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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8회] 박순경의 통일신학 - 황용연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4857, 2005.01.28 13:09:32
  • 박순경의 통일신학에 대한 문제제기-주체성 이해의 문제를 중심으로

    황용연(본 연구소 운영위원, 성공회대 신학과 박사과정 수료, KSCF 대학부 간사)

    1.
    남한의 통일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만만치 않으며, 남북한 기독교인들의 성례적/신학적 교류는 남북한의 민간 교류의 효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운동과 그러한 교류에 참여한 결과로 인해, 남한 기독교에는 통일에 대한 상당한 양의 담론적 성과가 쌓이게 되었으며, '통일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도 되었다. 탈분단의 관점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신학적 담론을 전개하는 것이 목표인 필자의 연구에서 이러한 기존의 '통일신학'의 성과들은 탐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통일신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한 인물 중의 하나인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에 그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은 학문적 차원에서 볼 때 바르트 신학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 신학과 민족 통일문제와의 결합을 상당히 성취해 낸 신학이며, 동시에 지금까지 남한의 이른바 'NL 경향'의 사회운동과 통일운동이 견지해 온 사회/운동에 대한 관점을 신학적으로 녹여낸 신학이기도 하다는 점이 필자가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2.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의 출발점이자 핵심은 '민족'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있다. 그의 통일신학에서 '민족'은 어떠한 신적 기원을 담보하는 집단성 차원의 주체성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주권 안에서 통합된 세계 인민의 기반이 되어야 할 집단성 차원의 주체성이다. 이러한 민족/세계 인민의 구별/겹침 관계와 이 관계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구실은 바벨탑 사건과 아브라함 사건의 대조를 통해서 더욱 심화제시된다. 박순경 교수에 따르면, 두 사건 모두 인간의 궁극적 존재 형태여야 할 '통합된 세계 인민'의 가능성을 제시한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바벨탑 사건의 경우는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성취하려 했다는 측면에서 신적 주체성과 인간적 주체성의 혼동이 일어난 반면, 아브라함 사건의 경우에는 하느님이 한 민족을 축복하여 다른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인간과 구별되어 인간에게 가능성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통합된 세계 인민'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배경에 깐 박순경 교수의 사회과학적인 민족 이해는 대체로 '혈통,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원초론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과학적인 민족 이해가 다시금 신학적 이해와 긴밀히 결합하는 것이 박순경 교수의 민족 이해의 특징이다. '하느님이 시간을 제공해 주셔야 인간적 주체성의 존립이 가능하다'라는 박순경 교수의 신념이, '따라서 민족이라는 집단성 차원의 주체성의 미래도 하느님이 시간을 제공해 주셔야 가능하다'는 논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시간을 제공해 주심으로써 성립되는 민족의 미래는 과연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미래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민족'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논하는 것이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의 기본 논리가 되는 것이다.

    박순경 교수는 한국 역사에서 민족이라는 주체성이 결정적으로 혁신하게 된 계기를 1920년대에서 찾는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신간회 등을 통해 이루어졌던 '좌우합작운동'에 주목하는 것이다. 박순경 교수는 이 좌우합작운동의 맥이 1945년 해방 직후의 좌우합작운동과 4 3 항쟁 등의 민중운동, 1960년 4 19 혁명 이후의 통일운동으로 이어지며, 1980년대 말부터의 통일운동으로 이어진다고 파악하고 있다.
    박순경 교수에 따르면,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가 민족해방운동에 본격적으로 등장함으로써, 그 전까지 서구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민족운동이 그 영향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앞에서 말한 계기들을 거치면서 한국에서의 '민족'은 서구 부르주아들의 세계 권력인 제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상응할 수 있는 주체성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박순경 교수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주체성의 발달 과정에서 동시에 민족 내부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박순경 교수는 '민족' 주체성은 반드시 '민족 민중'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민족 민중'이 역사적으로 겪는 질곡을 극복하고 변혁을 성취할 수 있다는 필연성은 창조자 구원자 하느님-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성과 구별되며 인간 주체성('민족 민중'을 포함한)으로 환원되지 않는 하느님-이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박순경 교수의 눈에는,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한국신학' 중에서 이러한 '민족 민중'의 주제를 제대로 포착한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민족'의 주제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이런 신학들은 공통적이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도,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한계 안에 있었던 1970년대 인권민주화운동에 기반한다는 점과, 안병무 서남동 등에서 발견되는 반공기독교의 잔재 등으로 말미암아, 박순경 교수 자신이 발견한 '민족' 주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3.
    앞에서 보았듯이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에서는 세계변혁의 주체가 될 '민족' 주체성과 '민족' 주체성의 세계변혁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창조자 구원자 하느님'이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은 이 두 가지에 대한 비판에 상당히 민감한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신학, 특히 사회적 해방을 구원의 핵심 요소로 보는 신학 중에서는 상당히 그리스도교의 기존 전통의 틀에 많이 의존하는 신학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특색이 잘 드러나는 예가 여성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발언하고자 할 때이다.

    박순경 교수에게서 여성 주체성은, 그 문제가 제기되는 맥락에서는 '민족 민중'의 주체성이 '민족 민중 여성'의 주체성으로 재정의될 정도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물론 가부장제라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악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신학적으로 보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방식 가운데 성령의 존재 방식에서 여성적인 주체성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도 하고, 또한 인간의 주체성 중 하느님 앞에 선 주체성이 여성적 호칭을 갖기도 한다는 점을 박순경 교수는 지적한다. 이러한 신학적 가능성과 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고통을 결합시키면, 창조자 구원자 하느님의 인도로 세상을 변혁해 나가는 인간의 주체성은 여성 주체성으로 통칭이 가능하다는 것이 박순경 교수의 주장이다.
    한편, 박순경 교수에게서는 이러한 여성 주체성은 '어머니'로 대표된다. 그 '어머니'는 1차적으로는 민족해방운동 과정에 참여한 남편과 자식을 뒷바라지하고 자신이 직접 운동에 참여하기도 한 그러한 '어머니'이다. 그리고 남성과 함께 (하느님의 인도 하에서) 새로운 민족 주체성을 창출한다는 의미에서의 '어머니'이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버지'된 주체성에 대응하는 의미에서의 '어머니'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이 맥락에서 카톨릭의 마리아 신앙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재해석된다).
    따라서 박순경 교수는 한국 여성신학이 '미국 여성신학의 영향을 받아' '창조자 구원자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민족 주체성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남성에 대한 여성의 권익을 주장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박한다. 예를 들어, 여성신학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칭호를 가부장적이라고 기피하는 현상에 대해서, 박순경 교수는 '종말적 구원자로 새 세상을 열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했다면, 이미 그 아버지 칭호는 초가부장적인 것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반론한다. 그리고 '어머니' 주체성이 '주체적 자율적 해방된 여성의 이미지'를 포괄하여 모든 해방된 여성의 주체성을 포괄할 수 있다고 글 곳곳에서 강변한다. 물론, 민족 민중 해방이 없이 어떻게 여성만 해방될 수 있겠느냐는 익숙한 담론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박순경 교수의 글 <민족 가족 여성 : 통일민족공동체를 위한 여성의 역할>(<<통일신학의 미래>> 264-282쪽)에서는 '통일민족공동체 실현을 지향하면서 여성단체들이 추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업'으로 다음 여섯 가지 사항을 제안하고 있다.

    (1) 연방제 통일 방안의 공론화
    (2) 북한 교회 여성들과의 대화 추진
    (3) 조선족 여성들과의 접촉 : 민족과 가족의 숱한 이야기들을 엮어 내는 작업. 조선족 여성들이 5백만 해외동포를 민족 경제권으로 연계하는 매개 역할을 하도록 협력하는 작업.
    (4) '고통을 모른 채 하지 않는 민족의 어머니'의 자세로서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과 이와 연계하여 장기수 송환 추진.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북한 여성들과 교류하면서 기성 가족 제도의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표출해 냄.
    (5) '민족의 어머니'의 자세로서 북한 수재민 돕기 운동 추진
    (6) 해외동포여성들과의 접촉과 외국인 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으로 세계화의 차원을 담보해 냄.

    이러한 목록을 두고 '여성'이라고 이름이 붙은 사회적 집단간의 교류와, '어머니'로서의 '가족 뒷치닥거리' 역할을 '민족'으로 확대한 것의 결합으로 파악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4.
    박순경 교수는 지난 1991년 일본에서 한 <기독교와 민족통일의 전망>이라는 강연(<<통일신학의 여정>>에 수록)에서 '주체사상을 찬양했다'는 혐의를 받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바 있다. 그 강연에서 '주체사상 찬양'이라는 시비가 붙었던 이유는 정확하게는 주체사상의 수령론에 관한 박순경 교수의 견해 때문이었다. 박순경 교수의 견해를 직접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통일신학의 여정>> 128-130쪽)

    "수령은 우선 첫째로 인민주체들의 공동체 혹은 집단을 가능하게 하는 구심점으로서, 말하자면 집단공동체의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엄격히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집단공동체는 수령이라는 구심체 없이는 궁극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교회구조에 비유하자면, 수령은 가톨릭교회의 교황과 유사하다. 개신교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은 불가시적이므로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개신교는 분열할 대로 분열한다. 교황은 교회의 통일성 보편성의 가시적 구심체 역할을 상대적이나마 수행한다. 유사하게 강력한 수령 없이는 북조선 인민의 자주적 삶이 지금까지 지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령의 유일성, 따라서 그의 독재성은 북조선의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된 것이다."
    "문제는 수령이든 공산당이든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오류에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야기된다. 공산권 국가들의 실패가 바로 그러한 문제 상황을 말해 준다. (중략)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단정되면 안된다. 문제는 수령이나 공산당 독재가 세계인민을 궁극적으로 실제로 대변하느냐 하는 물음에서 해답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대리하는 교황은 독재자도 우상도 아니다. 인민들을 착취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수령은 독재자도 우상도 아니다. (중략)"
    "수령의 자리가 계속 대치된다고 해도 수령론의 궁극적 주체는 유한한 인간 이상일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 혁명이념이 궁극성을 가지려면, 그 이념의 궁극적인 주체 혹은 담지자가 있어야 한다. 사실 공산주의 이념의 통일적인 주체는 결여되어 있으며, 주체사상의 수령론은 그 결여된 공백을 메꾸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령도 유한하기 때문에 수령론도 공백으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인 주체 없이는 공산주의 이념이나 주체사상의 수령론은 한갓 공허한 이념들로 남아 있게 된다. 여기에서 신학적 결단이 필요하다. 즉 수령의 자리는 궁극적으로 비어 있으니, 역사와 세계인민의 궁극적인 주체는 하나님의 자리가 아닌가."

    박순경 교수는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으며, 이 강연에 대해서 주체사상의 수령론을 찬양한 강연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사상에 하느님의 자리를 고려할 것을 권고하는 선교적 강연의 구실도 했다고 반론한 바 있다. 그리고 필자 역시 박순경 교수의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공감한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수령론에 대해 그 '궁극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박순경 교수의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낳는다. 말하자면 박순경 교수가 이해하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 주체사상의 수령론과 유사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금 제기한 문제를 "하나님을 올바르게 대리하는 교황은 독재자도 우상도 아니다. 인민들을 착취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수령은 독재자도 우상도 아니다."라는 언급과 결합해서 이해한다면 더더욱 문제는 커진다. 저 문장은 하나의 구조에 교황이나 수령, 혹은 하느님이라는 절대 권력/권위를 부여받는 자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구조적 문제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혹은 물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그 자리가 어떤 '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만을 묻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교황, 수령,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던지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새삼스레 신학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역사는 바로 '권력'의 문제를 그 '권력'이 선하냐 악하냐만이 아니라 권력 자체의 구조적 문제로 묻는 문제의식이 성숙해가는 과정이었으며, 그에 따라 신학적 차원에서도 '하느님 이해'와 '권력' 간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민해 왔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리에 어떤 '선한 권력'을 겹치는 이해는 앞에서 특히 여성신학에 관계된 문제를 다루면서 보았듯이 박순경 교수의 하느님 이해의 본질적 차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주체사상의 수령론과 일정하게 동형관계를 만들고 있으며, 거기에 '민족'을 중시하는 박순경 교수의 지향이 작용함에 따라 수령이 '민족자주성'을 위해 필수적인 구실을 했다는 이해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박순경 교수 식의 하느님 이해는 '선함'의 내용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본질적 차원에서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통일 문제에 대한 신학적 대응을 위해서는 사실은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덧붙여, '수령'이 있음으로 해서 지켜 왔다는 '민족자주성'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고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일단 우회적으로 답하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한국군 파병을 반대한다고 해서, 사담 후세인 정부의 '반미자주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5.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은 남한에서 전개된 통일에 관한 신학적 담론 가운데 가장 체계가 잘 갖추어진 담론이다. 그리고 남한의 (기독교) 사회운동/통일운동이 견지해 왔던 '민족'/'통일'에 관한 견해와 '해방'을 추구하는 신학적 견해를 상당히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담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 공과는 차치하고라도, 남한 사회의 현실이 생산해 낸 깊이 있는 신학적 담론 중의 하나로 꼽히기에 부족함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과연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이 앞으로 한반도의 탈분단 과정에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담론일지를 심각하게 검토하게 한다. 특히나 신학적 차원에서 신학의 근본 문제인 하느님 이해의 차원까지를 고찰하게 하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는 점에서도 더더욱 그러하며, '여성'의 예에서 보듯이 탈분단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될 '민족' 이외의 다른 주체성에 대한 이해와 관계맺음이 상당히 쉽지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도 더더욱 그렇다. 물론 그 이외에도, '민족'이나 '자주성'에 대한 이해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등, 신학적 담론의 깊이만큼 많은 논쟁점들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논쟁점들이 앞으로의 과제가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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