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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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안교회, 대안신앙> 위계적인 교회의 신앙문화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4520, 2003.11.23 21:35:24
  • 공개강좌 <대안교회, 대안신앙> 제2 강의안
    2003. 11. 4일(화) 저녁 7시/ 명동 향린교회


    신앙의 위기 2 - 위계적인 교회의 신앙 문화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1. 에피소드 - 교회 위기 징후의 한 사례

    한국교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으로 알려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벌어진 한 사태를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으려 한다.
    작년(2002)도 기장총회에서 가결된 헌법 개정안에는 "노회의 노회장, 시찰장, 정치부원은 조직교회의 목사와 장로여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 조항을 확인한 직후부터 줄곧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문제제기의 요체는, 동등해야 할 동역자들을 차별하는 법안으로서 사실상 교회의 규모에 따라 목회자의 자격을 제한하는 악법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물량주의 논리를 내면화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온라인에 의존했던 문제제기는 유감스럽게도 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 법안이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전 노회의 수의를 거쳐 노회의 과반수 및 총투표자의 2/3의 동의를 얻도록 되어 있었다. 대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된 수의 결과는 노회별 가결표수는 과반수를 넘겼으나 총투표수에서는 아슬아슬하게 2/3를 넘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 개정안은 부결이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그 아슬아슬한 결과가 화근이었다. 그 결과에 대해 유권해석을 내린 교단 헌법위원회가, 총투표수 가운데 무효표를 제외하고 가부 유효투표수만을 놓고 계산하여 유효투표수의 2/3가 넘었으므로 가결되었다고 공고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법안은 내용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절차상의 정당성마저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구속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어버렸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교단 안에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교계언론에 따르면 '사상 초유의 총회 단상점거 사태'를 겪은 다음에야 이번 총회(2003년 9월)에서 겨우 절충하는 방식으로 시정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절차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했기에 원천무효가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의견대립으로, 그 개정안의 시행을 유보하고 다시 수의 절차를 거치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 사태는 한 교단 안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태라기보다는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 징후를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첫째, 그것은 불평등한 차별적 위계화를 당연시하는 교회 내 문화의 자연스러운(?) 표출 현상이었다. 그 법안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가장 그럴듯한 근거는 소위 장로교 정치원리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목사와 장로가 함께 '치리'(이것도 문제다!)하는 장로교 정치원리상 회중의 대표인 장로가 없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므로 그 교회의 목사 자격이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교회 정치원리를 따지자면 여기서 많은 논점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간단히 말해 회중의 대표권이 굳이 '장로'에게만 제한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다른 일반 평신도에게 확대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일까? 그 법안의 지지자들은 다른 대안을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교회의 제도와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분 앞에서 다른 대안의 모색은 원천 봉쇄된다. 그러기에 그 제도의 원리에 충실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차별적 위계를 정당화는 것으로밖에 귀결되지 않는다. 이런 사고방식에는, 종교개혁기 장로교의 제도가 사제중심의 카톨릭교회의 제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회중의 의사를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구조로 채택되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제도 자체의 완벽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종의 물신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장로교 제도 안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디 장로교 안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까? 제도에 대한 물신숭배 현상은 어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로 바로 그 차별적 위계화는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물량주의와 짝을 이루고 있다. 장로교회에서 소위 조직교회의 요건은 일차적으로 일정한 교인 수를 충족하는 것이다. 최초로 장로를 선임할 수 있는 인원은 최소한(예컨대 기장의 경우 15인의 입교인)이기는 하지만, 그 최소한의 인원으로 당회를 조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재정적 자립의 정도라든지 그 밖의 여러 가지 요건을 고려해 장로를 선출하고 당회를 조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장의 경우 거의 절반에 가까운 교회가 미조직 교회인 것도 그런 현실 때문이다. 15명이라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 조직하지 못하는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한 현실에서 조직교회와 미조직교회를 구별해 그 목회자의 자격에 차등을 두는 것은 사실상 교회의 규모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과 다름없다. 그 혐의(?)는 또 다른 예를 통해서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조항과 같이 공론화되지 못했지만, 기장의 개정 헌법에는 이런 조항도 신설되었다. "지교회가 설립 후 세례교인의 수효가 10인 미만이 되어 2년이 경과되어도 정원수 이상이 되지 않으면 노회는 이를 기도처로 변경한다"는 조항이다. 일정한 인원이 되지 않으면 이제 아예 '교회'라고 불릴 수도 없게 만든 것이다. 교회의 제도를 정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그럴 듯한 관리조항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교인의 수효라고 명문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법을 제정하는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추호도 물량주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강변하겠지만, 모르는 가운데 규모의 논리, 물량주의적 관점은 그렇게 그럴 듯한 합리성(?)을 띤 모습으로 스며들고 있다. 실제로 헌법 개정안이 논란이 되었을 때, 그 개정 법안은 차별 이전에 '선교열의'를 독려하는 뜻을 지닌 법이라고 너무나 당연시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말이 좋아 '선교열의'이지, "수를 채워라.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관점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차별적 위계화는 물량주의와 쌍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신앙풍토가 교단별로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쉽게 보수와 진보로 나누기는 하지만, 밑바탕의 신앙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 있는 표징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라는 말은 작은 차이가 본질적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 '오십보'의 차이를 의미있게 보는 시각이라고 할 것이다. 내 자신이 속해 있는 기독교장로회 교단이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그런 시각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경험하면서 그러한 인식이 매우 순진한 인식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해 왔다던 교단의 실상이 그 지경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사실 절망했다. 권위주의와 물량주의가 그렇게 속속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데 따른 절망감이었다.
    스스로의 몸집 키우기와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우는 데 몰입한 교회는 건강한 소통성을 상실해간다. 그렇게 체질화된 교회는 외부와의 관계를 언제나 경쟁관계로 설정하기 때문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리 없다. 동시에 그러한 체질은 교회 내적으로도 심각한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권위' 앞에서는 '순종'이 요구될 뿐이다.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목표 앞에서는 모두가 '총동원 대상'이 될 뿐이다. 그 체제 안에서 일반 평신도들은 '양육'의 대상, 아니 '관리'의 대상일 뿐 인격의 주체로서, 신앙의 주체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최근 들어 교회 안에서 기존의 교회 관행에 이의를 제기한 평신도들이 출교를 당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년도 가을에 진행된 여러 교단들의 총회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시위'가 일상화된 현상이 두드러졌다. 제기된 여러 주장들의 진정성 문제는 사안마다 신중하게 평가해야겠지만, 그와 같은 현상은 한국교회가 교회 내적으로도 심각한 의사소통의 단절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국가권력에 대한 의사 표현방식 가운데 하나였던 시위가 교회 안에서도 일상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교회 자체가 꽉 막힌 권력기관이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의 문제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도대체 교회가 소통하는 구조가 되지 못한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 동등한 주체로서 바로 서야 할 교회 성원들이 '권위 있는' 한편과 '순종해야 하는' 한편으로 나뉘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 물음들에 대한 응답을, 지금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에서부터 찾아보려는 것이다.

    2. 이른바 '교회적 신앙'의 실체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사실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제도화된 교회가 등장한 이래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중세 카톨릭교회의 위기로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탄생한 개신교 교회 역시 또 다시 위기 가운데 처했다. 어쩌면 교회의 역사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태도와 종말론적으로 매 순간을 위기로 느끼며 대안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시도가 교차하는 가운데 지속된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당대의 지배적인 사회질서 및 가치관과 동일시되고 경직화된 교회적 신앙은 항상 위기의식을 통해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맞이했다. 그 점에서 위기의식 그 자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령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 어떤 신학적 진술보다, 현존하는 교회의 위기를 예리하게 통찰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오늘 교회의 위기에 대해 우회적으로 접근하고 싶다. 간접적 언급이라는 점에서 우회적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더 진실하게 오늘의 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는 방식이 없을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 보면 「대심문관」이라는 극시가 삽입되어 있다.
    16세기 어느 날 스페인 세빌랴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 현장은 바로 전 날, 소위 신의 영광을 위하여 백 명에 가까운 이교도들이 화형에 처해진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1500년 전의 초라한 모습 그대로 그 현장에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관속에 누워 장례를 기다리던 소녀가 일어난다. 그 동요와 혼란의 현장을 대심문관인 추기경이 목격한다. 바로 어제 이단자들을 처형한 장본인이다. 그는 호위병들에게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단자 재판소로 사용되는 건물 안의 감옥으로 '죄인'을 호송하여 그곳에서 심문을 시작한다. "네가 정말 그리스도냐? 정말 그리스도냔 말이다?" 그리스도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다. 몰라서 물은 게 아닌 까닭에, 대심문관은 상관하지 않는다. "대답 안 해도 좋다. ... 하긴 대답할 말도 없을 테지! ... 너는 필경 우리를 방해할 목적으로 이 곳에 나타난 것임에 틀림없어! ... 나는 내일 너를 재판에 회부하여 극악무도한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 버리고 말 테다. ... 그러면 오늘 너의 발밑에 입을 맞춘 사람들이 ... 너를 태우고 있는 불더미 속에 장작개비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한다. "멸망과 허무의 악마가 광야에서 너하고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지." 하며 대심문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은 사실을 환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악마가 주고받은 세 마디 가운데 인생사의 모든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고 보는 심문관은, 과연 그리스도와 악마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를 따진다.
    첫 번째로, "너는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돌멩이들을 빵으로 만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봐라! 본래 비천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하늘의 빵과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자유를 두려워하며 견디기 어려워한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제발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친다. 너는 어리석게도 그 외침을 외면하고 말았다. 결국 지상의 빵을 버리고 되지도 않는 천국의 빵과 자유를 약속해서 사람들에게 헤어나지 못할 무거운 짐만 지워준 거 아니냐?"고 심문한다.
    다음으로, 대심문관은 두 번째 시험과 관련해서 말한다. "인간을 다스릴 힘은 이 지상에 세 가지 힘 밖에 없다. 기적과 신비와 권위다. 악마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고 했을 때 너는 과연 그리스도답게 그것을 물리쳤지만 그 유혹을 물리칠 힘이 다른 보통 사람들에게도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인간의 본성이란 기적을 부정하게끔 되어 있지 않다. 특히 생사에 관한 무서운 순간에는..., 가장 심각하고 가장 괴롭고 가장 근본적인 의혹의 순간에 자기의 자유로운 양심의 결정에 따라서 행동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인간이 기적을 원하지 않을 때 인간은 신까지 동시에 부정하려 든다는 것을 너는 몰랐다. 한마디로 너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했다. 인간은 본래부터 반역자이면서도 또한 노예라는 것을 몰랐어. 잘 판단해 봐라!"고.
    마지막으로 대심문관은, 권세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한다. "케사르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왜 그걸 물리쳤느냐? 인간은 숭배할 가치가 충분한 사람과 양심을 맡길 만한 사람, 그리고 지상의 모든 인간이 오직 하나로 개미처럼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이 고민이야말로 제3의 고민이자 동시에 마지막 고민이다. 케사르의 자주 빛 옷을 수중에 넣었을 때 비로소 세계적 왕국을 실현할 수 있고 인류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고 빵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만이 인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케사르의 검을 잡았다."
    대심문관은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와 같은 일을 잘 해왔는데, 이제 네가 나타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고 심문한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너무나 고상하게 평가하고 기대하는 바람에, 소수의 사람들 밖의 대다수 사람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허황한 길을 제시해 부담만 안겨 줬다는 이야기다. 대심문관은 말한다. "너는 자유란 이름을 가지고 모든 인간을 축복해주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 자유를 소중하게 여긴 적이 있었지. 나 역시 수(數)를 채울 것을 열망한 나머지 소위 너의 그 선택받은 사람들 틈에, 위대하고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 틈에 끼어보려 한 적이 있었단 말이야. 그러나 나는 그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 너의 사업에 수정을 가한 사람들 틈에 끼어든 거다. 나는 오만한 자들의 곁을 떠나 겸손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겸손한 사람들에게 돌아왔단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한 대심문관은 "기필코 너를 내일 사형에 처하겠다"는 말로 심문을 마친다. 그러한 심문에도 한 마디 대꾸하지 않은 그리스도는 오히려 대심문관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몸을 부르르 떤 대심문관은, 문을 열어제치고 '죄수'에게 외친다. "자 가거라, 그리고 이젠 다시 이곳에 나타나지 말아라...,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라...영원히!"
    오늘의 교회가 과연 대심문관의 지위와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예수를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끝내 추방하는 것이 오늘 교회 현실이다.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고 우리와 동등한 자리에서 말을 거는 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오늘 교회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여전히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저 높은 자리에서 호령하는 신만이 오늘 교회를 지배한다. 그러기에 신앙은 자기의 자유를 유보당한 채 그저 순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렇게 순종하는 이에게만 현세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구원의 기쁨은 전도되고 말았다. 맹목적 순종을 강요하는 '가학'과 그 강요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피가학'의 논리를 신앙의 요체로 알고, 거기에서 기쁨을 찾는 우스꽝스러움이 미덕으로 칭송된다. 그와 같은 전도는 대심문관의 말처럼 일방적 강요의 결과만은 아니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3. 수직적 위계 질서를 정당화하는 기제들

    예수가 설자리 없는 교회라면,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설자리 또한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근원의 자리로 돌아가면 도무지 현실의 교회에서는 그 어떤 희망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면, 예수를 닮기 위해서 애쓰는 교회들의 모습에서일 것이다. 오늘의 교회를 근원의 자리에 세워 자꾸 비추는 것은 얼마만큼 예수를 닮기 위해 애쓰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때마다 일그러진 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의 역사를 아예 '일그러진 신의 얼굴'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암만 닮으려 해도 닮을 수 없는 교회의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제도로서의 교회는 그런 운명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 물론 인간의 실존적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 한계를 인식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는 노력들이다. 신앙을 일종의 위기의식 그 자체로 본 것은 그 한계 상황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달리도록 하는 위기의식의 추동력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교회를 평가하고, 현존하는 교회를 평가하는 것은 그 위기의식의 관점에서 교회의 한계를 분명히 하자는 뜻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교회를 '프로테스탄트' 또는 '개혁'교회라 칭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항구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급진적인 정신의 표현이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정신에서 현실의 교회를 진단하려고 한다.

    1) 독점적인 상층 정치구조

    예수는 교회를 원하지 않았지만 현실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만들었다. 이 사실은 처음부터 교회가 예수의 본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함과 동시에 역사적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의 불가피성을 시사한다. 오늘날과 같이 굳어진 형태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선택의 불가피성은 이미 성서 자체 안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교회의 제도화 현상이 성서 자체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도와 집사, 또는 감독과 장로, 그리고 교사 등 구분된 직분들이 초대교회 안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성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교회의 제도화에 대해 견제를 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아예 근원적으로 제도화를 거부하고 형제애를 중심으로 하는 소공동체를 지향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요한 복음과 서신들), 불가피하게 직분의 구별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경직화된 위계질서로 전락할 것을 경계했다(그 외 서신들). 모든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며, 각 지체는 서로 어울려 한 몸을 이룬다는 서신서들의 관점은 위계적 서열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은사의 동등성, 모든 직분의 동등성을 강조하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제도화의 필연적인 운명이겠지만 교회의 제도화는 그 나름의 당대적 합리성을 취하고 점차 고착화되기 시작한다. 교회는 세속적인 정치제도와 동일한 형식을 취하게 된다. 세속 사회의 일반적인 정치형태인 군주제에 걸맞게 감독 중심의 조직을 갖추었던 교회는, 봉건제의 확립과 더불어 철저하게 상하의 위계를 갖춘 조직으로 굳어진다. 봉건제 질서에서 일반 농민이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모양을 그대로 닮은 교회에서 평신도의 교회 정치 참여는 보장되지 않았다. 그것이 성직자 중심의 중세 카톨릭 교회의 위계질서였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교회는 평신도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점에서 획기적인 전환의 성격을 띠었다. 회중의 대표로서 장로를 뽑아 교회정치의 책임을 부여한 장로교회는 확실히 새롭게 싹튼 근대정신을 반영하였다. 그렇게 교회는 회중 대표의 정치참여를 보장함으로써 대의제에 기초한 공화정의 선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정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일반 정치 차원에서 대의 기관은 민의를 대변하는 장치라기보다는 소수의 독과점 세력의 권력 기관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점적 군주제에 비해 상대적 진보성을 지녔던 대의제는 이제 그 적실성을 검토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오늘날 그 대의제의 문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참여 민주주의가 활발히 모색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맥락이다. 에큐메니칼한 세계 교회 기구들도 교회 안에서의 더 많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에큐메니칼 세계 교회 협의체들은 성직자 중심의 대표권을 지양하고 비례대표제를 통해 평신도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는 추세다. 심지어는 장로교의 협의체인 세계개혁교회연맹조차도 가맹 교단의 총대를 구성할 때 목사, 청년, 여성 순으로 대표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회중의 대표로서 장로의 의미를 폭넓게 확대 해석한 결과이다.
    이와 같은 추세에 비해 한국교회의 상층 정치구조의 변화는 난망해 보인다. 아직도 여성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보다는 인정하지 않는 교단이 더 많고, 교단 정치에 목사와 장로를 제외한 여타의 평신도들이 참여할 구조가 보장되어 있는 교단은 전혀 없다. 지극히 예외적으로 특정한 위원회에 전문가에 해당하는 평신도들이 참여하거나 평신도 대표들이 총회에 언권 회원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실제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 평신도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이와 같은 교회의 상층 정치구조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권력 기구화 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흔히 장로교회에서는 당회와 노회, 총회를 치리회(治理會)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회중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결기구로서의 성격보다는 일종의 통치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다. 장로교 정치 원리상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한, 다른 대안을 찾을 필요성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 자체가 항구 불변하는 것일까? 우리는 정치적 차원에서 민의를 충실히 대변할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남용하거나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동시에 숙고해야 한다.

    2) 서열화된 교회 직제

    엉뚱한 소리부터 할까? 내가 신학생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떠돌던 우스갯소리다. "1학년은 목사, 2학년은 장로, 3학년은 집사, 4학년은 일반 평신도"라는 말이 있다. 공부를 할수록 번뇌가 늘어가고, 그래서 소위 '좋았던 믿음'이 떨어져나간다는 것을 풍자하는 우스갯소리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신앙의 정도가 위계적인 등급 순위를 따라 매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교회 안에서 일반화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교회 안의 일반화된 인식은 공연히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교회 내 직제의 위계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 교회 내의 직분은 단순한 역할상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고 실제로 책임의 비중을 나타내기도 한다. 장로교의 경우를 들어 말하면, 아무런 직분이 없는 일반 평신도가 공식적으로 교회 내의 의결기구를 통해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1년에 한 번 뿐인 공동의회 밖에 없다. 집사의 경우에는 대개 한 달에 한 번 제직회를 통해 의사를 반영시킬 수 있다. 반면에 당회를 구성하는 목사와 장로는 치리를 담당한다는 권위와 함께 교회의 매사를 직접 관장한다. 그와 같은 교회구조는 사실상 역할 배분 차원을 넘어 철저하게 위계화된 조직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암만 하나님 앞에서 은사의 동등성을 말한다 한들 그 이야기는 공허한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나마 은사의 동등성이 강조된다면, 마치 찌르는 가시처럼 현존하는 교회구조의 정당성을 되물을 수 있는 기회라도 제공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대개의 교회에서는 한편의 '권위'와 한편의 '순종'이 강조될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다'는 것을 입증하는 길은 교회 내 위계질서에서 상층으로 진입하는 절차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위계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개선하려는 움직임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려는 추세가 훨씬 강하다. 그 단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직분의 남용 현상이다. 오늘 한국의 여러 교회들의 교회 내 직분만 볼 것 같으면, 교파의 특성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집사 직분은 모든 개신교 교회 안에서 일반적이지만, 장로교가 아닌 교회에서도 장로는 일반화되어 있다. 반면에 또한 장로교 안에도 권사가 있고 안수집사도 있다. 여기에 더하여 권찰 직분도 있다.
    나는 이러한 직분들이 성서에 근거하느냐 않느냐 하는 점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어차피 교회의 제도화가 나름대로의 당대적 합리성을 따른 것이라면 그 합리성에 맞게 운용되느냐 하는 점을 따지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사도시대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도와 주로 구제 임무를 담당하는 집사가 있었다. 사도 시대 이후에는 집사 이외에 감독과 장로가 혼재되어 있었다. 이후 감독은 사제를, 장로는 평신도 회중 가운데 원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성서적 근거로 말한다면, 목사, 장로, 집사 정도가 정당성을 지닐까? 하여간 그 문제를 판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직분들이 과연 서로 어떤 관계로 설정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다. 흥미 삼아 국어사전을 들춰보았다. 교회의 직분들에 대해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목사> 교의를 해설하고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나 교구의 관리 및 신자의 신앙 지도 등을 맡아보는 교직. 또는 그런 사람; <장로> 성직의 한 계급. 모세 시대에 70 장로를 임직하였고, 현대 장로교ㆍ성결교 등에서 이에 따라 투표로 선정하여 당회나 노회의 승인을 얻어 임직함; <권사> 기독교회 직분의 하나. 전도사를 도와 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권면하고 전도에 힘쓰는 교직임; <집사> 기독교에서 교회의 일을 분담하는 사람. 세례교인으로서 임명함. 성공회의 안수례를 받은 사람; <권찰> 기독교의 한 교파인 장로교에서 신자의 가정 사항을 조사하는 직무. 또는 그 사람."(국어국문학회 감수, 『새로 나온 국어사전』, 민중서관, 2002 참조).
    단순히 어의를 정의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기원과 역사를 함께 설명해야 하는 성격을 지닌 개념들이므로 사전적 정의로 그 직분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각각의 직분은 필요에 따라 고유한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각각의 직분들이 차등적인 등급으로 위계 서열 순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파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수용된 여러 직분들은 은사의 효율적 배분 수단으로서보다는 그 위계의 등급을 세분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굳이 국어사전을 들춰가며 직분의 의미를 드러내보려고 한 의도는, 현재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직분들이 과연 그 구별된 정의가 의미 있을 만큼 운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유감스럽게 사실상 서열 등급으로서 의미 말고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직분의 남용은 위계질서의 강화 현상의 한 예라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교회 직분의 위계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예컨대 목사와 장로의 임기제, 또는 비례대표 원리를 적용한 장로 선출, 여성장로 할당제 등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대안들이 공론화 되기 시작한지 꽤 오래되었지만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기장 총회에서 여성장로 30% 할당제를 '권장' 사항으로 결의한 것 말고는, 그 어떤 교단의 총회에서도 이와 같은 사안에 대해 결의한 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개별교회 단위에서 시행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교단과의 관계에서 문제시되고 있고, 그래서 교묘하게 그 완고한 교단의 법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시행되는 경우들이 있다. 예컨대 기존의 당회원이 총사퇴를 한 후 재선출 또는 재신임을 묻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경우다. 이와 같은 시도들이 완고한 기존의 교회 제도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기성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대안이 자리를 잡게 되리라는 전망은 아직도 요원하다.

    3)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예배 양식

    위계적 교회 질서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예배는 사실상 그 질서를 최종적으로 승인하고 강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예배 순서를 맡은 사람의 등장 빈도와 비중은 거의 정확하게 위계화된 교회 직분 서열을 반영한다. 그런데 예배 자체가 하나의 신성화된 의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예배에 반영된 현실의 관계는 그대로 신성화되는 효과를 지닌다. 그 점에서 예배는 위계화된 질서를 최종적으로 승인하고 강화하는 기제가 된다. 게다가 신성화된 예배는 쉽사리 변경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예배로 성화된 현실 관계는 더더욱 확고부동해진다.
    그러나 예배양식 그 자체가 만고불변의 것일 수 있을까? 우리는 구약시대의 예배양식과 초대교회의 예배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질서에 참여하는 예식으로서 영성체를 중심으로 하는 카톨릭의 미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의 예배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예배양식이 그렇게 다른 것은, 교회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시대적 합리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 의미에서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데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으로서 예배의 정신이 손상되지 않는다면, 아니 하나님을 섬기는 뜻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예배양식의 모색도 가능하다. 그 어떤 직분을 맡았든, 그 어떤 처지에 있든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라는 고백을 한다면, 그 모두가 동등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으로서 예배양식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카톨릭 교회의 예배가 '영성체'를 중심으로 하였고, 개신교 교회가 '말씀'을 중심으로 하였다면, 이제 '공동체 참여'를 예배의 중심 개념으로 설정할 수도 있다. 온전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드리는 행위로서 예배라고 할 것이다.
    새로운 예배의 중심 개념을 '공동체 참여'로 가정해보는 것은, 지금 행해지고 있는 예배에서 그 요소가 가장 결여되어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공동체적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적 예배들도 드려지고 있다. 그런데 예배양식의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는 안수를 받은 목사 혹은 서품을 받은 사제 이외에 다른 일반 신도가 성사나 설교를 맡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카톨릭의 경우 특수한 상황에서 평신도가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고 있지만, 오히려 만인사제직의 원리를 따른다는 개신교에서 성사를 평신도에게 허락하는 경우는 없다. 설교의 경우는 개신교에서도 사실상 허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로 미성년이 참여하는 예배(어린이 예배, 중고등학생 예배)에 한정되거나, 성년이 참여하는 예배의 경우에 허용된다 하더라도 대개 격을 달리한다. 예컨대 예배에서 사실상 설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증언'이라든지 '간증'이라 하여 '설교'와는 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혼선은 예배의 중심 개념과 양식을 그대로 둔 채 부분적인 보완을 시도하는 데서 비롯된다. 물론 많은 논란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부분적인 보완의 시도가 예배양식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배의 중심 개념과 양식의 변화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시도는 자칫 오히려 기존 예배양식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소지도 있다. 예컨대, '설교'라 하든 '증언'이라 하든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소수의 엘리트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피하기 어렵고 그로 인한 교회 내 위화감은 훨씬 심각해질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러면 차라리 목사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의식에 손상이 간다. 이렇게 되면 사태는 더욱 나빠진다.
    따라서 예배의 중심 개념을 새롭게 설정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든 회중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는 예배 양식을 모색해야 한다. 이 때 예배의 새로운 중심개념의 설정과 함께, 신학적 의미에서 예배의 모든 요소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행위로 '격하'시키면 어떨까? 그래야 인간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신성화되는 착오가 일어나지 않고 진정한 '예배'가 되지 않을까? 예컨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기 위한 길잡이로 보자는 것이다. 실제 그런 것 아닌가? 그러한 신학적 인식의 변화는 성찬과 관련하여 화체설이 상징설로 바뀐 데서도 충분히 시사되고 있는 것 아닐까? 만인사제직의 원리에 충실하다면 서로 다른 직분에 있는 신도의 행위에 차등적인 등급이 매겨져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와 같은 변화 가능성은 이미 16세기의 종교개혁 원리에서도 이미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대안은 획일화된 예배 양식의 표준을 강조하기보다는 예배양식의 다변화를 시도하는 가운데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4) 배타적 군림의 상징으로서 교회 공간

    위계적인 신앙 문화 형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교회당 건축물 내지는 공간일 것이다. 건축물이나 공간은 상징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 형태나 구조 자체가 주는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 또 직제나 예배처럼 균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사리 일반화시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교회 건축물이나 공간에서 대체로 일반화된 어떤 인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숫적으로는 아주 미미하겠지만, 눈에 띄는 대형교회들의 교회당은 그 건축 양식에 상관없이 확연한 하나의 인상을 심어준다. 대개 주변환경과 상관없이 거대한 외양으로 우뚝 선 교회당은 지배와 군림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한 이미지를 주는 대형교회들이 대개 성장주의를 주도해왔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렇게 군림하는 형상으로 서 있는 교회당의 이미지는 소통과 공존의 가치보다는 배타적 경쟁과 군림의 가치를 사실상 숭상하는 한국교회의 신앙문화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교회당 규모에 상관없이 많은 교회에서 '교회당' 또는 '예배당'이라는 말보다는 굳이 '성전'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을 보아도 배타적 신앙과 교회 건축물과의 상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와 같이 배타적인 신앙관은, 크든 작든 대개 독립적인 교회당의 구조와 용도에서도 일정정도 나타난다. 대개의 교회는 주일만의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을 중심으로 하고 여타의 공간들은 부차화되어 있다. 회중의 집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특성상 당연한 측면도 있지만, 그 공간이 한정된 시간에 예배당 이외의 목적으로는 활용될 수 없다는 점은 재고의 여지가 있으리라 본다. 또한 예배당 이외의 부속 공간들도 교회 내의 다양한 그룹 또는 지역주민들에게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는 구도를 갖출 수 있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교회당을 들어설 때마다 늘 아쉽게 느껴지는 점 가운데 하나는 장애자에 대한 구조적 배려가 없다는 점이다. 오래 된 건물뿐만 아니라 최근에 건축된 건물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찾아보기 어렵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하긴 교회 부속 야학 출신 학생이 교인으로 등록하는 것을 꺼려하는 하는 이들도 있는 지경이니 교회당 공간에서 장애자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마지막으로 독립된 교회당을 갖추고 있는 교회나 임대교회나 공통된 교회 내부 구조상의 특징이 하나 있다. 높은 제단(강단)과 장의자로 배열된 회중석의 모양이 그것이다. 이 구도만큼 분명하게 교회의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이 구도는 우선 제단에 오를 수 있는 사람과 오를 수 없는 사람을 분명하게 갈라놓는다. 제단은 확연히 구별되어 있고 그 위에 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특별하다. 예컨대 위엄 있고 안락한 개별 의자가 놓여 있다. 반면에 회중석은 딱딱한 붙박이 장의자가 놓여 있고 다닥다닥 붙어 앉게끔 되어 있다. 강단에 선 설교자는 한 시선으로 온 회중을 통괄하는 형세다. 이와 같은 구도는 제단에 오른 이의 '권위'와 회중석에 앉은 이들의 '순종'을 자연스럽게 내면화시킨다.
    아마도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 우리들 대부분의 생각은 그러면 달리 무슨 획기적인 구도가 있느냐는 의문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들의 생각이 그 구도하에서 그렇게 굳어져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앞에서 예배 중심개념의 새로운 설정과 예배양식의 다변화 필요성을 말했다. 예배당의 구도는 그러한 변화와 함께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공동체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라면 당연히 예배당 구도 자체도 제단과 회중석의 경계가 유연해야 할 것이고, 회중석도 보다 활동적인 구도로 재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주제들에서 그 대안이 모색되겠지만, 그에 대한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 자신이 위계화된 신앙 문화에 굳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5) 교회 생활 언어와 성서번역본

    위계적인 신앙 문화를 내면화하는 기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아마도 교회생활 언어와 성서일 것이다. 이것은 사실 별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익숙하게 굳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큰 영향력을 끼친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직함을 호칭으로 부르는 언어생활이 일반화되어 있기에 교회만의 문화라고 할 수 없겠지만 교회에서의 호칭은 '신앙적 권위'까지 덧칠해져 일반사회의 위계적 서열의식을 더 강화시키는 면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교회 안에서 동등한 형제의식을 강조하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이 명백하게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형제' 또는 '자매'라는 호칭이 그런 경우이다. 물론 '자매'나 '형제'라는 말이 호칭으로 사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 하더라도, 그 호칭이 적용되는 것은 교회의 직분을 맡지 않는 신도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은 위계적 신앙 문화의 잠재적 표현 형태가 아닐까? 그러니까 그 호칭은,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다'라는 의식을 표현하기보다는 자매나 형제로 불리워지지 않을 때 비로소 교인다운 교인으로 인정되는 현실을 반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위계적인 언어 생활을 조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말 성서번역본들이다. 지금 우리는 성서 번역본들의 문제를 하나하나 따질 겨를은 없다. 딱 한 가지 예를 드는 것만으로도 지금 말하고자 하는 취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예수께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반말을 하셨을까? 우리말 어법의 맥락에서 말이다. 그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기나 한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개역한글판>은 사도들의 서신들도 모두 반말투로 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 이르러 존댓말로 바뀌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만큼은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에서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반말투이다. 물론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 자신이기에 그렇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더군다나 언제나 섬김을 강조한 분께서 아무나 대고 다짜고짜 반말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될 만한 일인가? 우리말 어법상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그와 같은 성서 번역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앙 문화에 영합한 결과일 뿐이다. 그럼으로써, 겸손히 섬기러 오신 예수를 독선적으로 군림하러 온 제왕 같은 이미지로 탈바꿈시켜버렸다. 그것은 예수께 지금 교회의 권위를 덧 씌어버린 것이다.

    6) 평신도들의 비주체성

    지금까지 위계적인 신앙 문화를 강화하는 몇 가지 주요 기제들을 검토했다. 그러나 이제 위계적인 신앙 문화 극복과 관련하여 가장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해야 할 차례이다. 솔직히 말해 목사인 나로서는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수동성 또는 비주체성은 앞서 말한 여러 기제들 때문에 내면화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화란 일방적 강요의 결과는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주인공 대심문관의 말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교회에서 맡아주는 측면이 있다. 쉽게 말해 교회 가면 위로를 받고 싶고 쉬고 싶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진다. 그러한 기대는 소위 보수적 신앙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교회에서만큼은 번잡한 문제로 고통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생활 조건의 차이를 생각하면 일면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수동성은 납득할 만한 측면도 있다. 교회의 전문 사역자로서 목회자의 생활 중심은 어쨌든 교회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그 누구보다 강도 높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일반 평신도들은 교회 생활과는 다른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특별한 집회 시간이나 특별한 교회의 활동을 위해서만 간헐적으로 참여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전문 사역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동등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생활 조건을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 목회자도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아마도 장차 그와 같은 목회자의 생활 조건의 변화는 상당히 확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목사는 '목회자'로서보다는 '설교자' 혹은 '예전 전문가'로서 몫이 중요해질 것이다. 소종파에 지나지 않지만 전문 사역자 없이도 신앙 공동체를 일구어나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으므로, 그것이 비신학적이라거나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새로운 교회 역시 어떤 형태로든 제도적 형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식일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전문 사역자를 필요로 하는 구조 안에서 위계적인 신앙 문화를 타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고민이요 과제다. 말자하자면 전문적인 사역의 몫을 인정하는 것이 곧 권위의 독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 대안에 대한 고민이다.
    지금 '동그란 네모'를 말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교회를 해체해버리자고 선언하면 그만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않는다. 여전히 기존의 신앙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여러 기제들 그 자체에서 의미를 느끼는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각하고 있다면 외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예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선언하면 될까? 거기서도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요즘 '안티' 개신교인들이 온라인 상으로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상으로도 활동을 한다. 그 사실은 교회가 이 세계와, 더 구체적으로 시민사회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신앙문화는 교회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이자 동시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므로 어찌되었든 교회의 신앙 문화 개혁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그것은 목회자와 평신도에게 동시에 부여된 과제이다.

    4. 교회의 위기를 넘어

    지금까지 이야기가, 어찌 보면 가만 두면 문제될 것이 없는 것들을 일부러 문제삼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결코 우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시각이다. 그것은 매우 강고한 구조적 요인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우리는 그 위기의 진원을 교회 내적인 동인에서 찾아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현재 교회의 위기를 통해 새삼 인식한 사실은, 현재 교회의 제도는 상대적인 하나의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보나, 성숙한 시민사회의 지평에서 보나 현재의 교회 제도와 관행은 위기에 처해 있다. 그 위기를 넘어, 서로 다른 역할이 권위의 배분으로 귀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는 것으로 인정되는 교회의 신앙 문화를 이루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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