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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회맑스코뮤날레] 이주노동자-외부로서의 내부, 내부로서의 외부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5192, 2005.05.29 22:42:11
  • 이주노동자 - 외부로서의 내부, 내부로서의 외부

    황용연(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대학부장,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운영위원 / 신학)


    1.

    얼마 전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 기념 음반이 제작되고 이 음반에 실린 노래들을 발표하는 콘서트가 있었다. 이 음반과 콘서트에는 이주노동자가 결성한 밴드가 참여하여 노래를 불렀고, 콘서트 중에는 이주노동자가 직접 <<노동의 새벽>>에 실린 시를 낭송하는 순서도 있었다. 그리고 이 콘서트의 수익금은 이주노동자의 유해 송환과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공부방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여러 가지 사회적 주제들 중에 이주노동자에 관한 주제는 특별히 주목받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이주노동자에 관한 주제는 주로 한국 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지적되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 사회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지적하는 단골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떤 시사 오락 프로그램에서 ‘이주노동자 가족상봉’이 상당히 공감을 얻는 코너로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것은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의 일면을 드러내주고 있다고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쉽게 제도적 대안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이주노동자 문제의 특성이기도 하며,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긍정적 시선은 ‘직접 대면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인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2.

    ‘이주노동자’는 흔히들 ‘외국인 노동자’라고 지칭되며 사실 모든 ‘외국인’인 노동자는 ‘이주노동자’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흔히 말하는 ‘이주노동자’는 ‘외국인’인 모든 노동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들 중에서 특정한 직종에 종사하는 일부를 의미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통념 중의 하나는 주로 이들이 ‘3D업종’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특히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3D업종’으로 지칭되는 제조업만이 아니라 식당, 보육 등의 서비스업에도 종사하며 이미 한국의 성매매 여성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직종들은 ‘3D업종’을 한국인들이 기피하고 있다는 또다른 통념이 증명하듯, 주로 한국인들이 취업하지 않는 업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은 한국 경제가 소비자본주의로 전환되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
    1997년 IMF 사태 직후 한국 사회의 보수-개혁 진영 할 것 없이 노골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일자리를 내국인으로 대체해 실업을 줄이자’라는 캠페인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거의 대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이를 방증해 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주노동자’ 관련 노동시장의 특성을 일컬어 사회과학자들은 ‘2차 노동시장’ 설동훈,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사회>>(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를 참조하라.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2차 노동시장’ 현상은 ‘3D 업종’등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사회적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필요도 일정 부분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내국인 종사’ 대기업 직종인 자동차 조립의 경우, 유럽에서는 ‘3D 업종’에 속하며, 따라서 주로 ‘이주노동자들의 일’로 인식된다 설동훈, 위의 책, 77쪽 각주 8번.
    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2차 노동시장’ 현상은 단순히 그 직종에 귀속되는 속성 때문에 ‘내국인’들이 기피하고 그에 따라 그 직종을 ‘외국인’들이 채우게 된다는 설명만으로는 해명이 곤란해지게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어떤 직종에 ‘외국인’들이 주로 종사함으로써 그 직종이 ‘2차 노동시장’에 들어가는 하층 노동이 되어 버리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주노동자’ 관련 문제는 ‘노동시장의 차별화’라는 차원에서 좀 더 깊게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에 대한 가정은 원칙적으로 노동이란 자유 계약에 의한 자유로운 노동력 판매이며 능력에 따른 차이 외에는 어떠한 다른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물론 노동에 대한 이러한 가정에 대해서 맑스주의는 노동자에게는 ‘2가지 측면의 자유’가 있다는 통렬한 비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노동에 대한 가정을 전제한다면, 앞에서 보았던 ‘2차 노동시장’ 현상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2차 노동시장’ 현상이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종류의 노동이 다른 종류의 노동보다 ‘하층’ 노동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것이 시장의 작동에 따른 노동자의 교류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이 작동되면 작동될수록 고착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차별이 앞에서 보았듯이 결국 사회적 차별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차별의 문제는 비단 ‘이주노동자’만의 문제는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최근 또다른 사회적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비정규직’의 문제도 상당 부분 그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평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러한 물음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자유 계약에 의한 자유롭고 차별없는 노동’ 자체가, 사실은 그 밑바닥에 이러한 ‘차별받는 노동’들이 배치되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는 노동인 것은 아닌가.

    3.

    흔히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은 ‘손님’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주노동자들은 대체로 처음 입국할 때 그 나라에 정주할 생각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실제로도 ‘돈을 벌었다면’ 돌아가는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손님’이라는 시선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손님’들이 나가고 들어오면서 결국 한국 내에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데다가, 처음 들어올 때의 목적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생활이 결국 장기 체류와 정주로 이어지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는 점에서 ‘손님’이라는 시선만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이 최근 고용허가제 일부 실시 등으로 이주노동자 운동 진영의 입장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일관되게 이주노동자들의 정주와 장기 체류를 막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주노동자들의 정주와 장기 체류를 반가워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 국가의 본성상 내국인과 외국인은 언제나 차별을 두게 마련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특히 한국의 경우, 오랫동안 합법적 신분의 ‘연수생’ 이주노동자보다 비합법적 신분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더 좋은 기형적 상황이 되어 온 탓에 이미 비합법적 신분의 장기 체류자가 그만큼의 숙련노동자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정주와 장기 체류를 막으려는 한국 정부의 끊임없는 시도는 오히려 2차 노동시장에 해당하는 직종들의 숙련노동자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음이 이주노동자 관련 사회운동 단체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비단 이러한 아이러니까지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주노동자가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이주노동자의 위상은 언제나 2중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던 ‘2차 노동시장’의 영역을 충당하는 존재로서 그 사회에 잉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필수적인 존재가 되고 있으면서도, 국가 단위의 노동시장을 교란하는 존재 내지는 국가 서비스에 잉여 부담을 지우는 존재로 인식되어 언제나 단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2중적인 양상. 이러한 이주노동자의 2중적인 양상은 이미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이주노동자 문제를 정치적인 주요 이슈로 만들고 있기도 하며, 한국에서도 앞에서 본 IMF 사태 직후의 경우처럼 정치적 이슈화할 가능성이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 정부를 비롯한 국가들이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주와 장기 체류, 그리고 비합법적 체류를 단속하려 하는 정책적 시도나 그 정책과 상응하여 이주노동자들을 추방하려는 민간적 시도들은 그 의도와 상관있든 없든 간에, 사실상 본래 목적을 달성하여 이주노동자의 교체나 제거를 촉진하기보다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존재의 근본 조건인 ‘노동차별화’를 심화시켜 이주노동자의 존재의 필연성을 더욱 더 강화하는 근본적인 아이러니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란주, <<말해요, 찬드라>>(삶이 보이는 창, 2003), 87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안 가겠다고 꼭꼭 숨어 있는 사람들은 억지로 붙잡아다 강제출국시키면서도 스스로 가겠다는 사람에게는 벌금 안 내면 못 간다고 도로 내보낸다. 벌금 낼 돈 없으면 가서 벌어 오라고 돌려보내는 곳이 바로 출입국 사무소였다.”


    4.

    이주노동자의 존재 조건이 이러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제일 처음에 지적했던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의 시선에 대해서 일정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사실 앞에서도 이미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직접 대면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지적을 했지만.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 문제가 한국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지적하는 단골 근거로 사용된다고 할 때, 그 시선에서는 ‘이주노동자’의 고통의 이유가 ‘한국인’으로서 ‘외국인’을 잘못 대하기 때문이라고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사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 자체가 이미 노동차별화를 기반으로 하여 조직되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같은 ‘하층 노동’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라면, ‘노동차별’이 먼저 존재하고 그 ‘차별’의 핑계거리로 ‘민족’이 덧붙여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배타적 민족주의’ 운운하는 지적은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이주노동자의 존재가 한국이 소비자본주의로 전환되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는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소비자본주의로의 전환과 ‘하층 노동’의 등장이 맞물린다는 말이라면, ‘민족주의’ 운운하는 지적은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의 밑바닥 이데올로기라는 차원에서도 전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주로 ‘불쌍한’,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로 제시되는 것에도 일정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불쌍한’, ‘도와 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시선은 여전히 ‘정상인’인 ‘우리’와는 다른 존재임을 가정하는 ‘타자화’된 시선이며, 그러기에 만약 그 ‘불쌍함’의 전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바로 ‘배타’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쉬운 시선임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배타’는 여러 번 이야기하듯이 자본주의의 노동차별화 현상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면, 사실은 ‘불쌍함’이라는 시선은 그 노동차별화 현상 위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적인 삶에 우리가 관련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그 차별화의 대상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때에만 가능한 시선일 수도 있다.

    5.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는 ‘고용허가제’의 예에서 보듯이 이주노동자 운동의 힘이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성찰의 계기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
    한 한국인 활동가의 평가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 운동은 “산업연수제도 폐지와 노동허가제 도입이라는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 거의 10년 가까이 투쟁해 왔음에도 겨우 반쪽짜리 제도개선을 이룬 것이 답답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불과 10년 사이에 이주노동자 문제를 한국 사회의 중요 이슈로 부각시키고”,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없는 이주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49년만의 국적법 개정과 고용허가제 도입, 재외동포법 개정 등의 제도개선”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낸 운동이다. 정귀순(부산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한국이주노동자운동의 평가와 전망>. 6쪽. 이 글은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ー조직 자체는 이주노동자 노조로 바뀌었으나 아직 홈페이지가 활성화되지 않음ー홈페이지(http://migrant.nodong.net)의 자료실 80번에서 검색되었음
    (http://migrant.nodong.net/zb/zboard.php?id=pds&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87)
    그러나 동시에 (1) 아직도 이주노동자들의 활동과 조직이 지원단체에 지나치게 의존적이며, (2) 대다수 지원단체가 종교단체에서 공격적 선교활동이나 교세확장 활동의 문제가 존재할 수 있고 이란주, 앞의 책, 251-258쪽에는 ‘외국인노동자 최초 파업’으로 보도되었던 아모르가구 파업 당시 평소 이 기업의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 선교활동과 지원활동을 해 온 한 목사가 다른 이주노동자지원단체의 개입을 꺼려하는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 (3) 지원단체의 양적 팽창이 단체 간의 불건전한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정귀순, 앞의 글, 7쪽.


    이주노동자운동의 이러한 성과와 한계는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동전의 양면인 측면이 있다. 특히 ‘고용허가제’의 문제가 그러하다. ‘고용허가제’는 분명 산업연수제도보다 진일보한 제도이지만, 산업연수제도와의 병행실시라는 측면을 빼고라도 이주노동 창출의 주도권이 사용자 측에 있다는 결정적 한계를 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용허가제’의 도입에 이주노동자 운동 진영이 일정하게 타협하고 수용했다는 또다른 문제도 있는 것이다.
    현재 일어나는 이주노동자운동의 분화는 크게 두 가지 쟁점으로 정리된다. 현재 이주노동자운동의 주류인 외노협은 주로 이주노동자 지원운동단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용허가제 도입에 어느 정도 타협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외노협 중심의 이주노동자 운동이 이주노동자 자신의 주체성을 잘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케빈 그레이는 평등노조 이주지부 대표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소개한다.“종교계에서도 ‘절대 집회 가지 마라’고 이야기하고 해요.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언제까지 우리가 한국인들에게 도와달라고 이야기할 건지, 우리가 바라보고 맨날 이런 식으로 가면, 우리는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밖에 안 된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문제로 앞서가야 한다. 이런 말 많이 하구요. 기본적으로 이 회사에서 문제 생기면 잠깐 도와 줄 수는 있지만, 다른 회사 가도 마찬가지예요. 언제까지 이렇게 반복되야 합니까? 직접 정부에게 우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이런 거 우리의 권리 받으면 어디 가서도 문제없이 일할 수 있고, 또 앞으로 새로운 사람들도 편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계급 이하의 계급’으로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 최장집 편 <<위기의 노동>>(후마니타스) 376-377쪽.
    과, 고용허가제와 자진등록제(2002년 한일월드컵 직전 ‘출국 1년 유예’를 조건으로 자진등록을 받았었음) 등에 어느 정도 타협적이었던 데 대한 비판이, 주로 평등노조 이주지부->이주노동자 노조로 이어지는 운동세력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운동이 분화하면서 이주노동자운동에서는 서서히 ‘노동권’의 문제의식이 부상하고 있으며, 미약하지만 이주노동자 스스로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현재까지의 이주노동자운동이 주로 ‘인권’의 문제의식 하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이 문제의식이 앞에서 다룬 ‘불쌍한 이주노동자’ 이미지와 일정하게 상응하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노동권’의 문제의식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이러한 타자화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이주노동자운동의 방향을 일정하게 지시한다고 할 것이다.
    특히 ‘노동권’의 문제의식을 가장 강하게 체현한 평등노조 이주지부->이주노동자 노조의 움직임은 한국 노동운동에도 일정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이후 서울여성노조에 집단 가입함으로써 서울여성노조가 ‘평등노조’로 변모한 것은 앞에서 지적한 ‘노동차별화’의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가 함께 첨예하게 드러낸 최초의 예로 기록될 것이다. 이주노동자 노조로의 발전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이제 한국 노동운동 전체로 발전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평등노조 이주지부->이주노동자 노조로의 발전 과정에는 동시에 일정하게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의 한계들이 침투되어 있으며, 그것이 조직의 발전에 일정한 장애일 수도 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지평에서도 성찰의 계기가 되는 측면이 있다. 이른바 ‘문민정부’의 수립 이후, 이주노동자 지원운동은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해 왔으며, 동시에 이주노동자 운동 내부에서도 (진보적) 기독교운동이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해 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원운동’의 한계와 ‘종교운동’의 한계, ‘인권’ 담론과 ‘노동권’ 담론의 효과의 차이 등은 (진보적) 기독교운동에도 고민해야 할 지점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지원운동’과 ‘인권’ 담론이 긴밀히 연관되며 이것은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근본적 자기 이해와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은 (진보적) 기독교운동에도 상당한 고민을 안겨 준다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조선족’만을 특화시켜 이주노동자 내부에서의 차별을 조장하고 ‘국적 회복’을 주장하여 조선족 사회 자체에 위협이 된 ‘조선족교회’가 (진보적) 기독교 운동 출신의 인사가 만든 교회였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6.

    앞에서 인용했던 한 한국인 활동가의 글에서는 (장기체류) 이주노동자의 귀환 문제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고민들을 제기한다. 정귀순, 앞의 글. 7-9쪽. 이러한 고민들은 예를 들어 특히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공동체 자체에 내장된 위험요소가 되어 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 (장기체류) 이주노동자가 ‘또다른 자본가’가 되는 것에 일조하고 있지 않은가?
    (2) (장기체류) 이주노동자가 가족의 해체나 재정착 실패 등의 결과를 낳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3) 이주노동자의 본국에서 이주노동의 기회는 일종의 특권이 되는 경향은 없는가?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이주노동자에게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는 것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한편, 이주노동자운동의 핵심 주장인 노동허가제에 대해서도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물론 노동허가제는 이주노동 창출의 주도권을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가 갖게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진전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노동허가제가 있는 국가에서도 미등록노동자의 문제는 여전하더라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라면, 이 역사적 경험은 이주노동이 ‘노동허가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앞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은 ‘2차 노동시장’ 현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들이 아직까지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최근 이러한 ‘위협’을 주장하는 세력들(<외국인노동자대책시민연대> 등)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노동허가제’ 등으로 이주노동이 활성화되어서 그러한 ‘위협’이라는 인식이 생길 경우,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은 과연 지금이주노동자운동에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우호적 입장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이 한국 사회의 노동차별화의 한 부분이라면, 그러한 노동차별화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은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주노동의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을 볼 문제가 아니며 한 국민국가 차원에서도, 국제적 차원에서도 깊은 차원의 문제로 내재하는 문제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예일 것이다. 이것은 이주노동의 문제가 ‘현재의 삶의 양식의 보완’만이 아닌 ‘다른 삶의 양식’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다른 자본가를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라는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심각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또한, ‘합법노동’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본질인 ‘노동허가제’의 문제나, <외국인노동자대책시민연대> 등으로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이주노동자 일자리 위협론’의 문제는, 이주노동의 문제가 근원적인 ‘사회통합’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현재 이주노동자운동의 대표적인 담론 중의 하나가 “차이를 존중하여 이주노동자를 한국 사회에 수용하자”라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 ‘사회통합’의 문제의식은 이주노동자운동도 공유한다는 말이 된다.

    이 지점에서 이주노동자운동이 ‘소수자운동’ 중의 하나로 범주화되기도 함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소수자 운동의 문제의식에서 본다면, 현 사회의 ‘다수자’ 중심성은 근본적으로 소수자에 대한 은폐와 억압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자 운동의 문제의식을 관철한다면, 소수자는 다수자 중심의 사회에 ‘통합’될 수가 없으며, 다수자 정체성을 해체하여 다른 사회를 만듦으로써 소수자 정체성까지도 해체되는 그러한 길을 걷게 마련이다. ‘외국인 학대’만이 아닌 근원적인 ‘노동차별화’의 문제. 그러나 ‘합법노동’의 범위를 확대하는 ‘노동허가제’ 이후에도 또다시 등장하는 미등록노동자의 문제.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칫하면 ‘또다른 자본가’를 만들 수도 있는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의 이런 속성들은 방금 이야기한 ‘소수자운동’의 특성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다수 대중이 걸을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어쩌면 앞에서 본 바대로,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주노동자 문제를 대해 온 것은 또 하나의 ‘다수 대중이 걸을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주노동자운동의 길이 ‘다수 대중이 걸을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길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길을 그려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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