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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4회] 종교와 세계화-세계화 시대의 한국 개신교의 혼성성 [카테고리]
  • 조회 수: 8653, 2006.09.26 15:03:14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월례포럼(2006년 9월 25일)

    종교와 세계화
    세계화 시대의 한국 개신교의 혼성성에 대한 한 이해


    _장형철 | 영국 맨체스터대학 종교학 박사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른바 세계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이 좁아지고 지구 반대쪽의 일을 거의 동시간대에 알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일에 전화나 인터넷 등의 수단으로 참여 및 조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또한 기업경영과 마케팅에 있어서도 이른바 국경과 국적이 이전처럼 뚜렷이 구분되기보다 이제는 다국적 기업이 가능하고, 같은 회사제품이라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른바 지구촌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시대적 현상을 우리는 ‘세계화(Globalization)’라고 부른다.
    이러한 세계화로 인해 사회와 문화 또한 매우 빠르게 변하는 듯해 보이며 그 변화는 각각의 사회와 문화가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와 문화로 변해 가는 듯하다. 세상 사람들이 매우 비슷해져 가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축구 또는 야구 유니폼을 입고, 나이키를 신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며, 코카콜라를 마시고, Eminem의 뮤직 비디오와 시트콤 Friends를 보고, CNN 뉴스를 보며, 지구를 지키는 이야기를 담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로 스트레스를 해소 하려 한다. 이러한 현상들로 인해 이젠 더 이상 지역과 민족(또는 국가)에 기반을 두는 사회와 문화의 독특성과 그 다양성들은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다면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들은 새로운 거대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세계화라는 현상에 떠밀려 가고만은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오히려 세계화로 인해 지역 사회나 문화에 이전과는 다른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 할 수 있다. 일례로 세계화를 대표할 수 있는 WTO(World Trade Organization)와 다보스포럼(World Economic Forum in Davos)만이 아니라 우리는 지난 2001년부터 시작된 반세계화 포럼인 World Social Forum과 G8 Summit가 있을 때 마다 회의장소 바로 밖에서 거세게 일어나는 반세계화 시위들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민족이나 지역사회의 종교를 포함한 문화들을 통합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민족과 지역사회의 정체성(Identity)과 통전성(Integrity)은 유지되고 있는가? 이 연구는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먼저 세계화란 무엇인지 이해하여보고 세계화의 결과는 구체적인 지역 사회와 문화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논할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세계화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 세계화로 인해 종교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려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논문은 기독교는, 특별히 한국 개신교는, 세계화와 어떤 연관성이 있어 왔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를 다루려한다. 실제로 세계화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역문화의 독특성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를 세계 종교라고 부르지만 기독교는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 개신교는 ‘한국’ 개신교라고만 부를 수 있는 특징들, 즉 무교적 영향, 유교적 영향 그리고 역사적인 정황으로 인해 매우 독특한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

    Ⅱ. 세계화와 그 결과

    II-1. 세계화란 무엇인가?
    김영삼 정부는 1994년 ‘세계화 추진 위원회’를 발족시키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아마도 세계화는 단순히 국가나 민족 간의 문화 경제적 교류를 말하는 단어로 이해한듯 하다. 그러나 그러한 국제교류는 수백 년 전부터 있어왔다. 예를 들어 동서양 교류의 비단길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를 세계화라 부르지는 않는다. ‘세계화(Globalization)'란 용어는 1970년대 후반 들어 많이 쓰기 시작한 용어이다. 흔히들 세계화는 자본과 인력의 국가 간의 자유로운 흐름, 이를 통한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선 자유무역과 경영과 경제 시스템 등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너무 단순하고 표피적인 이해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세계화는 매우 서구 중심적으로 특히 미국 중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쉬운 예로 우리는 전 세계에서 맥도날드 햄버거 체인점과 디즈니 캐릭터들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지만, 근래에 아랍 에미레이트가 미국의 한 항구의 경영권을 인수하려 했을 때 미국 의회에서 이를 제지하는 일을 하였고, 또한 미국 의회가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한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국경에 Cortina de acero(Iron Curtain)을 만든 것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나아가서 미국은 세계화와 개방을 운운하지만 결국 FTA(Free Trade Agreement)를 통해 타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단순히 세계화 가운데 자국의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는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금 자세히 보고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세계화의 근저에는 서구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끊임없이 이윤과 자본의 축적을 추구하는 사회 경제적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대량생산을 이끌고 그 생산품들을 팔기 위한 시장 확장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 서구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포괄하는 체계로 발전하려 한다. 마르크스(Marx)와 엥겔스(Engels)는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적 확산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들에 의하면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최소화시키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력 착취로 인한 상품의 구매저하는 결국 과다생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자본주의자들에게는 위기가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착취를 위한 시장을 찾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는 결국 비서구국가들의 경제를 서구경제로 병합시켰던 것이다. 나아가서 비서구 국가들을 새로운 시장과 착취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게 되는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이러한 논의를 함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자본주의 힘은 중국의 만리장성도 무너뜨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래서 그들은 공산당 선언문(Communist Manifesto)의 마지막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서구 자본주의 확산은 진보된 기술에 의해 그리고 모든 자본이 서구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국제적 경영으로 더욱 강화되어졌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 있던지 인터넷을 통해 대화하고, 물건을 사고, 은행 일을 보고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거의 모두 자본을 축적하고 이윤을 남기려는 서구 자본주의에로 귀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서구의 명품 브랜드 상품을 우리는 이제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고 구매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이러한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단지 물건을 판매하고 구매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서구 자본주의 비서구세계에 대한 침투는 단순히 무역과 경영과 경제 등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변동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는 단순히 미국의 패스트푸드를 팔고 이익을 챙긴다는 것을 넘어서 비미국 문화에서 가지고 있는 음식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문화적 가치들을 변화 시키려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맥도날드 햄버거를 팔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떻게 요리를 하고, 누구와 함께 어떻게 좋은 시간을 함께하며 음식을 나누는가라는 생각을 맥도날드 햄버거는 얼마나 빠르게 주문받아서, 얼마나 빠르게 먹고, 얼마나 빨리 치울 수 있는가도 바꾸어 놓고 그것을 하나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와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서구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적 체계(Economic system)만이 아니라 비서구 세계의 사회와 정치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즉 서구 자본주의의 자본의 축적, 이윤의 추구를 위한 새로운 시장의 개척은 경제적 종속화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종속화와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떻게 한 지역 사회와 문화가 서구에 식민지화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되는 것이다. 월러스타인(Wallerstein) 또한 자본주의의 논리는 어떻게 경제적인 세계화가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세계적 확산은 서구 산업화로 인해 가속화되어졌고 식민주의라는 서구의 정치적 개념에 의해 조장되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서구 자본주의 확산은 또한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등장하여 19, 20세기에 절정을 이룬 서구의 ‘근대성(Modernity)’과 필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서구 근대성은 ‘합리성(Rationality)’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합리성이란 이른바 모든 자연 현상들은 그 원인들을 찾음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 이해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 자체는 합리성 안에서는 부정되어진다. 코헨과 케네디(Cohen and Kennedy)에 의하면, 이러한 서구 근대성의 특성은 계속적으로 이성적으로 질문하려는 노력과 검증 가능한 지식을 찾으려는 합리성의 힘 그리고 사회진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념 등과 밀접히 연관 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서구 근대성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이끌고, 또한 사회과학을 태동하게 하고 발전시켜 중세적 전통과의 균열과 단절을 만들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Tönnies)는 바로 이러한 균열과 사회적 변화를 Gemeinschaft(전통사회 또는 근대이전의 공동체적 사회)에서 Gesellschaft(근대사회)로의 변화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 근대성의 확산의 결과는 단순히 긍정적으로 또는 낙관적으로만 고려될 수 없다. 합리성을 통한 세계 이해와 세계자본의 흐름과 투자는 그리고 시장경제를 통해 진보된 삶을 제공할 수 있다는 근대화된 미래에 대한 꿈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듯하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근대성이 가져온 예측 못한 결과들을 말하고 있다. 근대성은 과거와 전통에 대한 존중보다는 전근대적인 사회질서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비(Harvey)는 서구의 근대성은 이전까지 진행되어오던 역사적인 여건과 상황들과의 분명한 단절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파열되고 분절될 수밖에 없는 과정을 이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과학과 법과 보편적 도덕성의 발달을 이끌고 사고의 합리적인 방법과 사회조직의 합리적인 형태를 발전시킨 서구 근대성은 신화와 종교, 미신 등의 불합리성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것은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근대성은 인간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의 보편적 억압의 체계를 만들었다고 이해한다. 결국 합리성 뒤에 숨어있는 논리는 결국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었던 것이다.
    하비는 이러한 서구 근대성을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용어로 특징지으려 한다. 계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과 같이 서구 근대성의 특성으로서 이 ‘창조적 파괴’는 매우 낙관적이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해방을 성취시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목적이 그렇다 할지라도 이러한 창조적 파괴의 결과는 장미꽃 같은 미래의 현실화가 아닌 ‘홀로코스트(Holocaust)’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극이었다. 바우만(Bauman)에 의하면 홀로코스트는 근대성의 ‘반대(Antithese)’로서가 아니라 바로 서구 근대적 그리고 합리적 사회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나치에게 독일 사회를 좀먹는 민족으로 파악되어진 유대인들을 멸종시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결론이었던 것이다. 즉 홀로코스트는 근대적 합리성과 기술발전을 얻게 된 바로 그 컨텍스트(Context) 안에서 이해 될 수 있다. 홀로코스트는 분명히 근대성의 한 단면으로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는 근대성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서구 근대성의 주된 특성으로의 ‘창조적 파괴’는 세계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나아가서 19, 20세기 근대성을 기반으로 하는 서구 기독교의 비서구세계로의 확산―이른바 서구 기독교의 세계화―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이다. 서구 근대성의 황금기였던 19세기 20세기 서구의 기독교는 서구 근대성과 함께 매우 급속하게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경우, 당시 선교하였던 초창기 선교사들과 서구 사상가들은 한국인을 지극히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로 이해했다. 특히 선교사들은 한국의 사회적 병폐, 미신, 타락한 전근대적인 사회체계를 근절하고 그들의 문명을 심고 나아가서 새로운 비전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선교는 바로 하비가 말했던 서구 근대성의 ‘창조적 파괴’와 일치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한국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한국은 무너져야만 했다. 병원 학교 등의 건립 그리고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그들의 경제성과 편의성을 고려한 선교지분할은 그들의 진보된 문명을 소개하고 이식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작업이었다. 이러한 창조적 파괴는 서구 중심의 입장에서 비서구 사회와 문화를 서구세계의 선호성에 입각하여 변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아가서 이 창조적 파괴는 서구의 입장에서 모든 비서구 사회와 문화를 일반화시키고 서구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시키려 한다. 이러한 근대성인 ‘창조적 파괴’를 기반으로 한 서구 기독교의 확산은 당연히 비 서구인들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의미한다. 비어(Veer)는 이러한 개종을 19세기와 20세기의 유럽식 세계체계의 확산과 점차적으로 식민지화되어지고 있었던 타종교들과 타문화들과의 만남의 결과 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른바 기독교로의 개종(Conversion to Christianity)만이 아닌 ‘근대성으로의 개종(Conversion to modernity)’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구 근대성은 서구 자본주의와 같이 전 지구적 확산을 하였던 것이다. 코헨과 케네디(Cohen and Kennedy)는 서구 근대성은 근대화 시대의 최선봉에 서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17세기 이후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경제능력과 전쟁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들만의 사고 속에서 비서구세계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유럽식 또는 유럽만을 위한 놀라운 변환은 서구 근대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제도와 그것의 확산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기든스 또한 서구 근대성은 본래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확산하고 그 영향력이 역동적이며 이러한 근대성에 의한 변환에서 어떤 것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화란 이미 언급했던 자본주의와 서구 근대성의 확산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서구 자본주의는 시장점령을 통한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식민주의(Colonialism) 그리고 서구 근대성은 비서구 세계의 사회와 문화를 서구화시키고 자신들의 문화로 보편화시킴으로서 서구 중심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제국주의(Imperialism)와 연결되어 있다. 비서구 세계는 착취와 조작 및 교화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 현상은 17세기 이후부터 계속되는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더욱 빠르고 강하게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II-2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세계화의 결과
    이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세계화의 결과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기든스는 “세계화는 인간 공동체를 전반적으로 통합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결국 누구도 세계화되는 지구를 벗어나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든스에게 있어서 세계화되는 세계 속에서 지역문화의 정체성은 이제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더 이상 배타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지역성은 이제 전통적인 행동들이나 활동들로부터 멀어져가는 그리고 동일한 지역에서 아주 멀리 떨진 곳의 행위와 활동 등과 깊이 연결되는 과정 안에 있다고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계화는 하나의 거대한 통일로 향하는 지역들의 전환을 이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논자가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는 서구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확산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로 인해 각 지역들이 영향을 받는 것은 서구문화의 독특성을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Universalization)하는 것과 서구의 입장에서 모든 비서구문화를 서구적 표준에 맞추는 ‘동일화(Homogenization)’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의 결과는 서구문화의 보편화나 동일화만은 아니다. 저항(Resistance) 또한 가능하다. 왜냐하면 지역적인 것(The local)과 세계적인 것(The global)은 서로 대립하고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계적인 것의 힘과 동일화되도록 강요하는 것에 비세계화(De-globalization)로 대응을 하는 일도 있다. 피더스톤(Featherstone)은 세계화의 시대에 지역문화로 돌아가는 ‘회귀(Return)’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전 지구적 동일화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혈연적,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지역전통과 의례들을 강조하는 지역문화를 강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버(Barber)가 종교적 근본주의의 현상으로 언급했던 ‘지하드(Jihad)’는 이러한 동일화에 저항하는 예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을 ‘타질화(Heterogenization)’이라고 부르며 전 지구적 동질화에 반대하는 지역적 응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화 과정에서 동질화 과정과 저항 또는 전통을 강조하는 타질화 과정을 모두 고려한 로버트슨(Robertson)은 ‘Glocalization’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려 한다. 로버트슨에 있어서 지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에 반드시 반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에 포함된다.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을 종합하려는 그의 논의에 그리고 세계 내에서 문화적 동질성(Homogeneity)과 타질성(Heterogeneity)의 공존이라는 그의 생각에 초점을 좀 더 맞추기 위해서 그는 세계화(globalization)를 ‘Glocalization’으로 대체한다.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로버트슨의 Glocalization은 무엇을 세계적인 것이라고 무엇을 지역적인 것이라고 일상적으로 부르는지, 어떻게 그것들은 서로 뒤엉켜지는지 그리고 이러한 뒤엉킴의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분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세계화의 결과는 전 지구적 동질화와 그에 대항하는 타질화라는 분쟁적인 이해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버트슨에 있어서 세계화의 결과는 동질화나 타질화가 아니다. 그는 이 두 가지 성향 모두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로버트슨은 지역의 저항(Local resistance)과 지역의 주체성(Local subjectivity)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듯하다. 그는 심지어 반세계화운동(Antiglobal movements)도 세계화 과정에 기여한다고 말하면서, 미국 내에도 반세계화주의(Anti-globalism) 존재하지만 이것 또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한 형태이며 세계화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Glocalization 이론은 과연 어떻게 동질화와 타질화가 상호간에 관련되는지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세계적인 입장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지속하고 있는 ‘지역 문화적 독특성(Local cultural particularity)’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세계화를 통한 현대세계의 문화의 상호작용적인 관계가 동질화와 타질화를 결합시킨다고 제안한다. 그는 서구문화와 지역문화가 잘 혼합되어 Glocalization이 진행된 예로서 일본을 제시한다. 그러나 각각의 지역문화들에서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Glocalization이 진행되는 지를 설명하는 데 그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아시아의 경우, 근대화와 군국주의를 통해 다른 나라를 식민화하여 경제적인 성장을 이룬 일본이나 서구에 식민지화되었다가 독립 후 매우 낮은 GNP를 기록하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나 또는 한국과 같이 서구열강이 아닌 일본에 식민지화되고 전쟁(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급격한 경제 성장 중심의 근대화를 겪은 나라가 가지고 있는 분명한 문화 사회적인 차이들을 그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각각 다른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인 콘텍스트들과 각 지역의 전통들이 세계화에 응답 내지는 대응하면서 각 지역문화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력을 각각 다르게 미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또한 로버트슨의 ‘Glocalization’이 지역문화의 타질화를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타질화는 언제나 세계문화를 논의하는 동질화를 함께 논의한다. 바로 이것이 로버트슨의 문제이다. 서로 반대되는 동질화와 타질화를 한데 엮어 결국 서구문화의 지배성과 확장성을 위한 또 하나의 용어(Term)일 수 있는 전 지구적 체계(Global system) 안에서의 ‘전 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라는 개념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Glocalization은 지역 주체성의 중요성과 세계화로 인한 지역문화의 ‘전환(Transformation)’의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결국 서구 중심적 문화의 우월성을 여전히 강조하는 맥락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세계문화가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달라지는 세계 각 지역의 문화들의 연계성을 어떠한 이론적 틀로 설명할 것인가? 라는 등의 전 지구적인 관점(Global perspective)을 가진 로버트슨과는 달리, 논자는 세계화가 진행되는 이 시대에 지역문화는 어떻게 세계화에 영향을 받고 어떻게 저항하는가 그리하여 어떻게 변화하는 가에 관심한다. 이러한 ‘지역적 관점(Local perspective)’에서 보았을 때, 세계화로 인한 지역 문화의 변화를 동질화나 타질화로서 또는 이 둘을 묶는 Glocalization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세계화로 인한 각 지역문화의 변화는 그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컨텍스트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 각의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고 나름대로의 특성들을 성취하게 된다. 논자는 이를 ‘다양성(Diversity)’이라고 부르려 한다.
    다양성은 세계화로 인한 지역문화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세계화에 의한 문화적 변화들은 문화적 독특성이나, 지역주의, 그리고 차이 등을 재발견하고 이해하려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 지구적 문화라는 하나의 형식은 지역문화와 지역인들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다. 세계화와 맞닥뜨리는 각각의 지역문화는 하나의 이론적 틀로 넣을 수 없는 매우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지역문화에서 세계화로 인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변화들의 공통점을 찾아서 하나의 거대한 획일적이고 동일화된 전 지구적 문화의 출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역문화의 변화의 다양성들 하나하나에 주의하여야 한다. 피더스톤(Featherstone)은 세계화는 동일성(Homogeneity)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다양성과 지역문화들의 확장된 영역에 친숙해 짐(Familiarization with greater diversity and an extensive range of local cultures)”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터너(Turner) 또한 세계화는 한 공동체 안에서 많은 전통들이 겹쳐지고 증가하는 문화의 ‘다양성(Diversity)과 복잡성(Complexity)’을 일으킨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세계화는 전혀 새로운 수준의 ‘다문화주의와 문화적 다양성(multiculturalism and cultural diversity)’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제 세계화로 인한 각각의 지역문화의 변화는 동일화나 타질화보다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각각의 지역문화의 변화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또한 각 지역문화가 그 나름의 통전성(Integrity)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지역적인 것(The local)과 세계적인 것(The global)의 충돌은 단순히 세계적인 것의 힘에 지역적인 것이 종속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지역문화(Local culture)는 모두 서구 문화 중심으로 구획된 전 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에 편입되어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유리(Urry)는 세계화는 한 가지의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으며 다양하고 분열되고 불확정적인 지역성들이 세계적인 것과의 충돌(The impact of the global)에 의해 나타난다고 이해한다. 유리는 이러한 세계적인 것들과의 충돌로 인한 지역성의 특징을 ‘전 지구적 복합성(Global complexity)’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 지구적 복합성이라는 개념은 각각의 지역성의 특징을 담보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각각의 지역문화의 변화의 설명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다양한 지역성들을 복합성으로 볼 수 있지만, 복합성이라는 틀로서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인해―세계적인 것과의 충돌로 인해―변화된 각각의 지역성들의 독특성과 통전성과 그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II-3. 혼성화(Hybridization)
    여기서 우리는 각각의 지역성의 변화와 그 독특성과 통전성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과 개념의 필요성을 보게 된다. 독특성과 통전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지역문화는 이전의 지역문화의 반복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문화는 동시에 과거의 모습을 모두 버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또한 세계문화 또는 서구문화를 그대로 복사한 것도 아니다. 비록 지역 문화의 변화는 세계화로 인해 시발 되었지만 지역문화는 이전의 지역문화의 반복도 서구문화의 복사도 아닌 그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화로 인해 변화된 지역문화의 특성을 논자는 ‘문화적 혼성성(Cultural hybridity)’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지역문화의 변화 과정을 ‘혼성화(Hybridization)’라고 부른다. 프리드만(Friedman)에 의하면 문화적 혼성성은 새로이 증가하는 사회적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혼성화를 통해 만들어진 것은 그 혼성화를 진행한 사람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지역문화의 주체로서 지역사람들은 혼성화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지역 사회와 문화는 이러한 혼성화가 일어나는 장소이며 우리는 이미 많은 혼성성을 지역문화와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지역문화의 주체가 사람이므로 그 지역 문화를 바꾸는 주체도 지역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또한 이러한 혼성화는 하나의 동일한 또는 보편적인 형식이나 진행과정이 정해져 있지 않다. 각각의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로 인한 지역문화의 혼성성은 종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서구세계의 기독교들(한국 개신교 등)은 문화적 혼성성을 보여준다. 각 각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콘텍스트 아래 비 서구세계의 기독교들은 나름대로의 혼성화된 특성과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저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이러한 비서구 세계의 기독교들의 혼성성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바바(Bhabha)에 의하면 바로 그러한 것이 탈식민시대의 문화적 혼성성의 특성이라고 한다. 그의 탈식민주의적 사고는 비서구 기독교의 문화적 혼성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문화적 혼성성(Cultural hybridity)은 식민주의적 힘의 영향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식민주의적인 지배에 대한 거부의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혼성성은 이미 입증된 문화적인 전통으로나 또는 식민주의적 힘이 지역 문화를 관통한다는 생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한다. 바바는 이러한 문화적 혼성성의 특징을 ‘양가성(Ambivalence)’이라고 한다. 바바에게 있어서 이러한 양가성으로 존재하는 지역적 정체성으로서의 혼성성은 지역 공동체가 교정되고 재구성된다는 표시(Sign)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한국 개신교의 경우 선교사들이 전한 기독교는 바로 그대로 한국에서 수용 및 정착된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모습을 성취하였고 그러면서 성장하였다. 혼성화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의 사회문화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토착화를 논자는 혼성화의 한 유형이라고 이해한다. 한국 개신교는 분명 서구 기독교를 받아 들였음에도 서구 기독교는 가지고 있지 않는 나름대로의 특성과 모습을 발전시키었다. 제의적 측면에서는 추도식(추도예배)이 그 예이다. 추도식은 단순히 유교적 전통에 대한 포기와 새로운 종교를 즉각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한국인으로서 기독교를 수용하고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혼성화(Hybridization) 과정에서 획득되어진 것이다. 핵심 용어로서 개신교에서 말하는 신의 이름 ‘하나님’ 또한 본래 무교전통에서 최고신의 이름이었다. 물론 존 로스(John Ross)가 서상륜 등 여러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최초의 󰡔성서󰡕 번역에서 하나님이 사용되고 있으나(1886), 그의 번역 이후에도 ‘상제’ 등의 용어도 함께 사용하며 혼란을 겪다가 ‘하나님’으로 귀착되었다. 또한 개신교 안의 산기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안수기도, 금식기도와 같이 서구 기독교에서는 미약해지거나 없는 제의적 모습들을 한국 개신교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한국 기독교의 독특한 모습들에는 서구 기독교의 맥락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서구 기독교의 모습에 거스르는 것도 있다. 실제로 서구 선교사들은 제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주를 불살라버려야 한다거나 혹은 반드시 없애야 하는 악마숭배로 이해했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제사를 통해 부모님에게 존경과 효를 표현하고 나아가서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사람취급조차 못 받을 수 있다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한 초기 서구 선교사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기독교 신의 이름으로 적당한 이유는 무교에서의 최고 신(The highest God)이며 ‘원시적 단일신관(Primitive monotheism)’을 보여준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이 무교에서 기독교적인 의미로의 변화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이라는 무교적 신개념이 기독교적 신개념으로 전환(Transformation)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종교적인 측면에서―기독교의 경우―세계화의 결과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동일화 현상이나 또는 저항과 반대급부로서의 타질화가 아니라 새로운 특성과 모습을 갖게 되는 혼성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서구 기독교의 세계화의 한국 내에서의 결과는 혼성화인 것이다.
    서구 기독교를 판단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한국 개신교는 단순한 종교적 혼합주의(Syncretism)의 한 형태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설명하였듯이 한국 개신교는 서구의 기독교와는 다르며 그렇다고 한국의 다른 종교전통에 흡수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는 19세기 초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한국 사회와 문화와 충돌하고 이를 전환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한국 개신교는 무교와 불교적 종교문화와 무너져가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유교를 신봉하는 한국 사회에 많은 자극과 도전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추도식은 유교가치의 반복이 아니며 동시에 서구 기독교의 완벽한 복사도 아니다. 오히려 추도식은 어떻게 한국 개신교가 그 특성을 다종교 상황과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 아래서 자신의 특성을 형성 하였고 한국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추도식은 바로 한국 개신교의 문화적 특성, 혼성성(Hybridity)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서구 기독교가 혼성화 과정을 거처 자신만의 특성을 가지는 한국적 개신교가 되는 것이다.


    Ⅲ. 한국 개신교와 세계화

    III-1 종교와 세계화 : 한국 개신교 특성 이해의 새로운 시도
    종교를 교리나 세계관은 어떠하며 어떠한 궁극적인 목적(구원, 해탈 등)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묻고 대답하며 이해하고 정의할 수 있지만, 종교는 또한 그 종교를 가진 또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적 행위는 어떠한가의 문제, 즉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신앙)를 실천 하는지를 관찰하고 이해 할 수도 있다. 세계화 시대의 종교적 혼성성 또한 혼란과 종교 혼합주의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입장으로 본다면 어떻게 한 종교가 인간의 삶과 사회 속에서 실천되고 토착화되고 있는지를 관찰함으로서 종교적 혼성성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뒤르껭(Durkheim)은 종교를 ‘믿음과 실천의 연합된 체계(A united system of belief and practices)’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믿음의 체계와 그 실천은 반드시 교회와 같은 공동체와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뒤르껭에게서 종교는 종교의식, 기도나 예배 등의 실천(행위)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기어츠(Geertz)는 또한 신성한 것을 강화하고 헌신 하도록 하는 ‘문화적인 체계들의 상징적 행위들(symbolic activities of cultural systems)’이라고 종교를 정의한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보콕(Bocock)이 주장 했듯이 문화는 예술작품이나 독특한 삶의 방식이나 공유된 가치나 의미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문화가 무엇인가(What is culture?)’라는 질문보다는 이제 ‘문화는 어떻게 실행되고 실천되는가?(In what way is culture performed and practised?)’라는 질문에 답함으로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문화는 인간의 삶의 근저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매일 행위하는 것이 문화이다. 문화는 사람들의 물리적 또는 지리적 그리고 상징적 또는 사회 안에서의 사고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역문화의 규범과 가치들을 실제화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천 또는 행위가 한 지역문화의 정체성과 통전성을 유지하게 하는 주요한 힘이다. 왜냐하면 정체성과 통전성은 여전히 지역주민들의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행위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힘은 식민주의적 그리고 제국주의적인 힘의 헤게모니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아가서 문화를 국가나 민족 또는 한 집단 안에서 생산되고 변화, 교환되어지는 가치와 의미들의 행위들로 본다면, 문화로서의(문화로서 이해하는) 종교 또한 인간의 행위로서 파악함으로서 좀 더 실제적으로 적확하게 종교를 설명할 수 있다. 종교를 사회적 제도나 문화적 현상만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에 의해 구체적인 컨텍스트 안에서 제의(Ritual)로, 또한 사회적인 행위(Social activities)로 실천 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구체적인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은 그들의 지역성을 숙지하면서 그들의 컨텍스트 안에서 신앙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지역 기독교(Local Christianity)는 그 지역 사람들의(The locals) 문화적 행위로 인해 그 특성과 모습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한 지역의 기독교의 특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종교로서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와 교리에 대한 지역 기독교인의 이해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종교적 행위 즉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성장 발전하는 장소에서 언제나 이러한 기독교는 ‘문화적 행위(Cultural practices)’인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기독교가 그 지역 안에서 지역문화의 통례적으로 규정된 규례들만을 실천하면서 지역 기독교의 특성을 만든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역의 문화적 규례들은 적용되기도 하지만, 반드시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복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때로는 지역의 문화적 전통과 규례 등에서 벗어난 행위들을 통해서 지역의 기독교는 그 특성을 구성하기도 한다. 부르드외(Bourdieu)는 이렇게 규례를 지키기도 거스르기도 하는 인간의 행위를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부르드외에게 있어서 아비투스는 “오래 지속하는 체계(Systems)이며, 바꿀 수 있는 습관(Dispositions)이며, 구조화하는 구조(Structuring structures)가 작동하도록 하는 구조화된 구조(Structured structures)”이며, “인간의 행위와 표현들을 만들고 조직하는 원칙(Principles)”이고 또한 “어떤 법칙에도 순응하지 않은 채로 규정되어졌고 규칙적(Regulated and regular)”이다.
    이러한 아비투스를 이해하기 위해 스포츠 경기를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단순히 규칙을 지키기 위한 경기를 하지만 시간이 지나 경기의 규칙이 몸에 베이고 나면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만이 경기하는 선수의 모든 모습은 아니다. 어느 날로부터 또는 점점 경기를 많이 하면서 점수를 내기 위한 경기, 이기기 위한 경기 심지어는 적당히 반칙인지 아닌지 모호한 행동을 하며 경기를 하게 된다. 이러한 경기력은 경기규칙을 지키면서 규칙에만 억매이지 않는 그리고 규칙에 대한 아무런 부자연스러움 없이 경기를 하는 선수의 아비투스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아비투스에 의해 문화와 사회 안에서의 인간의 행위는 문화적 기대와 전통을 아우르는 규례(regularity) 안에서 한정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행위는 그것을 뛰어넘는 사회문화적인 가치와 체계에 대한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서 아비투스는 어떤 규칙에 복종하거나 거스르는 것으로 인간의 행위를 분절되고 일관성을 상실하여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Harmony)’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부르드외에 의하면 아비투스는 마치 ‘지휘자(Conductor)가 없는 오케스트라’와 같이 작동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투스는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로 만들어진 생산물들이 그들 자체 내에서 어떤 일체성 없이 어떤 의도적인 목적 없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비투스는 지역 기독교의 혼성성과 그 성취과정(혼성화 과정)을 진행시키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를 작동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서구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이제 세계종교라 할지라도 그리고 전 지구적 네트워크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지역 기독교(Local Christianity)의―특히 비서구 세계의 기독교들의―혼성성은 “어떤 법칙에도 순응하지 않은 채로 규정되어졌고 규칙적(Regulated and regular)”인 아비투스에서 비롯된 구체적인 지역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즉 지역 기독교는 단순히 서구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가 아니라, 지역인들의 사회문화적 아비투스의 작동에 의해 그 지역인 들이 기독교적 신앙행위를 함으로서 그 특성과 모습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즉 아비투스에 의한 지역 사람들의 신앙행위에 의해 기독교가 한 구체적인 장소에서 토착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지역 개신교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과 모습을 단순히 서구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의 실천으로 인해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은 예배나 기도 등의 종교적 행위와 사회현안들에 대한 의사표현과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문화적 혼성성 또한 종교적 행위 즉 예배나 기도 그리고 사회적 행위 등을 관찰함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추도식과 하나님이라는 핵심용어의 형성과정들이 바로 그 예들이다.
    이 혼성성의 예들은 한국문화에 맞추어 무엇인가를 만들겠다는 식의 전문신학자나 교단만의 정형화된 뚜렷한 의도나 조정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추도식 등과 같은 혼성성의 예들(혼성화의 결과물들)은 습관이나 관례나 또는 어떤 지적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한국 문화적 아비투스에 의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 생성된 것들이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혼성성을 생성하는 한국 개신교들의 종교적 행위가 전통적 가치와 의미들과의 혼란이나 단절을 야기하기보다는 아비투스에 의해 오히려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III-2. 한국 개신교의 혼성화 과정과 종교사회문화의 재형성
    논자는 앞에서 기존의 세계화 이론을 비판하고 제시한 혼성화 이론의 근거로서 한국 개신교의 혼성화 과정과 그 특징들을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혼성화 과정을 한국 근대화 과정과 더불어 이해하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는 한국 근대화(Modernization) 과정과 함께 성장하였고 그 성장 가운데 혼성화가 진행되었다. 논자는 이를 세 가지 국면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국면은 19세기 말로부터 1950년대까지 이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개신교의 혼성화는 한국의 종교문화와 사회에 충돌/도전하고 새로운 문화적 가치들을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초창기 개신교인들은 단순히 개신교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유교적 가치와 무교적 종교심성과 가치 판단들과 충돌하며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개신교의 문화적 혼성성은 추도식과 같은 실질적인 생활 속에서의 문제들로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한국 개신교는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의 붕괴와 일본의 식민지화 등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 민족운동에 깊게 관여하였고 새로운 민족성(Nationality) 형성에 기여했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특성은 세계화로 인해 서구 문명과 종교에 동화 되는 것이 아니라 초기 한국 개신교인들이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번역(Cultural translation)하는 것으로서 또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재해석(Re-interpretation)하는 것으로서 가능했다. 즉 혼성화이었다.
    또한 해방이후 여러 가지문제(신사참배, 신학적 분쟁, WCC 가입문제 등을 그 시발점으로 하여)로 분열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하비가 언급 하였듯이 서구 근대성(개인화와 합리성의 영향)의 특징 중의 하나인 분열과 파편화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국면은 1960대부터 1990년대 이다. 해방이라는 민족적 사건과 한국전쟁이라는 큰 역사적 비극으로 정신적으로 환경적으로 경제적으로 황폐화 및 초토화된 후 군사독재가 이끈 근대화는 경제성장에 지나친 집중으로 급격한 산업화와 극심한 도시화 현상을 수반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한국 개신교는 양적인 급성장을 이룩한다. 이는 베버(Weber)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이해와는 상반되는 예이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개신교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한국 개신교는 실제로 그 양적 성장 과정에서 사업자적인 마케팅 전략 등으로 자본주의적인 색채를 매우 강하게 드러내었다. 또한 전쟁과 식민지 이후 강한 생존욕구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동들은 무교적 심성과 행위들과 접합된 신앙형태로서 기복신앙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민중신학과 같은 정치신학도 등장 하게 된다. 이 시기의 한국 개신교의 혼성화는 자본주의와 경제 발전과 타 종교전통의 영향을 받아 진행 되었다. 서구에서 한참 세속화 이론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이 시기에 서구 기독교와의 동일화나 또는 기독교에 저항하는 타질화라기보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는 나름대로의 혼성성을 획득하는 독특한 발전을 하였다. 이는 세속화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적 매혹(Modern Enchantment)’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구 기독교의 세속화와 판이하게 다르게 진행된 개신교의 성장 과정은 한국 개신교만의 혼성화 과정 이었다. 그리고 개신교는 기존의 유교와 불교전통보다 역사는 매우 짧지만 나름대로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또한 개신교의 등장과 성장 그리고 사회문화적 영향으로 인한 한국의 ‘종교 사회와 문화의 기반을 재형성(Re-establishment of religious and socio-cultural founda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 번째 국면은 1990년대로부터 2000년대 초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이전까지의 급속한 성장의 침체 국면의 시기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폭발적인 성장이 이렇게 멈춰지는 것 또한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개신교의 한 독특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종교사회학자 이원규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박탈 보상 심리의 저하와 대체종교의 발달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서 이러한 국면은 교회의 양적 성장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기복적, 근본주의적 신앙 형태에 대한 거부감과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대다수의 보수적인 교회들의 무관심과 무참여에 대한 실망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그러나 급격한 성장이 진정국면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감소의 시작을 의미 하는지는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 국면은 아마도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에 형성될 한국 개신교의 새로운 혼성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Ⅳ. 나오는 말

    이 글에서 논자는 세계화는 서구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확산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세계화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본다면 종교 또한 이러한 세계화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화'를 의미하는 서구 기독교의 확산 및 수용만이 아니며 또한 ‘타질화’를 의미하는 저항과 거부가 아니라 각각의 문화와 사회 안에서 ‘혼성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혼성화 과정은 한국 개신교의 특성과 모습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서구 기독교가 한국 종교문화와 충돌하였다 할지라도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세계화는 한국인들의 사회문화적 ‘아비투스’에 의해 개신교 신앙을 삶에서 실천 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형성하는 ‘혼성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개신교는 서구의 기독교의 복사판이 아니며 기존의 종교문화 전통의 답습 또한 아니다. 이러한 혼성화 과정은 논자가 제시한 한국 개신교의 발전및 혼성화 과정의 세 가지 국면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문화적 번역’이며 나아가서 ‘한국 종교 문화와 사회의 기반의 재형성’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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