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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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회맑스코뮤날레] 맑스의 유령, 그리스도교의 문을 두드릴 때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6644, 2005.05.29 22:37:34
  • 맑스의 유령, 그리스도교의 문을 두드릴 때

    이정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신학)


    From the time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Heaven? imperial rule has been breaking in violently, and violent menare attempting to gain it by force.[마태복음 11:12; 참고. Right up to John? time you have the Law and the Prophets; since then God? imperial rule has been proclaimed as good news and everyone is breaking into it violently(누가복음 16:16)]

    1

    ‘공통된 이름’(안또니오 네그리)을 밝히라. 당신들은 누군가? 왜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는가? 하이에나인가 ‘두더지’(다니엘 벤사이드)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계륵 같은 것이기에 던져버린 뼈에서 골수를 빨고 있는 하이에나인가, 아니면 교리의 철벽 밑을 파고들어와 주춧돌 밑까지를 파헤쳐 감히 신의 도시를 무너뜨리는 두더지인가? 은진미륵의 기단 밑에 구멍을 뚫는 쥐들인가(서남동)?
    연대하여 이 시대의 새로운 적들을 향해 바리케이드를 치자고 유혹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그렇다. 그리스도교에서 마르크스주의까지는 명백한 혈통관계가 존재한다. 그렇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영성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쳐놓은 바리케이드의 맞은편에서 같이 싸워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적인 유산은 너무나 귀중하므로 근본주의자의 변덕에 남겨질 수 없다.”1) 슬라보예 지젝, 김재영 옮김,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왜 그리스도교 유산은 싸울 가치가 있는가?』, 인간사랑 2004, 14.


    당신은 누구인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꼬뮈니스트라 이름붙이는 당신은?

    “꼬뮌주의적인 전투성의 미래의 삶을 조명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옛 전설이 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그의 일을 생각해 보라. 다중의 가난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는 공통의 조건을 채택했고(가난해졌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회의 존재론적 힘을 발견했다. 꼬뮈니스트 전사도 다중의 공통의 조건 안에 있는 무진장한 부(자원)를 확인하기 위해 그처럼 행동한다. 프란치스꼬는 초기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도구적(기계적) 훈육을 거부했고, 육신(flesh)의 고행에 반대하여(가난 속에서 그리고 구성된 질서 속에서) 즐거운 삶을 제시하였다. 그 삶에는 모든 존재와 자연, 동물들, 자매 달, 형제 태양, 들판의 새들 가난한 사람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포함되고, 그들과 함께 권력 의지와 부패에 대항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포스트모던 세계 속에서 우리가 프란치스꼬의 상황에 있음을 발견하고, 권력의 참혹함에 대항하여 삶의 기쁨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어떠한 권력도 통제할 수 없는 혁명이다 ─생명의 힘(biopower)과 꼬뮈니즘, 협력과 혁명은 사랑과 소박함, 그리고 순수함 속에 함께 머물기 때문이다. 이것이 꼬뮈니스트의 억누를 수 없는 청명함과 기쁨이다.”2)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윤수종 옮김, 『제국』, 이학사 2001. 번역을 약간 수정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치를 떠는 사람들의 이론 속에 잠복해 있는 ‘메시아적인 것’을 ‘신학-정치학 담론’으로 조탁해내고, 예언자를 두더지로 메타모르포시스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알튀세르의 마지막 이론인 불확정적 마주침[우발성의 유물론], 알랭 바디우의 기적적인 사건,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그리고 안토니오 네그리의 구성[제헌]권력 같은 담론이 그것이다.”3) 다니엘 벤사이드, 김은주 옮김, 『저항』, 이후 2003, 94.


    “예언자는 사제가 아니다. 성자도 아니다.
    점술가는 더더욱 아니다. [ ... ]
    두더지는 바로 사건들을 가지고 도래를 준비한다.
    느린 성급함으로. 조급한 끈질김으로.
    왜냐하면 두더지는 예언자적 동물이기에.”4) 위의 책, 241.


    당신들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독해하기에 다음과 같은 끔찍한 말을 토설하는가?

    “지젝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관념론이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제공하는 방법을 수립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젝은 관념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정치혁명의 모델을 찾는다.”5) 토니 마이어스, 박정수 옮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필맥 2005, 217.


    서구의 정치신학,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문화-정치 신학, 여성[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그 어느 것도 시대의 사명을 다하고 이제 지구화 시대의 신자유주의에 의해/속으로 녹아내려버린 것 같은 오늘,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을 붙이면서, 그 이름을 더 발본화하면서 다가드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교가 폐기해버린 녹슨 것을 잘 닦아 찾아주려 온 고마운 손님인가, 잘 굴러가는 교회라는 자동차의 차축을 부러뜨리려는 불한당들인가? 방문자인가 침입자인가? 아니, 초대자인가? 아무튼, 그들과 부딪치면서 예수의 말 한토막이 자꾸 살아난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제국적 통치가 폭력적으로 침입하고 있다. 폭력적인 사람들이 힘으로 그것을 장악하려고 한다.”(마태복음 11:12) 레온하르트 라가츠는 그들의 정체를 통찰한 것일까?

    “만일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거부한다면 하느님과 그의 나라는 ‘비신앙인들’에게로 간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와 예수의 메시지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및 하느님 나라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프루동과 바쿠닌, 맑스와 레닌에게로 간다. 만일 신앙인들이 진리를 멸시한다면 비신앙인들이 진리와 함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교와 그와 연관된 전 세계의 몰락을 의미한다.”6) 레온하르트 라가츠, 유장현 옮김, 『예수의 비유』, 다산글방 2001, 224)


    오늘의 역사 현실 속에서 맑스와 접선한 그리스도인은 이중간첩일 뿐이다.

    2

    칼 맑스의 얼을, 넋[魂]을(‘유령’으로 번역되는 서구의 개념들은 우리에게는 ‘중음신中陰身’, 혹은 참혹하게 횡사한 사람의 넋인 ‘영산’이기보다는 ‘귀신’이나 ‘허깨비’에 가까운 것 아닌가?) 불림하는 굿판에 왠 그리스도교 신학? “훠이 훠이 물러가라, 삿된 것 굿판 어지럽히지 말고 물러가라!” 소금뿌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교는 바알세불의 우두머리 맑스를 이 세계에서 추방하여 지옥에 영원히 감금하기 위해 축귀(逐鬼)·구마(驅魔) 푸닥거리를 150년 넘게 해 왔는데! 초대받았으나 억지로 끼어든 것 같은 어색함, 초라함 혹은 불편함.
    오늘 한국 사회에서 학문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학문’의 장에서 이론으로서의 종교는 겨우 존재한다.7) 오늘 학문의 위기를 말하면서 학문을 다시 문제설정하고 있는 연구 결과들에서 종교는 없다. 백낙청 엮음/김남두 외 지음, 『현대 학문의 성격』, 민음사 2000; 정대현 외, 『표현 인문학』, 생각의 나무 2000; 다만, 조동일, 『인문학문의 사명』,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에서는 종교학이 역사적 지평을 회복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교수신문 엮음,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생각의 나무 2003에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엮여 있을 뿐이다. 여기에 그치는가? 이종영에게서는 “인문주의 학교는 종교교육과의 대립을 외적인 규정성으로 갖고” 있다.(이종영, 『사랑에서 악으로』, 새물결 2004, 11)
    물론 종교의 외부에서 그렇다. 각 종교는 나름대로의 교리적 담론과 그 담론의 매트릭스에서 구성되는 사회 이론·사회 윤리를 생산하고 있다. 그것이 사회 집단으로서의 종교를 향해 비판의 칼끝을 돌리지 않는 언술로. 자기를 성찰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존립 근거를 뒤흔들 수 있는 외부 질서의 발본적 변혁, 혁명 혹은 창조로부터 도피한다. 도피만이겠는가?─오늘 미국 네오콘의 한 기둥인 그리스도교 보수·근본주의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려고 애쓰는 세계 각지의 그리스도교 보수·근본주의자들의 행태를 말해야 하는가?8) 오늘의 종교 행태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에 대해서는 다음 잡지들에 실린 글들을 참조. 『당대비평』 12, 2000년 가을호, 「쟁점·한국의 지식권력 3─권력으로서의 한국 종교; 『사회비평』 33, 2002 가을호, 「특집 II·한국 개신교를 비판한다」; 『진보평론』 19, 2004 봄, 「특집·종교의 권력화, 다른 가능성은?」

    안에서 바깥을 향해 말하고 있지만 바깥에서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들리지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일까? 종교 안에서는 신자들에게 바깥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바깥에서의 사랑, 자비, 정직, 정의, 용서, 화해 등등 인륜의 근본과 어긋나지 않는 삶을. 한국 그리스도인은 각 종파/종단이 주장하는 신도의 수를 합하면 아마 2천만 명을 넘나들 것이다. 불교인들은 그보다 많다고도 한다. 그들로 이루어진, 그들이 이끌어나가기도 하는 오늘 우리 현실은 그들이 지키기로 서약하는 윤리적 계명, 계율에 걸맞는가? 1932년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윤리와 정치 사이의 갈등을 ‘정의’를 축으로 통전시키려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사회적 불의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개인 생활의 최고의 만족을 구매할 수 없다. 우리는 총체적인 인간의 사업을 무절제와 부패로부터 구하지 않고 방치한 상태에서 하늘에 이르는 개인의 사다리를 세울 수 없다.”9) 라인홀드 니버, 남정우 옮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대한기독교서회 2003, 255.
    이 통전의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환상’과 ‘[숭고한] 광기’ 그러나 ‘이성의 통제하에 있는 환상’이다:

    “그 구출 작업에서 가장 유력한 행위자는 낡은[폐기된] 환상들을 새로운 환상들로 대치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 환상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의 집단 생활이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환상이다. 그것은 당장에 소용되는 매우 가치 있는 환상이다.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숭고한 광기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정의는 접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광기 이외에는 어떤 것도 악의를 가진 권력, 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정신적 사악함’과 싸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환상은 무서운 열광주의를 충동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환상은 이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그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성이 환상을 파괴해버리지 않기를 희망할 뿐이다.”10) 위와 같음.(번역을 약간 수정)


    ‘숭고한 광기를 일으키는 환상’[그러나 이성의 통제를 받는]이 아니고는, ‘완전한 정의’에의 환상이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는 정의, 그 정의 수립 없이는 개인 생활의 만족에, 하늘에 도달 할 수 없는 정의. 오늘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하늘에 이르기 위해 쌓는 [말씀의] 제단, 환상과 광기의 제단, 그 제단 위에 세워지는 사다리는 얼마나 많은가! 그만큼 우리 현실은 정의로운가? 아니면, 라인홀드 니버의 성찰은 몽환적 독백일 뿐이었는가? 그리스도교 사회 윤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분과임에도 불구하고 니버가 과도하게 그것을 중심축으로 삼은 것일 뿐인가? 신앙은 윤리와는, 사회적 행위와는 그 목적과 경계가 결국은 다른 것인가? 언제나 솟아오르는 ‘종교와 정치’라는 문제설정!
    니체도 토해낸다: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이 고통받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으며, 모든 인간사가 폭력과 속임수와 불의에 의해서 결정되는 한 인간은 도덕적일 수가 없다.”11) 뤼디거 자프란스키, 오윤희 옮김, 『니체』, 문예출판사 2003, 159에서 재인용.
    ‘불의’의, ‘폭력’의 뿌리[본질주의로 귀결되는 ‘기원’이 아니라], 그것의 생성, 성장, 재생산을 캐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그 뿌리를 걸핏 ‘원죄’ 교리에 담근다. 세례는 그 뿌리를 정화시키는가? 그러기에 그들은 ‘거룩한 무리’, 성도(聖徒)인가? 교회 내부에서만? 외부에서는? 정당과 관계없이 그리스도인 국회의원 동아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수정하는 데 동의할 때 그들의 신앙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국가보안법이 예수가 선포한 도래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비추어 정의로운 법인지 악법인지를 따져보기는 할까? 아니, 정치인으로, 혹은 한 국민으로 투표에서 어떤 정당을 선택할 때 그 정당의 정책을 예수의 메시지에 비추어보기나 할까? 성도들로서!
    불의와 폭력이 그리스도교 제의로서도 결코 변화될 수 없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본능]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종교와 관계없이 정의와 타자를 향한 사랑의 연대가 동물적 본능을 지닌 인간 본성의 뿌리라면 어찌할 것인가?

    3.

    그리스도교를 외부에서 보면 그들의 신학적[교리적] 아포리아 속에서 그 정체성이 모호하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비판적·적대적 사유와 담론 속에서가 아니라 적어도 그리스도교 교리의 대들보를 문제설정할 때 그 모호성이 드러난다면 신학은 그 외부로부터의 사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설정하고 있는 문제를 상당히 우회하는 것이 되겠지만, 외부에서의 사유가 신학적 아포리아의 뿌리를, 뽑아야 할 신학의 눈에 박힌 대들보를 인식론적으로 명료화하고 있다고 판단될 때, 그것은 우회의 번잡함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철학계에서 그리스철학, 형이상학의 대가였던 박홍규는 고대 그리스 철학(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을 분석하면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이 되는 명제인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인용이 길어지겠지만, 깊이 새기면서 알아들어야 할 말이기에 요약하지 않으려고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이 허무에서 만들었다고 주장해. 그런데 만약에 모든 것을 허무에서 만들었다고 하면, 존재와 무는 일 대 일로 대결하는 것이어서, 허무에서 나온 것이 왜 운동과 다(多)로 갈라지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이 안 돼. 학문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돼! 초월적인 존재와 무가 모순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학문의 세계는 취급하지 않아. 플라톤은 이성이 방황하는 원인을 설득시켜 생성계의 대부분을 좋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지, 전지(全知)하다고는 안 했어. 이론상 전지한 지식이 있을 수 있어, 없어? 전능한 능력이 있어, 없어?
    [ ...... ]
    허무에서 나온 것, 허무에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능력dynamis이라고 하지 않아. 혹 그런 말을 쓸지는 모르나, 거기에는 지식이 성립할 수 없어 ... 전지전능omnipotens하다는 것은 말 자체가 인간이 하는 소리일 뿐이야. 이론상으로는 허무에서 무엇이 만들어졌다 할 적엔 지식도 뭣도 없어 ... 전지전능하면 기적이 있어? 전지전능한 신이 다 알아서 해준다는데, 기적이 일어날 필요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초월적 존재와 무에서 출발할 것이냐, 동일성과 타자에서 출발할 것이냐의 문제야 ... 학문은 원인aitia을 찾는데, 존재는 무에 대해, 무는 존재에 대해 원인이 될 수 없어. 만약에 허무에서 무엇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것은 원인이 없다는 이야기야. 학문에서는 그런 것 안 찾아.”12) 박홍규 전집 2, 『형이상학 강의 1』, 민음사 1995, 271-272.


    그리스도교 사상은 “무에서 존재로 가는 하나의 비약”, <모순>에서 출발한다. 그에 비해 철학은 동일성identity에서 출발한다. ‘무로부터의 창조’, ‘무에서 존재로 가는 하나의 비약’은 역설적인 신앙에서는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모순’에서는 철학이, 학문이 불가능하다. 신학은 대답할 수 있다. 신학은 믿음의 학문이다. 신학은 역설이요 비약이다. 그러나 박홍규의 분석은 좀더 깊은 곳을 파고들어 건들고 있다.

    “가장 위에 있는 일자(플로티노스) ... 는 즉자적인 것이니까 방황하는 세계와 완전히 떨어져 있는 초월적 존재자이고, 따라서 그 초월적 존재자로부터 나오는 것은 허무를 거쳐 나와야 된다, 바로 그 점에서는 기독교 사상이 맞아. 창조론,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으로 가. 시간론 읽어 보면 그런 것 나와. 그런데 기독교 사상의 난점이 무엇이냐 하면, 만약에 존재자들이 허무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허무에서 나온 것이 어떻게 다(多)와 운동으로 변하는가가 설명이 안 돼.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존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초자연학Ueber-physik이야. 그러나 윤리니 선이니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자연 세계에서만 성립해. 인간의 본성이 없으면, 도덕도 없고 종교도 없고 국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실정법도 없어.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취급해?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생물의 생태학적인 행태야. 기독교적인 수학, 기독교적인 물리학, 기독교적인 생물학은 없어. 기독교적인 생물학이 없으면, 기독교적인 국가, 윤리, 정치, 미학, 그런 것 다 없어. 그래야지, 이론상으로? 다만 어느 시대, 어느 지방에 기독교 신자들이 특정한 윤리를 갖고 있었다 하는 의미에서는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자연 신학이라고 하지 초월 신학이라고 안 해. 기독교 자체는 초윤리Ueber-ethik, 초정치Ueber-politik인 것이지. 윤리학, 정치학에 관하여 기독교 계통의 여러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면, 일단 자연 신학으로 돌아와서, 철학으로 옮겨와서 이야기를 해야 돼.”13) 위의 책, 275-276.


    “우리가 사회 정의니 하는데, 정의는 기독교 사상이 아냐. 창조에 무슨 정의가 있어? 정의란 연속적인 사물에서의 얘기야 ... 플라톤처럼 윤회하면 기독교 사상 안 나와, 연속성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잘못했으니까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천당으로 간다는 것은 플라톤 사상이지 ... 재림 사상 같은 것도 기독교 사상이 될 수 없어. [ ...] 재림은 도대체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얘기야. [ ...] 부활, 그러니까 아까 존재와 무를 논하는 것 자체가 그 뒤에 어떤 차원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어떤 지식 체계라 그래요. 부활이니 재림이니 다 두 개가 들어가, 두 개. 모순을 통해서 나오는 존재는 항상 하나야, 하나. 그래서 재림이라는 말도 쓸 수 없고, 원칙은 부활이라는 말도 못써. 부활의 <부(復)> 자, 두 번 다시라는 말도 못써.”14) 위의 책, 339-342.


    박홍규의 분석을 우리는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 무에서 존재로의 창조론 위에 그리스도교 신-<학>이 서 있는 한, 부활과 재림, 나아가 [사회] 정의조차도 학문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역설과 비약으로서의 믿음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반론이 가능하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신학 자체의 학문으로서의 논리가 있다. 신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다[종교학도 아니라고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논쟁의 영역일 것이다]. 신학은 신학만의 학문 이론으로 부활도 재림도 사회 정의도 논증할 수 있다. 박홍규는 물론 신학자가 아니다. 그의 신학 이해는 극히 상식적이다. 창조를 둘러싼 복잡한 신학 담론의 세계 속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신학은 다음과 같은 박홍규의 그리스도교의 뿌리에 대한 통찰은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테네는 전쟁에서 이겼어. 요컨대 먹는 문제는 해결되었어. 플라톤을 읽으면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들은 안 나와. 그러나 성서를 읽으면 기적을 일으켜 빵을 먹이고 고기를 먹였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오거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내고 말이야. 성서에는 패전국의 아무런 희망 없는 사람, 약탈당하는 사람, 먹을 것 없고 병든 사람, 몸 파는 여자들이 나와. 희랍에서는 그런 것 없어. 그러나 거기는 사느냐 죽느냐의 경계선에서 헤매는 사람들이야. 우선 먹을 것이 없어. 플라톤의 책에는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나와. 행복한 상태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법nomos만 설정하면 되지만 성서가 그리는 세계는 법이고 뭐고 없고, 법 이전의 세계야. 우선 먹고 나야 법이 생기지. 법이 완전히 없다는 거야 .... 성서에는 죄 없는 사람이 있으면 돌로 여인을 치라고 말하고 있지. 그런데 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법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쳐야지. 그래서 벌을 해야 될 것 아냐. 그러나 너희들 중에 누가 칠 사람이 있냐는 거야. 그 말은 법이 땅에 떨어져서 법이 없다는 얘기야. 법을 지키면서 살 세상이 아니었지. 구약의 십계명이니 랍비니 전부 법이거든. 그러나 그것이 안 통하는 시대였어. 법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시대야.”15) 위의 책, 316-317.


    박홍규의 분석을 극단화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사상/이론/학문으로서의 신학이란 외부에서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게토적 방언일 뿐이다. 그나마 그 종교의 경전도 고대 지중해와 근동 세계의 사유와 특히 그리스 철학의 사유가 뒤엉킨 혼종, 혼합주의의 산물이다.16) 위의 책, 341. 우리 말로 번역된 그리스도교에 끼친 그리스 철학의 영향에 관해서는 베르너 예거, 김승철 옮김, 『초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 전망사 1994 참조. 예를들면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의 경계를 긋게 하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204-270년)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박힌 가시다.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헬레니즘 그리스도교 사상과 플로티노스 철학과의 상관성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위해서는 버트란드 러셀, 곽강제 옮김, 『서양의 지혜』, 서광사 1990, 176-179 참조.
    ‘무로부터의 창조’와 ‘부활’ ‘재림’은 비대칭적 대응 개념으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개념 위에서 정의를 끌어낼 수 없다. 신학의 대답은 무엇인가? 히브리적 사유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의 핵심이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스토아철학으로 트랜스코딩됨으로써 그 정체성이 모호해졌고, 그 모호한 정체성 위에서 구성된 신학이 주류를 이루어왔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박홍규의 말대로 현실 세계에서의 정의를 말하기 위해 ‘자연신학’으로 기울어질 수 없는 독특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가 창건되었다면 어쩔 것인가? 만물의 신성을 주장한다는 누명을 씌우면서 스스로 ‘범신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배타하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호하기만 한 ‘범재신론’이라는 개념으로 슬쩍 세계를 보쌈하는, 그 개념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기에 굳이 ‘신’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는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도 슬그머니 비역질을 해보는, 그 ‘자연신학’ 유파에서의 신이 히브리 역사에서의 신, 예수-포이에시스에서 표현되는 신과는 그렇게 내밀한 신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예수-포이에시스에서 표현되고 있는 신이 예수 세미나 중심의 ‘새로운 탐구’의 해석 경향성에서 드러나듯이 헬레니즘 시대 지중해 제국의 한 변방 피식민지 농민운동이 그 축이 아니라, 바울의 보편화를 떠받치는 헬레니즘 도시에서의 운동이 축이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를 유랑하던 히브리 유목의 삶을 축으로 역사화되었던 신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 신은 정주의 질서로부터의 도주를 끊임없이 추동하고 명령하는 신이라면? 유목으로서의 도주, 도주로서의 유목과 함께 하는 신이라면?17) Regis Debray, tr. by Jeffrey Mehlman, God: An Itinerary, Verso 2004 참조.


    4

    그리스도교 외부의 공적 담론의 장에서 ‘겨우 존재하는’ 신학이라고 했다. 내가 접하고 기웃거릴 수 있는 이론적 정보의 한계 안에서 주류라고 자처하는 신학의 줄기는 타 학문에서 어떤 담론이 생성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서구 학문의 장에서 인문학문이든 사회학문이든 그리스도교 신학에 관심이 없다. 적어도 안또니오 네그리가 “카이로스는 새로운 존재를 생산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비우는 그리스도이다. 카이로스는 표현에 의하여 증대된 시간성이다. 카이로스는 공통된 이름의 프락시스이다”18) 안또니오 네그리, 정남영 옮김, 『혁명의 시간』, 갈무리 2004, 54.
    라고 말하면서 마가복음 1:15의 카이로스라는 단어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 역사변혁의 계기를 바로 그 신학의 카이로스 개념 속에서 읽는 이매뉴얼 월러스타인은 참으로 예외적인 경우일 것이다.

    “한 체제가 위기 속에 있으며 그리하여 어떤 다른 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체제의 붕괴가 눈에 보이는 때이다. 이것이 곧 카이로스라는 개념이 뜻하는 그런 ‘진정한 시간’이며, 또한 당연히 ‘진정한 장소‘인 것이다. 우리가 신학자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바는, 근본적인 어떤 것, 드물게 다가오지만 일단 올 때는 도저히 피할 수 없게끔 다가오는 그런 근본적인 도덕적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카이로스에 직면해 있는 인류, 이름하여 변혁의 시공간에 직면해 있는 인류는 도덕적 선택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진정한’ 시간과 ‘진정한’ 장소에서, 그 길이와 너비를 확실히 잴 수도 미리 예측하여 자리매길 수도 없는 그런 질적인 시간과 공간의 한 계기(moment)에서, 인류에게 억지로 떠맡겨진다.”19) 이매뉴얼 월러스타인, 성백용 옮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창작과 비평사, 1994, 193-194.


    물론 그들의 언술이 그리스도교와는 그렇게 내밀한 연관성도 없고, 또 신학에 무언가를 보태려 하는 것도 아니다.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들을 끌어다 쓸 뿐이다. 월러스타인이 끌어들인 ‘카이로스’라는 개념도 사실 폴 틸리히의 실존주의 신학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기에 “도덕적 선택”인 것이다. 예수가 카이로스를 선포할 때, 그 카이로스는 기존 질서를 총체적으로 전복시키는 정치적 혁명의 선언이었다. 어떤 분야에서든 적어도 오늘의 세계질서의 변혁을 겨냥하고 있는 신학 외부의 이론에서 같은 관점을 가지고 신학 담론이 논의되고 있는 것을 찾음은 헛일이다. 그리스도교를, 그 신학을 발본적으로 조각내려 했던 니체도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을 찌르는 서구의 고딕 성당에 거미줄이 드리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된 이름을 가진 한 종교-사회 집단을 변혁을 향한 연대 세력으로 눈짓함은 이미 물건너간 일일 것이다. 19-20세기에 변혁을 겨냥한 사회운동에서 그리스도교란 일찍 해체될수록 좋은 집단이었을 뿐이다. 이에 각성한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그 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새롭게 구축하려고 했다.20) 에두아르트 부에스/마르쿠스 마트뮐러, 손규태 옮김, 『예언자적 사회주의』, 한국신학연구소 1987; 귄터 브라켈만, 백용기 옮김, 『사회운동과 기독교: 19세기 유럽 사회운동과 기독교 사회운동』, 다산글방 2001; 레온하르트 라가츠, 유장현 옮김, 『예수의 비유』, 다산글방 2001 참조.
    독일의 목사이며 급진적 사회주의자 루돌프 토트(Rudolf Todt, 1839-1887)는 시대와 복음을 꿰뚫어본다: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의 해결에 기여하고자 하는 자는 오른편에 국민경제를, 왼편에 사회주의자들의 학문적 문헌을, 그리고 앞에는 신약성서를 펼쳐 놓고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하나가 결핍되면 해결은 빗나가게 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21) 귄터 브라켈만, 백용기 옮김, 『사회운동과 기독교: 19세기 유럽 사회운동과 기독교 사회운동』, 다산글방 2001, 216.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각자가 이러한 두려운 문장을 변경될 수 없는 법칙으로 감수하며, 자기의 슬프고도 눈물나는 결과를 기껏해야 한탄하며, 어쩔 수 없이 절망적으로 합장하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땅은 눈물의 골짜기다. 그러나 하늘은 그것에 대해 축복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품으로 보고 심지어 상품으로 취급받는 상황이 어떻게 기독교 이상과 결합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도덕적으로 어떤 심연에 놓여있는가? 어떤 신적이거나 인간적인 권리를 가지고 우리는 노동을 인간 자체로부터 감히 떼어놓으려 하는가? 마치 의복을 몸에서 떼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22) 위의 책, 224.


    그리스도교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이러한 메타노이아(탈/향)의 절규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왜? 아담의 노동은 죽음의 형벌이 아니었던가[이브의 출산도 역시]? 인간이면 누가 노동을 즐거워 할 것인가? 생존의 기쁨을 보장하는 노동의 기억이 민중에게서 지워져버린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국가는 민중의 노동의 향유를 억압하면서 인간 무의식의 욕망의 깊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레비아탄이 아닌가? 깔뱅은 폭력에 강압당하는 노동, 수탈당하는 노동의 대가를 신의 은총으로 지불했다. 부르주아의 자본축적 또한 신의 은총이었다. 그 자본을 호위하는, 자본에 기생하는 국가[권력] 또한 신의 은총이어야 했다.23) 자본주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비판적 성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D. Stephen Long, Divine Economy: Theology and the Market, Routledge 2000; Philip Goodchild, Capitalism and Religion: The Price of Piety, Routledge 2002.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 이후의 논의를 가로지르면서 권력을 신학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연구로는 Kyle A. Pasewark, A Theology of Power: Being Beyond Domination, Fortress Press 1993을 참조.
    그리스도인 어느 누가 그 은총을 거부하겠는가? 자본과 권력의 은총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을 인간이 있을까? 그러기에 영국 청교도혁명의 급진파로 수평파를 이끌었던 제라드 윈스탄리(Gerrard Winstanley, 1609-1660)가 성서의 창조 서사를 당대의 역사 현실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삶의 시스템을 개벽시키는 해방 서사로 읽어낸 것도 푸른 바다에 던진 좁쌀 한 알이었을 뿐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먼지로부터, 즉 땅의 먼지로 간주되는 발아래 짓밟힌 가장 미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인간으로 일으켜 세울 것이다. 정의의 법은 제일 먼저 이러한 일을 수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게 하고,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의 발견들이 그들로부터 흘러, 세상의 위대한 자들과 학식 있는 자들의 물이 마치 여름 개천물이 말라붙듯이 바닥이 드러나게 할 것이다.(마태복음 11:25; 고린도전서 1:27) 이러한 회복이 의로운 행동으로 뿜어 나올 때 피조물인 불, 물, 땅 및 공기에서 저주가 풀릴 것이다. 그리고 정의를 내뿜는 그리스도는 ... 유일한 구원자가 될 것이다. 지구나 가축에는 더 이상 메마름이 없을 것이다 ... 무분별한 기후의 폭풍도 없어질 것이다. 모든 저주는 없어질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은 정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스가랴 3:4)24) Gerrard Winstanley, The New Law of Righteousnes, in George H. Sabine edited, The Works of Gerrard Winstanley, Russell & Russell 1965, 185-186. 이 번역은 임희완, 『청교도혁명의 종교적 급진사상: 윈스탄리를 중심으로』, 집문당 1985의 부록으로 번역되어 실린 「정의의 신법」[198-199쪽]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대중들은 결코 속을 수 없었다. 저항과 혁명은 언제나 실패했고, 성공한 혁명의 지배 집단은 이전의 지배 집단과 다름없었다. 맑스주의자 랍비(테리 이글턴) 발터 벤야민이 통찰하고 있듯이 역사주의의 신봉자들만이 아니라 대중[민중]도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보기 위해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비록 땅바닥에 누워 짓밟히고 있지만, 그들을 짓밟고 넘어가는 지배자들의 개선행렬에 동참하고 있는,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봄으로써 항상 지배자에게 유리한 시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언제가 나도 저 승리자의 개선행렬에 동참하여 땅바닥에 누워 있는 자들을 짓밟을 것을 꿈꾸면서.25) 발터 벤야민, 반성완 옮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346-347. 이종영의 권력과 지배, 그 내면성에 대한 발본적 성찰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의 뿌리를 응시하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지배와 그 양식들』, 새물결 2001;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 새물결 2001; 『내면성의 형식들』, 새물결 2002; 『사랑에서 악으로』, 새물결 2004.

    우리는 맑스의 유령에게 물을 수 있다. 인간의 동물적 지배 욕망을 전화시킬 수 있느냐고? 꼬뮌주의 욕망으로의 전화가 가능하냐고.

    5

    이종영은 “그 형식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기에는 아직 때 이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건으로서의 혁명”보다는 “과정으로서의 혁명”에서 단호하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내면적 꼬뮌주의 또는 꼬뮌주의적 내면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이다. ... 꼬뮌주의적 내면성은 ‘존재의 망각’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삶의 외로움과 동경을 되찾고 서로를 위로해주려는 것이다. 타자를 죽이고 자기가 살아남는 ‘자기파괴’를 요청하는 생산양식, 정체성, 권력향유 등과 같이 존재를 망각시키는 온갖 힘들을 벗어나는 것이 꼬뮌주의적 내면성이고, 그러한 힘들이 불가능하도록, 그러한 힘들이 작용할 수 없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꼬뮌주의이다.”26) 이종영, 『내면성의 형식들』, 새물결 2002, 402.


    나는 이종영의 과학적 이론 노동을 총체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것은 앞서 끌어들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찰과 주장, 논쟁이 뒤얽혀 있는 화쟁(和諍)적 담론 장에서, 그리스도교 외부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들에 귀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그 소리들은 깊은 밤 불쑥 찾아드는 나그네가 두드리는 문소리처럼 우리를 소스라치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소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27) 발터 벤야민, 앞의 책, 247.
    그러나 집중해 들으면 낯설지는 않다. 이종영의 ‘내명적 꼬뮌주의 또는 꼬뮌주의적 내면성’의 ‘제도화’를 아직까지는 멸종되지 않은, 아미쉬 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몬드라곤28) W.F. 화이트/K.K.화이트, 김성호 옮김, 『몬드라곤에서 배우자』, 나라사랑 1993.
    등을 ‘토지의 공유화’와 국가기구[권력]의 지양 위에서 사유하고 있는 점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비판하고 있는 오늘의 뉴에이지 영성주의의 내면성을 극복하고 있음은 자명할 것이다. 나아가 섬광과 같은 사건으로서의 혁명, 혹은 그 사건의 표면 효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지금 여기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 혁명 과정 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기에 유토피아적이기를 멈춘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적 정신과 그 실험이 지속되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 속에 있는 욕망으로서의 ‘희망의 원리’때문이 아닐까? 동물과 천사의 중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것을 희망할 수 있는 것 아닐까?29) 우리 말로 번역된 것들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 박설호 옮김, 『희망의 원리』(1-5), 열린책들 2004; 서구 중세에서 종교개혁까지의 메시아운동에 관해서는, 노만 콘, 김승환 옮김, 『천년왕국운동사』, 한국신학연구소 1993; 제3세계 역사 속에서의 메시아운동에 대해서는, 페레이라 데 케이로즈, 이상률 옮김, 『세계의 메시아운동』, 청아출판사 1992;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실험에 대해서는, 마르틴 부버, 남정길, 『유토피아 사회주의』, 현대사상사 1993; 중국의 천년왕국운동에 관한 것으로는, 미이시 젠키치, 최진규 옮김, 『중국의 천년왕국』, 고려원 1993.

    이종영의 가능성의 단호함을 움켜쥐고서도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성공적 이데올로기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그것의 특수한 내용 내부에 있는, ‘피억압자’에게 속하는 주제·동기와 ‘압제자’에게 속하는 주제·동기 사이의 긴장이다: 지배적 관념들은 곧바로 지배 계급의 관념들인 것이 결코 아니다. 아마도 궁극의 사례일 것인 기독교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어떻게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 피억압자들이 지닌 일련의 동기와 열망을 통합시킴으로써(진리는 고통 받고 굴욕당하는 자들의 편에 있다, 권력은 부패한다 ... ), 그리고 그것들을 기존의 지배관계와 양립가능한 방식으로 재표명함으로써.”30) 슬라보예 지젝, 이성민 옮김,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 b 2005, 300-301.


    이종영이 여러 책에서 발본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인간의 본능적인 권력과 지배를 향한 나르시시즘과 욕망, 갈망이 지배와 착취 관계에 의해 ‘왜곡’되고 확대 재생산될 때, 그 확대 재생산의 악순환에서 도주하려고 할 때,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나의 의지는 그것을 원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바울의 부르짖음이다. 과연 무엇이 있어 인간 본능 속에서 꿈틀거리는 죽임과 살림의 역능을 꿰뚫어보여 주고, 살림의 역능이 죽임의 힘을 통어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나는 지금 이 본능을 그리스도교의 교리적 원죄론으로 도둑질하여 재영토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 또아리 틀고 있는 힘의 강도(强度)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목사 허병섭이 20여년 민중목회를 하다 결국 목사직분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토설한 울부짖음 속에서 그 강도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가? 오직 변화의 ‘과정’만 있는 것 아닐까?
    지젝은 그리스도교를 “궁극의 사례”라고 한다. 아니라고 쉽게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궁극적’이라니? ‘광주 혁명’은 왜 광주의 경계를 넘지 못했는가? 증오와 배타의 내면성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은 어떻게 들불처럼 그렇게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는가?31) 로버트 팩스턴, 손명희/최희영 옮김, 『파시즘』, 교양인 2005; 이종영, 『내면성의 형식들』, 「제3장 파시스트적 내면성의 형식」 참조.
    이 물음은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 역사에 대한 성찰의 결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 결론을 향해 던지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은 그이[나자렛 사람 예수]에게서 하느님 안에 가난한 자, 폭력을 버린 자,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를 베푸는 자, 평화를 이룩하는 자,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자들은 복되다고 배웠다. 또한 남을 배려하고 나누며, 용서하고 뉘우치며, 위로하고 양보하며 도움을 베푸는 것도 배웠다 .... 이 무수한 이름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나날의 삶 속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들, 절대 규범들, 지고한 이상들을 살아낼 수 있음을 언제나 다시금 증언하고 있다 ....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신앙은 그저 내세에서의 위로가 결코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불의한 현실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토대이며, ‘전혀 다른 분[것]’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에 의해 떠받쳐지고 강화된다.”32) 한스 큉, 이종한 옮김,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 분도출판사 2002, 971.


    그러나 벌거벗은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 그들은 얼마나 무기력했던가? 비그리스도인 대중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관점에서, 고난당한 자들의 관점에서 세계의 역사를 읽으려는 진보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서의, 상징적 권력으로서의 그리스도교가 민중에게 가한 폭력과 억압, 수탈의 역사에, ‘그리스도교 범죄사’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신학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민중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뿌리를 캐내는 인접학문의 이론들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개벽시키려는 실천에 합류하고 연대했다. 합류와 연대를 눈짓하는 변혁 이론의 장(場), 공간이 신학에 관심하든 말든. 이 일은 신학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업(業)일 수도 있다. 나아가 신학은 푸코가 철학이 감당해야 할 ‘사고의 고행’ ‘자기 훈련’을 신학으로 트랜스코딩하여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 철학 작업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 ... 그것이 사고에서의 ‘고행’, 자기의 훈련이다.”33)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문경자·신은영 옮김, 나남 2004, 23.

    자크 데리다가 1993년 “맑스는 아직도 수용되지 않았다”34) 자크 데리다, 양운덕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한뜻 1996, 307)
    고 맑스의 유령을 초혼(招魂)하면서 ‘메시아’라는 이름을 탈영토화했다.35) 데리다의 작업을 둘러싼 쟁론은 Michael Sprinker ed., Ghostly Demarcations: A Symposium on Jacques Derrida’s Specters of Marx, Verso 1999 참조. 신학에서는 John D. Caputo, The Prayers and Tears of Jacques Derrida: Religion without Relig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7; Yvonne Sherwood ed., Derrida’s Bible, Palgrave 2004 등이 있다. 진태원이 자크 데리다,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2004의 용어해설로 첨부한 “메시아주의-메시아적인 것”은 명료한 요약이다.
    여기서 우리를 수렁으로 잡아끄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술이다: “종교적인 것은 메시아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과 함께, 또한 ─우리가 여기서 특권화한 ─필연적으로 불확정적이고 공허하고 추상적이고 메마른 형식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여기서 그 명령 ─그것이 은밀하거나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을 거듭 확신하는 <해방적인 맑스주의의 ‘정신’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예수 부활-사건 후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어닥친 영은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었는가? 사도행전 2:43-47과 4:32-37의 에클레시아-꼬뮌이다.36) 이것에 대한 연구는 호세 미란다, 정혁현 옮김, 『성서의 공유사상』, 사계절 1987; 호세 미란다, 김쾌상 옮김, 『마르크스와 성서』, 일월서각 1987 참조. Roland Boes, Marxist Criticism of the Bible, T & T Clark International 2003은 맑스주의 비판이론으로 성서를 다시 읽고 있다.
    트로츠키와 엥겔스가 그 에클레시아-꼬뮌의 한계를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한 사회나 국가를 총체적인 에클레시아-꼬뮌의 형태로 변혁시킨 역사도 없다. 오히려 에클레시아-꼬뮌은 끊임없이 중심에서 밀려났고, 이단으로 추방당했고, 유목했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를 광야로 불러낸 유령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브라함의 유목, 히브리의 삶의 투쟁, 예언자의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 예수-포이에시스가 에클레시아-꼬뮌에서 절정에 이른 것으로 성서의 역사를 읽는다.
    오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개벽시키기 위해 합류하라고 그리스도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맑스의 유령일까? 에클레시아-꼬뮌의 얼일까? 맑스의 유령은 민중신학의 문을 두드리는 에클레시아-꼬뮌의 혼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와 예수의 메시지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사회주의와 꼬뮌주의 및 하느님 나라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푸르동과 바쿠닌, 맑스와 레닌에게로 간다”는 라가츠의 말대로 어느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문을 두드리며 호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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