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로그인

181
yesterday 161
visitor 884,783
  • [0409] (민중)신학 방법론 - 정강길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5191, 2004.09.21 13:41:58
  • (민중)신학 방법론
    - 보편과 특수 : 귀추법의 적용 -
    정강길

    "모든 경험적 지식에는 피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있으며, 어떤 형이상학도 현실 세계의 <실재>reality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입증되지 못하면-그것이 경험적 표지를 지녀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
    - Immanuel Wallerstein

    "철학(형이상학)은 지금까지 신학에 철학 자체의 오류로 인하여 기독교에 해를 끼쳐왔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이 곧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철학을 신학에 적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올바른 철학으로서 어떤 철학을 신학에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 John B. Cobb, JR & David Ray Griffin

    "어떤 사람들은 인간 역사의 지평을 전부라 생각하고, 자연사의 지평이나 형이상학은 불필요하거나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지금 나타나는 자연사의 지평에 눈을 감을 수도 없고 또 형이상학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 서남동

    "예컨대, 새로운 민중신학은 '전태일 사건'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라는 하나의 류(類)적 상황에서 시공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발견하고, 그 보편성을 다른 모든 류(類)적 상황에 적합하도록 적용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새로운 민중신학은 한국적이라는 상황뿐만 아닌 제1세계, 제3세계, 어디에도 <적용가능>하고 <충분>할 수 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p.145.


    1. 들어가며
    신학은 자명한 진리에 대해 논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여전히 오류와 모순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학적 담론에 불과한 것인가? 신학은 신 존재를 필연적으로 전제해야만 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신을 언표로 하면서 늘 변하는 시대사적 흐름과 사건들을 쫓아가서 비평하는 기독교적 담론일 뿐인가? 신학은 시대를 넘어선 보편을 구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그때그때마다의 상황담론일 뿐인가? 어쩌면 이러한 물음들은 -어떤 면에서 참으로 지겹기까지- 진부하리만큼 반복되어온 논쟁의 테마들이기도 하다. 인류 지성의 궤적들은 보편이냐 특수냐 혹은 정신이냐 물질이냐 혹은 연역이냐 귀납이냐 추상이냐 구체냐 등등 그러한 이분화된 대립적 구도의 논쟁들을 곧잘 보여주곤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기독교 신학이 제아무리 보편 담론을 구하는 자리라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하나의 보편 담론의 신학을 구한다는 것은 매우 허망한 것이고 전적으로 회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근대 이후의 후기근대는 그럼으로써 보편성을 아예 포기한 점이 없잖아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실제로도 현재의 주류 기독교 신학은 다양성을 꿰뚫지 못한 채 점점 고립되고 게토화 되어가는 터라 이에 대한 답변을 주지도 못할뿐더러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냉소와 반감만 불러오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실패하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의 각 분과학문들은 제각기 파편화된 길로만 가고 있다는 점에서 비단 이것은 신학만의 위기는 아니며 나로서는 인문학 전체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본다.
    반대로 신학이 보편성을 포기하고 그때그때마다의 특수성에 자족하는 것이라면 신학은 그저 권력담론에 불과한 것이며, 이는 그 자신의 모든 지적 분석의 동기조차 회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사실 이러한 경우의 신학적 주장 역시 지극히 파시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정체성에 기반한 지적 과업은 타자에게 그것이 옳기 때문에 먹혀들어가는 차원이 아니라 권력이 있기 때문에 먹혀들어가는 차원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혹은 보편은 못되더라도 부분적으로는 약간의 일반화를 허용할 경우에도 문제는 역시 남아 있다. 그것은 즉, 도대체 어디까지의 일반화만 인정해야할 것인가 하는 범주 설정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기존 기독교의 주류 신학적 전통에 반발한 온갖 다양한 상황신학들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럴 경우 특히 제3세계 신학들 한국의 민중신학도 포함하여 은 확고한 토대로서의 보편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신학인가? 신학이란 것도 그저 국지적 지엽성에서 자족함으로써 정당화될 뿐인가? 나는 탈근대 담론 역시 스스로에 대해선 합리화하는 측면을 지닌다고 보기에 자족적 합리화의 사태를 피해가진 못하고 있다고 본다.
    본 논문은 이러한 당면한 위기 요인들을 참조하면서 도대체 우리네 신학의 학문적 방법론이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내가 볼 때 이것은 신학 자체의 학문적 방법론 고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특히 자연과학과 철학의 문제 역시 학문의 방법론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불가피하게 이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이때 필자는 과학담론의 논증법 연구에서 연역주의와 귀납주의 외의 또 다른 해결책으로 새롭게 떠오른 <귀추법>retroduction을 소개하고 이를 신학방법론에 적용하고자 한다. 적어도 신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방법론을 적용한 사례를 나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귀추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흔히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the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라고도 얘기된다. 화이트헤드 역시 귀추법과 같은 방법론을 썼다고도 평가되지만 귀추법의 발견과 정식화가 화이트헤드에 의해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현대 기호학의 원류로 알려진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ierce)와 영국의 과학철학자인 노우드 러셀 핸슨(Norwood Russell Hanson)이 과학사를 연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물론 그 기원은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는 귀납법과 귀추법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만 보았을 뿐, 이후에 귀추법은 학자들의 뇌리에서 망각의 세월로 사라졌다. 그런데 이 귀추법이 20세기에 이르러 다시 재발견됐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귀추법이 보편과 특수의 논쟁에 있어 일종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귀추법이 저 두 긴장의 이해관계를 적절하게 녹여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에 대한 하나의 응용사례로서 한국 민중신학의 학문적 방법론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고 어떠한 맥락에서 볼 수 있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나 자신이 애초에 왜 하필 <(민중)신학의 방법론>이라는 본 논문의 제목 중에 왜 괄호를 처넣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진리를 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연역과 귀납
    자이퍼트(H. Seiffert)에 의하면 학문의 방법론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보통 분석적 방법과 비분석적 방법이 그것이다. 분석적 방법은 자연과학에 토대를 둔 것으로 검증 가능한 개념들을 중요시한다. 여기에는 연역주의와 귀납주의가 있다. 반면에 비분석적 방법에는 자연과학에서 들여다보지 않았던 역사, 해석, 상상 등을 중요시하는 방법이다. 이때 분석적 방법은 객관성과 확실성을 지식의 근거로 삼고서 수학과 같은 추상적 언어로 정확히 표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에, 비분석적 방법은 구체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것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과학에서는 주로 분석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때 <분석적>이란 말은 '주어진 구성요소들을 분해하여 일련의 상호관련성을 고찰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분석적 방법은 대상을 분해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놓고서 파악하고 해석하는 방법인데, 대체로 자연과학에서는 용인되지 않으나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예술문예 진영에서는 곧잘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이 <학>學을 표방하는 한에서는 결국 일반화로서의 객관성 확보를 지향할 수밖에 없기에 분석적 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는 점이 많은 실정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방법이 신학의 학문적 방법론에서 적절하게 쓰일 수 있음을 모색하고자 할 것이다.
    과학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그 뿌리에는 사실상 확고한 <수학주의>가 깔려있다. 질송(E. Gilson)이 지적한 대로 근대세계의 포문을 열었던 데카르트가 설파한 연역주의의 뿌리에도 확고한 토대로서의 수학주의가 깔려 있다. 수학은 고대 그리스 시절 플라톤까지 전성기를 누리다가 다시 한 풀 꺾이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에서 다시 비약적 발전을 가지게 된다. 특히 17세기의 유명한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이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등등 그러하며 수학은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철학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영향을 행사하였다(SMW 66). 오늘날 역시 아이슈타인 상대성 이론, 보어 및 하이젠베르크 양자물리학 이론 등은 결국 수학으로서 표상되고 있다. 갈릴레이가 우주를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라고 하였을 때 여기에는 확고한 질서체계로서의 우주를 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학은 일반화에서 무시간성을 특징으로 하는 고도의 추상에 해당한다. 과학에서의 정당성 확보는 연역주의와 귀납주의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이 두 방법론에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요소는 <형식논리>와 <관찰된 경험>이다.
    이때 형식논리에 기반했던 근대 세계관의 연역주의는 수학의 확실성 특히 기하학적 조건에 기반한 것으로 이때의 기하학은 곧 <뉴클리드 기하학>을 의미한다. 근대 세계의 확고한 토대와 심지에 깔려 있는 그 신념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뉴클리드적 좌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단순정위>simple location의 좌표로 보고 있다. 즉, 서구의 근대 세계관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점과 직선에 대한 정의와 이에 따른 균등한 시간과 공간 배분의 좌표는 <무시간적 동일성>의 좌표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네 사고들을 매우 오염시킨 측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수학의 확실성이 물리적 우주 공간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하학적 지식의 확실한 근거라고 보통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철학적 사색을 크게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상당한 손상을 입히고 있는 잘못된 생각이다"(SMW 44).

    무시간적인 수학적 특성이 시간적인 구체적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합리화하기에는 그 깊은 전제에 대한 고찰이 제대로 이뤄지진 못했던 것이다. 예컨대 기하학은 물질적 사물의 어떤 형상을 연구할 목적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점과 선에 대한 최초의 정의 단계에서의 뉴클리드 기하학을 살펴볼 경우 곧바로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닌 특정의 궁극적인 물질적 사물을 요청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PR 528). 즉, 형상이 아무런 근거없이 물질적 사물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기하학은 현실적인 존재들 화이트헤드식으로 표현하면 <결합체>nexus 의 형태에 관한 연구이다. 확실한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추론되는 연역주의는 기하학적 조건에 근거해서만 합리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기하학적 조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을 경우 매우 불안정하기 쉽상인 것이다.

    3. 인간의 경험관찰과 사실의 여부
    형식논리를 중요시하는 연역주의와 달리 귀납주의는 <관찰된 경험>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경험한다'라고 생각하는 것, 즉 관찰의 행위가 실로 매우 불완전하다는 점에 귀납주의의 곤혹스러움이 놓여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관찰하고 이를 기술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해석>이 끼어들 수밖에 없음을 인지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에서조차 일반화된 인간 경험에 대한 필연적 현상이기도 하다. <실재>reality는 언제나 관찰자의 의식과 별개로 작동되지 않으며 같이 맞물려 있다. 화이트헤드는 관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찰한다는 것은 사실의 어떤 측면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주 넓은 의미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추상화의 도식을 초월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SMW 38).

    그렇기에 사물 혹은 사건에 대한 인간의 관찰 경험은 이미 그 어떤 조직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재에 대해 기술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실재에 대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은 실재에 대한 온전한 기술이라고 보기 힘들며, 사실상 인간의 언어 자체가 해석의 산물이라는 점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온전한 기술은 직접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에서는 이를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고도 얘기한다. 이때 그 해석은 어디까지나 <전이해>의 토대에서 현재적 새로움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전이해의 궁극적 지평의 그림을 그려보는 자리가 곧 <형이상학>이라는 차원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이란 모든 세부적 사실과 관련을 맺고 있는 우주론cosmology과 존재론ontology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제일성의 철학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종의 <해석학적 존재론>인 것이다. 결국 사실을 제시하는 인간의 모든 언명들은 그 완전한 분석에 있어서 사실을 필요로 하는 우주의 일반적인 성격으로서의 실재의 모습을 온전히 복원시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하겠다. 무(無)속에 떠도는 자기 충족적 사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PR 11).
    성서 자체도 이미 해석의 산물이다. 해석학의 문제는 전체 우주의 모습을 온전히 바로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세계 안의 많은 사건들을 정합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그 기초적 시각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과 관련된다. 굳이 거창하게 얘기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내 앞의 있는 컵 하나를 놓고도 이를 기술하고자 할 때, 그것은 분명 주변 환경과 분리된 컵 자체에 대한 기술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주 전체의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내 앞에 놓여있는 조그만 이 컵 하나조차 결코 온전히 해명되어질 수 없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컵은 단순히 그냥 <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체 우주 안에서의 컵>이기 때문이다.

    4. 비행기의 비유
    나는 여기서 지금까지의 분석적 방법과 비분석적 방법 그리고 연역주의나 귀납주의와는 다르게 저 두 가지 긴장의 요건을 적절히 포섭하고 있는 또 다른 학문적 방법론으로서 신학의 방법론을 얘기해보고 싶다. 오늘날에 이미 이것은 <귀추법>retroduction 혹은 <가추법>abduction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가설 유도의 추리'라고도 번역된다. 그런데 이는 오래전 화이트헤드가 설파했던 저 유명한 비행기의 비유의 그것과 같은 패턴의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화이트헤드 자신의 철학을 포함하여 일종의 학문적 방법론을 의도하고 있으며, 우리네 학문들이 어떻게 방법론적으로 세워져야 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점으로 보인다. 본인은 바로 그 방법론을 살펴보고서 이를 신학의 방법론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이미 이 점은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는 언급된 바 있기도 하다. 일단 이것은 화이트헤디안들 사이에서도 매우 유명한 저 비행기의 비유에 압축적으로 요약되어 있기에 이를 옮겨보겠다.

    "베이컨이 등한시했던 점은 정합성과 논리라는 요건에 의해 통제되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작용이었다. 진정한 발견의 방법은 마치 비행기의 비행과 흡사하다. 그것은 개별적인 관찰이라는 대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상상력에 의한 일반화라는 희박한 대기권을 비행한다. 그리고 나서 합리적 해석으로 예민해지고 새로워진 관찰을 위해서 착륙한다. 이 상상력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 성공하는 근거는, 차이의 방법이 실패했을 때 거기에 변함없이 현존하고 있는 요인들이 상상적 사고의 영향 아래에서 관찰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사고는 직접적 관찰에서 드러나지 않는 차이를 보완한다. 그것은 심지어 모순까지도 적절히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경험에 나타난 일관된 요소, 영속적인 요소들을, 상상 속에서는 그것들과 모순되는 것과 비교함으로써 그것들을 조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PR 5)

    이것은 크게 세 가지 단계를 가진다. 먼저 현실 세계의 관찰과 경험의 토대에서 출발하지만(1단계), 그 같은 1단계를 자료로 하여 논리에 통제된 엄밀한 <상상적 일반화>를 마련한 후(2단계), 2단계에서 마련된 일반화를 가지고(with) 다른 여러 경험적 사례에도 충분하게 적용가능 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3단계). 이때 1단계와 3단계는 특수의 자리에 속하고 2단계는 보편가능의 자리에 속한다. 이것은 2단계가 1단계의 전이해를 고찰해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에 하나 3단계에서 2단계에서 마련된 보편적 원리가 실제로 경험적 지평에 맞지 않는 사례가 발생할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즉, 그럴 경우는 1단계와 3단계를 고려해서 재검토한 후 새로운 <상상적 일반화>imaginative generalization의 작업이라는 2 ' 단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재검토되어 수정되거나 아예 새롭게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그만큼 철저히 경험론에 입각한 합리주의자였다. 그는 임의의 보편법칙의 수립을 위해서는 어떠한 경험도 빠뜨려서는 곤란하다고 보았다.

    "어떠한 경험도 빠뜨릴 수 없다. 취중의 경험과 맑은 정신의 경험, 잠자는 경험과 깨어있는 경험, 꾸벅꾸벅 조는 경험과 완전히 잠이 깬 경험, 자기 의식의 경험과 자기 망각의 경험, 종교적 경험과 회의적 경험, 정상적 경험과 비정상적인 경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AI 353)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일반적 범주를 추출해내는 일, 이것을 '현실태로부터의 추상'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추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가미된 일반화가 요구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귀납적 일반화와 대비하여 <상상적 일반화> 혹은 <기술적 일반화>descriptive generaliz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PR 10). 그리고 이것은 경험적 지평에서 창발되는 자극들에 문을 열어놓고 있기에 끊임없이 생산성을 가질 수 있는 <학>의 방법론이면서도 동시에 중심이 있는 보편 이론을 추구하는 입장에 속한다. 즉, 그 어떠한 보편이론도 우리네 경험상에 있어서 <적용가능성>applicability과 <충분성>adequacy에 있어서 부적절한 경우 수정 또는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 정합성의 유지와 더불어 실제의 적용상에서 그 부작용이 드러나기까지에는 최선의 이론으로서 보편이론으로 채택될 수 있다. 만에 하나 이것 자체마저 부정하거나 거부된다면 우리는 사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고 만다. 객관성이란 어디까지나 그때까지의 최선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완전성을 의미할 뿐이다. 화이트헤드는 "명확한 이론 없이 생산적 사고의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은 할아버지대에서 유래한 학설에 안주하는 것"(AI 348)일뿐이라고 말한다.
    자연과학에 밝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것은 이미 자연과학에서 학문적 방법론으로 통용되는 <관찰 가설 실험>이라는 이 세 단계와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다양한 실험에 대한 적용사례가 맞아떨어질수록 그 가설은 더욱 힘을 얻게 된다. 만일 실험에서 그 가설이 부적합한 경우가 발생할 경우 그 가설은 처음부터 다시 재수정되거나 폐기된 후 새로운 가설의 수립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러한 당시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그 자신의 철학 구축에 도입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헤드가 추구한 사변이성은 근대 합리주의의 독단적 이성과는 다른 생산적 실험이성으로서 평가받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헤드 자신은 이러한 방법론을 귀추법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 진영에서는 이를 연역법이나 귀납법도 아닌 새로운 종류의 논법인 <귀추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보다 더 개명한 자연과학자들에게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는 학의 방법론의 하나다.

    5. 귀추법에 대하여
    사실상 귀추법의 본격적인 재발견과 등장은 화이트헤드가 아닌 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퍼스가 연역법(deduction)과 귀납법(induction) 외에 가추법 혹은 귀추법이라는 또 하나의 추론 과정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가치의 쓰임새를 학계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그로부터 몇 년 뒤에 핸슨은 그의 저서 『발견의 패턴』Patterns of Discovery(1958)과 그의 논문 「과학적 발견의 논리는 존재하는가?」Is There a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1961)에서 과학적 발견들의 유형들을 검토하면서, 인간의 감각 경험이 실제로는 이론이나 개념 혹은 배경지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관찰이 이론과 상관없이 객관적이라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핸슨의 유명한 말 "본다는 것은 안구(眼球)운동 이상의 행위이다"라는 문구는 이를 잘 표현해준다. 인간의 경험사실이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복잡한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모든 지적 작업들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관찰된 사건의 특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그것들이 설명될 수 있는 일반화로서의 이론을 향해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과정을 익히 잘 아는 삼단 논법을 통해 그 차이들을 살펴보자.
    일단 귀추법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① 어떠한 놀랄 만한 현상 P가 관찰된다. ② 만일 가설 H가 참이라면, P는 당연히 설명될 것이다(여기서는 현상에 내재하고 있는 <패턴>pattern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함). ③ 따라서 가설 H를 참이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충분한 근거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추론과정에서 가설의 추론은 사실에 의존하기 때문에, 현상 P는 가설 H를 통제한다. 귀납추론의 경우 H는 P의 무수한 통계적 반복으로부터 도출되고, 연역추론의 경우는 먼저 H를 창조하고, 아직 완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 이 H로부터 P와 관련되는 내용을 도출해내는 것이므로 귀추법은 이것들과 충분히 비교된다고 볼 수 있다.

    1. 어떤 놀랄만한 현상 P가 관찰된다.(개별현상)
    2. 만약 H가 참이면 P가 설명될 것이다.(보편법칙)
    3. 따라서 H가 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보편법칙의 예증)

    귀납법
    사례 : 그는 컴퓨터를 많이 했다.
    결과 : 그는 눈이 아프다.
    규칙 :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

    연역법
    규칙 :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
    사례 : 그는 컴퓨터를 많이 했다.
    결과 : 그는 눈이 아프다.

    귀추법
    결과(개별현상) : 눈이 아프다.
    규칙(보편법칙) :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
    사례(법칙의 예증) : 컴퓨터를 많이 해보니 정말 눈이 아팠다.

    어떤 남자가 눈이 아프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가 컴퓨터를 많이 했다고 추측한다. 이것은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아프다는 법칙을 하나의 코드 체계로 삼아서 눈이 아프다는 사실을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눈이 아픈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개연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다양한 코드체계를 통해서 해석할 수 있다. 즉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각한 것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사실은 귀추법은 확실성에서는 연역법이나 귀납법에 비해서 턱없이 모자라나, 그 생산성은 증가한다는 것이다. 퍼스에 따르면 "과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바로 가추법"이라고 말한다. 김성도 역시 이러한 귀추법이 과학적 발견의 과정 및 예술에서 창조적 행위, 일상생활에서 거의 매순간 실천적인 추론 형식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럴 경우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바로 그러한 보편 법칙을 추론하는 가설의 궁극적 지평에 자리하고 있는 정식화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6. 각 학문의 자리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경험하고 사는 이 세계를 <우리의 우주시대>Our Cosmic Epoch라고 불렀다. 그의 체계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시대는 다음과 같이 고찰해서 나뉘어 볼 수 있다. 일단 우리의 우주시대를 넘어서까지 있는 형이상학적 질서로서의 <연장적 결합의 사회>The Society Extensive Connection가 있으며, 그 다음에는 우리의 우주시대에 속하는 <전자기적 계기들의 사회>Electromagnetic Society가 있다. 그리고는 <존속하는 객체>Enduring Objects와 <입자적 사회>Corpuscular Societies, 그리고 여기에다 이에 기반하고 있는 고등한 존재로서의 인간 사회까지 덧붙여 이렇게 나뉘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우리가 연구하고 공부하는 각 학문의 자리와도 분명한 관련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도표-1 참조). 각 단계는 각 학문의 성격들과도 관련된다. 이때 1단계인 연장적 결합의 사회는 모든 전단계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근원적 베이스로서의 질서에 속한다. 하지만 2단계인 전자기적 계기들의 사회는 그 자신의 단계이상인 3단계 이상부터 질서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질서의 흐름에 있어서 그 역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3단계인 존속하는 객체와 입자적 사회는 4단계 이상부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은 벡터 에너지의 흐름이자 인과적 질서의 방향인데, 각 학문의 성격에서도 이것은 이와 필연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즉, 형이상학이란 영역은 수리물리학의 단계부터 그 위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학문에 해당한다. 마찬가지 화학은 수리물리학의 인과적 질서에 영향을 받으며, 또한 지질학이나 생물학은 화학과 물리학의 인과적 질서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각 단계가 상승될수록 존재가 가지고 있는 새로움의 강도intensity는 증가한다. 고등한 인간 사회는 바로 하부 단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즉, 인간 사회의 질서는 지금까지의 우주역사가
    도표-1


    (해석)
    새롭고도 우연적인 사건들의 발생적 자극 (질서를 벗어난 일탈 혹은 돌연변이들) - 1단계에 대한 수정 또는 재구성으로 이전 보다 더 한층 복잡한 시스템을 형성한다.

    축척해왔던 생명의 질서들을 이어받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로움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각 위계적 질서와 관련한 학문의 자리를 놓고 볼 때, 철학이란 학문이 왜 모든 학문에 깃든 사유의 베이스로서 기능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저 근원에 자리한 <해석학적 베이스>에 대한 철저한 고찰 없이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우주에는 질서만 있지 않다. 화이트헤드는 질서가 무질서보다 근본적이라는 보는 것은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주의 질서를 이탈하고 있는 혼돈의 발생 또한 언제든 충분히 가능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각 단계별의 역방향의 흐름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 이 가능한 경우는 그 단계에까지 기반되고 있는 그 시스템의 질서를 벗어난 혼돈으로서의 새로움의 발견의 경우에 한에서다. 이것은 산일구조라는 비평형계의 구조에서 발생되는 새로움의 증폭과 동일하다. 사실상 이것은 1단계의 수정과 재구성까지 자극하는 것으로 그때까지의 현시스템에 대한 근원적 위기 요인인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경우 이것은 신과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 있어 전면적인 재수정을 요구하는 지평에 해당한다.

    7. 기독교 신학의 형성
    애초에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다양한 전승들이 결부되면서 점차로 형성되어졌다. 그것은 특정의 사건에 대한 일종의 해석들이 덧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는 부인할 수 없이 희랍 철학의 세례에 상당한 영향을 덧입고서 발전되었다. 플라톤의 철학사상은 교육을 받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세계 해석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브래태니커 백과사전(1976년판)의 경우 다음과 같이 써 놓고 있다. "기원 2세기 즉 100년대 중엽부터 희랍철학을 어느 정도 배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지성적인 만족과 교양있는 이교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을 희랍 철학 용어로 표현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철학은 <플라톤주의>였다." 이로 인해 역사적 예수가 일으킨 사건의 성격은 자꾸만 모호하고 느슨해져 갔고 결국 비역사화ㆍ관념화되었으며, 당시의 교권을 부여잡은 교부들로서는 지적 만족감과 정치적 권력의 지배적 효율성까지 성취하게 된다. 기독교 교리의 형성과정들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활약은 기독교 신학의 수립에 매우 결정적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희랍의 이원론을 아예 체계적으로 심어놓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희랍 사상가들의 세계 해석을 본격적으로 기독교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기독교적 해석학>을 수립화ㆍ체계화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성요인으로서 형성되고 있다. ①성서의 사건들과 ②전승자와 그 경로 그리고 ③해석자가 지니고 있는 해석학적 존재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전이해가 동반된 일반화 작업에 해당되는 ③ 요인이다. 즉, ①과 ②도 결국은 ③에 의해 조직화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텍스트를 사건에 대한 해석자가 냉철한 이성으로서 공평무사하게 파악하지 않는 한, 거의 대부분은 그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시대적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지점이 많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성과정 역시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었다. 사실 기존의 민중신학도 이 점에 있어선 예외이지 않다. 해석학적 존재론의 오류는 시대의 한계이자 산물이기도 하다.

    8. 신학의 이상과 기존 보수신학의 병폐
    나는 신학 이론의 학문적 방법론을 위해서 다음을 먼저 명시해두고 싶다. "올바른 신학이라면 정합성과 논리성을 가져야 할뿐더러 세계 안의 경험의 여러 사태들과 견주어서 그 신학적 도식에 의해 적용가능하고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것은 나 자신이 보는 신학의 이상이다. 만일 신학이 정합성과 논리성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신뢰할만한 권위를 지닐 수도 없을뿐더러 한낱 가벼이 부침될 언어께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학이 세계 안의 온갖 경험 사태들과 무관하거나 전혀 적용되지도 해석에 있어 충분하지도 못한다면 그 신학은 설득력이 없는, 무기력하고도 공허한 추상이요 맹신적 주술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론은 실천을 필요로 하고 실천은 이론의 예증과 완성을 위한 필수적 파트너라고 볼 때 신학은 적어도 이러한 두 긴장이 늘상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때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기독교 신학의 방법론에 적용해보자. 맨 처음에 그 어떤 사건의 발생이 있다고 하자. 이를 예수사건이라고 봐도 좋다. 물론 기독교 신학이 성서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할테지만 성서 역시 구체적 사건 즉, 이스라엘 민중의 사건과 예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귀추법에 있어 이것은 첫 번째 단계인 개별현상에 속한다. 어떤 점에서 안병무가 말에 앞서 태초에 사건이 있다고 본 것은 신학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리고 귀추법에 적용에 있어서도 볼 때 매우 적절한 통찰이었다고 본다. 이 같은 개별현상에 대해 저마다 경험한 자들이 그 어떤 일반화로서의 신학을 구상한 것이 바로 귀추법의 두 번째 단계인 보편법칙의 해당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서 그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갔던 점이 세 번째 보편법칙의 예증 단계에 해당한다.
    그럴 경우 기존의 보수신학을 떠올려보자. 기존의 보수신학은 성서에 나타난 예수사건을 가지고서 일종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신학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안의 다른 사항들까지도 규정하는 잣대가 되어 있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삶은 그러한 보편적 원리로서의 신학 체계에 그 신앙적 준거틀을 둔다. 그렇다면 신학 방법론의 측면에서 볼 때, 기존 보수신학의 문제는 정작 어디서부터 파생되고 있는 것인가? 물론 기존 보수신학은 잘 알려진 대로 연역주의가 가지고 있는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이론이기도 하다. 독단적 연역 앞에서 세계 안의 모든 사유와 존재 사태들은 오로지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추법의 적용에서 볼 때도 그 문제점을 더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귀추법의 적용에서 볼 때, 그것은 바로 세 번째 단계에서 드러나는 완악함과 폐쇄성인 것이다. 즉, 그 보편적 신학원리는 실제적 적용에서는 적용되지도 못했고 혹은 제한적이거나 충분하지도 못한 심각한 부작용과 병폐를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보편신학의 <재개정>reconstruction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적용에 있어선 여전히 폭압적 권위로서만 군림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그러한 이론 체계들이 사실상 정통을 이어왔다고 자부하는 교회권력의 유지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통을 자처하는 기존의 보수신학은 합리화의 단계에 있어서 실상은 반합리적 요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심각한 노출은 세계 안에 그 자신들의 신학적 무기력함과 공허함을 노출시키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를 감추고자 더욱 폐쇄적이고도 폭력적인 것으로 돌변해나갔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기존 보수신학이 가진 폐쇄성은 이미 그 안에 잠복된 것이었고 예정된 성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보수신학은 일찍부터 불변하는 존재를 상정하는 철학사상을 끼고서 축조된 것이기에 그렇게 형성된 교리 체계 역시 개정되거나 변할 리 만무했던 것이다. 오히려 강조된 것은 그 자신의 빈곤한 이론적 폐쇄성과 독단성으로서의 반합리성을 감추는 데에 급급한 개념들이다. 예컨대, 인간으로선 신의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식의 신과 인간의 건널 수 없는 질적 괴리의 강조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할 수 있겠다. 어떻든 서구신학의 보편적 원리라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관념적 이원론에 기반된 것이었고 그것은 현실 세계를 설득력 있게 담아내지 못하는 치명적 한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단적 횡포와 폭력성마저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민중신학자들이 그 자신들의 신학을 <반서구신학>이라고 하면서까지 서구신학을 비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관념론적 병폐로만 치닫는 데 대한 일종의 <신학적 반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중신학은 별 문제가 없었는지, 여태껏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9. 기존 민중신학의 문제
    기존의 민중신학은 기본적으로 구체적 현실과 역사적 사건에서 그 신학적 기반과 구성들을 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민중신학에 대해 흔히 말하길, 민중신학은 책상의 신학, 관념의 신학이 아니며 고난 받는 민중의 현실에서 건져 올린 사건의 신학, 실천의 신학이라고들 얘기한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이 비난했던 관념적 서구신학이 <연역주의>였다면, 기존 민중신학은 <귀납주의>로 대비된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민중신학의 보편적 원리에 대한 고찰은 사실상 도외시된 측면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기존 민중신학에 철학적 고찰이 부족했다는 비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얘기이기도 하다. 기존 민중신학은 여전히 당대의 사회적 사건이라는 그 특수성의 지점에 집중하는 경향이 매우 지배적이다. 물론 제한적으로는 그 특수 사건들 간의 보편적 질서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민중해방 전통> 혹은 <민중의 자기초월적 사건>이라는 표현으로서 매우 두루뭉술하고도 모호하게 방치된 채 있어온 것과도 별다르지 않다.
    사실상 귀추법의 제1단계나 제3단계들은 민중신학에 있어선 <현장>을 의미한다. 이에 비하면 민중신학이 비난했던 서구신학은 현장에 적용되지도 못했을뿐더러 그것은 이미 현장을 갖지 못하고 있는 신학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안병무는 그 자신의 저서들에서 "서구신학의 관념론적 병폐"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했었다. 이에 비해 기존 민중신학은 역으로 그 일반화의 단계가 부재하거나 매우 미흡했었다. 굳이 들라고 한다면 강원돈의 <유물론적 세계관>의 접합시도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이후의 민중신학들은 그때그때 마다의 역사적·사회적 사건들을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해석할 필요성이 있다면서 시류적 사건들에 대한 민중신학적 해석들을 곧잘 내세웠다. 이를 테면, 민주화와 통일운동 혹은 시민운동 또한 신자유주의나 세계화 담론, 미제국의 이라크 침략, 최근에는 민주노동당의 등장까지 등등 이러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적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신학적 입장에서의 해석>을 꼭 강조하곤 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민중신학도 역시 결국은 다원화된 사회를 꿰뚫을 수 있는 해석학적 기반을 충분히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무(無) 속에 떠도는 자족적 사태란 없다. 오늘날 사회과학 역시 세계에 대한 해석학적 기반으로서의 철학(형이상학)을 도외시 하지 않는 판국에 민중신학이 이를 도외시한다면 매우 순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신학이 아닌 사회학에서조차도 <중범위 이론>theories of the middle range으로 유명한 로버트 머튼(Robert K. Morton)은 <경험적 일반화>empirical generalization를 말하면서 어느 정도 다양한 사회적 사태들을 꿰뚫는 일련의 작업이 매우 중요함을 일갈하고 있다.

    10. 귀추법의 적용으로서의 새로운 민중신학
    귀추법으로서의 학문적 방법론을 민중신학에 의도한다면, 예컨대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겠다.

    (1단계)먼저 한국의 전태일 사건이라는 특수한 시·공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2단계)이를 토대로 그 어떤 보편적 일반화로서의 원리를 수립한 후
    (3단계)그것을 한국만이 아닌 다른 모든 세계 안의 사건들에 충분하게 적용가능 하도록 마련하는 데에 그 신학적 이론의 목적을 둔다.

    억눌림 받고 저항하는 민중사건들이 어찌 한국이라는 시·공적 상황에만 머물겠는가. 따라서 새로운 민중신학은 한국적이라는 상황뿐만 아니라 1세계 3세계 등등 모든 류(類)적 상황에 대해 적용가능해야 마땅하잖은가. 혹시 이것을 두고 <보편담론의 횡포>라고 우려를 표명할지 모르나 귀추법이 연역법과 다른 것처럼 만약에 적어도 그때까지 구축해왔던 민중신학의 보편적 원리가 3단계의 적용 사례에서 부정합성이 드러날 경우 이는 곧바로 2단계를 수정할 수 있는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열려 있는 보편담론'이라고 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앞서 말했듯이 귀추법의 논증을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the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라고 불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최선으로서 확보할 수 있는 보편담론의 범주인 것이다. 민중신학은 언제나 그때까지의 최선의 신학이론으로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만약 최선의 보편담론마저 부정되거나

    도표-2

    형이상학의 전환은
    가장 큰 패러다임적 대전환






    예수사건 아우슈비츠사건 동학, 전태일사건, 광주사건 세계 안의 다양한 민중사건들
    (특수성1) (특수성2)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특수성들) (다른 여러 특수성X들)
    멀다 가깝다. 가깝다. cf) 제3세계 혹은 이라크 민중들 등등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세계 안의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모든 언급들은 매우 불안정하거나 철저하지 못한 이론적 고찰이 되기 쉽상인 것이다.
    도표-2를 살펴보자. 이때 현재 시점에서 시간적으로 먼 옛날이거나 혹은 자료가 빈곤할수록 <상상적 일반화>의 차원에서 비분석적 방법의 상상 혹은 직관이 더욱 요구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작업들은 주로 결론나지 않을 해석들의 나열과 경쟁으로 치닫기 쉽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그 한 사례이다. 그럴 경우 오히려 해석자의 자리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더 긴요할 가능성 역시 더 높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해석학적 기반이라는 보편적 원리의 정립 단계는 형이상학의 차원까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는 파편화되어 있지 않으며 저마다 모든 존재들과 관계된 그 과정상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보편적 원리로서의 이론을 지탱하는 합리주의의 근거는 세계 안의 모든 경험에 대한 자료들(Data)이다. 즉, 모든 다양성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이에 근거하여 가능한 가장 최선의 설명력으로서의 이론을 추상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여전히 검증되어야 할 것으로 이것의 해체 가능성 또한 언제든지 열어놓아야 한다. 그리하여 수정 혹은 재구성의 정도 역시 형이상학에까지 이르고 다시 날카로워진 보편적 원리로서의 해석학은 땅으로 내려야 여러 경험의 지평들과 조우되는 것이다.
    기존의 민중신학은 그 학문적 방법론에 있어서 그것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현실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얘기들은 한다. 나 역시 이 점 동의한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기존의 민중신학이 당대의 민중 사건들을 통해 형성한 것은 다른 모든 민중 사건들에 대해 적용가능한 일반화의 원리는 못되었고, 그러한 보편적 원리를 마련할 수 있는 단초로서, 특정의 사건들에 대한 국소적인 일반화로서의 파편화된 해석들뿐이었다. 물론 돌이켜보면 민중신학은 그동안 이천 년 서구신학이 버려놓고 있었고,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놀라운 발견을 한 셈이다. '민중'이라는 현장,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눈뜸. 이 점은 그 자체로도 매우 파워풀한 것이기도 했다. 민중의 억눌린 받는 현장은 한국의 정치적ㆍ사회적 상황에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성서 안에도 있었기에. 이 발견 자체는 내가 볼 때 그리스도교 신학사의 쾌거였고 커다란 의미였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민중신학은 이를 일반화하는 단계로까지는 나아가진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연유에는 7, 80년대의 시대적 절박성도 한몫 작용했을 거라고 본다. 어떻든 나 자신이 기존 민중신학의 치명적 오류를 철학의 부재 또는 모호함으로 보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보편적 원리를 수립하려는 일반화의 단계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체 우주를 개괄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담금질마저 거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애초의 협소했던 시ㆍ공간적 특수성을 극복하여 세계 안의 모든 다양한 특수성들을 꿰뚫는 신학적 일반화를 통해 보다 풍부하고 보다 유용하게 신학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보편적 원리의 성격은 세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다양한 적대 세력들에 대해 탁월하면서도 지속적인 투쟁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세계사의 다양한 상황들을 적실하게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할뿐더러 그러한 저마다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조차 하나님 나라를 향한 투쟁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보편적 원리는 저마다의 투쟁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진 않는다. 그것은 다만 임의의 투쟁이 들어갈 자리를 지정해준다. 투쟁의 내용은 그때그때마다의 적실한 상황에 따른 방편으로서 취득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검증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최선의 이론을 유지해야하며,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발생되는 사회적 사건들을 해석해내고 이를 변혁의 길로 안내해주는 것이 바로 이론의 임무라고 본다.
    세계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특히 오늘날과 같은 지구화의 상황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사건들이 발생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중신학자들은 쏟아져 나오는 세계 안의 여러 사건들에 대해 이를 민중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들 강력하게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궁극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작업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침묵하거나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기존의 민중신학자들이 학문적 방법론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거나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모든 특수한 다양성들을 꿰뚫는 일반화의 작업이란 저마다의 그 특수성 자체가 <전체 우주와 관련되고 있는 가운데서의 특수성들>이기에 전체 우주의 밑그림부터 그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편적 원리가 지금도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세계안의 구체적 사건들을 제대로 해석해내지도 적용되지도 못할 때에 그것은 수정 또는 폐기 되어야 마땅할 것이리라. 다시 말해, 나 자신이 부르짖는 일반화로서의 작업이란 언제든지 <해체가능한 일반화>이며 <열려있는 체계로서의 중심이자 구성>인 것이다. 하지만 기존 민중신학이 일반화를 마련하는 작업자체를 계속 외면한다면 이 또한 민중신학이 더 이상 발전하진 못한 채, 쏟아지는 세계 이슈들에 대한 시류적 분석에만 급급해할 것이며, 그저 여러 특수신학들 중 하나로서의 상황신학으로서 머물고만 말 것은 뻔한 일 아니겠는가. 한국의 민중신학은 단지 한국적 상황에만 머물 것인가?

    10. <한국신학>이란
    인간의 신체란 세계와 가장 친밀한 한 부분일 뿐이다. 한국이란 시·공간적 특질 역시 전체 우주와의 연관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그 어떤 특정 지점의 성질에 속한다. 문화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ㆍ공적 제약으로 인한 특질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표현들의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이때 민중신학이 다른 여러 신학과 다른 것은 일차적으로는 한국이라는 시·공적 제약의 특질이라는 그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한국의 시·공적 제약의 특수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기층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근대화가 자행되던 시절의 고난 받는 민중의 현장 즉, 전태일 사건으로 대표되는 그러한 역사적인 민중사건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이라는 특정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출발은 당연히 한국신학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오래 전에 이정배는 <한국적 신학>이라는 것을 "한국적 상황에서 표현되는 보편적 종교원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한국신학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언급한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는 <한국적 신학>을 논하면서 동학의 지기론(至氣論)이야말로 한국적 종교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토착화 신학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국신학>은 이러한 전통의 토착화 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이 종합화 될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예전에 변선환은 한국의 문화사상과 연관된 토착화신학과 한국 역사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연관된 민중신학의 통합적 신학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나 자신은 이러한 종합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실상 그것들은 시ㆍ공적으로 떨어져 있었던 개별적인 특수 사건들이지만 그것은 이를 종합화해내는 보편담론의 지점인 형이상학의 지평에서부터는 조우됨으로서 충분히 서로 간의 종합화로서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신학은 결국 세계 안의 모든 민중사건들을 꿰뚫는 신학일 필요가 있다. 민중은 한국에서 발견된 것이지만 그것은 한국이라는 상황에 국한되어 있지도 않다. 한국 민중 역시 이미 그 자체로 <지구적 민중 안에서의 한국 민중>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민중신학은 세계 안의 다양한 문화 영역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여러 민중해방 전통들에까지 보다 풍부하게 소통 가능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다고 하겠다. 사실상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 다원적 측면으로 드러나는 삶life 그 자체인 것이다.

    11. <오류>와 <비극> 앞에 겸허한 신학
    하지만 한국적 신학이든 무슨 신학이든 간에 그 어떠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론적 지평에서는 부정합성과 논리적 허점들로 드러날 수 있고 동시에 이것은 경험의 실천적 지평에서는 부작용과 비극들로 드러날 수 있다. 설사 아직 허점이 안보이는 이론이 있다고 쳐도 그 어떠한 이론도 완전무결한 이론이라고 보아서는 곤란하며, 그것의 치명성은 결국 경험적이고도 실용적인 정당성에서 예증될 뿐이며 그럼으로써 단지 상대적인 이론적 우위성을 확보할 따름이다. 화이트헤드의 언급대로 합리주의의 모험에 선을 긋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FR 76). 이때 만약에 우리 앞에 체계화된 보편적 원리가 있을 경우 그것이 언제 수정 가능할 수 있는지를 언급해본다면, 그것은 곧 보편적 원리가 오류와 비극의 사례로 드러날 경우다. 앞서 도표-1에서 가장 근원적 베이스의 하부단계를 자극할 수 있는 요인이 그때까지의 시스템에서 통제되지 않는 일탈요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네 문명사에 드러나고 있는 오류와 비극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때 오류를 이론적 지평에서의 비극을 말한 것이라고 봐도 좋고, 비극을 경험적 지평에서의 오류를 의미한다고 봐도 좋다. 보편신학으로 군림했던 서구신학은 바로 그 자신의 이론적 오류 앞에 겸허해지지 않았고 동시에 그럼으로써 세계 안에 많은 비극적 사건들을 초래하곤 하였다.
    신학이란 것은 자명한 진리에 대해를 추구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진리이기를 포기한 담론에 머물러야 하는가? 이에 대해 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 언급한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대비해본다. 한 명은 움베르트 에코의 말이다. 그는 언젠가 "진리에 대해 조심하라.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사실 근대 합리주의라는 이성의 횡포를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이기를 포기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질 우려 역시 가진다. 반면에 화이트헤드는 진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종말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일이다."(MT 16)라고. 다시 말해 이것은 오류와 비극이야말로 우리네 삶과 신학에 있어서 가장 큰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는 오류와 비극 없이는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진보도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열려 있는 보편으로서의 신학 혹은 해체 가능한 구성으로서의 신학은 바로 그 오류와 비극 앞에 철저하게 겸허해진 신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똥 밟은 곳을 다시 또 밟을 수는 없잖은가. 그런 점에서 똥 밟은 경험이란 그 자신에게 매우 귀중한 가르침을 주는 체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전철들이 있다면 어찌 이를 다시 밟겠다는 것인가!

    12. 나오며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민중)신학의 방법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내가 괄호를 친 이유는 그 괄호 안에는 온갖 다양성으로서의 특수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자리임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괄호 안에는 (여성)신학, (생태)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등등 그러한 꼴로서의 신학을 넣을 수 있다. 이때의 괄호( )란 세계 안의 온갖 구체적 상황과 특수의 자리에 대해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인 것이다. 민중신학이 ( )신학으로서 일반화의 단계를 확보할 경우 한국의 민중신학은 세계 안의 다양한 신학담론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신학의 방향이 그냥 "신학"이라기보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 )신학"이어야 한다고 본다. 만약에 신학이 구체화된 사태의 문제들을 온전히 직시하지 않는 한 그것은 말그대로 관념론적 병폐를 낳을 수밖에 없다. 세계 안의 온갖 특수를 꿰뚫지 않는 혹은 그와 동떨어진 보편이란 한낱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민중신학이 폭로했던 서구신학이 지닌 <거짓보편성>인 것이다. 즉, 기존 기독교의 보수신학은 이러한 괄호가 배제된 신학이기에 바로 이 같은 구조적 한계의 치명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제국의 신학일 뿐이다. 제국의 신학은 바로 그 괄호의 자리를 배제한다. 유동하는 영역의 온갖 다양성과 특수성들을 포용치 못하는 보편신학이 곧 제국의 신학인 것이다.
    이에 반해 기존의 민중신학은 기본적으로 구체적 현실과 역사적 사건에서 그 신학적 기반과 구성들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민중신학에 대해 흔히 말하길, 민중신학은 책상의 신학, 관념의 신학이 아니며, 고난 받는 민중의 현실에서 건져 올린 사건의 신학, 실천의 신학이라고들 얘기한다. 안병무는 태초에 <말>이 아니라 <사건>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존의 민중신학에는 특수성은 있었지만 보편적 원리로서의 체계 수립은 아예 포기한 감이 없잖아 있다. 물론 워낙 전통 서구신학이 휘둘렀던 그 끔찍한 보편성에 혹은 근대 합리주의의 횡포에 질겁을 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네 기독 신학이 그저 특정의 상황성에만 머무를 경우 이는 그 스스로 이론적 체계화로서의 신념과 가능성마저 포기한 점도 없잖아 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솔직히 보편적 원리로서의 체계화 작업은 오히려 민중신학에 튼튼한 이론적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나로서는 저 두 긴장을 귀추법의 적용을 통해 적어도 그때까지의 최선의 이론으로서의 보편담론을 확보하고자 한다. ( )신학은 열려있는 중심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 )는 온갖 특수성과 상황성의 자리다. ( )의 자리는 온갖 실험과 생산을 쏟아내는 현실의 영역이며 유동성의 자리다. 반면에 '신학'은 그러한 ( )와 관련을 맺으면서 현실 저 너머에 있는 영속성과 보편성을 지향하는 자리다. 이때 이 두 긴장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를 제약한다. ( )는 끊임없이 신학을 검증하며 자극한다. 신학은 ( )에 대해 시대적 제약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보편성에 대한 메리트가 없이 특수성을 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한낱 유별난 개성만 강조되는 그러한 반짝신학으로 머무를 수 있다. 반면에 특수성 없이 곧바로 보편성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단이며 미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의 상황에서 태동된 민중신학은 이 땅의 모든 오클로스의 삶들과 같이 가려는 신학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 자신의 정치적 입장의 정당화에 한정되지 않는 합리주의의 전진에 속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현장을 갖지 않는 혹은 배제하는 기존의 주류신학이 지닌 <거짓 보편성>을 폭로함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한 성찰적 신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이 이 땅의 오클로스를 그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궁극적으로 정체성의 정치 맥락마저 넘어선 모든 공평한 처사에서 비롯되고 있는 존재론적 합리성의 사실로서 파악될 때 비로소 오클로스 역시 모든 존재와의 소통과 화해마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사건 혹은 전태일 사건 같은 민중의 해방이야말로 현재 세계를 가장 유효하게 정화시키고 있는 우주적 해방의 지름길로도 자리매김 될 수 있다. 민중신학이여, 제발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를 놓치지 말라!

댓글 0 ...

http://minjungtheology.kr/xe/45470
번호
분류
제목
닉네임
52 카테고리 최형묵 4656 2005.05.29
51 카테고리 최형묵 6965 2005.05.29
50 카테고리 최형묵 5613 2005.05.17
49 카테고리 최형묵 4916 2005.03.29
48 카테고리 최형묵 3944 2005.03.01
47 카테고리 최형묵 4856 2005.01.28
46 카테고리 최형묵 4973 2004.12.07
45 카테고리 최형묵 4569 2004.10.27
카테고리 최형묵 5191 2004.09.21
43 카테고리 최형묵 6759 2004.07.28
42 카테고리 최형묵 5721 2004.06.27
41 카테고리 김진호 4668 2004.06.04
40 카테고리 최형묵 5709 2004.05.08
39 카테고리 최형묵 8495 2004.02.24
38 카테고리 최형묵 17152 2004.02.24
37 카테고리 최형묵 4845 2003.11.23
36 카테고리 최형묵 4314 2003.11.23
35 카테고리 최형묵 6456 2003.11.23
34 카테고리 최형묵 4628 2003.11.23
33 카테고리 최형묵 4520 2003.11.23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