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로그인

64
yesterday 160
visitor 911,223
  • [제83회] '광주이후'의 신학하기(이석규)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6054, 2005.07.26 10:17:24
  • “아우슈비츠이후”에서 “광주이후” 로의 이행의 의미
    : ‘광주이후의 신학하기’로서 민중신학을 하기위하여

    이 석규(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전 감신/성공회대 강사, 정치신학)

    주제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 민족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분단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분단 현실은 대부분 외세와 여기에 종속된 세력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한반도는 물론이요, 동 아시아의 과거사를 바로 찾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의 힘으로 상징되는 제국들에 의해서 역사가 바로 잡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문제는 한. 중. 일에 의해서 제기되는 다양한 역사인식에서도 비롯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정작 역사의 주체의 역사서술의 주체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05년 일본이 강제한 조선에 대한 외교권 박탈을 시작으로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었다. 그로인해 식민지배가 표면화되었고, 일본이 조선을 넘어서 중국침략의 정책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는 조선은 ‘강제징용 및 노역’ 그리고 ‘정신대’라는 참혹한 수탈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일본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수십만의 희생자를 내고서야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공식적인 항복 선언으로 종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굴욕적인 패배와 그로 인한 많은 희생자들로 쌓인 역사를 망각하고 승리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꾸미고 있다.

    아우슈비츠 비극은 무엇보다도 독일인과 유대인의 사이에 벌어진 참혹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아우슈비츠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사이의 가슴 아픈 관계의 교정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란 바로 시대와 상황을 무시한 망각의 구원의 논리에 대한 교정인 동시에 넘어서기이다. 이것은 유럽의 신학의 흐름에서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반도에서 신학하기 특히 한국의 민주화가 성숙할 있는 맹아를 1980년 ‘광주민중항쟁’으로 그 시발점으로 정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광주 이후’라는 표현양식을 한반도에서 신학하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사용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아우슈비츠이후”라는 표현은 요컨대 정치신학적인 전망에서 특히 메츠의 신학적 범주인 ‘기억, 이야기 그리고 연대성’ 가운데 하나이다. ‘탈현대’, ‘현대 이후’ 등의 의미와는 달리 여기서 이러한 표현은 우선 훈계어(Mahnwort)로 이해되고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망의 제시로서 ‘이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민중신학적인 전망에서 ‘이후’라는 표현양식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여기에서 어느 정도 정치신학에 기대어 민중신학의 전망으로서 민중신학이 마땅히 ‘광주이후’라는 우리식의 훈계어로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식해야 할 것 있다. 광주에 제국 미군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군산에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스텔스 전투기가 다량 배치된 상황이다. 그리고 평택에는 동두천의 미2사단과 용산의 미8군의 재배치로 인해 미군기지가 확장될 전망에서 제국/제국주의의 지배가 더욱 첨예화될 위험한 상황이다. 올 해로 광주민중항쟁 제25주년을 민족의 고난사로서 회상하고 오늘에 그 의미와 신학적인 도전과 과제를 내다본다.

    ‘광주이후’로 시작하기

    2005년은 고통의 역사적 관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자 비참을 회상하는 해 이다. 중유럽에서는 1943년에서 45년 사이에 히틀러에 의해서 유대인과 폴란드 인등을 집단 살해한 홀로코스트로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 사건의 해방 60돌을 맞이하는 해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1979년 대통령암살사건과 1980년 당시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불안정 속에서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광주 민중/시민의 희생을 기억/기념하는 ‘광주민중항쟁’ 25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사건/역사로 독일 수상 빌리브란트가 1970년 아우슈비츠를 방문해 무릎 꿇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독일인의 참회의 역사와 독일인과 유대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역사로 구성하는 여정이 시작 된지 35년이 되었다. 광주항쟁은 1987년 6월 민중/시민항쟁을 기점으로 광주항쟁에 대한 재해석과 희생자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데도 아직도 우리는 이 5.18사건의 역사화의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을 안고 있다. 이른바 탈 식민과 탈 제국주의 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오늘의 시대에서 당시 음모와 폭력을 저지른 배후 조종자들 규명과 처벌이 속 시원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주 민중/시민의 정체성과 한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들이 매우 미흡하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이 과거 유대인학살에 대해 참회하고 매 년마다 이를 통해서 자신 독일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은 이제 몸으로, 정신으로 관습화되었다. 이들은 아우슈비츠라는 인간비참을 망각한 채 그 무엇도 앞으로 해 나갈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로 자신들의 전통들(교회와 신학, 철학적 사상들)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하버마스가 제창한 ‘의사소통이론’이나 탈근대, 탈구조주의 사상들도 바로 근대의 관념론적 사고와 이러한 인간비참을 극복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로서 ‘탈 형이상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이와 유사한 운동이 바로 메츠(가톨릭 예수회), 몰트만(개신교) 그리고 죌레(개신교) 등의 신학자들이 제창한 에큐메니칼 정치신학인 것이다. 특히 몰트만과 죌레에 의해 한국에 소개된 정치신학은 한국의 민중신학과 민중운동 등에 서로 많은 영향력을 주고받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발전을 자극하는데도 영향을 끼쳤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에 나선 광주민중/시민에게 저지른 ‘광주오적’으로 대표되는 신군부와 군인들의 학살만행사건에 당시 민중/시민은 가해자의 시각인 당시 군부에게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집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했다. 하지만 희생자의 시각에서, 참다운 역사의 시각에서 광주의 사태는 20세기 후반 가장 비극적인 현대의 ‘홀로코스트’중의 하나이며 87년 6월 민중/시민혁명이 이루어 낸 자유(직접선거제)와 그 이후 ‘광주민중항쟁’이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최 정운, <5월의 사회과학>, 79-
    과연 광주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은 이러한 죽음들 이후에 과연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과 신에 관해서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의 상처는 치유되었고 25년 전의 광주는 망각되었는가.

    이제 우리는 유럽의 정치신학이 보여 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하기로부터 ‘광주 이후’의 신학하기라는 이행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실존적 과제이며, 토착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우슈비츠는 시간적인 의미의 과거가 아니기에 광주를 기억하게 하는 힘을 제공할 것이다. 광주 또한 시간적인 의미의 과거가 아니기에 아우슈비츠를 일깨울 것이다. 두 과거는 과거에 공존하면서 현재에 공존하며 상호의 기억이 주는 잠재력을 과시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광주: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회상(remembering)이란 내적 성찰이나 회고처럼 평온한 행위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재라는 시대에 아로새겨진 정신적인 외부의 상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조각난 과거를 다시 일깨워 구성하는 고통을 동반하는 작업일 것이다(호미 바바).” 도미야마 이치로(임 성모 역), <전장의 기억>, 132-


    1980년 5월 이후 광주민중항쟁의 역사가 민중/시민들에게 의도적으로 침묵되고 망각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하지만 “5월의 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기억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박 영주, 2004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기념 논문자료집’(전남대) 참조
    희생자의 과거의 고난의 역사는 희생자의 상처의 흔적(Trauma)으로만 보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는 또한 이 역사를 희생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동력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이제 기억/기념과 더불어서 증언으로서 기록으로 남게 되었고 역사로서 살아 존재한다.

    북동 유럽의 폴란드에 작은 지역 아우슈비츠는 자연적인 지역명칭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평범한 낯선 곳이다. 그곳에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이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고 언제부터 그곳이 공포와 죽음의 상징하는 장소로 바뀌었고 세상에 가장 유명한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는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특히 1943년부터 1945년 까지 나치(NAZI) 독일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와 유대인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사건이 틀림없이 아우슈비츠라는 지역을 홀로코스트의 ‘사건의 장소’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의 날이 온갖 상처와 원한이 식지 않은 채 60년의 노년의 나이를 맞이하고 있다. 60년이라는 이 기간 동안에 아우슈비츠의 가해자들과 희생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아우슈비츠로부터 여전히 무엇을 기억하고 또는 망각하고 있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스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러한 질문은 수 없이 반복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수 없는 아우슈비츠가 그 이후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라고 하는 이곳에서 대부분 유대인인 120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2,500여개의 수많은 ‘아우슈비츠’에서 무려 600만 명이 현장에서 학살되었다. 가해자는 나치로 상징되는 독일군들이고 희생자들은 유럽의 원근각처에서 끌려온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 당시 히틀러의 증오와 멸절의 대상들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장소에서 산자와 죽은 자들은 어쨌든 아우슈비츠의 ‘현장의 증언자’요 ‘사건의 증언자’이다. 이들은 죽음을 경험한 희생자들이자 죽음을 본 목격자들이요, 공포의 죽음을 세상에 알릴 증언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한 개인이자 집단이기도 하다. 그들의 상처는 깊다. 그 깊이만큼 당시의 공포에 대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기억 또한 깊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우슈비츠의 증후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희생자들은 또한 아우슈비츠의 공포와 죽음을 망각하고 싶은 의식도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깊은 상처와 경험은 때때로 자신의 일상을 가로막는 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자들에게 아우슈비츠는 ‘트라우마(Trauma)의 장소’인 것이다. 알라이다 아쓰만, <기억의 공간>, 430-432.
    어쨌든 희생자들은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살아가야 한다.

    아우슈비츠라는 ‘집단학살 사건’은 또한 희생자 민중들의 ‘소유권박탈’인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은 ‘하느님은 수용소 가스실에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신뢰한 강한 신이 자신들을 구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Ottmar John, , 44-
    이러한 무고한 공포와 죽음 앞에서 과연 정당하게 신의 존재를 고백할 수 있을까.

    이와 반대로 600 만의 존엄한 생명들을 가스실에서 그리고 생체실험으로 난도질하고 학살한 가해자들은 학살과 죽음의 현장을 기억하고 싶어 할까. 이들은 ‘기억의 증후군’보다 ‘망각의 증후군’으로 지배당하고 있다. 가해자들은 공포와 죽음 대신에 국가의 민족의 승리라는 성취욕에 사로잡혀 ‘역사의 승리’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아우슈비츠는 ‘공포와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정복과 승리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그런 장소이며 이러한 장소가 현재와 미래에도 반복되기를 욕망할 것이다. 가해자와 희생자의 경계선에서 과연 아우슈비츠는 어떤 장소로 기억되고 망각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망각해도 되는가. 아우슈비츠의 타자인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무엇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사건과 장소를 그냥 망각의 구덩이에 희생자들과 더불어 가두어야 하는가.

    60년 노년의 ‘아우슈비츠의 기억’ 곁에 25년 청년의 ‘광주의 기억’이 있다. 광주의 기억은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한 운동을 하는 시기인 20대의 중간기이다. 1979년에서 1980 년 사이에 분단된 남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광주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증언할 수 있다. 대통령 암살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앞장 선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사건. 이러한 동족의 경험들이 이율배반적으로 자신에게 거의 같은 시기에 운명처럼 찾아 왔다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가장 성장이 촉발되던 시기에 ‘광주의 흔적’이 멀리 떨어진 미국의 군사력이 배치 된 영토들 사이에서 목격될 수 있는 것이다. 탱크와 공포로. 그리고 광주에서 일어난 것과 아주 다른 희생이 발생했다. 죽음을 부른 버스-기계의 전복으로. 필자 자신이 고통당한 80년 초 여름의 비연속적 우연의 불의의 사고로 인한 상처의 기억을 광주의 80년과 시공을 넘어서 그 연결의 독특성을 표현했다.
    이로써 개인사는 사회로 사회사는 개인사로 이행이 가능하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가장 신뢰 했던 인물이며 보호자요 친구였던 비서실장의 총탄에 제5공화국의 실권자 박 정희는 이 세상 사람이 더 이상 아니었다. 한 개인이며 국가의 통치수반인 그의 죽음은 남한뿐만 아니라 긴장된 북한 그리고 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국가들 특히 남한을 지배하려는 미국에게 한반도의 현실이 그저 평화롭지만은 않은 긴장과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1945년 이후로 지속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경제적인 위협과 압박은 민주화의 열망과 투쟁에 앞장 설 1980년 광주를 살얼음으로 만들었다. 그런 이후 1987년 6월 민주화를 위한 민중/시민 투쟁의 결실로 비로소 신군부에 의해서 속칭 ‘폭도들의 난’으로 낙인찍힌 ‘광주사건’은 ‘5.18민중항쟁’의 정신을 간직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인정되었다. 5.18민중항쟁은 분단과 식민, 탈 식민 그리고 신 식민의 시대에 어떻게 무고한 민중/시민이 학살되었는지 상황을 고발한다.

    가스실에서 ‘살인의 광기’로 수백만을 학살한 아우슈비츠의 기억과 망각 그리고 도시 원근 각처에서 산산이 흩어져 수백 명 내지는 이보다 더 많은 무고한 민중들을 학살한 광주의 기억과 망각은 분명한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공통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반복적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음모, 공포, 전율 그리고 탄식이 그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기억과 가해자인 독일의 기억의 정체성 을 위한 노력으로 ‘기억의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광주는 민중/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군부정권의 쇠퇴 그리고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민주화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역시 ‘기억의 장소’로 틀이 잡히고 있다. 기억이 국가뿐만 아니라 민족과 민중의 자기정체성을 재구성하는 힘이라면 망각은 그와 반대로 모든 정체성을 파괴하는 장치임에 틀림없다. 지배자가 이러한 사건을 망각하게 만드는 주체라면 희생자들 민중은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주체이다.

    아우슈비츠 사건/기억에서 광주의 사건/역사로의 이행

    “오직 역사화 됨으로써만 영원할 수 있다” 정 일준, 위의 자료집 참조
    라는 말에 나는 이것을 ‘기록의 역사’와 ‘기념의 역사’로 이해하면서 동의한다. 왜냐하면 기억은 그 자체로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사라지고 나면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건은 기록과, 기념관 그리고 장소의 보존 등으로 역사화의 이행을 반드시 거쳐야만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게 전승되고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전승’은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아주 차이가 나는 하지만 동일한 반복으로 이해되는 아우슈비츠와 광주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는 ‘공포’, ‘전율’ 그리고 ‘죽음’이라는 개념이 20세기에 문명화된 인간들에게 어떻게 경험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그 장소 그 자체이다.

    아우슈비츠는 분명히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유럽 정신의 위기와 정체성물음에 도전장을 던진 인간비참 그 자체이다. 아우슈비츠는 여기에 두 가지 위기들을 던졌다. 첫째는 유럽의 정신사를 만든 종교의 위기이며 두 번째는 유럽의 정신에다 진보적 문명의 혁명을 가져다 준 정신과학의 위기라는 것이다. 정신과학의 위기는 이성의 위기이며, 계몽의 위기이며, 근대성의 위기이다. 하버마스와 ‘탈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사상가들은 이러한 위기들을 ‘이성의 의사소통적 구조’와 ‘도구적 이성’의 해체를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다. J.B.Metz, 'Anamnetische Vernunft in Zwischenbetrachtungen im Prozess der Aufklaerung', Juergen Habermas zum 60. Geburtstag, 1987, 733-


    아우슈비츠에서는 과연 어떤 정신이 사라진 것인가. 메츠는 말하기를 바로 ‘기억하는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기억은 망각된 자의 흔적을 드러나게 한다. 기억은 지나간 고통의 망각을 거부한다. 위의 책, 736-
    따라서 고통당했고 ‘고통당하는 자의 권위’는 기억의 ‘열린’ 특성을 가진다. 기억은 현재 살아 있는 자들에게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관심 갖게 한다. 위의 책, 737-
    기억은 공공의 역사를 필요로 하는 ‘변수’를 보장한다. 그리고 현재의 지배의 역사와 사회를 혁명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에 이러한 의미에서 기억은 '위험스러운 것‘이다. H. 마르쿠제, <일차원의 인간>


    ‘기억의 장소’소서 아우슈비츠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고, 접속시키며 산자로 하여금 반복적으로 기억, 성찰하여 죽은 자와 희생자와 연대하도록 재촉한다. 여기에서 홀로코스트의 체험자의 말을 빌려 보자.

    “여기서 그들은 죽었다. 천천히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대열 속에서, 유럽의 도처에서 와서. 이것은 그들이 쳐다보았고 아직도 바라보고 있는 지평선이다. 이곳은 포플러 나무다. 이곳은 창문 유리로 햇빛이 반사되는 감시탑이다. 이곳은 그들이 지나간 문이다. 날카로운 빛이 나타나고 있고 샤워 시설이 없었던, 금속판으로 된 사각의 기둥들이 있는 공간들이다. 이곳은 그들이 갑자기 어둠 속으로 치달은 담장이다. 구멍 사이로 새어난 가스 속에서. 이러한 말들, 이러한 인식들은 아무 것도 말해 주지도 않으며,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잔디로 뒤덮인 돌 더미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알라이다 아쓰만, <기억의 공간>, 435-


    인용문에서 표현된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의 ‘여기’는 매우 이중적이다. 과거의 ‘여기’는 현재의 ‘여기’를 일깨우고 미래의 여기를 넘나본다. 하지만 과거의 ‘여기’와 현재의 ‘여기’사이에는 기억이 채울 수 없는 시간적, 공간적인 변화의 질적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사건의 현장’은 ‘기록의 기억’을 통해서, 기념관의 기억을 통해서 그리고 현장의 기억을 통해서 ‘역사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화는 국민, 민족 그리고 민중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워준다. 유대인과 독일인의 사이를 위한 아우슈비츠라면 광주는 누구와 누구 사이를 위한 사건인가.

    광주 - 현장을 통해서 본 기억의 사건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제83회 월례포럼 (2005.7.25)

    1980년 5월 18일에 광주라는 남녘의 대도시에 한 가족의 일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국가에 의해서 자행된 폭력이 일상의 기억을 공포와 죽음을 기억을 넘어서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해체시키는지 그것을 고통의 기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고통의 기억은 가족의 새로운 정체성을 각인하며 새롭게 구성하게 만들고 있다.

    전남도청 상무대 앞에 줄지어 누워있는 죽은 사람들, 그 속에 숙희의 오빠가 있습니다. 숙희 오빠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어 어머니도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숙희만 알아볼 수 있었는데 숙희가 오빠 손바닥에 쓴 ‘숙희 은반지’라는 글씨 때문이었습니다. 숙희 오빠는 숙희 생일 선물로 은반지를 사줄 생각으로 시내에 나갔다가 변을 당합니다. 숙희는 자책감에 오빠의 시신을 모른 체합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며 허망한 세월을 보내는 어머니는 실성을 합니다. 미쳐가기는 숙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을 놓은 어머니에게 숙희는 고백을 하는데, 흥분한 어머니와 몸싸움을 하다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숙희에게 ‘너 탓이 아니야, 세상이 잘못된 거야’라며 이야기를 해준들 위안이 될 까요. 민주공원 2005년 5월 호 참조


    키케로는 장소에 내재되어 있는 기억의 힘의 위대성을 극찬했다. 알라이다 아쓰만, 같은 책, 391-394.
    아우슈비츠가 기억을 통한 ‘트라우마’의 장소로, 정체성 회복의 장소로 간직될 수 있는 것은 장소가 주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25살의 광주가 가진 ‘기억의 장소’는 무엇인가. 광주민중항쟁의 ‘기억의 장소들’을 열거함으로 그것이 주는 의미를 재구성함은 매우 의미가 크다.

    전남대학교 - 광주역광장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 금남로 - 도청 - 광주YMCA 옛터 - 광주 MBC - 녹두서점 - 전남대학교병원 - 광주기독병원 - 광주적십자 - 조선대학교 - 배고픈 다리 - 주남마을 - 광목간(진월동, 송암동) - 농성광장 - 상무대 옛터 - 무등 경기장 - 양동 시장 - 광주공원광장 - “진실, 평화와 연대”의 열린 광주로

    이 ‘기억의 장소들’에서 무슨 일어났는가 반복되어 질문된다. 5. 18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이곳에서 항쟁의 불씨가 뿌려졌다. 광주 민중/시민과 신군부의 계엄군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고, 수십만의 민중/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한 항쟁을 펼쳤다.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곳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고, 군부독재 대한 민중/시민들의 항의와 분노가 분출되었다. 이곳에서 광주항쟁소식을 들은 민주인사들의 사태수습과 희생을 막으려는 모임이 있었다. 이곳에서 민주화를 촉구하는 학생들의 궐기대회가 있었다. 이곳에서 밀려든 부상자, 치명상을 입고 신음하는 중환자들의 아우성치는 외침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역시 이러한 부상자들을 위한 민중/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다. 이곳에는 신군부 계엄군을 막아내고 시민방위군이 있었다. 이곳에는 또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이 있었다. 이곳에는 여전히 희생자들의 혼령이 살아 있다. 그리고 이제는 희생자들이 주체가 된 진실의 기록과 역사가 드러나고 정립되어야 한다. <민주공원> 2005년 5월호 참조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역사화의 과정에서 권력에 의해서 끝없이 은폐되고 왜곡될 때 진실 또한 드러날 수 없어 묻혀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지식권력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희생자들이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는 과정 즉 ‘주체화’라는 개념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일준, 2004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논문 자료집>(전남대)
    이러한 의미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 사건과 역사의 주체는 바로 당시 학살당하거나, 부상당한 그리고 항쟁에 참여한 상처 입은 민중/시민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이들로 구성될 때에만 사건의 진실은 역사의 진실로 이어질 수 있고, 승리와 정복의 역사가 아닌 희생자의 역사 속에서 참다운 역사가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가해자가 이러한 진실의 역사에 참여하는 길은 반복적이고 생산적인 역사적인 참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역사는 영원하지 못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광주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크다. 하지만 파시즘의 잔악함과 폭력성을 드러낸 600만 이상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홀로코스트이며, 20세기 과학의 위기를 가져다준 아우슈비츠와 나란히 같은 세기 후반에 이른바 탈 식민시대와 탈 제국주의 시대에 여전히 폭력의 잔인함을 폭로케 한 5.18광주가 갖는 유사성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들과 독특한 유사성은 오늘날 여전히 다양한 폭력의 반복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인간이 창작한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진보라는 괴물이 가지고 있는 잔악함과 폭력성이 지구 곳곳에서 고발되고 폭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생자가가 주체가 되어 만드는 두 사건이자 동시에 역사는 현대의 정신사의 위기를 일깨우고 산자를 기억현장에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연대로 불러 모아 역사를 경험하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에서 ‘광주 이후’의 신학으로: 오늘의 민중 신학으로

    중유럽에서 탄생한 진보신학들 가운데 아우슈비츠라는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신학의 한 가운데 끌어 들이고 ‘사건의 신학’에서 ‘역사의 신학’으로 탄생된 신학이 정치신학이다. 남미의 해방신학, 북미의 정치신학과 흑인신학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제3세계 신학 등은 20세기 중 후반에 전통적인 수구신학과의 단절과 넘어섬으로써 탄생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유럽의 정치신학은 이전의 칼 슈미트로 대표되는 ‘정치신학’과는 매우 대조되는 신학이기에 이른바 ‘새로운 정치신학’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 국가의 통일된 정치체제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신학이나 헤겔의 우파적인 정치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반해서 독일을 중심으로 메츠와 몰트만 그리고 죌레가 함께 시작한 정치신학은 종교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둔 신학이다. 정치신학은 인간의 고난사인 아우슈비츠라는 인간의 비극 사건을 ‘고난의 역사’ 즉 참다운 역사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역사는 지배와 정복의 역사로서 가해자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정치신학은 타자와 연대하기 위한 시선에서 역사를 재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신학은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을 지금까지 서구의 사상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종교의 정체성의 위기로 인식함으로써 신학을 재구성하려는 ‘반 신학’이요 ‘탈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회심의 신학’이요 ‘반성의 신학’이다.

    희생자인 타자를 위한 시선을 신학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고 희생자가 아닌 유럽의 시민계급을 ‘고난당하는 주체’로서 연출하고 역사의 주체로 재구성하는 신학이 정치신학이다. 민중 신학은 희생자를 역사의 주체로 세우고 연대하는 기존의 신학에 대한 ‘반 신학’이요 ‘탈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 신학은 무엇보다도 ‘전태일 사건’을 신학적인 근거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전태일 사건은 개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인간해방과 자유를 위한 예수의 사건과 연결, 접속 그리고 접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태일 사건은 예수 사건의 오늘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중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사건의 신학’이 두드러지게 된다. 예수사건이 개별자의 사건이 아니라 집단성을 의미하듯이 민중 신학에서 민중은 개별자이면서 집단으로 이해된다. 광주민중항쟁은 바로 이러한 민중신학적인 의미에서 집단적인 예수의 고난이면서 민중의 고난의 반복된 사건인 것이다. 고난의 현장에서 고난의 사건을 담당한 주체는 바로 민중인 것이다.

    역사는 고난의 사건으로 재구성되는 민중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서 남동에 따르면 ‘역사로서의 계시’(판넨베르크)는 ‘하부구조’에서 ‘아래로부터’ 민초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안 병무도 지적했듯이 지금까지의 역사는 지배자와 왕조가 이끈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민중이 수탈당하는 역사였기에 고난사로서 민중의 역사는 침묵되고 망각되어 은폐되고 왜곡되어 중심부에 벗어나 잊혀 지게 되었다. 역사는 정치신학적인 시각에서 타자를 위한 시선으로 서술되는 역사로만 보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한계를 넘어서 타자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중심부가 아닌 외부에서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서술하는 민중-되기로써 서술되는 주변부로서의 고난사인 역사로 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와 광주가 사건에서 역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희생자의 시선이 역사서술에서 결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건이 역사로 이행되는 과정은 가해자와 지배자에서 은폐와 음모로써 왜곡될 것이고 그 역사는 중심부에서 다시 민중을 지배하는 가해자의 역사로 변질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치신학이 내건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하기에서 분단의 고통과 통일의 희망을 증언하는 실천하는 ‘광주 이후’의 신학하기라는 이행의 과제가 중요하다. ‘고통의 신학’이요, ‘현장의 신학’이요, ‘사건의 신학’이요, ‘증언의 신학’이요, ‘이야기의 신학’인 민중신학 이야말로 오늘의 암울한 시대에 ‘희망의 신학’과 ‘책임의 신학’으로서 참다운 신학일 수 있다. 이러한 민중신학은 시대에 무감각한 반복적인 전통신학이 더 이상 아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이러한 ‘형이상학 이후’, ‘그리스도교 이후’, ‘관념주의 이후’, ‘종교 이후’의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이야 말로 오늘의 책임적인 신학이다. 전 지구의 사회구조가 강자와 약자 그리고 다수자와 소수자로 구성되어 강자와 다수자가 지배하고 갈라지는 상황에서 오늘의 민중신학은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광주 이후’ 아마도 80년 광주민중항쟁과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로 ‘광주 이후’라는 명칭이 소수자에 의해서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광주 이후’는 하지만 헤게모니와 지역을 넘어서는 추상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 이후’, ‘6.25 이후’ 그리고 ‘베트남 이후’의 신/학의 잠재성이 드러난다.
    의 신학이어야 하는 것이다.(sklee192003@yahoo.co.kr)

댓글 0 ...

http://minjungtheology.kr/xe/45490
번호
분류
제목
닉네임
73 카테고리 제3시대 6013 2007.06.25
72 카테고리 제3시대 5024 2007.06.25
71 카테고리 제3시대 5368 2007.05.07
70 카테고리 올빼미 5033 2007.03.30
69 카테고리 올빼미 6438 2007.03.08
68 카테고리 제3시대 8121 2007.01.30
67 카테고리 5423 2006.11.16
66 카테고리 8652 2006.09.26
65 카테고리 6887 2006.08.29
64 카테고리 7619 2006.08.29
63 카테고리 16317 2006.06.12
62 카테고리 6142 2006.05.09
61 카테고리 9919 2006.02.27
60 카테고리 거사 5867 2006.01.24
59 카테고리 거사 6345 2005.11.30
58 카테고리 최형묵 18562 2005.09.30
57 카테고리 정나진 7053 2005.09.11
56 카테고리 최형묵 4033 2005.09.02
카테고리 최형묵 6054 2005.07.26
54 카테고리 최형묵 4821 2005.06.28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