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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포럼] 예수 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정혁현)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4156, 2004.05.08 09:36:30
  • (* 각주가 없으므로 별도로 한글 파일을 첨부하지 않습니다.)


    예수 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

    정혁현


    지난 4월 초 사순절 마지막 주에 즈음하여 한국 개봉한 그리스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 영화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영화는 특히 수난설화 중 로마군인에 의한 고문과 십자가 행진 그리고 못 박힘과 죽음 등, 수난의 시각적 참혹함과 육체적 고통에 집중하여, 무엇보다 감각적 자극의 강도를 최고조로 높인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그리스도 영화이다. 보수 교회를 중심으로 단체관람이 줄을 이어 흥행은 연속 3주 1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평단의 반응은 대체로 강력한 비판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평단의 반응과 흥행 성적으로 드러나는 관객의 지지가 서로 돌아눕는 경우야 다반사이지만, <패션> 성공은 무엇보다 관객 일반보다는 교인들을 일시적으로 극장으로 불러들인 데 크게 기대고 있는 것이어서 이채롭기도 하다.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영화는 일단 '예수-그리스도-영화'라는 범주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규정하는 범주를 지칭하는 개념들이야말로, 이 영화에 대한 찬반의 반응을 규정하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예수'라는 개념은 그리스도 교회 이전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태도를, 그리고 '영화'라는 개념은 매우 폭넓은 문화정치적 의미를 갖는 문화 상품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와 관련된 문제의식일 것이다. 이는 또한 좀 더 추상적으로 신학, 특히 성서신학적 관심과 제도종교로서의 교회가 갖는 호교론적 관심 그리고 이 둘과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다양한 필요에 의해 갈등, 협상, 공조하는 영화산업의 관심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각각의 입장에서 <패션>에 접근하는 방법을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의 예수가 요즘 다시 관심이 고조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와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 또는 '그리스도론'에 관한 신학적 연구 지층이 어떤 방향을 갖고 있는지 등등에 관해 기술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의 관심은 '그리스도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과 흐름 속에서 이 영화를 봄으로써, <패션>이 다른 '그리스도 영화와 비교하여 갖게 되는 차이의 의미를 추적해 보는 것이다. 서구, 특히 미국사회의 강력한 세속화 동력 중의 하나로서, 현대사회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한 영화가 교회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유형의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상당히 실천적인 생산성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교회-보수집단, 영화-문화산업이라는 교조적인 규정에서 벗어나서 양자의 관계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것은 신학과 신앙이 가져야 할 교회 개혁의 임무와 상호관계적인 사회적 참여를 위한 이론과 실천에 창조적인 생산력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장르와 장르의 역사

    영화연구에서 장르연구는 일군의 영화들이 공유하는 동일성이 관객의 욕망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와 효과를 탐구한다. 또한 최근에는 초기영화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행의 영화 실천을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으로 상대화하고, 영화의 다른 발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영화사 초기의 영화들, 그러니까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영화는 오늘날의 영화와 내용은 물론이고 관객의 기대 수준에서도 상당히 다른 것이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초기영화에서도 오늘날의 상업영화를 예시하는 일정한 장르의 경향성을 띠는 두 개의 주요 흐름이 있었는데,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포르노그래피와 성서영화였다. 할리우드 장편영화의 아버지라 알려진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1919년이었던 데 비해, 상당한 영화적 짜임새를 갖춘 시드니 올콧의 그리스도 영화 <구유에서 십자가까지>는 60분짜리 장편으로 이미 1912년에 제작 개봉되었을 정도이다. 최초의 '성서대작' (biblical epic)이라 할 수 있는 세실 드밀의 <왕중왕> (국내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되었다)이 만들어진 1927년 이전에 최소한 30편에 달하는 그리스도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었다고 한다.
    바빙턴과 에반스는 '성서대작'이라는 장르를 '구약성서 영화', '로마-그리스도교 영화', 그리고 '그리스도 영화'라는 세 가지 하위 장르로 구분한다. 구약성서 영화는 <십계>(세실 B. 드밀,1923/1956), <삼손과 데릴라>(세실 B. 드밀,1949), <다윗과 밧세바>(헨리 킹, 1951), <탕자>(치처드 토르프, 1955), <에스더와 왕>(라울 월쉬, 1960), <룻기>(헨리 코스터, 1960), <소돔과 고모라>(로버트 앨드리치, 1962), 그리고 <성서>(존 휴스턴, 1966) 등등이다. 또한 '로마-그리스도교 영화'의 예로는 <벤허>(프레드 니블로, 1925/ 윌리엄 와일러, 1959), <십자가의 표시>(세실 B. 드밀, 1932), <폼페이 최후의 날>(메리언 C. 쿠퍼, 어네스트 쉐드색, 1935), <쿼바디스?>(멀빈 르로이, 1951), <성의>(헨리 코스터, 1953), <살로메>(윌리엄 디털리, 1953), <데미트리우스와 검투사들>(델머 데이브스, 1954), <성배>(빅터 새빌, 1954), <위대한 어부>(프랭크 보저지, 1959), 그리고 <바라바>(리처드 플라이셔, 1962)와 같은 영화들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많지만. 보다 잘 알려지고 유의미한 것만을 뽑아보아도 상당하다. <구유에서 십자가까지> (시드니 올콧, 1912), <왕중왕>(세실 B. 드밀, 1927), <골고다>(줄리앙 뒤비비에, 1935), <왕중왕>(니콜라스 레이, 1961), <마태복음>(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1964),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조지 스티븐스, 1965),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노만 주이슨, 1973), <가스펠>(데이빗 그린, 1973), <나사렛 예수> (프랑코 제피렐리, 1977), <몬티 파이든의 브라이언의 생애>(테리 존스, 1979),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마틴 스콜세지, 1988), <몬트리올 예수> (데니스 알칸드, 1989) 등등. 이 중 프랑스에서 만들어 진 <골고다>는 성주간의 사건들만 다룬다는 점에서 <패션>과의 관련성이 두드러진다.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진행된 미국의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영화는 도시에 집단 거주를 시작한 노동자와 빈민들의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따라서 영화는 '저급오락'으로 쓰레기 취급을 받기가 일쑤였으며, 포르노그래피적인 경향은 그 분명한 반증으로 제시되었다. 반면 '성서대작'은 이러한 비판의 화살을 무디게 하면서도 대중 동원력을 갖는 독특한 장르였다. '성서대작'은 흥행을 바탕으로 상당한 물량이 투입되는 대형영화로 제작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따라서 기술적 혁신을 실험하는 장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십계> (1923)는 최초로 2단계 테크니컬러 현상 기술을 선보였으며, <성의> (1953)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였다. 성서영화는 대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적인 찬사를 받았으나. 평단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예를 들어 비평가 세일러 존스톤은 '성서 대작'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흥행술, 에로티시즘, 비속성, 가장된 순진성 faux n vet , 그리고 가식적인 picture-postcard 경건" 등으로 나열한다.
    현대사회에서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문화가 공동의 기억을 구성하며, 이를 바탕으로 공동의 기억과 정서에 기반 하는 현대적인 '민족-국가'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바빙턴과 에반스가 '성서 대작'이라는 장르에 접근하는 방식은 바로 이러한 착안이다. 그들은 <성서 초대작 영화. 할리우드 영화 속의 신성한 이야기>(1993)에서 성서 대작 영화를 진지하게 취급하면서, 종교 뿐 아니라 민족성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젠더가 이 장르에 영향을 끼쳐온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가지고 검토하여 이 장르의 영화에 내려진 비평의 진부함을 폭로하고 있다. 텔포드는 그들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성서 대작 영화의 중요성에 대한 최근의 재평가는 이 장르의 영화가 종교가 공격당하는 세계(특히 1950년 대) 속에서 유대-그리스도교 도덕적 코드의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 행한 투쟁과 자유와 종교적 진리에 대한 미국적 관념의 보강을 강조하였다. 성서 대작 영화는 "미국의 신화에 중심적인 의미들의 무의식적인 알레고리"를, 특별히 "억압적인 지배 계급과 영국과의, 그리고 억압받았으나 궁극적으로 승리한 이스라엘 민족 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미국인과의 연관성"을 제공함으로써 "미국 혁명 시나리오를 가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장르는 미국의 탄생을 약속된 땅으로 제시하는" 서부극을 그 짝패로 하고 있으며, 이 두 장르는 공히 미국 영화의 전 분야를 지배한다." 더욱이 성서 대작은 신앙과 의심, 신념과 회의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20세기 미국의 종교와 세속주의의 대결을 극화하기도 한다."

    물론 <패션>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성서대작영화가 드라마나 정신성보다는 스펙터클을 통해 저급한 감각에 호소하며, 성서 텍스트에 대한 근본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접근으로 종교적 보수주의를 강화한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영화의 산업적 성격과 검열의 문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텔포드는 성서대작영화 장르의 역사를 1920년대를 에덴동산 시기, 3,40년대를 광야시기 그리고 5,60년대를 약속의 땅의 시기라고 재미있게 분류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분열과 몰락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로마-그리스도교 영화' 장르의 경우에는 70년대 이후 주목할만한 영화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장르의 흥망성쇠는 언제나 시대적인 영화산업의 생존전략, 그리고 관객성과 맞물린다. 1920년대가 성서대작이라는 장르가 형성된 시기가 된 것은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의 발전과정과 조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산업적인 것으로 인식된 영화는 대량의 친숙한 이야기를 필요로 했으며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승은 그 젖줄로 기능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영화사 초기부터 창공에서 빛나는 스타였다. 3,40년대가 광야시기가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 영화 생산이 거의 중단되고 할리우드가 세계적인 패권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는 미국대중의 신앙적 정서와 다른 유럽의 대중들을 위해 보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실험하고 개발하였으며, 바로 이 시기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장르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5,60년대는 냉전체제 하에서 문화적 보수주의와 영화에 대한 검열이 강화되었다. 할리우드는 상대적으로 검열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할 수 있는 성서대작으로 돌아와야 했으며, 의도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대 성서대작 영화는 다른 장르의 영화는 감히 시도하지도 못할 풍부한 섹스와 폭력을 자유롭게 시각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0년대 베트남전쟁 이후의 미국에서 '성서대작'과 함께 국민적 신화로 자리 잡은 '아메리칸 드림'은 회의의 대상이 된다. 60년대 말부터 프랑스의 누벨바그, 독일의 뉴저먼시네마의 영향을 받은 뉴아메리칸 시네마 운동이 할리우드에 새로운 충격을 주기 시작하였고, 특히 베트남전 이후에는 이들의 영향이 주류영화에 깊숙이 침투했던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성대대작은 B급영화로 전락하였으며, 성서와 예수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색다르고 비판적인 접근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브라이언의 생애> (1979)는 그리스도영화 장르에 대한 패러디 혹은 반장르영화로 출현하였으며,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몬트리올 예수>는 전통적인 장르를 비판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션>의 출현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리스도 영화

    <패션> 이전의 그리스도 영화는 대체로 세 가지 형식을 갖는다. 대개의 그리스도 영화는 고전적이라 할 수 있는데,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일정한 선형성을 갖고 재구성한 전기영화이다. 또한 전기 영화이기는 하지만 뮤지컬의 형식을 갖는 영화들이 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3)과 <가스펠>(1973)이 그것들이다. 그리스도 영화 쇠퇴기인 1073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예수 영화가 모두 뮤지컬 형식을 가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 하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영화적인 반응의 결과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그리스도 형식에 대한 대중영화의 검토는 일단 예수 이야기의 고리타분한 전형성을 넘어서 대중과 호흡하는 형식적 모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몬트리올 예수>는 알레고리이다. 프랑스계 캐나다 영화인 <몬트리올 예수>는 수난극에 참여하게 되어 예수에 관한 체험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극화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리스도 영화와 일반 영화의 모호한 경계지점에 있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의 내러티브가 그 형식적 구조 상 복음서 설화와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서부영화 <쉐인>에서 비롯해서 공상과학영화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삶의 여정을 복음서의 예수의 그것과 비교하려는 시도는 진부하다 할 전도이다. <골고다>가 수난주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패션>과 비교될 수 있겠지만, 전자는 수난 설화 전체를 전통적인 할리우드 내러티브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대별된다. 아무튼 그리스도영화에서 감독과 제작자의 일차적인 임무는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와 영화가 상여되는 당대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무의식적인 두려움과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신학과 다른 영화의 예수 접근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영화가 제기해왔던 전통적인 이슈는 유대인과 여성 그리고 그리스도 묘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영화가 "평면적인 영웅과 극적으로 단순화된 플롯"으로 지극히 이분법적인 세계를 재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영화에서 유대인들은 미국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감정을 극적으로 재현하고 이것이 다시 현실의 인종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그리스도 영화의 세계에서 거의 모든 여성은 동정녀 아니면 창녀였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 출신으로 상상하는 것은 복음서보다는 할리우드 영화가 여성을 보는 시각적 욕망에 근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묘사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배우 선정의 문제, 예수의 지도자 상에 관한 해석, 그리고 신성과 인성의 조화이다. "빅토리아 시대적인 경건의 산물, 즉 예수를 금발에 수염, 긴 머리카락, 푸른 눈 그리고 흰색 의복을 입은 형상, 천상의 존재 같으면서도 약간은 온화한, 명령하면서도 다소 순종적인 모습으로 재현하는 방식이 족히 반세기가 넘게 영화를 지배하였다." 그리스도 묘사 문제는 언제나 다양한 형태의 검열과 함께 사고해야 한다. 미국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영화에 대한 검열을 가장 먼저 조직한 사회 집단이다. 이러 이것이 할리우드 그리스도 영화가 교권에 의해 전유된 예수를 재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그리스도 영화는 예수를 묘사함에 있어 대체로 그의 신성을 강조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세실 드밀이 <왕중왕>을 만들 때의 일화는 전설적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수의 복장을 한 H.B. 워너에게는 감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을 걸 수 없었다. 그가 세트와 그의 의상실 사이를 걸어갈 때는 베일로 가려지거나 완전히 가려진 차를 탔으며, 로케이션에서 그의 텐트에 있을 때는 그는 홀로 식사하였다. (Hayne 1960:256)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내용상 전통적인 기독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예수의 지도자 상에 해로운 해석을 가함으로써 교권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전반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의 예수영화가 '베트남전쟁 이후의 예수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자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영화로서의 <패션>

    <패션>을 새로운 형식의 그리스도 영화라고 한다면, 무엇으로 지칭하는 것이 적절할까? 영화 홍보사는 '사실주의적'인 그리스도 영화라고 하지만, 대중이 현실이라고 믿는 내용을 영화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모두 '사실적'이다. 예수의 체포에서 처형에 이르는 과정, 그중에서도 영화의 런닝타임 대부분을 로마군인들에 의한 고문과 십자가 행진 그리고 못 박힘 등 육체적 고통에 집중하여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패션>을 '하이퍼리얼'한 그리스도 영화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에서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슈퍼리얼리즘은 대체로 생활상의 대상을 찍은 정밀한 사진을 바탕으로 이를 회화적으로 재현한다. 대상을 바라보는 주관성을 삭제하고 철저하게 대상에 집중하는 하이퍼리얼리즘의 회화 이미지는 주체성이 제거된 대상의 정밀한 사진적 묘사가 대상을 오히려 낯설게 함으로써 미학적 성공을 거둔다. "하이퍼리얼리즘의 작가들은 진보적인 이상의 종말, 이를테면 월남전의 악몽으로 인해 모든 미국적인 이상에 대한 환멸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념적인 것, 의미에서는 모든 보수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동으로서 하이퍼는 탄생되는 것이다."
    물론 <패션>의 미학적 전략의 목표가 회화의 하이퍼리얼리즘과 통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패션>은 생산방식에 있어서 하이퍼리얼리즘을 닮았다.

    사진을 택하여 그리는 극사실주의는 자연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그리기 때문에 3차원의 자연물을 2차원에 옮길 때 일어나는 이미지와 리얼리티의 부조화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즉 그들은 평면이미지를 평면이미지로 확대하는 것이지 3차원은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현이라는 문제에서 비켜 날수가 있었다. 또한 사진을 이용하는 작가들은 전체를 구성하면서 종합적으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적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완성시켜나가면서 전체로 확대해나가기 때문에 자신의 감성을 빼 거의 기계가 하듯 객관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http://my.dreamwiz.com/moogi007/art30-%B1%D8%BB%E7%BD%C7%C1%D6%C0%C7.htm)

    영화가 홍보하는 '사실주의적'이라는 주장, 즉 멜 깁슨이 아람어와 라틴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를 자막도 넣지 않고 상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하이퍼리얼리즘적인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즉 회화의 그것은 사진의 2차원에서 회화의 2차원으로 옮기려 했다면, 멜 깁슨의 그리스도 영화는 대중의 복음서에 대한 환상을 다시 영화의 환상으로 치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회화의 하이퍼리얼리즘과 정반대의 것이 된다. 즉 회화의 하이퍼리얼리즘이 대상 그 자체에 집중하고 철저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를 지우는 방식을 통해 나르시시즘의 극한에 이르렀던 미술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 반면, 멜 깁슨의 하이퍼리얼리즘의 목적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가 재현하는 고문 장면 자체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하이퍼리얼리즘은 극단적으로 자기애에 이른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이러한 병적인 자기애를 정신분석학적으로 규명하는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짧은 논문 <매맞는 아이>(1919)는 이 영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시사를 한다. 그는 유아기의 근친상간적 욕망이 '매맞는 아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면서, 점차 변형되어 가학/피학의 쾌락에 집착하는 정신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을 통해 극도로 가학/피학적인 장면으로 재현된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는 미국의 관객들, 특별히 지극히 공격적인 정치적 보수주의와 역시 전투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구성된 그들의 시각적 쾌락을 시사 받는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9.11테러에서 이라크 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시는 이를 '선과 악'의 대결로 개념화함으로써, 미국의 공격주의를 절대선으로 극단화하였다. 영화는 이 근본주의의 절대선이 악마에 홀린 세력에 의해 살가죽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참혹하게 고문당하는 그들의 환상을 시각화한다. 물론 영화가 재현하는 폭력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소박한 태도이다. 지젝은 <파이트 클럽>에 대해 촌평하면서, 이를 "자아-폭력, 주체의 존재의 질료에 대한 폭력"으로 평가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이미 관객과 영화 주인공 예수 사이의 거울 관계가 확립된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정도의' 폭력을 상연한다. 그러므로 영화 속의 예수는 이미 인간이 아니며, 그의 육체 또한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신적인 육체를 지니고, 초월적인 맷집을 과시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멜 깁슨이 고증을 통해 인물들에게 아람어를 사용하게 하고 영어 자막조차 넣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은 결코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는 성서를 재현하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재현하고자 한 것은 폭력적 국가주의의 동력, 철저한 강탈과 살육의 신화,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 전유한 성서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바로 미국의 관객 대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이 신화를 동원하고, 나아가 그것을 변치 않는 진리로 확증하려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도를 죄의식 뒤에 감추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영화 장르에 속하는 영화인 <패션>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 속으로 끌려들어간 부시 시대를 살아가는 미국 대중들의 '두려움과 욕망'을 무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국과는 매우 다른 맥락에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 관객들은 <패션>에서 어떤 영화적 쾌락을 얻는 것일까? 일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라는 상황에서 탈맥락화한 신앙에 경도되어 미국의 대중들과 정서적으로 유사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즉 제도화된 종교는 체제 유지를 목적으로 신앙의 동력을 개인적인 내면 심리의 끝없는 환원성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욕망과 죄의식의 순환 속에서 종교적 역동성은 내적 운동의 완결성에 빠진다. <패션>은 한국에서 신의 육체적 고통을 생생하게 시각화함으로써 죄의식의 자극에서 시작되는 내세적 종교의 김빠진 신앙에 일시적인 자극제를 주사한 것으로 보인다.


    글을 마치며

    성서영화와 같이 신학의 관심사들을 다루는 영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흥행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영화로 재현된 성서의 이야기가 대중의 욕구를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는 이 사실이 역으로 신학의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다. 신학은 성실하게 '성서영화'의 신학적 측면에 대해 반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단순히 신학적 텍스트인 것만을 이해하는 사실 또한 필요하다. 영화는 산업적이며 미학적인 자기 논리 속에서 영화를 생산, 유통, 소비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학은 이 과정에도 개입할 수 있다. 즉 미학적 신학과 신학적 미학의 전개를 통해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 상상력의 출구를 개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화적 재현의 윤리를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패션>의 경우 영화비평계는 신학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대중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를 균열시키고 신학을 삶의 문제에 대한 보다 진지한 담론으로서 여기는 가능성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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