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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1회] 마태복음에 나타난 ‘작은 사람들’(김재성) [카테고리]
  • 조회 수: 16319, 2006.06.12 15:19:21
  • 마태복음에 나타난 ‘작은 사람들’

    _김재성(한신대 교수 | 신약학)

      
    1. 머리말

    마태복음은 예수의 선포를 후대의 상황에 맞게 변경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이를테면, 산상수훈의 복 선언에서, ‘가난한 사람’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굶주리는 사람’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바꾼 것을 두고, 마태 기자가 실질적인 곤경의 문제를 종교화 내지 정신화 했다거나, 부유한 사람들을 배려하였다는 평가들을 하곤 한다. 이러한 평가들은 대개 마태복음의 몇 몇 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마태 공동체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마태복음 전체를 일괄적으로 평가하는 데 문제가 있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들보다 ‘작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10:42; 18:10, 14). 또 이것과 관련된 표현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25:40, 45), ‘어린아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11:28),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늦게 온 사람’ 등등이다. 마태 기자가 이러한 용어들을 많이 사용한 것은, 그가 부유한 계층들을 위한 복음서를 썼다고 하는 주장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에 덮어씌워진 선입견들을 벗겨내고 본래의 모습을 밝혀보기 위해서,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을 밝힐 수 있는 데까지 밝혀 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에 그 빛에서 마태복음의 ‘작은 사람들’과 그것과 관련된 표현들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태의 신학적 틀 또는 기독론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2.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

    1)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지위
    초대 기독교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노예들과 매우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고전적 견해는 최근의 학자들에게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것에 반대하는 대표자는 저지(E.A. Judge)이다. 그는 기독교 문서들 안에 나오는 이름, 계급, 직업 등을 조사하여, 초대 기독교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가장 권리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없고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들도 없는, 매우 넓은 지지층을 포용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주장은 최근의 학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은 대체로 마태 공동체가 도시에 있었다고 본다. 웨첸(H.C. Waetjen)은 마태복음이 도시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마태복음에서 ‘마을’은 단지 4번 나오는 데 반해서 ‘도시’는 26번이나 나오며, 예수는 대체로 도시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가 자라난 나사렛도 2:23에서 도시로 표현된다. 예수의 선교 활동 장소를 가버나움이라고 서술하는데, 8:1에서 그곳을 “그의 도시”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4:24에서 시리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점, 시리아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디다케가 마태복음을 알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마태 공동체는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웨첸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전승들을 근거로 하여, 마태 공동체가 비교적 부유한 계층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이 전승들을 보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이는, 상인들이나 지주들이 많이 나타난다.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5:42).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들이 훔쳐 가지도 못한다”(6:20). 이런 구절들은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타당한 말이다. 최후의 심판 비유(25:31~46)도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봐 주며 자기 집을 개방할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교육을 충분히 받았던 계층으로 보인다. 이 복음서의 문학적 구성이나 신학적 변증은 상당 수준의 학문적 조예와 교육 수준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시리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때부터 헬라인들과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받았고, 그 후의 모든 왕들이 안디옥의 유대인들에게 이 같은 특권을 베풀어주었다. 유대인들은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고, 수많은 헬라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크렐링(C.H. Kraeling)의 추산에 따르면, 네로 통치 때 안디옥에는 45,000 명의 유대인이 살았을 정도로 수가 증가했고 번창하였다. 그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들도 있다. 사도행전 11:27~30은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클라우디우스 통치 기간 중 근동에 발생한 크나큰 기근 동안에 유대지방에 살고 있던 형제들에게 구호금을 보냈다고 보도한다.
    킹스베리(J.D. Kingsbury)도 마태복음 자체에서 그러한 증거들을 찾는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선교 여행을 할 때 어떠한 동전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지만(막 6:8),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에게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지니지 말라고 명한다(마 10:9). 누가복음에서는 므나의 비유가 나오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달란트의 비유가 나온다. 후자는 전자의 약 오십 배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공회원인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를 부자이다(27:57).
    이러한 관찰들은, 마태 공동체의 전반적인 상황을 조망할 뿐, 공동체 내의 구체적인 역학관계를 보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태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부유해지면 질수록, 공동체 안으로는 빈부격차와 갈등이 더 심해질 수 있다. 공동체 밖으로도, 경쟁관계에 있는 회당이나 로마의 지배 체제와의 긴장이 더 높아질 수 있다. 공동체가 부유해지면 다른 경쟁 상대들과 비슷하게 되려는 유혹에 노출이 되고, 그것은 정체성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그 공동체는 더욱 경쟁 상대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긴장을 높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 공동체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구체적인 내부 역학관계와 외부와의 긴장 관계 등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카터(Waren Carter)의 분석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킹스베리 등의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마태 공동체를 밝혀내고 있다. 그는 마태 공동체 구성원들이 ‘비자발적 주변인들’(involuntary marginals)에 의해 주로 구성되지 않았다고 본다. ‘비자발적 주변인들’은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도시의 주변으로 밀려나서 사는 최하층민을 말한다. 그가 이 단어를 쓰는 것은, 마태 공동체가 그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들은 소수였고, 유대교 회당이나 로마의 지배 사회와의 갈등 속에서 ‘자발적으로 주변인들’로 살았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카터는 마태복음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작음’의 이미지를 주목한다. 마태는 ‘작은 사람들’이라는 마가의 용어를 유지할 뿐 아니라 더 강조한다. 잃은 양 비유에서, 누가는 죄인들을 찾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마태는 작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작은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첨가하고 반복함으로써 마태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카터는 마태 공동체가 소수 그룹이었음에 주목한다. 스틸웰(R. Stillwell)의 조사에 따르면, 2~5세기의 안디옥에 있는 집들의 식당에는 40~45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안디옥의 크리스천들이 한 집에서만 모였다면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 40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며, 도시 안팎의 여러 그룹들이 여러 집들에서 모였다고 해도 그 수는 기껏해야 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안뜰과 방들을 가진 집의 경우 한 집에서 천 여 명이 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터는 150명이든 1000명이든 간에, 당시 안디옥의 인구가 15만에서 20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크리스천의 수는 아주 적은 수였을 것으로 본다.

    2) 회당과의 관계
    마태복음이 유대교 회당과 결별하기 전의 상황에서 기록되었는지 아니면 결별한 이후의 상황에서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이미 그 공동체가 유대교와 불화를 겪은 상황에서 나왔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데이비스(W.D. Davies)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다른 많은 부분이 바리새적 유대교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데서 공식화되었다고 본다. 유대전쟁 이후 살아남은 바리새파인 이른바 “얌니아 학파”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려 하였으며,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하였다. AD 85년경에 제정된 회당 기도문에는 기독교도를 저주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누구든지 이 기도문을 암송하기를 주저하면 회당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스는 마태복음 특히 산상수훈이 이러한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인의 응답이었다고 본다. 주요 구성원이 유대 기독교인이었던 마태 공동체는 그 유대적 뿌리로부터 잘려져 이방 세계로 흡수되는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걱정했으며, 마태는 얌니아의 개혁에 대항하여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카터는 이와 관련된 마태복음의 구절들을 열거하면서 그 긴장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 마태는 자주 회당을 “그들의 회당”(4:23; 9:35; 10:17; 12:9; 13:54), “너희 회당”(23:34)이라고 부른다.
    - 회당에 대한 우호적인 언급들을 생략한다. (a) 야이로는 마가복음 5:22, 35, 36, 38에서는 회당장인데 반하여, 마태복음에서는 단지 지도자로 나온다(9:18, 23). (b) 누가는 백부장을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준 사람으로 우호적으로 진술하는데(눅 7:5), 마태는 이러한 언급을 생략한다(마 8:5~13).
    -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진술한다. (a)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한 마가의 언급을 마태는 강화한다. (b) 마가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마태는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c) 마태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눈먼 인도자’, ‘눈먼 바보들’로 묘사한다(23:6, 17, 19, 24, 26; 참조 15:14).
    - ‘랍비’가 잘못된 제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만이 사용하는 부정적인 용어가 된다. 마가에서는 베드로가 두 번 그 용어를 사용하지만, 마태는 그것들을 생략해 버리거나(막 11:21과 마 21:20), ‘주님’으로 바꾸어 버린다(막 9:5과 마 17:4). 마태가 이 용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경우는 배신자 유다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뿐이다(막 14:45; 마 26:49).
    카터는 회당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진술은, 적어도 안디옥의 유대인 공동체의 일부 내에서 마태 공동체가 심한 충돌을 겪은 것을 반영한다고 본다.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 이후 몇 십 년 동안, 다양한 유대교 그룹들은, 어찌하여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치열하게 논쟁하고 씨름하였다. 그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과 회당 중심 예배를 통하여 유대교를 재공식화 하려고 하였고, 그 방면의 전문가인 바리새파 지도력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들이 지도자로 출현하는 것은 마태 공동체가 하려고 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 대한 마태의 부정적 언급은 이런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3) 이방 선교 문제
    마태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교와의 대결이 아니라 이방선교였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루츠(Ulrich Luz)는 마태복음이, 공동체가 이방선교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해야 하는 전환점의 상황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가 이렇게 보는 것은 마태복음에 상이한 구절들이 병존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거리나 사마리아 동리로 가지 말라는 예수의 배타적 명령(10:5~6)이 있는가 하면 그 복음서의 마지막은 모든 민족(이방인)을 제자 삼으라는 보편적인 선교 명령으로 끝난다(28:19). 마태복음만큼 유대 기독교적 기독론(다윗의 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복음서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거절이 발견된다(13:11~15; 21:41~43). 또 일점일획까지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철저한 율법 준수 명령(5:17~19)과 동시에 성서와 자신을 동일하게 놓는 예수의 반제들이 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23:2)이 명한 것을 지키라고 말한 바로 그 다음에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23:15~24; 16:12). 손 씻는 정결규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독자들이 유대교에 친숙하다고 전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차별 없이 취급할 만큼 유대교에 대해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에 근거하여, 루츠는 마태 공동체가 더 이상 유대교의 회당 연합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마태 공동체나 그 주위에는 이방선교를 결단했던 유대 기독교 그룹이 있어서 마태도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본다.

    4) 로마제국에 대한 대안사회로서 주변부 공동체
    카터는 마태가 유대전쟁 이후의 상황에서 로마 제국의 지배에 대응하면서 그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고 본다. 마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하나님의 사자들,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거부하고 백성을 잘못 이끈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보았다(22:7). 마태는 로마를 하나님의 징벌 대리인으로 이해하는 관점들(솔로몬의 시편 2:1~15; 8:9~22; 제4에스라서, 제2바룩서, 요세푸스 등)에 동의한다. 제국적 권력을 하나님의 징벌 대리인으로 보는 전승은, 또한 그 권력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설 때 궁극적으로 멸망할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앗시리아(사 10:12~34), 바빌론(렘 25:12~14; 27:7; 사 44:28; 45:1), 그리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마카비하 7:32~36)를 심판하고 파괴하신 것 같이, 로마도 심판하실 것이다(솔로몬 시편 2:16~25, 30~33; 17:21~34; 시빌리 신탁 3:46~53). 마태복음에서, 이러한 구원은 이미 예수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예수께서 오실 때, 로마의 권력은 무너질 것이며(24:27~31), 하늘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온전히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에게서(1:23; 28:20) 그리고 그에게 헌신하는 공동체 안에서(18:20) 나타났다.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위임 받은 대리인이요 그리스도요 아들이다. 예수는 그의 가르침, 기적, 죽음, 부활, 그리고 임박한 내림에서 하나님의 통치, 복 주심, 구원하시는 임재, 정의를 나타내신다.
    사회의 복지는 제국의 활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전폭적인 복 주심에서 온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이들은, 권력이나 특권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병든 사람, 주변화 된 사람, 하찮은 사람들이다(4:17~25). 하나님의 복 주심 안에서 새롭고 다른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복 주심은 계급적이며 정의롭지 않은 현상 유지 세력을 붕괴시킨다(5:3~12). 마태복음 이야기는 로마의 제국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제국의 선전을 전복시킨다. 그것은 대안적 세상을 건설하며, 제국적 요구들에 저항한다. 그것은 대안 공동체를 창조하며, 반 제국적 실천을 일으킨다.
    카터는 마태 공동체가 이러한 비전을 포용하면서 사는 한 그 사회에서 주변적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은 회당 공동체와 긴장관계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공동체의 신학적, 그리스도론적, 종말적 이해와 실천은 로마제국의 체제와 사회정치적 실천과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요구와 정반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대안적 실천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이 공동체는 아브라함, 에녹, 모세, 바룩, 에스라, 솔로몬 또는 회당의 지도자 또는 제국의 이데올로기 대신에 예수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실 분으로 본다.
    - 제국의 수장인 황제에게 헌신하는 대신 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따른다.
    - 로마의 평화를 받아들이는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한다(마 4:17; 6:10; 12:28; 24-25).
    - 황제를 신의 뜻을 나타내는 자로 이해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임재와 뜻이 예수, 임마누엘 안에서 나타났음을 본다(1:23; 18:20; 28:20).
    - 계급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들을 유지하는 대신 대안적이고, 한층 더 평등한 가족 구조를 받아들인다.
    지금까지의 살펴 본 것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마태 공동체를 좀 더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태 공동체는 시골에서 도시로 와서 급격하게 부유층이 늘어남에 따라 예수의 급진적 선포를 부드럽게 하고 정신화 했다고 하는 주장들은 성립하기 힘들다. 오히려 그들은, 시골보다 더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도시 환경 속에서, 소수 공동체요 주변인들로 살면서, 예수의 선포를 새롭게 해석하고 더욱 철저화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들은 회당과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두 체제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그 두 체제를 넘어서는 대안 사회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그 대안 공동체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고, 그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작은 사람들’이었다.

    3. 작은 사람들

    ‘작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관심을 갖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학자들이, 그 단어가 제자를 의미한다고 보아서, 그 단어가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보는 것은, “이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라는 구절 때문이다(10:42). 그들은 여기 나오는 ‘제자’가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설교자를 가리킨다고 보고, 이 구절은 선교사 대접과 관련된 것이지 사회의 약자와 무관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제자’는 부가적으로 삽입된 것일 뿐이다. 마가의 병행구절(막 9:41)에서도 제자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본래 중요한 것은 ‘작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제자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작은 사람’이 나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구절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18:6)이다. 여기서 ‘나를 믿는 작은 사람들’은 신자들 가운데 상처받거나 걸려 넘어지기 쉬운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것과 아주 비슷한 말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약한 신도들’(8:7, 10, 11)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지식이 있다 하면서 남을 생각하지 않는 일부 신자들 때문에, 음식을 먹는 문제 등으로 상처 받고 걸려 넘어지기 쉬운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비교적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계층이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의 ‘나를 믿는 작은 사람들’도 신자들 가운데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엄한 경고를 한다. 이어서 그런 죄를 짓게 되면 죄를 범한 손발을 찍어 버리고, 죄를 범한 눈을 빼어 버리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공동체 안의 작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그를 공동체 밖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누가의 병행 본문(눅 17:2)에는 “나를 믿는”이라는 구절이 없다. “나를 믿는”이라는 구절이 후대 교회에서 넣은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누가의 것이 더 오래된 전승이라 하겠다. 이는 본래의 전승이, 제자나 신자를 대접하는 문제 이전에,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작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문제와 관계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본문에 이어서 잃은 양 비유가 나오는데, 비유의 도입구와 적용구에 누가의 잃은 양 비유에는 없는 ‘작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8:10).  (11절은 없음)< 잃은 양 비유(18:12~13)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8:14).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 서두에 ‘세리와 죄인들’이 등장하는데, 마태는 그 자리에 ‘작은 사람들’을 대신 넣고 있다. 이는 마태가 ‘작은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세리와 죄인들’을 대신하는 의미로 썼음을 의미한다. ‘세리와 죄인’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의미하므로, ‘작은 사람들’도 그와 같이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누가의 본문에서는 avpole,saj(잃어버렸다)와 avpolwlo.j(잃어버린)라는 단어들을 씀으로써, 주인이 양을 ‘잃은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이것을 planhqh/|(길을 잃었으면)와 planw,menon(길을 잃은)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비유의 초점이 주인의 ‘분실’이 아니라 양이 ‘길을 잃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마태의 변경에서 ‘양의 방황’을 연상할 수 있다 해서, 마태가 도덕적 해석을 의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planhqh/|는 가정법 과거 수동태이고 planw,menon는 현재분사 수동태이다. 둘 다 수동태임에 유의한다면 (양이 방황을 하여서) ‘길을 잃었으면’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누군가가 양을 잘못 이끌어서) 양이 ‘길을 잃게 되면’ 또는 ‘잘못 인도되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런 해석은 비유 앞뒤의 도입구나 적용구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도입구와 적용구에서 나타난 이 비유의 의도는 작은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18:10) 망하지 않게(18:14)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도덕적 방황과는 무관하며, 공동체의 작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낮고 소외된 계층이라는 것은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제자들도 신자들도 아니다. 그들이 신자였다면, 인자가 의인들에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그렇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거기 나온 문자 그대로,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다. 루이제 쇼트로프(Luise Schottroff)는 그들을 ‘천민들’이라고 부르며, 사회 계급적·경제적 의미에서 볼 때 하층민인 ‘작은 사람들’과 같은 그룹이라고 본다. 이 비유의 파격성은 인자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데 있다. 인자의 이런 파격적 선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그들이 높여지고 있다.
    미래적 인자가 이렇게 파격적으로 자신을 작은 사람들과 일치시키는 것은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킨 예수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는 어린이를 영접하셨다. 제자들이 어린이가 예수께 오는 것을 막았을 때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다(마 19:13~15). 어린이는 당시 사회에서 제일 약하고 제일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하였다. 예수께서 어린이를 영접하신 것은 어린이 자신만이 아니라 그 사회의 작은 사람들을 영접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는 질문에 어린 아이를 가장 큰 사람의 모범으로 세우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어린이와 일치시키셨다(마 18:5).
    마태복음 11:25~30은 하나님의 계시의 특권이 이런 어린이에게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계시는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어졌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났다. 예수는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고자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아들이 계시하여 주고자 하는 사람’은 문맥에서 볼 때 ‘철부지 어린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어서 나오는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도 어린이들과 똑같이 예수의 영접을 받는 이들이다. 또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20:1~16)에서도 나중에 온 일꾼이 일찍 온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은, 공동체의 작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는 주인의 선언에 잘 압축되어 있다.
    마태 공동체의 ‘작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강한 신자에 의해 걸려 넘어지기 쉬운 약한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소외 계층이었다. 마태는 공동체가 부유해짐에 따라 작은 사람들이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상황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부적으로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과 정의에 의해서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회당과 로마 지배 체제와의 대결에 의해서 이런 긴장과 갈등을 극복하려고 한다. 회당과의 관계에서나 로마 제국 체제와의 관계에서 마태 공동체는 그 전체가 주변인들이요 작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마태는 작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파격적인 사랑을 통해서 공동체를 내적으로 결속하고 이방선교를 포함한 이 세상으로의 진출에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4. 복 있는 사람들

    산상수훈의 복 선언(5:3~12)은 예수의 청중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마태 공동체의 작은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의 병행본문(6:20~23)과 비교하여 볼 때, 가장 오래된 전승은 마태복음 5:3, 4, 6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늘 중요한 논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3절과 6절만 다루고자 한다.

    1)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마 5:3)이라는 구절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실제적 가난의 의미를 정신화시킨, 심리적, 정신적, 종교적 차원의 가난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히브리어 ‘아나브’의 역어이다. ‘아나브’는 ‘아니’와 함께 원래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사야서 61:1 이하에서, 가난한 사람으로 지칭된 사람들은 어느 한 부류의 인간 집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포로 된 자, 묶인 자, 슬퍼하는 자, 절망한 자 등등을 다 포괄하는 개념이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부를 약속하는 대신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신 것(마 5:3; 눅 6:20)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난이 인간의 총체적인 곤경을 서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자가 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된다.
    루이제 쇼트로프는, ‘마음이’(tw/| pneu,mati)에 나오는 ‘프뉴마’는 히브리어 성서의 ‘루아흐’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관점에서 본 ‘인간 전체’를 나타낸다고 한다. 마음의 가난은 물질적인 생활에서도 존재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인간들이 불의하고 고통 받으며, 무기력한 상황이다. 영적인 가난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곤경을 나타낸다. 사회적, 법적, 정치적, 종교적 심리적 상황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마태가 처음의 세 축복문을 변형시킨 것은, 원래 구체적이고 물질적이었던 개념을 ‘정신화’시켰다기보다는, AD 70년 성전파괴 이후 달라진 민족의 상황에 의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프뉴마/영·마음은 전인적인 인간학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tw/| pneu,mati의 여격은 장소 내지는 관계의 여격이다.
    tw/| pneu,mati의 여격을 수단의 여격으로 보아 ‘마음으로/영적으로’라고 해석하면 그것은 정신적 가난을 의미하는 것처럼 된다. 하지만 쇼트로프의 말대로 그것을 장소의 여격으로 보고 프뉴마를 인간 전체로 이해하면, 그 구절은 ‘전체 삶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프뉴마를 ‘인간 전체’로 보는 이와 같은 입장은 최근의 학자들에게서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해그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몸과 마음의 구분이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슈바이처는 프뉴마가 인간의 영을 가리키지만 하나님의 영의 영향 아래에 있는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크로스비도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프뉴마를 인간 전체로 보는 관점은 그것을 ‘정신적으로/영적으로’라는 의미로만 보려고 하던 기존의 관점보다 진일보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프뉴마를 인간 전체로 본다 하더라도, ‘인간 전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이해될 때 다시 ‘정신적으로/영적으로’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앞의 학자들의 경우에도, 해그너는 심리적 이해로 기울고 있으며, 슈바이처는 종교적 이해를 보인다. 크로스비는 ‘존재의 깊이’를 말하는 점에서 추상적이다. 루이제 쇼트로프를 제외하고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복 선언이 이제 더 이상 가난을 겪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프뉴마의 의미가 추상적인 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프뉴마의 의미를 추상화시키지 않는다면, 마태의 복 선언은 누가의 것을 왜곡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일보 시킨 것이 된다. 누가의 것은 경제 문제에만 국한 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는 데 반해서, 마태의 것은 경제 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을 곤경에 빠뜨리는 모든 차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의 예를 카터(Waren Carter)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복 선언이 가난 자체 대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대상을 부드럽게 하는 것에 의해(‘자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또는 그것을 비유적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심약한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 정신화될 수 없다. 그들은 문자적, 신체적 가난, 빈곤,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 사는 사람들이며, 적절한 자원이 없고,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며(레 19:10, 15; 잠 14:31; 28:15), 엘리트들에 의해 무시당하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경건하게 빈곤을 받아들이는 ‘인내’ 또는 ‘겸손’을 의미하지 않는다. “깨끗한 마음”(시 24:4)이나 “영혼의 짓밟힘”(시 34:18)과 같은 구절들과 비교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마음은 순결이나 짓밟힘의 영역이다. 인간의 영에 가난이 있을 때 그 영은 경제적 가난과 같다. 자원과 희망이 없어서 더 큰 힘에 종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고 영 또는 존재가 경제적 부정의에 의해 짓밟힌 사람들이다. 지금 예수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될 때, 거기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복 선언은 현재의 제국적 구조들을 하나님의 행위를 통하여 끝장내는 것을 축복하는 것이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 5:6)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마태가 누가의 ‘굶주림’(눅 6:20)을 실제적인 굶주림과 연관되지 않는 것으로 의미를 변질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관례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의’가 개인의 윤리적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립되기가 힘들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우리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또한 주림과 목마름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암 8:11)과 은혜(사 55:1, 2) 및 하나님의 현재함(시 42:3)을 동경하는 것에 대해 자주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굶주림이 채워질 것이 약속되었다(삼상 2:5; 시 107:36~41; 146:7). 마태는 하나님의 의가 그의 공동체의 행위에서도 실현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복 선언에 ‘의’라는 단어가 첨가되기는 했어도 누가복음의 복 선언의 의미를 변질시킨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누가가 단순히 굶주림이 채워지는 것만 말한 데 반하여, 마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정의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크로스비는 이런 관점에서 산상수훈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그는 마태 공동체가 하나님의 정의에 토대를 둔 사랑의 공동체였다고 보며, 산상수훈의 기초가 하나님의 정의라고 본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나 하늘나라의 경험은 땅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에 달려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삶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필수조건이다(19:21). 마태 공동체는 부가 증가함에 따라 주위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유혹을 받게 되었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5:20)라는 말씀과 이어서 나오는 말씀들(5:21~58)은 공동체에게 그 사회의 정의 기준과는 구별이 되는 정의를 드러내도록 요청한다.
    크로스비(Michael Crosby)는 이런 관점에서 반제들, 특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을 새롭게 해석한다. 예수의 시대에 이웃 사랑은 ‘내부사람들’ 즉 확장된 가족이나 종교에 속한 사람들―여기서는 유대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다. ‘외부사람들’은 실제적 원수들이었다. 그러나, 가정 교회 외부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긴장이 생기자, 마태 공동체는 원수는 공동체와 도시를 포함하여 어디서나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그들의 공동체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함으로써, 그는 οικια(집)의 문을 넘어서서 οικουμενε(세계)로 전통적 실천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의를 명시하는 것이었다(5:20). 이 정의는 전체 공동체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 나타나야 했다. 나아가, 그것은 그 공동체로부터 마을과 도시 전역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실제로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일 수 있다. 그들은 희망의 근거도, 기뻐할 이유도 없고, 이 세상의 자원(땅, 빵)도 갖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사회의 부정의 때문에 땅을 잃고, 세금과 빚에 시달리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필요는 하나님의 지배가 가져오는 종말적 전복에 의해 충족될 것이다. 하나님의 행동은 모든 것을 정의로운 관계로 되돌려 놓으신다. 그들에게 땅을 주시고 빵을 주신다(5:5, 6). 이사야는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으로 본다.(사 61:3, 8~11).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추상적인 굶주림이나 정신적인 목마름과는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정의를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정의롭지 못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5. 작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임마누엘

    임마누엘 신앙의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작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인 말구유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셨고(1:23), ‘두세 사람’이라고 하는 적은 무리가 모인 곳에 ‘그들과 함께’ 계시며(18:20), 세상 끝 날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28:20). 지상의 예수는 어린이와 자신을 일치시키셨고, 미래의 인자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신다.
    마태의 이러한 임마누엘 신앙은, 로마의 황제를 가장으로 하는 가부장적 지배 체제에 대항하여 새로운 대안 사회를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마태 공동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높여야 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든 간에 마태 공동체는 선생이나 아버지나 지도자라고 불러서는 안 되었다(마 23:8~10).
    호슬리(Richard Horsley)는 이러한 구절들이 전통적인 가부장적 형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갱신된 공동체 개념을 가족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새 공동체는 분명히 그들 사이에 어떤 지배적 권위 형태도 없는 평등한 형제 공동체들이다. 호슬리는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의 예수 족보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네 여인”을 주목한다. 그들은 마리아의 전조가 되고 있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가부장제의 규범에서 벗어난 한 여인의 비정상적 출산을 통한 메시아의 탄생”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남자 가부장들은 하나 같이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또는 무능한 모습으로 나오지만 여성의 행동이 그 백성, 혹은 백성의 지도자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이센도, 마태 기자가 산상수훈의 복 선언이나 반제들에서 엄격한 비군사적 이미지의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고 본다. 예수는 세계를 비폭력적인 윤리적 명령으로 통치하는 현명한 왕이다. 마가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네 번 나타나지만 마태는 10번 사용한다. 마태는 이 칭호를 더 발전시켰고 이것을 치유와 연결한다(9:27; 12:23; 15:22; 21:15). 이를 통하여 마태는 모든 정치적-군사적 함의를 피해간다. 이 다윗의 자손은 전쟁을 유발하지 않고 사람을 치유한다. 산상수훈은 그의 왕국을 위해서 올바른 의가 필요함을 명백히 보여준다. 팔복선언은 반-군사적인 언급들을 담고 있다. 이 반제는 강력하게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라고 강조하면서, 더 나은 의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예수의 이와 같은 온유하고 현명한 메시아직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형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되었다.
    타이센은 또한 마태는 방랑의 급진주의 전승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다고 본다. 묶고 푸는 베드로의 권능은 전체 공동체에 주어졌다(18:18, 19). 카리스마적인 베드로로부터 공동체 전체로 권위가 이전된 것은 마태 공동체 내에서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인물로부터 지역 회중으로 권위 구조가 변화한 것을 반영한다. 마태는 방랑하는 카리스마 지도자들이나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지역 권위자들을 지지하지 않고 대신 유일한 교사인 예수의 권위를 지지하길 원했다. 마태 공동체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형제/자매들의 회중으로 변화하였다. 마태는 예수만이 유일한 권위를 갖는 회중을 꿈꾸었다. 또한 리치스도 임마누엘 신앙에서 순회 설교자들의 권위가 떨어진 것을 본다. 마태 공동체는 순회하는 설교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으며, 공동체에 있어서 그 궁극적 권위는 공동체 가운데 임재하시는 ‘임마누엘’에 있었다.
    임마누엘 신앙 속에서, 작은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시는 예수의 유일한 권위가 확립되었다면, 이제 예수를 높이는 것은 작은 사람들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이 된다. 마태는 그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더 두드러지게 예수가 크신 분임을 거듭 강조한다.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이며(12:6), 요나보다 더 크신 이며,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다(12:41~42). 그런데 예수께서 가장 크신 분인 것은, 솔로몬보다 더 큰 부와 권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작은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시기 때문이다(마 18:4~5).

    6. 맺음말

    마태 공동체는 AD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 이방 도시 지역에 살면서 회당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지배 체제와도 긴장 관계 속에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갈릴리 예수 공동체에 비하여 부유해지고 구성원들도 다양해졌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회당과 대결하면서 회당 유대교에 대응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 지배 체제의 선전과 대결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유대교와 결별하고 새로운 이방선교를 향해 나가려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 세계 속에서 유대교적 뿌리를 잃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의 파격성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해석하려고 하였다.
    이런 파격성은 마태가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작은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고 또 강조하는 데서 나타난다. 마태는 ‘작은 사람’이라는 단어로, 제자나 신자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기존의 연구들은 그 단어의 종교적 의미를 추구하는 데 치중하였고, 사회적 의미를 밝히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마태는 ‘작은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의식하여 중요하게 사용하였다. 그들은 걸려 넘어지기 쉬운 약한 신자들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소외 계층이었다. 마태는 부유해진 공동체 안에서 그들이 무시당하거나 차별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당과의 관계에서나 로마 지배 체제와의 관계에서 볼 때 마태 공동체 자체가 주변인들이요 작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작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파격적인 선포를 통하여 공동체를 내적으로 결속하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작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에 대하여 엄한 경고를 한다. 잃은 양 비유에서는, 작은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망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는, 작은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인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파격적으로 인자와 동일시된다. 또한 작은 사람들의 대표격인 어린이가 예수와 동일시된다. 작은 사람들을 영접하고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예수의 행동에서 회당과 로마의 지배 체제에서 통용되던 질서가 전복된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
    예수의 선포의 파격성은 산상수훈의 복 선언에 잘 나타난다. 첫 번째 복 선언에 마태가 ‘마음이’를 첨가한 것이 그러한 파격성을 부드럽게 하고 정신화 했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tw/| pneu,mati는 ‘정신적으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인간을 곤경에 빠뜨리는 모든 차원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그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 즉 겸손한 사람이나,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온 존재가 경제적 부정의에 의해 짓밟힌 사람이다. 그리하여 오직 그러한 부정의를 전복시킬 하나님의 통치만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네 번째 복 선언에 마태가 ‘의’를 첨가한 것에 대해서도 굶주림을 정신화 했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는 인간의 도덕적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으로서 정의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마태 신학의 기본 틀은 임마누엘 신앙이다. 임마누엘 신앙의 핵심은 작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이다. 예수는 작은 사람들 가운데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셨고,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작은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그들을 높여 주신다. 마태 기자는 이렇게 자기를 낮추어 작은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예수에게서 성전보다,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를 본다. 이 가장 크신 이 안에서 기존의 가부장적 체제는 전복되며 작은 사람들의 권위가 확보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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