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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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안교회, 대안신앙> 교회의 새로운 구조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6463, 2003.11.23 21:40:01
  • 한국 교회의 새로운 구조를 향하여


    백종국(경상대학교)


    1. 쇠퇴 일로의 한국 개신교회와 개혁주의 정치원리의 재고찰

    한국의 개신교회는 현재 쇠퇴 일로에 있다. 이 징조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지만 신도 수의 감소라는 가장 확실한 지표가 이를 증명한다. 개신교파들이 정부 당국에 보고한 교세통계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인은 1995년의 1,450만명에서 2001년의 1,282만명으로 5년 동안 약 11.6%가 감소하고 있다. 정부의 인구 센서스 결과를 기준으로 볼 때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에 약 35%가 증가했었다는 사실과 뚜렷이 대조되는 경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국 개신교회의 쇠퇴에 대한 우려는 이미 여러 차원에서 제기된 바 있다. 1993년에 출범한 [한국기독교개혁추진협의회]의 여러 활동이나, 1996년 10월에 나타난 [교회개혁열린포럼]의 "교회개혁 실천연대를 위한 선언", 1999년 10월 한국기독청년협의회/한국기독학생총연맹 교회 청장년연대모임의 "교회개혁을 위한 평신도 선언", 혹은 각 교단의 개혁 모임을 하나로 모은 [교회갱신협의회]의 출범을 예로 들 수 있다. 1998년 10월에는 [한국교회개혁선언위원회]가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한 '98 선언문(이하 [교회개혁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세상의 소금이어야할 한국 교회의 상당수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 교회 수준에의 개혁운동도 과거와는 달리 보다 적극적인 형태를 띄고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에도 개 교회 차원의 비리 시정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부패와 비리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적 청산 위주였으며 이조차도 성공하는 예가 드물었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관련하여 소위 "교회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교사모)"들이 조직되면서 평신도들의 교회 개혁 활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연대적인 운동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들이 제기하는 주제들은 주로 담임목사의 세습 중지나 교회 재정의 투명성 보장, 목회자의 윤리성 회복, 등 매우 상식적이면서 그러나 한국 교회 내에서는 구조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한국 교회의 쇠퇴를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서 한국 개신교회의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를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집중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우선 한국 교회 내에 편만한 사제주의적 권위주의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이유들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다음으로 헌법의 개정, 특히 개교회의 "모범정관갖기운동"을 이러한 권위주의 청산의 제도적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 척결에는 다양한 해결책이 있을 수 있다.(백종국 2003) 구조개혁을 강조할 수도 있고 의식개혁을 강조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제도개혁을 강조하고자 한다. 현행 제도는 좋은 데 의식이 따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다. 이 논문은 실제로 한국 교회의 제도가 얼마나 개혁주의의 교의에서 벗어나 있느냐를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한국 교회의 현행 헌법들과 이 헌법들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교회법학자들의 견해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분석할 것이다.
    보편적 교회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며 그의 법도를 순종하는 모든 나라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다. 박윤선은 이 보편적 교회의 특징으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박윤선 1983, 29)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점이다. 물론 개인으로서 택함을 받지만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 둘째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는 건전하지 못하다. 셋째 개 교회도 보편적 교회의 지체이다. 노회나 총회와 같은 광대회의(廣大會議)는 이러한 점에서 유익하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보편적 교회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개혁주의 교회는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김득룡 1984, 241-243) 첫째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를 통치하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교회의 머리를 주장할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모든 활동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교인은 여기에 복종하여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어느 개인도 치리의 권세를 주장할 수 없으며 단지 교회 내에서 맡은 직분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이 직분은 교인의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것이다. 넷째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지교회가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 각급 광대회의(廣大會議)에 참여하여 협조해야 하지만 교회의 모든 권리는 본질적으로 지교회에 속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에 대해 한국의 교회법학자들 사이에서는 대체적으로 이견이 없어 보이지만, 개혁파 교회정치의 특징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미국 장로교의 뉴욕총회(1788년)가 의결하고 한국 교회가 받아들인 교회정치의 원리는 8가지이니 곧 양심의 자유, 교회의 자유,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진리(신앙)와 행위의 연락, 교회 직원의 자격, 교회의 직원 선거권, 치리권 및 권징이다.(박윤선 1983, 19-27) 그러나, 이 8가지는 원리라고 부르기에 부적합하다. 원리에 해당하지 않은 요소들, 예컨대 교회 직원에 관한 항목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김득룡과 임택진과 박병진은 장로회주의의 3원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가 조금씩 다르다. 김득룡은 장로들에 의한 치리, 성직의 평등, 장로회주의의 균등원리를 말하고 있다.(김득룡 1984, 295-304) 그러나, 임택진은 장로들에 의한 치리, 교직의 평등, 교회회의의 단계적 구성을 3원칙으로 말하고 "장로교회의 정치적 특성"으로서 "대의정치"와 "기본권과 치리권"을 따로 언급하고 있다. 박병진도 "기본교권"과 "치리교권"이 장로회정치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교)권은 장로에게, 치리(교)권은 목사에게 귀속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균형의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디에서 이러한 논지가 시작되었지는 찾기 힘들지만, 위의 세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권과 치리권의 분리와 귀속"은 개혁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선 용어의 혼란이 발견된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국민의 기본권이란 평등권, 참정권, 자유권, 생존권, 청구권, 등 주권자인 국민들이 당연히 누려야하며 본질적이어서 통치자에게 위임할 수 없는 권한을 의미한다.(헌법재판소 1995, 15) 통치권 혹은 치리권이란 대의제적 선거를 통해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은 통치자들에게 당연히 귀속된다. 이럴 경우에 그 권한들은 통치자와 피치자가 설정한 각종 계약에 의해 그 한계가 정해지게 된다. 예컨대, 이 한계가 침범당했을 경우에 기본권을 지닌 피치자들은 통치자들을 합법적으로 교체할 수 있다. 이것이 상식적인 수준으로 이해되는 균형의 원리이다. 한국 교회 정치의 혼란은 이러한 상식을 부정하고 이미 치리권을 위임받은 장로들에게 구태여 기본권을 귀속시키고 치리권은 성직자로 명명한 목사에게 귀속시킴으로 발생하고 있다. 치리 장로라고 부르면서 치리권이 부여되어있지 않다는 이상한 논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이 주장은 일차적으로 용어 자체를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부적 구성에 있어서도 모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첫째 모순은 만일 기본권이 장로들에게 귀속된다면 장로들을 선출한 성도들에게는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대의제적 정치형태를 갖추었다면 마땅히 치리를 담당한 장로에게는 치리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장로들을 선택할 수 있는 선거권 혹은 참정권으로서의 기본권은 여전히 교회 정치에서 주권자로 간주되는 성도들에게 남아있어야 한다.
    둘째 모순은 목사도 장로의 하나로 간주하는 개혁교리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 토론을 통해 자명해진 바처럼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헌법은 "항존직" 항목에서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하고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가르치는 자는 마땅히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타인의 모범이 되는 성결함과 영성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는 영적인 권위를 누릴 수 있으며 이 권위의 한계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치리교권을 목사에게 귀속시키며 그 결과로 목사에게 당회 내의 독재권을 부여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치리는 장로와 목사가 협의하여 결정해야 하며 개혁교회 내의 치리교권은 마땅히 장로와 목사에게 공동으로 귀속된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교회 정치의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개혁교리를 위반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목사직의 사제화를 부추기고 이를 위해 개혁교회의 제도를 왜곡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논리를 개발하는 데 열중해온 것이다. 본 논문에서 이미 분석된 바처럼, 비교적 개혁교의에 충실했던 박윤선의 헌법해설부터 시작하여 점차 목사중심적 해석이 강화되어 가는 김득룡, 임택진, 박병진의 헌법 해설들이 그러한 경향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법학자들의 식견이 모자랐다기 보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형성된 권위주의적 편향이 교회에 침투한 결과로 보여진다. 민주주의를 꺼려하고 권위주의의 효율성을 신봉하는 경향은 단지 일반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교인인 동시에 시민이었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깊숙이 침투되고 있었다.


    2. 헌법개정과 모범정관의 채택

    어떤 법 체계는 그 시대의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 체제의 유효성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하게 되어있다. 예컨대, 고대 왕정 시대의 방법과 근대 민주정 시대의 방법이 같을 수 없다. 성경이 왕정을 비유로 사용한다고 해서 민주정을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참으로 유치한 일이다. 한국 교회에서 발생한 유감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1910년대의 한국 교회 정치가 그 시대에 가장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것이었으나, 2002년의 한국 교회 정치는 그 시대에 가장 후진적인 권위주의 체제로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한국 교회정치는 사회가 본받아야할 모델이었지만 이제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은 한국 교회의 나태로 말미암아 전도의 문이 닫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 체제는 당연히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미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이를 확인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를 추가로 들 수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부족하기 때문에 공화적으로 지혜를 모으는 게 현명한 일이다. 둘째, 자칫하면 교회 지도자가-목사든 장로든-하나님을 대신하는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갈수록 회중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과거처럼 구태여 교회의 특정지도자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근본적으로 사회가 갈수록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부문에 다 통달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 여섯째, 민주화할수록 교인들의 자발적 헌신과 참여를 높일 수 있다.
    기존의 헌법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교단 헌법의 개정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건강교회운동본부는 2001년부터 이러한 관점에서 헌법개정운동을 해오고 있으며, 이 운동은 [교회개혁실천연대]로 승계되고 있다. 이 기관은 한국교회의 헌법에서 비성경적이고 비민주적이고 비상식적인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뉴스앤조이] 2002.7.30.) 물론 법조항의 오류나 모호성, 그리고 법 해석의 자의성과 판단착오도 흔히 발견된다고 보고 있다.

    3. 모범정관의 구조

    개혁주의적 모범정관이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교회의 원리를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정관을 의미한다. 교회의 주권을 인정하는 개혁주의의 원리에 따라 복음적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 개 교회들은 각자의 정관을 가질 수 있다. 이미 적지않은 교회들이 자신이 소속한 교단 내에 협약의 형태로 헌법과 달리 개 교회의 형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정관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때로 이러한 정관들은 교회내의 각종 세력들이 가지는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형태를 취하기 쉽다. 개 교회의 주권을 상실하고 교단에 의존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개혁주의적 원칙에 상응하는 정관에 대한 연구와 고민없이 단지 교회 내 세력의 구조만을 반영하는 교회정관을 채택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모범적인 정관을 추구하는 일은 진실로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지만 한국 교회 내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교단 분열은 교리적 차이보다는 목사/장로 집단 간의 세력투쟁 때문에 발생하였다.(기독교신문취재팀 1992, 236) 예컨대, 헌법으로 말하자면 그 신조와 규칙들에 있어서 거의 차이를 발견하기 힘든 교회들이 예수교장로회만 65개 이상의 교단들로 분열되어있는 현황으로 보아 잘 이해할 수 있다. 교단의 분열이 교리나 원칙 때문이 아닌 한 분열된 교단의 신앙적 권위를 주장하기는 불가능하다. 도리어 각 교회가 교파 세력들의 정치적 고려가 아닌 신앙적 정관들을 공통적으로 채택하기 시작한다면 한국 교회의 일치는 매우 급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일반인으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각종 법규범에 조응하는 규칙을 한국 교회에 모범정관이라는 형태로 제공해주는 일도 중요하다. 현실적으로 다수의 교인들은 이미 존재하는 교회법 조차도 잘 알고 있지 못하다. 그 법 때문에 걸려 넘어짐이 심할찌라도 왜 문제인지 어떻게 고쳐야하는 지를 파악하기 힘들다. 때로 "법이요"를 외치면서 복음과 개혁주의적 원칙들을 왜곡하는 사람들도 발견된다. 따라서, 교회 내에 있는 건전한 상식인이라면 알 수 있는 수준의 모범적인 규칙을 작성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교인들이라면 마땅히 이를 숙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료 3>과 같은 모범정관의 작성은 바로 이러한 토의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다.
    본 연구는 일종의 선행연구(pilot study)로서 앞으로의 토론을 위해 비교적 과감한 제안들을 시도할 예정이다. 실로 여기에서 다루는 모든 주제들이 기독교 수천년의 역사에서 다루어져왔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종료할 수 없다는 점을 미리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본 연구에서는 먼저 개혁교회의 3대 기본 원리를 다루고자 한다. 이미 토론한 바 있지만, 미장로교 스타일의 8대 원리 등은 그 원리의 등가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시의성도 약하다. 따라서, 이를 다시 요약하여 3대 원리로 제공하고자 한다. 그 다음으로 토론하는 주제들은 이 3대 원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3대 원리 파생되는 주제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이 중에서 교회정관으로 마땅히 포함되어야할 기초적 사항이거나, 현재 한국 교회의 사정으로 보아 꼭 고려되어야할 점이거나, 가까운 미래에 교회의 부흥을 도울 수 있는 요소를 선택하여 보았다.


    1) 3대 기본 원리 선언

    한국의 개혁교회들이 추구해야할 교회 정치의 원리는 양심의 자유, 교회의 주권, 그리고 복음적 분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백종국 2003a) 현재 이 원칙을 정관에서 천명하고 있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언덕교회]는 교회의 주권과 복음적 분업만 반영하고 있다.

    ① 양심의 자유

    개혁주의 신앙의 제1원리는 양심의 자유이다. 주님만인 양심을 주재하시므로 우리 중 누구든지 신앙에 관계되는 사건에 대하여 각자의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고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각자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주셨으므로 만일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했을 때 그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얻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양심의 자유를 제일 원리로 간주한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역사에 비추어 교단과 전통의 횡포로부터 교인들을 자유롭게 하는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2000년대를 맞는 한국 교회에도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중요하다. 칼 맑스가 비꼬는 바와 같이 중세 교회는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본질을 벗어나 매개자의 존재를 위한 기관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복음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역사적 이유로 조성된 갖가지 제도와 전통으로 교인들은 신앙적 삶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조차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겨우 1백여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어 군사독재의 권위주의를 마치 교회의 원칙인양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제 수 백 개로 분열한 교단들은 산하의 교회들의 주권을 유린하고 교인들은 차라리 신앙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양심의 자유는 500여 년 전 그때처럼 이러한 질곡을 끊고 복음을 부활시키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② 교회의 주권

    양심의 자유에서 파생된 개혁주의의 또 다른 원리는 교회의 주권이다. 우리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주권은 그의 부르심을 입어 교회를 구성한 교인들에게 있다. 일상적으로 주권(主權 sovereignty)이라 하면 해당 조직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뜻하며 위임할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는 그 권한을 의미한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권자이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의 조직에서 이 그리스도의 주권은 교인 개개인의 양심에 역사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는 때로 소수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수일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장로교회의 헌법들은 "교회의 자유"라는 항목으로 "교파나 교회가 각자의 규칙을 가질 수 있는 자유"로 규정하고 있다. 역사상으로 이 원리, 교회의 자유 혹은 종교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제정일치의 모습을 보였던 중세교회체제 하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종교 권력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으로 부터서도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간섭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왜곡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세속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교회의 자유에 대한 관심은 교단과 교회의 관계에 쏠리게 된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있어서 종교의 자유는 확고하게 보장이 되었으나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교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즉 교단을 교회들의 협의체가 아니라 교회를 종속시키는 권위체로 간주하는 태도가 발달되어온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으며 한국 교회는 개혁주의적 원리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세속적 경향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의 개혁교회들 특히 장로교회들은 노회를 교회 조직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전통에 심하게 몰입되어 있다. 심지어 이종일은 "노회의 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위임목사에 대해 "주님의 수권행위에 의하여 발생한 그리스도의 사역자, 사신, 사자요, 하나님의 대표자(정제 4장 1조, 동 3조)로서 노회의 주권에 의하여 노회로 부터 지교회의 치리권을 위임받은 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이종일 1996, 23) 만일 노회가 "주권"을 가진 존재요 "하나님의 대표자"라면 우리는 교회의 주권이 아니라 노회의 주권을 말해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의 개혁 교회들은 바로 이 노회 혹은 연회의 주권이라는 함정에 빠져있다. 실제에 있어서 각 교단의 권력은 어떤 노회가 더 강한 힘을 가지는 가로 귀일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노회는 지역별로 조직되기 때문에 결국 교단 내의 권력투쟁은 지역갈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지역적 구분에 기초한 노회는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지역감정이 한국 교회 내 에서도 그대로 재연되게된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노회가 목사들의 직업적 안정성을 결정하는 기관이 되었으므로 노회의 권력을 누가 혹은 어느 파가 장악하느냐가 목사들에게 있어서 치명적 관심사가 되었다. 목사의 지위를 노회가 좌우하는 한에 있어서 자신의 직업적 안정성에 관심이 큰 목사들일수록 자신의 교인들이 아니라 노회에서 다수파를 장악하고 있는 보스 목사에게 더 큰 충성을 바치게 되어 있다. 보스는 휘하의 목사가 어떠한 실수를 하든지 그 지위를 보장해주고 졸개는 그 보스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깡패의 의리가 한국의 교회에 횡행하게되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맥그레고의 설명에 따르면, 1500년대에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노회제도는 국가 교회 하에서 중앙집권적이면서 지역적인 조직의 효율적인 운용과 더불어 개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목표를 가지고 개발되었다.(맥그레고 1997, 176) 회중교회의 산만함과 감독교회의 답답함을 극복하는 시대적 대안의 하나로 개발되었고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중앙집권화된 근대국가 체제에 잘 어울리는 교회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서 이단의 활동을 밝혀내고 사역자들의 자격을 규정하며 연합적인 사업을 위해 광대회의체들은 극히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와 개인의 중간적 존재로서 지역의 노회를 조직의 중심으로 삼은 앤드류 멜빌의 아이디어도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유용한 제도가 한국에서는 개 교회의 의사를 짓밟고 목사들을 교단 정치에 동원하는 도구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야말로 강남의 유자를 강북으로 옮겨심으니 탱자가 된다는 중국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본질적으로 교회의 주권이라 함은 개 교회의 주권을 의미한다. 이미 자세히 밝힌 바처럼 노회나 총회는 개 교회를 돕는 광대회의체로서 존재한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바처럼 모든 광대회의체들은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법칙을 만드는 존재들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존재이어야 한다.(하지 1996, 488)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전통에 따라 혹은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 때문에 목사를 지역 노회의 소속으로 한다 할지라도 이는 개 교회가 신앙적 원칙에서 바로 서는 일을 돕기 위한 것이며 결코 개 교회를 노회의 주권 하에 놓기 위함이 아니다. 어느 목사를 세워 개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게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의 총의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권은 바로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③ 복음적 분업

    모범정관이 채택해야할 세 번째 원칙은 복음적 분업이다. 모든 교인은 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그의 부르심에 따라 각기 하나님의 나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의 지위는 동등하며 서로의 맡은 바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이후로 만인제사장설이라고 지칭된 이 원칙은 이론상으로는 동의하나 실제상으로는 무시되어온, 특히 한국 교회에서 의도적으로 왜곡되어온 바이다. 교회를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행위는 매우 이교적인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배치되는 바라는 점은 이미 다양하게 개진되었다.(퀑 1997, 160) 개혁교회 내에서 누구도 그리스도 대신으로 중복적 역할을 주장할 수 없으며 타인과 구별된 성스러움을 주장할 수 없다.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분에 적용되어야할 동등성의 원칙을 목사와 장로라는 직분의 동등성에만 적용하는 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한국의 주요 교회법학자들은 "기본교권"이라는 말을 개발하여(그 근원이 어디인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를 장로에게 부여하고 목사에게 "치리교권"을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김득룡 1984, 299; 박병진 1993, 79-81; 임택진 1994, 29-30) 이러한 오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첫째, 용어 자체에서 심한 혼선이 발생하고 있다. 장로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치리"라는 말은 장로에게 귀속되고 장로를 목사와 치리장로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 중에 목사는 강도권을 가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치리"는 치리장로의 고유권한이 되어야하겠지만 목사의 권한을 강조하려다 보니 치리권을 목사에게만 귀속시키고 치리장로에게는 색다르게 "기본교권"이라는 용어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로서 "평신도의 기본권을 대표하는 치리장로의 치리권"과 같은 용어상의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박병진 1993, 253)
    둘째, 집사나 권사나 교사와 같은 많은 여타 직분들을 목사와 장로라는 직분의 하위직으로 보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이 질문 자체에 대한 개혁주의적 답변은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임택진은 "목사, 장로, 집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상 동등하다"(임택진 1994, 27)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당회의 존재를 절대시하고 이 당회 내에서 차지하는 목사의 권한을 부각시키므로서 개혁교회들조차도 차근차근 동등성의 원칙을 훼손시켜왔다. 만일 목사가 치리권을, 장로가 기본권을 대변한다면 집사는 무슨 권한을 대변할 것인가?
    이 왜곡은 단지 한국 교회에서뿐만 아니다. 매개의 변증법이 적용되는 인간의 관계가 있는 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세계 개혁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이 원칙이 고의로 혹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되어왔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데이빗 왓슨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도 로마 카톨릭교회에서처럼 성직자가 나타났으며 영적 은사와 사역에 관한 교리는 대부분 무시되었다.(옥덴 2000, 66) 만인제사장의 원리는 일부 회중교회에서만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사는 성직자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이종성이 지적하는 바대로 "종교개혁자들이나 그들의 후예들도 성직자·평신도라는 2중 구조를 완전히 철폐하는 데 실패했다."(이종성 1989, 162)
    직분 사이의 분업을 강조하지 않으면 자칫 회중교회의 약점에 빠지기 쉽다. 적지 않은 회중교회들이 직분의 평등을 위해 장로의 직분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라 할찌라도 직분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39개 교회정관 중 회중교회를 표방하는 갈릴리교회와 인천생명침례교회의 정관에서 담임목사의 지위는 지나치게 강하다. 이를 견제할 장로의 직분을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개인의 신앙적 헌신에만 의존하는 체제는 매우 비효율적이 된다.
    분업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유익하다.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며, 천부의 자질과 능력과 선호에서 각자 차이가 크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사회 내의 직업과 위치에서 다양한 분화를 보이는 것 또한 당연하다. 더욱이, 아담 스미스의 지적처럼, 모두가 동일한 일에 몰두할 때 보다 서로 다른 분야를 맡아 협력할 때에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지곤 한다.
    일반 사회의 기계적 분업과 달리 교회가 추구하는 유기체적 분업은 더욱 놀라운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단순히 교회 내에서 각자의 기능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각 사역자들의 위치는 전문화의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김동호 1999) 그런데 기계적 분업 내의 전문화로 교회의 직분을 유추하는 것은 매우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이 전문화의 내용을 보면 필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좀 더 귀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전문적 식견을 가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복음적 분업의 외곽에 위치할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어느 직분이든지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합리적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태복음 20장)에서처럼 모든 영적 직분에 대한 상급은 동일하다. 이러한 종류의 분업은 유기체적 비유에 의해서 잘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손발이 일을 하고 입은 넣기만 한다고 해서 손발이 입에 불평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손발과 입은 모두 자신의 헌신을 통해 동시에 그들의 생존을 보장받게 되며 이를 총괄하는 정신적 역량에 의해 자신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회는 영성적 유기체이며 그 활동 양식은 복음적 분업이어야 한다.

    2) 개체교회의 독립성

    ① 정관의 독립된 형식

    교회의 주권이라는 신앙적 관점과 각종 법적 지위를 갖는 요건이라는 관점을 고려해 보면 각 교회는 그 자체로서 완성된 정관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본 연구를 위해 수집된 39개 교회의 정관을 보면 주요한 사항을 교단헌법에 위임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조직이나 의결이나 재정에 관한 사항은 건전한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가 운영되고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아예 그러한 사항을 다수 언급하지 않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의존한다면 이는 무분별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교회정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헌법에 주요 내용을 위임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예컨대, 수지중앙교회는 직원의 직무에서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항목에서 교회정관의 내용을 교단헌법에 준하고 있으며 열림교회나 예심교회 등도 교단헌법에의 위임이 심하다. 물론 교단헌법은 개체교회들의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개체교회의 정관에 대거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교단헌법에 준한다는 조항으로 정관을 구성하려면 교회정관을 제정하는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 교단헌법에 준할지라도 교회정관은 그 자체로서 완결된 규칙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
    교회정관의 형식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강현교회], [부천사랑교회], [언덕교회], [일산광성교회], [일암교회], [주님의 교회], [큰빛교회], [인천생명침례교회] 등의 정관은 내용과는 상관없이 규칙으로서의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어서 좋은 형식의 정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료 3>에서 보여주는 바처럼 좋은 형식의 정관이란 대체적으로 교회정관의 의의를 요약하는 전문이 있고, 총칙, 교회정치의 원리, 교인, 조직, 회의, 재정에 관한 장들이 설정되는 게 바람직하다. 부칙은 주요 장에서 다루지 아니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설정하는 데 필요하다. 물론, 일산은혜교회의 경우에서처럼 교회정관에서 다루지 아니한 사항을 교단헌법에 위임하는 항목도 필요하다.

    ② 광대회의체의 제자리 찾기

    개혁주의 교회에서 광대회의체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가 웨스트민스터헌법해설에서 요약한 바처럼, 교리의 보존을 위한 협력 기구로서, 권징의 조화를 위한 기구로서,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있는 기구로서 필요하다.(하지 1996, 139-141) 광대회의체의 존재와 교회의 주권은 서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비유컨대, 국제사회에서 주권 국가들이 협력하는 국제연합(UN)과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국제기구가 존재하는 것처럼 주권을 가진 개체교회들도 보편적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광대회의체들을 구성해야 한다.
    문제는 광대회의체들이 자신을 교단(敎團)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주권적 존재인 것처럼 행동할 뿐만 아니라 그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개체교회들의 복종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한국 교단의 부작용은 최근에 목격되는 몇 가지 사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어떤 감리교 목사가 파렴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그러자, 그 교단의 주요 기관장들이 연서로 그 목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이 목사의 구속이 종교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악간의 판단이 없이 동료의 의리만을 내세우는 것을 우리는 깡패의 의리라고 부르고 있다. 또 순교신앙의 전통을 자랑하는 고신 교단은 교단 내의 병원 운영이 부실화하여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자 교단 내의 교회들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야한다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보수 교단들의 연합체라고 불리우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그 자신이 파당적 정치행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국가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집회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단체가 산하 교단의 동의를 얻고 이러한 행동을 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한기총의 행동에 대해 소속교단들의 책임도 면할 길이 없다. 물론 교단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일반 사회의 선거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고 있는 돈봉투 뿌리기를 자행하는 모습들이 흔히 발견되고 있다.
    단지 그 운영의 부작용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분열상으로 인한 정당성 상실 때문에라도 한국의 교단들은 개체교회들로 하여금 복종을 명령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크리스챤라이프사가 발간한 1997년의 한국 교회 주소록을 보면 예수교장로회만도 약 65개가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많은 교단의 분열이 과연 신앙적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발생하였을까? 얼핏보아도 그렇지 않다. 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을 표방하는 교단만 해도 합동, 합동개혁, 합동경신, 합동보수, 합동복음, 합동선교, 합동성음, 합동연합, 합동예총, 합동은혜, 합동장신, 합동전통, 합동정통, 합동중앙, 합동진리, 합동총신, 합동호헌, 합동환원, 등 19개나 된다. 확실히 "한국 기독교의 파벌 자체가 교회의 갱신과 선교사명 완수라는 발전적인 명제로 인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기독교신문취재팀 1992, 236) 사정이 이러하다면 각 교단들이 개체교회에 대해 교단의 신앙적 권위를 요구할 근거가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현존하는 교단들의 존재에 정당성이 없고 광대회의체의 존재는 필요하다면 한국 교회는 앞으로 대대적인 개혁의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신앙적 원리에 대한 판단과 목회자의 자격요건 등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단 하나의 광대회의체-즉 한국장로교총회-하나만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지금처럼 부실한 교단들이 운영하는 부실한 신학교에서 앞다투어 목사를 배출하므로서 복음의 전파와 교회의 위신에 심각한 손상을 미치는 일이 속히 제어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일치 문제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만일 지금처럼 각 교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최소공배수를 찾는 방식으로 교회 일치가 진행된다면 이러한 개혁조치는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기존 교단들의 해체를 통한 일치야말로 한국 교회를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단일 광대회의체들을 조직할 때에는 개체교회의 행정이나 재정에 관한 치리는 개체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한국 교회 내에서 유무상통을 통한 보편적 교회의 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 직분의 평등성

    ① 직분의 재편과 업무분장

    개혁주의 교회의 직분들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교단헌법들은 이 직분의 설정에 있어서 복음적 분업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차적으로 직분상의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다. 예장통합의 헌법을 보면 제27조 목사의 칭호에서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전도목사, 기관목사, 선교목사, 원로목사, 공로목사, 무임목사, 은퇴목사 등 무려 10여 개의 목사 칭호가 나타나고 있다. 예장합동의 칭호는 하나가 더 늘어서 11개에 이르고 있다.
    이 헌법들이 이토록 많은 목사 칭호를 개발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위임목사로부터 여타 목사를 분리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모든 목사들이 동일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단지 그 기능상의 차이만이 존재한다면 목사의 칭호는 이렇게 많을 필요가 없다. 단지 목사라는 칭호로 족하며 기능상의 칭호는 수시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정관상의 칭호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교단들의 법적 구조는 이와 매우 다르다. 위임목사는 교회의 정식 청빙을 받아서 교회 운영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목사이며 여타 목사들의 지위는 이와 비교할 수 없다. 특히, 동일한 교회 내에서 위임목사 휘하에 속하는 부목사나 교육목사들의 지위는 비참할 정도로 열악하다. 이들의 직업적 안정성은 전적으로 위임목사의 호의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들의 봉사기준은 교인들이 아니라 위임목사 혹은 담임목사라는 부르는 존재이다. 예컨대, 어떤 부목사가 진심으로 교인들을 섬기려고 작정한다면 그의 이 결단은 그의 직업적 안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담임목사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직분에게만 딸려있는 목사의 의의라는 항목은 오랜 전통이긴 하나 매우 모순되고 불필요한 것이다. 예장통합의 헌법을 보면 제5장 24조에 목사의 의의가 나타나고 있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인 교인을 양육하는 목자이며, 그리스도의 종이며,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이며, 교인을 가르치는 교사이며, 복음의 전도인이며, 하나님의 도를 맡은 청지기라고 선언하고 있다. 매우 의아스러운 조항들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목사만이 그리스도의 종인가? 목사만이 교인을 가르치는 교사이면 유년주일학교 교사들도 목사인가?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라면 치리장로는 또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양육하는 목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성경이 우리를 양이라고 지칭할 때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목사는 그리스도와 동격인가? 물론 모든 의의에 대해 다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이를 목사만의 의의로 치환하면 많은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혼란들이 발생하는 주요 이유는 목사만을 성스러운 직분으로 부각시키려는 불필요하고 잘못된 노력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소위 3대 항존직이라 하여 목사, 장로, 집사의 3대 직분을 조직의 기초로 삼고 있다. 39개 교회 중에서 [강현교회],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 [서부교회], [수지중앙교회], [주님의 교회], [화란한인교회], 그리고 예장합동진주노회가 제시하는 정관모델이 그러한 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정관상의 직분이 그러하다고 해서 여타 직분들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장 많은 논란은 아마도 권사나 서리집사의 직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개혁주의 교회들이 정관을 세울 때 권사와 서리집사의 직분을 명시할 것인지에 대해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 직분의 명칭에는 한국적 권의주의의 냄새가 짙게 배여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이끌어 가는 교회이면서도 여성을 장로로 세우지 못하는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니 불가피하게 여성의 장로급 직분을 명시하는 권사라는 직분을 개발하고 있다. 성경적 직분의 부여에는 한계가 있으나 직분을 계급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다수 성년 교인들을 만족시키려고 하다보니 서리집사라는 제도를 개발해내었다. 이 모두가 원칙으로 말하자면 편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일종의 한국적 전통이며 때로 유익할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각 교회는 각자의 형편에 알맞은 대로 전통을 고수하거나 원칙을 따르거나 할 수 있다. 요컨대,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은 항구불변의 개념이 아니다.
    개혁주의적 원칙을 말하자면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칭호를 단일화하고 불필요한 계급구분을 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교회에 시무하는 모든 목사들은 단지 목사일 뿐이며 동등한 지위와 대접을 받아야 한다. 단지 기능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설교 담당, 교육 담당, 심방 담당, 구제 담당, 선교 담당 등 교회의 크기와 기능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 장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무장로, 휴무장로, 무임장로(협동장로), 은퇴장로, 원로장로 등의 구분은 무익하다. 모든 장로는 단지 시무의 임기에 있거나 혹은 임기가 종료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한다. 집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무집사, 무임집사, 휴무집사, 은퇴집사, 서리집사 등의 구분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 집사는 장로로 승진하기 위한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직분이다.

    ② 직분별 임기제의 도입

    각 직분이 복음적 원칙으로 돌아가려면 직분의 임기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교단헌법 경우에 있어서 거창하고 복잡한 분류를 진행한 이유가 바로 이 시무의 임기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명칭은 정관 사항이 아니다. 예컨대, 시무가 끝난 목사나 장로나 집사를 해당 명칭으로 부른다고 해서 반대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한 번 임직하면 교회의 권고사면 결의나 본인의 자신사면이 없는 한 정년 때까지 시무를 지속하게 하는 현행 교단헌법제도들은 대단히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현행 주요 교단헌법들이 규정하는 임기 체계는 대단히 모호하고 위험하다. 예장합동의 체계를 보면 위임목사의 경우 공동의회 참석자 2/3의 의결로 청빙을 받게 되어있다.(제21장 1조 5항) 문제는 권고사면의 경우인데, 원칙상으로 개체교회가 현재의 위임목사를 원하지 않으면 노회에 공동의회의 의결로 노회에 청원하고 노회는 이를 청취한 후에 처리한다고 되어있다.(제17장 2조)
    이 체계의 첫째 문제는 개체교회가 원한다고 해서 위임목사를 권고사면시키는 것이 아니며 목사를 사면시키는 권한은 노회에 있다는 것이다. 소위 "노회 주권"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며 교회주권의 원리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의 자격 여부만을 관장해야할 노회가 위임의 권한까지 장악하므로 아무리 개체교회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노회를 장악한 보스 목사에게 충성을 바치는 졸개 목사를 개체교회가 권고사면시킬 수가 없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둘째 문제는 목사에 대해 권고사면 결의를 할 공동의회의 소집과 의결정족수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물론, 제직회나 무흠 입교인 1/3 이상의 청원이 있으면 공동의회 소집을 요청할 수 있으나 이 때에도 역시 소집권은 당회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회의 의결은 의장인 당회장의 권한 하에 있다. 교단헌법들은 제척사유에 대한 명시가 없기 때문에 결국 당사자인 당회장이 원하지 않으면 교인의 절대다수가 원하더라도 합법적인 공동의회 개최가 어려워진다. 잘 알려진 미주의 [텍사스 에이앤앰 한인교회]나 [시흥교회]의 경우에서처럼 교인의 절대 다수 혹은 대다수가 모여 목사의 사면을 의결하였다할지라도 교단의 헌법에 따르면 이는 불법집회이며 도리어 노회가 시벌할 수 있는 빌미가 되고 있다. 결국 이런 저런 분규를 겪은 후에 목사가 더 견디지 못하고 사면에 동의하지 않는 한 목사를 권고사면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임기제의 장단점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정주채가 요약한 단점을 먼저 소개하자면 첫째, 임기가 끝난 경우 교회 내에서의 위치가 모호해진다, 둘째,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자칫하면 교회 내에 불필요한 분란이 조성될 수 있다, 셋째 임기 내에 계약을 파기하고자 할 때를 따로 상정해야 한다는 점이다.(손봉호 외 1998, 82) 정주채의 요약은 한국 교회의 정서상 확실히 의미가 있는 문제제기이다. 또는 목사의 임기제는 목사를 노회의 소속으로 하는 장로교회의 전통에서 있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장로교회의 전통은 민주적 대의제를 채택한다는 점에 있지 목사의 임기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기제의 단점에 대한 우려는 그 반대의 경우 즉 임기제의 장점을 생각해보면 대폭 해소가 된다. 임기제의 장점에 대한 정주채의 요약을 보면, 첫째, 교회갱신을 도모할 수 있다, 둘째, 리더쉽의 순환을 통해 급변하는 선교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셋째, 다양한 지도자들을 계발할 수 있다, 넷째, 목사장로의 영적인 성숙과 목회능력의 계발을 촉진한다는 것 등이다.(손봉호 외 1998, 81-82) 더욱 고려해야할 점은 임기가 없이 언제 배척을 받게 될지 모르는 상황과 주어진 임기가 있는 상황 중 어느 것이 교회 운영에 있어서 더욱 안정적이며 분규의 소지가 적으냐 하는 것이다. 또한 성도들이 어떤 목사에게 깊이 실망하였을 때에 임기가 있는 경우와 임기가 없는 경우 중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쉬우냐 하는 측면도 고려하는 것이 좋다.
    정주채의 지적처럼, 임기제의 장점 중 하나는 교회에 끊임없이 새로운 역동성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물론 이 경우에 목사만 임기제를 채택하는 것이 아니다. 장로와 집사도 임기제를 채택하여야 한다. 실제로 장로나 집사가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면 2-3년의 활동도 벅차기 마련이다. 누구나 처음 임직 받았을 때의 감격대로 봉사한다면 교회는 급속히 부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봉사가 10여 년을 지나 매너리즘에 빠지면 아무리 자극을 받아도 새로운 활력을 보여주기 힘들다. 따라서 모든 직분들은 일정한 임기를 가지는 게 좋다. 특히, 교회가 부흥되어 새로운 인물들이 영입되었을 때 종신직 임기들은 역량있는 신입교우들의 참여를 봉쇄하고 빈번히 불쾌감을 조성하기 마련이다. 신참자의 정열을 활용하지 못하는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이다.


    4) 의사결정의 민주성

    ① 각급회의체의 의사결정 정족수 확인

    모든 규칙의 자격 요건 중 하나는 의결정족수를 명료하게 하는 일이다. 만일 한국 교회가 그들의 규칙에 의결정족수 조차도 명시하지 못하면서 이를 "전적으로 교회 내부의 일로서 세속법에 의해" 다룰 일이 아니라고 하거나 "교회의 오랜 관행과 교회법으로 다루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모욕하는 일이다. 교회법은 사회법 보다 그 내용에 있어서 더욱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
    만일 교단헌법들이 위임목사에게 독재권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명기할 일이다. 예컨대, "당회의 의결은 당회원의 과반수로 한다. 단 반드시 당회장의 동의가 포함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혹은 "모든 회의에 있어서 담임목사는 찬반을 물을 권리가 있다" 혹은 "모든 회의에 있어서 담임목사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안건의 처리를 거부할 수 있다"고 명시해야 한다. 글자로 나타나는 헌법 조항에는 명시하지 못하고 교회의 관행 혹은 터무니없는 "치리권과 기본권의 동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목사의 독재권을 실현하려는 데서 온갖 혼란과 갈등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의결정족수의 내용에 있어서도 주의를 요한다. [주님의 교회]는 "위 모든 회의는 구성원 과반수의 참석으로 성립되며 의결정족수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다수결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회의에 대한 성원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아직 교회 인원이 적을 때는 가능하나 대형교회로 발전하면 대체로 회의의 성원을 채우기가 어려울 수 있다.
    만일 출석인원으로 회의의 성원을 만들 경우에 회의의 안건과 장소에 대한 선행 공고는 필수적이다. [주님의 교회] 경우에는 서리집사직이 없고 각 부서장으로 이루어진 사역자회의가 있기 때문에 재적인원의 과반수 참석으로 쉽게 회의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일산광성교회]에서처럼 단지 출석인원만으로 회의를 구성하고 회의의 안건과 장소에 대한 선행 공고의 강제규정이 없다면 이 또한 회의 소집권자의 독단이 회의의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높다. 이 경우에 공동의회는 일주일 전에 공고하게 되어있으나 재정을 다루는 열린제직회는 이러한 선행공고 규정이 없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의결정족수를 과도하게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직분자의 재신임 혹은 임기연장에 대한 의결을 2/3로 하거나 [강남향린교회]처럼 3/5로 하는 경우는 지나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명백히 부결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의결정족수는 직분자들로 하여금 재신임의 기대를 버리게 만들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부산에서 보내온 [주안에 교회]의 정관은 교회의 핵심 운영기관인 운영위원회의 모든 의사결정을 2/3로 하고 중대사안에 대해서는 만장일치를 선언하고 있다. 만일 교인 수가 극소수로서 의기투합하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의 의결정족수는 매우 비현실적이다.


    ② 의사결정구조의 일치성 확보

    현행 교단헌법의 문제점 중 하나는, 주로 장로교의 문제인데, 회의체의 권위가 일치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헌법들은 치리회라는 항목으로 당회와 노회, 총회의 순서를 명시하고 있으며 회의라는 명목으로 공동의회와 제직회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치리"라는 말은 매우 포괄적으로서 단순히 신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사와 조직과 재정 전체를 관장하는 권한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용상에 있어 개체교회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은 공동의회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회의에서 예산과 결산 및 직원의 선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길원이 지적하는 바처럼, 권한의 위임을 받은 자가 권한의 위임을 주는 자 보다 높을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뉴스앤조이 2002.5.7.)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것은 회의체 자체가 직분을 의미하는 전통적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치리(治理)"의 영역이 지나치게 넓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로교가 표방하는 3심제 형태의 진정한 치리(治理)는 신조의 일치성과 직분자의 자격을 다루는 재판국으로서의 역할로 국한되는 게 옳다. 만일 이들 치리회가 개체교회의 인사와 조직과 재정에까지 관여하면 반드시 현재와 같은 "교회의 주권과 노회의 주권이 충돌하는 모순"이 발생된다. 만일 현재와 같은 형태의 회의체가 역사적 산물로서 받아들일만 하다면 그렇다면 공동의회를 당회 위에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당회는 공동의회가 위임하는 사무를 맡아보는 행정기관으로서 현재와 같은 제반 사무를 관장할 수 있다. 또한 노회나 총회와 같은 광대회의체들은 각 교회의 공동의회가 파견하는 대표들-사실상으로는 당회의 구성원들이겠지만-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당회의 행정적 기능을 인정하고 이를 공동의회 산하에 둘 경우에 제직회와 당회의 기능상 중복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제직회를 둔 것은 성경적 원칙 하에서 구제를 담당할 집사들의 모임을 상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제직회에는 당회원들이 중복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회의체의 구성으로 보아 제직회가 당회를 포괄하는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업무 또한 중복적이어서 제직회에서 다룬 재정 사항이 보통 당회에서 재론되기 마련인데 당회원들은 이미 제직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두 회의체의 차이를 말한다면 당회가 제직회의 결의를 뒤집을 수 있다는 데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이 조성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모순을 없애는 방안의 하나로서 당회와 제직회의 기능을 통합하는 운영위원회 혹은 사역자회의를 두는 경향이 늘고 있다. [새길교회]나 [새벽이슬교회], [언덕교회], [예인교회], [주님의 교회], [주안에 교회], [화란한인교회] 등 현재까지는 비교적 교단의 압력에 자유로운 교회들이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만일 용어의 변경이 쉽지 않는 경우라면 "당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럴 경우에는 당회의 구성원을 목사와 장로 뿐만 아니라 각 부서장이나 기관장에게까지 확대해야 한다. 당회 혹은 운영위원회가 공동의회에서 위임한 행정기관으로 정립될 경우에 이 회의의 의장을 구태여 목사가 맡아야하는 지도 재검토해야 한다. 행정의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어떤 직분에 있든지 그만한 신앙과 능력이 발견되는 구성원이 의장으로 활동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소위 제직회는 실제적인 기능에서 무익하다. 왜냐하면, 구제는 구제부가 전담할 것이고 집사들은 집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회의체 자체가 직분을 의미하는 방식은 이미 매우 낡은 것이며 한국 교회 내에서 이미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킨 존재들이다.

    5) 재정의 투명성

    ① 재정 사항의 공개

    모범적인 교회정관에 명시되어야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재정 사항의 공개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는 재정의 투명성이 지켜지지 않는 데서 발생하고 있다. 적지 않은 교회에서는 제직회나 공동의회가 끝나고 나면 교회의 재정보고서가 유출되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외부에 공개하면 안될 정도의 교회 재정이 왜 교회에서 발생하는 걸까? 물론 이 정도는 비교적 건전한 편이다. 수많은 교회가 목사나 장로의 자의적 재정 사용으로 시험에 빠지고 있으며 그래도 역시 재정의 공개를 두려워하고 있다.
    [언덕교회]와 [주님의 교회]는 아예 정관 혹은 정관의 시행세칙에 모든 재정관련 사항을 홈페이지에 공개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아직 정관을 채택하고 있지는 않으나 [높은 뜻 숭의교회]도 이미 교회 재정을 상세하게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재정의 공개는 실로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많으면 많은대로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적으면 적은 대로 움추려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재정의 공개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첫째, 교회의 재정이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된다. 우리 교회 재정을 남들이 보게된다는 압력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자연히 남들이 보아도 창피하지 않을, 때로 남들에게 보여주어도 될 만큼의 건전한 재정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둘째, 주위로부터 신뢰를 얻게 된다. 신자들로부터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불신자들로부터도 신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가 그 불신자에게 복음의 문을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례들이 자주 발견된다. 셋째, 공개되어있는 교회들의 재정을 보며 보다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본 연구는 여러 교회의 정관들을 비교하므로서 보다 건전한 정관을 채택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다. 재정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방식으로 교회재정을 사용하느냐는 데 있어서 미처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교훈을 다른 교회의 사례로부터 얻을 수 있다.
    재정 공개의 결과로 기대되는 것 중 하나는 각 교회의 재정지출 비율이 보다 신앙적인 모델로 수렴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노치준의 연구에 따르면, 1992년을 기준으로 한국 교회 전체 예산 규모는 약 3조 5천억 정도라고 한다.(손봉호 외 1998, 152) 이 헌금 지출의 항목별 비율은 교역자 급여 32.3%, 예배비 5.3%, 교육비 7.9%, 선교비 4.8%, 상회비 2.2%, 관리비 16.2%, 운영비 10.4%, 건축비 10.3%, 사회봉사비 2.3% 였다고 한다. 막대한 헌금액에 비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와 구제에 너무도 적게 지출되고 있다는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재정의 공개는 이러한 태도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소위 칼빈의 건전한 교회재정 모델로 수렴할 수 있는 계기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칼빈의 모델은 교역자생활비 25%, 교회관리운영비 25%, 선교비 25%, 구제비 25%라고 한다.(손봉호 외 1998, 160) 실제로 [서울영동교회]나 [한영교회] 등은 교회운영과 선교와 구제의 몫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② 재정항목의 합리화

    한국 교회의 재정실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노치준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교회 재정 개혁의 첫 번째 과제는 "모호한 항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교묘한 거짓을 은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손봉호 외 1998, 157) 모범적인 교회정관이라면 이 점에 대해 명료하게 선언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재정 항목은 실로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많은 경우에 재정항목은 목회자의 소득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교육비라는 항목은 교회의 공교육을 위한 비용인 것 같지만 사실은 상당 부분이 목사 자녀의 교육비를 의미한다. 교통비나 경조사비는 교회의 공식 활동을 위한 비용이 아니라 목사의 교통비나 경조사비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 데 그러면서도 목회비는 또 따로 책정되기도 한다. 김치를 담그는 염장비라는 항목은 교회의 공동식사를 위한 김치 비용이지만 그 상당수가 목사 가족을 위한 김치 비용이 되기도 한다. 한국 교회의 재정은 무엇보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는 데에서부터 새로 시작하여야 한다.
    재정항목의 합리화란 절차의 합리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재정 항목의 수입 지출은 정해진 절차를 따라 관계자들의 정확한 날인을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항목은 최대한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어야 하고 이미 지적한 바처럼 공사(公私)가 구분이 되어야 한다. 제3자가 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금전출납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교회에 편만한 태도 중 하나는 담임목사와 재정부장의 합의가 있으면 재정 항목의 꼼꼼한 검토없이 지출이 이루어지는 태도이다. 간혹 이러한 내용의 오류들이 제직회 석상에서 지적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지적하는 직분자의 관심을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은혜스럽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심지어는 목사의 잠재적 반대자로 간주하는 경향조차 존재한다.
    심지어는 세속적 풍조를 따라 정해진 항목을 사용하여 비자금을 조성하는 행위까지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 발생한 대형 감리교회 목사의 구속 사건에 대한 검찰의 기소장 내용은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검찰 조서는 이 목사가 어떤 선교단체에 지원금을 보내는 것처럼 교회재정에서 무려 2억 3,700만원을 빼내어 자신의 교단장 선거 비용으로 사용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소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작든 크든 많은 교회에서 이러한 항목의 부적절한 집행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③ 재산관리의 절차 규정

    교회재산의 관리는 실정법과 연관된 부분이 많아 교회정관 제정 시에 매우 주의를 요하는 주제이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한국 대법원의 판례는 교회재산을 교인 총유(總有)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 처리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교인의 총회 혹은 공동의회에 귀속시키고 있다. 심지어 교회가 분열되어 어느 한 파벌을 교단적 차원에서 정리하였다 할지라도 한국의 법원은 분열 이전의 교인총회에게 해당 재산의 처분 권한을 귀속시키고 있다. 다행히도 법원은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개체교회의 정관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가를 묻고 있다.(수원지법 1994.5.4. 선고 93나3728 판결) 교회정관에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가가 교회재산의 관리 절차를 규정한다는 교회주권의 인정 선언인 셈이다.
    교인총회 혹은 공동의회의 주권을 중심으로 재산의 관리 절차가 정해지는 게 바람직하다. 교회 재산은 대개 목사나 장로의 개인명의, 교회 단체명의, 노회나 총회 혹은 기타 유지재단이라는 3가지 형태로 등록이 되고 있다. 물론 어느 경우일찌라도 교회의 재산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 개인이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없고 공동의회의 의결이 있어야만 그 처분이 가능하게 되어있다. 만일 교인 중 일부가 그들의 동의만으로 혹은 다수의 동의를 위장하여 교회재산을 처분하거나 재산상 손실을 끼치면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등죄에 해당하고 아무런 동의 절차없이 무단으로 재산을 매매하였을 경우에는 업무상배임죄를 묻게 되어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으로서 그 재산의 취득과 처분에 관한 모든 결의는 공동의회를 거쳐야 한다고 명시해야 한다. 이 점은 [주님의 교회] 정관 시행세칙이 잘 보여주고 있다. 혹시 필요에 따라 대표자 이름으로 재산을 등록한다할지라도 그 처분은 공동의회에 귀속된다는 점을 명기하는 게 좋다. 39개 교회정관 중에 어떤 교회는 재산관리인을 명기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서광교회]는 교인 중 10여인을 지정하여 재산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에게 재산관리를 맡기는 정관을 채택하고 있다. 교회정관이 이와 같이 특정인에게 재산을 귀속시키는 경우라 할지라도 교회의 재산으로 인정되는 한 교인총회의 결의가 없이는 처분할 수가 없다. 이처럼 두드러진 사례가 아닐지라도 재산관리를 비롯한 제반사항을 담임목사 혹은 당회장이 결정하도록 규정한 교회정관들이 다수 눈에 띈다. 이러한 조치들은 신속히 교인총유의 재산으로 정립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재산의 관리를 특정인 혹은 특정 그룹에 위탁하는 태도는 교회를 주님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 혹은 사람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또 분쟁이 생길 경우에 불필요한 갈등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 재산의 관리를 교인 총유의 것으로 한다고 해도 실제적으로 교회가 재산등록의 주체가 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 가장 적절한 방법이 교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는 길인데 이렇게 할 경우에 교회는 여러 가지 번거로운 법적 조치들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쉬운 길은 교인 중의 대표자 명의로 소유하게 하는 방법인데 이러한 경우에 관리의 불안정성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개인 명의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용을 교회가 공적으로 부담하는 공사(公私) 혼동의 상황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교회재산관리의 가장 안정적인 수단은 교회 자체의, 혹은 교단 차원의 재단에 관리를 위임하는 것이다. 39개 교회정관 중에서 [갈보리교회], [라빠스교회]와 [부천사랑의교회] 등은 자체의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사례이다. 교단의 유지재단에 관리를 위임하는 경우도 흔히 있으나 현재의 교회정관에 명시되어있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교단의 결속을 높이고 재산의 안정성을 기하기 위해 유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유지재단 구성은 교단별로 약간 다르다. 감리교는 중앙총회에 집중하는 중앙집중형을, 예장통합은 55개 노회 별로 조직하는 지방분산형을, 침례교는 행정과 재산을 분리하는 행정분리형을 취하고 있다. 총회헌법에서의 가입규정도 다양하여 하나님의 성회나 침례교는 자발적 참여를 추구하나,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단들은 강제적으로 가입을 권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교단의 유지재단에 가입하더라도 개체교회 교인총회의 의결이 없으면 교회재산을 처분할 수 없다.


    4. 결론

    본 연구는 현행 한국 교단헌법들이 심각한 난맥상에 빠져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규칙들이 가져야할 요건도 미비되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백 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개혁주의가 아니라 사제주의적 요소를 강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갱협의 1997년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다수가 제도보다는 사람이 문제라고 답하고 있다.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인간은 항상 궁극적으로 문제이며 단지 한국 교회의 교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 내에서 사리에 타당한 제도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인간의 유한함과 죄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도구로 삼기 위함이다.
    제도 개혁은 논외로 하고 인간의 인식만 탓하는 것은 마치 교통체계가 엉망인 교차로에서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운전자의 빈약한 인식만 탓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와 내 교회와 우리 노회는 괜찮은 편이다"는 자위, "한국 교회 중 문제가 있는 부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터무니없는 낙관론,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도 못하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무지와 게으름, 등이 총체적으로 주님의 몸된 한국 교회를 좀 먹고 있다. 본 연구가 깨우려고 하는 바가 바로 이것들이다.
    놀랍게도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교회 개혁을 말하면 교회의 전통을 말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이다.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므로 개혁 논의 자체에 대해 전통의 힘을 들어 방어할 일이 아니다. 도리어 개혁이라고 하는 바가 혹시나 개악이나 아닌지를 자세히 검토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지적한 대로 인간 사회는 역사적 산물이므로 무조건 바꾸거나 파괴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축적해 온 문화를 새로 축적하려면 그만큼의 오랜 시간과 비용이 또 필요하다. 이 때문에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하고 아끼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현재의 체제를 방어하려는 자는 전통이니 바꿀 수 없다고 억지를 쓰기보다는 개혁의 논지에 비추어 현재의 내용이 어떻게 옳은 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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