선포한다. 선포한다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것도 아니다.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한다. 의장이 개회를 선언함으로써 회의가 시작한다. 판사가 선고를 함으로써 유죄와 무죄가 확정된다. 이러한 언어활동에 있어서는 발설작용과 발설내용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 발설작용이 발설내용으로 하여금 현실의 사실이 되게 한다. 예수의 선포는 바로 이러한 언어작용에 속한다. 우리는 앞에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예수의 선포가 참이냐 거짓이냐는 물음을 제기했다. 이런 식의 물음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발언 내용과 실제 사이의 일치 여부로 발언의 진위를 판별하는 대응설적 판단 기준을 예수의 선포에 적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 우리는 선포의 내용을 점검하는 대신에 이러한 선포를 하는 분이 누구이며 이러한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

    3.19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구별하자면 역사적 예수는 선포하시는 분(
    der Verk ndiger)이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선포되는 분(der Verk ndigte)이다. 복음서에는 이 두 모습이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융합되어 있다. 앞에서 제기한 우리의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둘을 반드시 분리해 낼 필요가 없다. 복음서의 예수는 자기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과 선교활동을 벌이는 것이 옛 예언자들의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마 13:16-17; 눅 4:17-20; 7:21-23 등등). 예수를 옛 예언의 성취로 인식하는 일과 예수의 선교활동의 내용이 예언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어느 쪽이 선행했는가? 다시 말하면 예수의 활동 내용이 예언자들의 예언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을 점검하고 난 후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비로소 예수를 옛 예언의 성취로 인식하는 일이 생겼는가, 아니면 거꾸로 예수를 옛 예언의 성취로 인식하는 일이 먼저 생기고 나서 그러한 인식을 남에게 논증하기 위하여 예수의 삶과 예언 내용과의 일치를 찾아냈는가? 후자가 역사적 사실에 속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선교활동의 내용과 옛 예언의 내용의 일치 여부는 객관적 판단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교활동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육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종말에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말라기 4장 5절의 예언을 믿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출현은 그들에게는 종말의 때가 도래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예수는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보았다(막 9:12-13). 어떻게 해서 예수의 눈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로 비춰지는가? 어떻게 해서 예수는 "율법과 예언자는 세례 요한까지다."(눅 16:16) 하는 선언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가 바로 종말적 구원자이다 라는 인식(예수의 자의식인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인지 구별할 필요 없이)에 뒤따라 생기는 인식이다.

    3.20.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이러한 믿음에 이르렀는가? 이러한 물음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음은 오늘 우리의 주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이 믿음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에는 종말적 구원자상이 여럿이다. 즉 메시야, 다윗의 자손, 고난의 종,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등이다. 쿰란 종파는 두 메시야를 대망한다. 이들 구원자들의 역할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많다. 또 같은 구원자라도 각 예언서와 각 묵시록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은 것은 예수에게 이 모든 종말적 구원자상을 통합한 최종의 종합적 존귀칭호를 예수에게 씌워 드린 것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때에는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고, 최후의 심판이 행해지고, 옛 세상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이와 달리 메시야나 다윗의 자손의 역할은 준궁극적이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 직전에 현재의 이 땅 위에 평화와 정의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워서 다스릴 구원자이다. 예수는 이들 준궁극적 구원자상과 신원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 구원자상을 그의 인격 안에 흡수하여 용해시켰다. 전통적인 구원자를 개별 비타민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종합비타민과 같다고 할 것이다.

    3.2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이라는 큰 문제를 서로 상반된 방향의 처리 방법을 사용하여 현명하게 해결지었다. 즉 그것은 신화의 역사화 방법과 역사의 재신화화 방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종말에 관한 언사는 예언적 종말론이나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나 가릴 것 없이 신화적 언어로 되어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은 것은 신화를 역사와 결합시킨 시킨 것, 즉 신화를 역사화 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형편은 변한 것이 없다. 이 모순을 그들은 역사를 다시 신화화 하는 작업을 통해서 해결했다. 즉 역사를 신화에 재결합시켰다. 이 나사렛 예수는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며 장차 사람의 아들의 모습으로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궁극적 구원의 시대를 여실 것이라고 했다.

    4.1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이슬람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교들과 달리 종말론적 역사관을 가졌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이야 말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연결하는 가장 튼튼한 화해의 가교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한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별개의 종교로 갈라지게 한 것은 바로 이 종말론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속한다. 정통 유대교 신학과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들의 정경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묵시문학적 문서들을 배척한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요행히 정경에 채택되었지만 나머지 문서들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푸대접을 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의 야웨 신앙은 기원전 515년 제2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 사제 계급이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 내에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주도권을 장악함으써 제의 종교로 점점 굳어 갔다. 그 결과로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종교적 삶의 유일한 중심이 되었고 예언자들의 종말론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초기 유대교가 확립된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말라기와 요엘 예언자의 활동을 끝으로 유대 사회에는 예언자가 다시는 출현하지 못했다. 묵시문학이라는 것은 예언자가 태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유대교의 변두리 집단의 저항 운동으로 정통 유대교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유대교에 정식으로 입양되지 못한 채 끝까지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

    4.2 기원후 1세기에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유대 사회의 민중들 사이에 만연했던 묵시문학적인 임박한 종말 대망의 분위기 속에서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예언적 종말론이 제시하는 종말적 구원 사건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 했다. 그들은 종말적 구원의 내용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으로 집약하고 나사렛 예수의 선교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 실제가 된다고 믿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모든 종말적 구원자 상(像)들을 예수라는 인물에게 통합시켰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구원 사건을 나사렛 예수의 삶과 일치시키고 나사렛 예수에게 다시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라는 신화의 옷을 덧입혔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이제 곧 사람의 아들의 모습으로 내림하여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분으로 받들었다.

    4.3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신앙은 제도적 교회 안에서 점점 주변으로 밀려 났다. 종말론은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서자의 신세로 전락했다. 역사의 변혁의 원동력으로서의 종말론 사상은 교회사적으로 소수의 이단 종파 운동에서 간헐적으로 그 명맥이 이어져 올 따름이다. 초대교회부터 오늘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류는 나사렛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종말 신앙을 비종말화 시키는 데 기울어졌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윤리 종교, 문화 종교, 사적 종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4.4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역사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종말이라는 고삐를 씌워서 제어하려 했다. 종말이라는 고삐가 풀리면 역사라는 괴물을 제어할 수단은 달리 없다. 역사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면 결국에 역사는 인간을 지배하는 신으로 군림할 것이다. 종말 신앙은 역사라는 괴물을 우상화 하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한 안전 장치이다. 왜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은 이 고삐를 놓아 버리는가? 종말이라는 고삐는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인데 반해서 유사 이래로 역사는 지금까지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거대한 괴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역사를 제어해야 할 종말이 다시 역사에게 삼킴을 당하는 것이다.

    4.5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종말론이라는 보화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은 똑 같이 역사라는 괴물을 제어하도록 그들의 손에 쥐어준 종말이라는 고삐를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역사라는 거대한 괴물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 종말이라는 놓쳐버린 그 고삐를 되잡는 데 공동 전선을 펼 수 있으며 반드시 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역사 변혁의 본래적 생명력으로 부활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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