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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1회] 황용연_신학의 위상학, 신학적 위상학--한국사회에서 신학적 사고의 가능성 [카테고리]
  • 제3시대
    조회 수: 4918, 2007.07.31 08:49:39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제101회 월례포럼                                                           2007.7.30

    신학의 위상학, 신학적 위상학
    - 한국 사회에서 신학적 사고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_황용연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대학부장, 본 연구소 기획위원)


    1.
    최근 [기독교사상]에 연재되는 정용섭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의 5월호 설교비평 <값싼 은혜, 무거운 은혜 :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에 대해서 당사자인 조헌정 목사가 6월호에 거센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다.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정용섭 목사의 비평의 핵심은 조헌정 목사의 설교가 너무 ‘무겁다’라는 것이었다. 이 때 ‘무겁다’라는 말은 조헌정 목사의 설교가 설교자(인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성서의 목소리가 혼재된 상태에서 청중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진리로 다가가게 되어 결국 청중들에게 과중한 짐으로 다가서게 된다는 의미라고 보인다. 이런 입장에 선 글이었던 이유로, 정용섭 목사의 비평 중에는 특히 조헌정 목사가 자주 설교에서 언급한 평택 미군기지 문제에 대해서, 과연 그렇게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일종의 딴지를 거는 구절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좀 길게 인용하면서 자세한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필자는 조 목사와 달리 미군기지가 평택 대추리로 옮겨지는 덕분에 남한 곳곳에 흩어졌던 미군기지가 공원으로 탈바꿈되는 꿈을 더불어 꾼다. 욕먹을 각오로 더 노골적으로 말하겠다. 미군기지로 사용되는 용산의 그 땅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정말 해괴한 논리지만 미군주둔 때문이었다. 미군기지가 아니었다면 이미 그곳은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창피하게 대구 시내 한복판에도 미군기지가 몇 군데나 있다. 이제 이런 시설이 평택으로 옮겨간다면 대구에 꽤 쓸 만한 도시 공원을 마련할 수 있으려나.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와 한미 FTA 반대에 서명했고, 나름으로 그런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필자가 지금 빈정대듯이 조 목사의 설교를 트집 잡는 이유는 그가 설교와 시국강연을 혼동함으로써 그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축소시킬 염려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의 느티나무’라는 매우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수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정확하게 뚫어볼 수 없게 만드는 자기함정은 아닌지. 필자의 눈에 조 목사는 낭만적인 평화 원리주의자처럼 보인다."
    결국 조헌정 목사의 설교에 대한 정용섭 목사의 평가를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일종의 ‘선동’이란 말을 쓸 수 있으리라. 실제로 글의 다른 부분에서 정용섭 목사는 보수주의 목사들이 설교에서 정치 선동을 하는 것이 불편했는데, 조헌정 목사의 설교에서도 같은 불편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정작 필자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정용섭 목사의 이런 비평에 대한 조헌정 목사의 반론이 상당히 격렬했다는 것이다. 물론 격렬했다는 그 자체를 두고 왈가왈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격렬함’의 양태에서 어쩌면 한국 그리스도교 내의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종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조헌정 목사의 반론의 격렬함은 대체로 정용섭 목사의 비평을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일종의 ‘반대’로 받아들인 데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신이 설교와 집회 참여에서 가장 정성을 들인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문제를 두고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비평이 들어온 것을 상당히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조헌정 목사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문제를 두고 일종의 계몽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서두부터 정용섭 목사가 적어도 비난이나 조롱의 의미로는 쓰지 않았을 ‘독립투사’나 ‘설교 1년에 30차례’ 등의 표현을 비난/조롱조 아니냐고 인식하면서 언짢은 심기를 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조헌정 목사는 정용섭 목사의 ‘평화 원리주의’라는 지적에 대해서 사실상 자신이 ‘원리주의자’가 아니라고 반박하기보다 자신의 ‘원리’가 왜 부당하냐고 반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리주의’라는 지적이 다른 말로 ‘선동’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면, ‘선동’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나아가서 그렇게 ‘선동’을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냐는 말도 될 것이다. 그리고 조헌정 목사의 그 신념은 자신의 신앙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라는 점이 틀림없으며, 사실 그러하기 때문에 바로 앞 문장의 지적-‘원리주의자’가 아니라는 반박이 아니라 자신의 ‘원리’가 왜 부당하냐는 반박을 하고 있다-이 가능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인 한국의 ‘진보적’ 그리스도인의 신앙 구성 양태이기도 하며, 이 진술은 ‘진보적’자를 빼더라도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있는 사실을 하나 떠올린다면, 조헌정 목사는 자신의 반론 서두에 평소에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을 기쁘게 읽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기쁘게 읽어 왔다는 설교비평을 두고, 막상 자신을 대상으로 했을 때 저런 격렬한 반론을 하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남들 비판하는 건 읽기 재미있지만, 역시 자기 비판하는 것은 견딜 수 없어서? 설마.^^
    아마도 그 동안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에 담긴 메시지와 신앙이 조헌정 목사 자신의 신앙에 잘 맞는다고 느꼈기에 기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바른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고 문제설정을 해 놓고, 그에 대해서 조헌정 목사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이 비교적 잘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잘 맞아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막상 자신이 대상이 되었을 때 다른 점, 더군다나 자신의 의견과 ‘반대’로 보이는 다른 점이 드러남으로써 격렬한 반론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짚어 볼 것은,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 역시 ‘바른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기본적으로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설교의 의미 자체를 풍부하게 드러내기보다는, 그 설교가 ‘바른 복음’을 전하는데 적절하냐 아니냐라는 기준에 맞춰 가부 판단을 내리는 글에 가깝다(어떤 민중신학 연구자는 “마치 교수가 대학 학점을 매기는 듯 한 비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헌정 목사의 설교가 ‘선동’이라면, 그러한 ‘선동’이 가능한 이유는 조헌정 목사가 근본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정치사회적 견해를 ‘바른 길’이라고 확신하고, 목사의 직무는 그 ‘바른 길’을 어떻게 잘 전할 것인가에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헌정 목사를 ‘선동’이라고 비판하는 정용섭 목사 역시, 그러한 근본 사고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정용섭 목사가 조헌정 목사의 ‘선동’을 비판하는데 동반되는 질문이 “설교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사회문제를 언급하는 게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라는 것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근본 사고가 비슷한 상태라면 ‘정도’를 따지는 질문 외에는 나오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지점에서 생각나는 것이, 진보적 기독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믿음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천을 해야지”, “예수의 길을 따라 살고 싶다/살아야 한다” 등등의 말이라는 것이다. 진보적 기독교의 입장에 선다는 사람들은 이 말을 ‘보수적 기독교’와 구별되는 자신의 정체성인 듯이 사용하지만, 사실 이 말은 '진보적‘이라는 말을 생략해도 사용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먼저 상기해 두자.
    그 점을 상기한다면, 방금 지적한 말들 역시 정용섭 목사와 조헌정 목사의 논쟁에서 부각되었던 특징을 공유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문제는 그 ‘바른 길’을 어떻게 실현하느냐라고 보는 그 특징 말이다. 그리고 ‘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려면, 그 ‘바른 길’은 당연히 이미 내용이 대체로 확정되어 있다는 전제가 뒤따라야 가능할 것이기도 하겠고.

    2.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최근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의 폭발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이랜드’. 정용섭 목사와, 조헌정 목사와, “예수의 길을 따라 살고 싶다”는 사람들은, 과연 ‘이랜드’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할까?
    무슨 말이냐는 반문이 당연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말한 사람들 모두, 분명 지금 그 자체로 비판을 하고 있고, 특히 성서 구절과 사회적 상식을 들어 가며 “복음을 실천하는 것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이랜드”를 비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랜드를 비판하는 필자 입장에서는 그렇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 보려는 것이다. 과연 이랜드의 문제가 “복음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고,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 것인가? 조금 말을 다르게 바꿔 보면, 이랜드 경영진을 과연 흔히 말하는 “선데이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랜드를 ‘기독교 기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장 비종교적인 영역일 것 같은 ‘기업 경영’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실천’을 해 보겠다는 것, 즉 ‘복음을 실천’해 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랜드를 비판하더라도 “복음을 실천하지 않았다”라는 비판은 틀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복음의 실천”은 전형적인 한국 보수주의 기독교의 실천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오랫동안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억압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 지점에서 그 “복음의 실천”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오히려 그런 비판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은 더 이상 “복음”이란 것을 전제해 놓고 그것을 “실천”하느냐 아니냐를 단순하게 가리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복음”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왔으니까 노조가 ‘사탄’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옳음이 종교의 힘을 받아 확신으로 변함으로써, 관계 속에서 전혀 상호작용할 수 없는 바로 그 모습.

    그래도 이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문제는 ‘보수주의 기독교’ 혹은 ‘근본주의 기독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 아닌가 하고.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터진 샘물교회 신도들 납치 사건.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한국 보수주의 기독교의 위기를 드러낸 사건이라고들 해석하고 싶어한다. 물론 그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문제의 본질은 종교가 아니라 한국의 파병 정책”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물론 이 사건에도 일정하게 한국 보수주의 기독교의 문제점이 투영되어 있기는 하다. 그들이 안전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선교’를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주어진 상황을 찬찬히 따지고 거기에 따른 대책을 모색하기보다 ‘선교’라는 당위에 매몰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교’가 당위가 되면서, 이번 사건에서 보듯이 이른바 ‘공격적 선교’가 아닌 봉사 중심의 선교라 할지언정, 타자의 상황과 요청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리고 아무리 “뜻이 좋아도” 그것이 현지에서 어떤 작용을 하게 될 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선교’를 그러한 양상의 ‘당위’로 올려 놓은 것이 보수주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특히 이번 샘물교회처럼 비교적 ‘건전한’ 보수주의 기독교라도 끝내 포기하기 힘든 ‘기독교 우월주의’에 근거한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터.
    그런데 과연 이 사건이 ‘보수주의 기독교의 위기’이기만 할까?
    이 사건이 ‘보수주의 기독교의 위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한 이른바 ‘여론’이 기독교에 대한 격렬한 비판 담론으로 형성된 것에 있을 것이다. 때마침 앞에서 이야기한 이랜드 문제까지 겹치는 바람에 그런 비판 담론이 더 활성화되었기도 하리라. 그런데 그 비판 담론의 양상은 거의 루머나 날조를 통해 납치당한 사람들의 행동을 멋대로 상상하고, 그 상상된 행동의 ‘어이없음’을 공격하거나, 혹은 “국가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말아야지”라는 말을 아주 당연한 듯이 전제하고 그 전제에 따라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면, 대체 이 때 이런 담론들이 ‘기독교 비판’, ‘보수주의 기독교 비판’이라고 해서 특별히 의미를 가질 것이 무엇인가? 그냥 욕하고 싶은 대상을 욕하는데, 당장 갖다 쓸 수 있을 만하게 보이는 ‘결점’들을 마구 갖다쓴 것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 ‘욕하고 싶은’ 마음이 이번 경우에는 아예 “차라리 그 곳에서 죽는 게 더 나을 지도 몰라”라는 말까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감수성의 공감대 자체에서 제외해 버리려는 여러 언행의 핑계까지 되었다면 말이다.
    이 사건이 ‘보수주의 기독교’의 위기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진보주의 기독교’의 위기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체 이 사건을 두고 ‘진보주의 기독교’는 어떤 입장과 담론을 취해 왔는가? 필자가 보는 한, ‘진보주의 기독교’는, “국가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말아야지”라는 입장을 반복하거나(“위험지역 선교를 자제하자”는 KNCC 총무의 메시지), 혹은 “역시 보수주의 기독교가 우월주의에서 무리한 선교를 하더니...”하는 식으로 일반 여론에 편승만 하거나, 혹은 이 사건을 “아프가니스탄 파병군대 철수”의 계기로 삼으면 된다고 하는 담론에 편승만 해 왔다. 결국 이 사건에서 ‘진보주의 기독교’는 헛다리를 짚거나, 최악의 경우 납치된 사람들을 감수성의 공감대에서 제외하려는 시도의 공범이 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다시 ‘보수주의 기독교’건, ‘진보주의 기독교’건, 공유하고 있다고 앞에서 지적한 전제ー‘복음’ 등의 ‘옳은 것’과 ‘당위’를 전제해 놓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되고, 그것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도덕적 비난을 가하면 된다는 그 전제ー를 상기해 보자. 사실 비단 저 납치 사건의 경우만이 아니라, ‘진보주의 기독교’가 ‘보수주의 기독교’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방금 말한 전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아니, 저 전제야말로 진보주의 기독교가 그 동안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해 갖는 우월감의 근거였지 않은가. 그런데 진보주의 기독교가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해 가한 도덕적 비난이 앞에서 본 것과 같은 파시즘의 근거로 전유될 때, 진보주의 기독교는 과연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물론 그 도덕적 비난의 근거가 될 만한 일을 그 동안 보수주의 기독교가 많이 해 왔고, 그들이 그런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역시나 “복음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는 전제를 굳건히 사수하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여기서 조금 덧붙인다면, “복음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기복신앙”을 극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거짓말이다. 이 말은 그들이 앞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기복신앙”을 조장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3.
    “복음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을 전개하고 보면, 이런 사고방식과 그에 따르는 문제가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가 보여 주는 사고방식과 그에 따르는 문제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의 한국 사회의 담론 양상에서 이 글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김진호 목사의 주된 주장인 민주화 이후의 시민 주체 형성 - 국가/시민사회와 욕망을 거래하는 주체 - 의 논의를 잠시 빌어 온다면, 그러한 시민 주체로 형성된 사람들이 격렬한 인정투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IMF 이후로 사회적 존재 자체가 불안해져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든 ‘개인적 탈출구’를 찾으려 하면서, 그 개인적 탈출구를 “남보다 더 많이 인정받는 것”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 이러한 인정투쟁의 근본 원인일 것이다. 인터넷 환경에서 일어나는 폐해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악플’은, 인정투쟁의 격렬함을 잘 보여 주는 예로 적절하다.
    이러한 인정투쟁의 속성은 ‘공정한 경쟁’에 대한 욕망과도 연결된다. 누구든 자신을 패배자로 상상/인정하기는 쉽지 않은지라, 항상 현실의 모습이 어떠하든지간에 자신을 승리자(혹은 미래의 승리자)로 생각하기 쉽고, 그 승리를 혹시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공정한 경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정투쟁의 와중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감정은 크게 두 종류이다. 자신의 영역을 위협하지 않거나, 어떤 계기로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다면, 동정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사회적 소수자들은 대체로 “지들이 못난 주제에 감히 특혜를 바라는” 존재로 욕을 먹게 마련이다.

    이러한 ‘인정투쟁의 만연’ 현상이 ‘민주화 이후’와 결합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물론 ‘인정투쟁’ 자체가 이미 민주화 이후 ‘시민 주체’의 정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지만, 여기에서는 ‘민주화 이후’ 그 민주화의 해석과 사회적 작용의 문제에 집중해 보자.
    민주화라는 것은 대체로 그 전의 비민주적 정부를 어떻게든 축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시당초 ‘민주 vs 반민주’ 구도의 도덕적 담론 속에서 이루어지기가 쉬울 것이고, 한국도 그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민주화의 이런 도덕적 성격과 앞에서 논의한 인정투쟁의 성격이 결합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담론은 인정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동원의 대상 - 민주화를 긍정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는 대로, 부정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는 대로 - 으로 전화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노무현 정부 이후 (주로 보수언론에 의했긴 하지만) 많이 언급된 ‘편가르기’의 실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민주화 담론이 인정투쟁의 담론으로 전화하면서, 민주화 담론은 이제 갈라진 두 편 중 어느 쪽이 ‘흠집’이 적으냐를 놓고 서로 다투는, 그럼으로써 서로를 상처내기에 급급한 그런 싸움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고 보면 지나친 것일까. 물론 ‘인정투쟁’에서 이기는 길은 앞에서 잠깐 전개한 논의가 시사한 대로, 애시당초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자원’을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인정투쟁’은 자신들의 싸움을 위협하거나 혹은 아예 그런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십자포화’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른바 ‘귀족 노조’ 담론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물론, ‘귀족 노조’ 담론의 절반의 책임은, 인정투쟁 구도 자체를 깨기보다는 그 인정투쟁에 한 몫 끼어들기를 더 열망하는 것으로 보이는 민주노동당의 상층부를 비롯한 이른바 ‘민중운동’ 세력에도 있다).
    앞에서 논의했던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옹호/매도의 시선과 그 시선을 반복해 온 진보주의 기독교의 한계는 이 지점에서 정확하게 민주화 담론이 인정투쟁과 결합하는 바로 그 지점과 만난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옹호/매도의 경계선은 민주화 담론으로 벌어지는 인정투쟁의 경계선의 일부가 되었으며, 진보주의 기독교 역시 자신을 그 인정투쟁의 한 편 - 물론 ‘민주화 편’ - 으로 위치짓고 예컨대 ‘사학법 재개정 반대’ 등의 운동을 벌이는 입장이다(‘사학법 재개정/재개정 반대’ 대립은 이 인정투쟁이 얼마나 불모의 투쟁인지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것이다. ‘재개정’을 주장하는 한 편이 ‘선교’라는 당위 하나만을 내세워 그야말로 꽉 닫힌 모습으로 일관했다면, ‘재개정 반대’를 주장하는 다른 한 편은 말하자면 ‘그거 시행해도 니들이 걱정하는 일은 안 일어날 거야’라는, 미래의 비전 따윈 전혀 없는 모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최근 이른바 ‘범여권 대통합’에 진보주의 기독교 인사들이 많이 관여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특히 2장에서 다루었던 이랜드 사태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보수주의 기독교와 진보주의 기독교의 위기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파행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도 읽을 수 있다. 샘물교회 피랍 사건에 대해 ‘안티기독교’ 여론이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안티기독교’ 담론이 평소에 ‘민주화 담론으로 이루어지는 인정투쟁’의 맥락에서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과, 이랜드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 역시 ‘130억 십일조’로 상징되는 ‘안티기독교’ 담론의 영향력을 빼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두 사건 모두 ‘인정투쟁’이 심해졌을 때, 그리고 그것이 ‘민주화’와 결합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하는 예가 된다는 것이다.

    4.
    문법을 의식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말하는 양태를 조직적으로 포착하면 문법이 된다. 신앙의 문법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한국 기독교의 신앙의 문법은 그대로 신학의 위상에 관한 문제로 연결된다. 이 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던 “복음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는 신앙의 문법은 보수주의 기독교와 진보주의 기독교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그 문법에 따라 말하는 내용은 양쪽이 다르다.
    보수주의 기독교 입장에서 저 문장은 무엇보다도 ‘이미 존재하는 복음’과 그것을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음에 주어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여기에서 “그러면 뭐 하냐 실천을 해야지”라는 흔한 비판 혹은 비아냥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보수주의 기독교의 입장대로라면 ‘실천’은 ‘이미 존재하는 복음’에 자연히 수반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수주의 기독교의 신학적 사고는 ‘복음’에 ‘자연히 수반’되는 ‘실천’의 결과를 기반으로 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다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대해 살짝 언급하면, 이 사건의 배경 상황 중의 하나는, 어찌되었든 위험 지역을 비롯한 ‘사회봉사’의 실제 일을 동기를 불문하면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수행한다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보수주의 기독교’는, ‘자연히 수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는 망각한다. 그리고 그 ‘실천’의 그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주목하지 못한다. 그저 ‘자연히 수반된 실천’의 결과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만 이야기할 뿐이다. 전형적인 승리주의.

    진보주의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복음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그 복음의 ‘해석’에 관해서는 융통성이 존재하며, 그것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고도 상당히 약화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공간만큼, 타자와의 관계보다는 ‘당위’를 중시하는 사고가 약화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공간에 채워넣은 것은 ‘우리는 민주화 진영에 속해 있다’과 ‘그래도 우리가 보수주의 기독교보다는 낫다’는 다른 양식의 도덕적/당위적 사고, 그리고 ‘근대 시민사회에 걸맞는 합리성’ - 이것 역시 ‘우리가 보수주의 기독교보다는 낫다'는 또다른 근거이기도 하다 - 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올 초 화제거리 중의 하나였던 ’도올 김용옥의 성서비판‘은 전형적인 합리성 추구의 예라 할 것이다.
    앞에서 진보주의 기독교의 도덕적/당위적 사고가 어떤 문제를 낳는지 살펴 본 것은 둘째 치고라도, 이러한 도덕적/당위적 사고와 합리성의 결합은 진보주의 기독교의 ‘종교성’ 자체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요소가 된다. 종교란 어떤 이유에서든지, 현재의 세계가 현재의 세계 그대로 계속 존재할 수 없을 가능성. 즉 부정성과 상대하는 일일 터인데, 도덕적/당위적 사고와 합리성 둘 다, 더군다나 그 둘의 결합은, 이러한 부정성과는 전혀 반대 방향의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과거에 진보주의 기독교 인사에 소속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들의 준거집단이었던 ‘민주화 진영’이 집권하니 새삼스레 정부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지 않은 사람들도 민주화 이후의 인정투쟁을 극복하기보다 거기에 매진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신앙이란, 그리고 신앙의 문법인 신학이란 어떤 위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이 같은 문법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낙관과 승리감만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신학이 부정성을 망각하고 은폐하는 자리에서 그저 세계를 어떻게 순조롭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점에 동의할 때, 신학이 놓인 지점은, 앞에서 말한 인정투쟁의 만연과, 그에 수반되는 “어떻게든 내 몸의 생존을 잘 유지해 보자”는 민주화 이후의 동물/속물성(김홍중)과 직면해야 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인정투쟁과 동물/속물성 뒤에 놓인, 사회경제적 차원을 깊이 내장한 전사회적인 불안감과 직면해야 하는 지점이다. 이런 지점들은 동시에 그 자체로 그 뒤에 부정성의 존재를 내장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한다면, 신학이 자리해야 하는 자리, 즉 신학의 위상은, 바로 이 부정성을 어떻게 존재 구성의 윤리(도덕이 아니라)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잠시 서두에 인용했던 정용섭 목사와 조헌정 목사의 논쟁의 쟁점 중 하나가 “설교에서 정치사회적 쟁점을 어디까지 다루어야 하나”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물론 질문이 이런 방식으로 제출되는 것 자체는 문제지만, 이 질문은 ‘정치사회적 쟁점’이라고 했을 때 흔히 생각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런 쟁점이 우리들의 현재 존재 양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신학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겠는가. 특히나, 처음 출발할 때부터 기독교 안의 영역(이른바 ‘성’)과 기독교 밖의 영역(이른바 ‘속) 사이에 계시와 의미 발견의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은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민중신학적 입장에서는 더더욱이나.

    5.
    앞에서 한 논의처럼 신학의 자리를 설정하고 한국 사회를 바라보다 보면,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 때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는 의미는, 불교적/유교적/무신론적 등등의 패러다임으로 각기 사회를 바라보는 그런 종류의 하나로서의 ‘신학적’이 아니라, 신학/기독교가 갖고 있는 고유성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의 ‘신학적’이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글에서 종종 ‘원죄’ 개념을 민중신학이 적극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했었다. ‘원죄’ 개념을 신과 인간의 간격을 떼어놓는 기독교의 내부 논리 구축 개념이 아니라, “지금 내가 정상적으로 살아오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를 내장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세계의 부정성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윤리에 포섭하려는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특히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미 한국 사회의 ‘시민 주체’는 국가/시민사회와 욕망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또 한국 민주주의 훼손의 주범으로 인식되던 정부 역시, 단순히 ‘민주화운동 세력’이 집권했다는 차원을 넘어, 그러한 거래 관계 속에서 이른바 ‘협치’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그러나 그렇게 ‘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도, 아니 실현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는 만큼, ‘욕’을 먹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 욕은 ‘조중동’이나 ‘꼴통 기독교’에게도 갔지만, ‘귀족 노조’나 ‘주제넘는 비정규직’들에게도 갔다. 어떤 것은 잘된 욕이고 어떤 것은 잘못된 욕이라는 식으로 가리는 것이 가능할까? 더군다나 예를 들어 ‘귀족 노조’를 욕하는 욕은, 한편으로는 “그래도 난 노조 자체는 욕 안해”라는 착각을 안겨 주고, 다른 쪽에는 “우리는 부당하게 욕 먹으니 역시 정당해”라는 착각을 안겨 주면서, 정작 피터지게 싸우는 ‘노조’를 묻히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면 말이다.
    여기에 예를 들어 이번 아프가니스탄 납치 사건으로 인해 다시 떠오른 김선일씨 같은 존재들을 희생의 예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아프가니스탄 납치 사건을 두고서도 날조된 사실과 피해에 대한 과장된 상상들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그냥 희생되어 줬으면”하는 은근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었다. 한국이 “테러 대상국”이 될 지 모른다는 말은 이미 한국이 “테러 대상국”이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한국 사회가 이미 비정규직/김선일씨/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 등등을 희생/망각한/하려는, ‘원죄’ 위에 존재하는 증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원죄’로 구현되는 세계의 부정성은 ‘원죄’를 저질러 은폐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부정성은 사회적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소수자’로 구현된다. 민중신학의 용어로 바꾸면 ‘오클로스’다.
    소수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면 그저 고통에 불과하다. 그런 상태에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벌어지는 상태가 바로 ‘인정투쟁의 만연’일 것이다. ‘인정투쟁’을 열심히 벌여서 ‘인정’받으면, 고통이 면제될 것이라는 ‘희망’. 그래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못한 소수자는 ‘그들이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나를 보호’하게 마련이다.
    한편 자기 자신을 긍정한 소수자는 그 자기 긍정을 관철하는 순간 하나하나마다 현 세계와 맞부딪친다. 당연히 소수자는 현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성의 존재이므로 그러하다. 물론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등의 타협책이 언제나 존재하지만, 자기 긍정을 관철하면 관철할수록 그 타협책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았을 때, 소수자는 이미 흔히들 ‘소수자’라고 이야기하는 장애인/성소수자/어린이 등에만 한정된 문제도 아니게 된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전 세계적으로, ‘노동’ 역시 현 세계의 부정성의 영역에 들어가 버렸다는 이데올로기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아니던가?
    신학이란, 신앙이란 결국 자기 부정과 자기 긍정의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나아가서는 그 두 개가 일치되는 길을 찾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부정성으로서의 소수자는 신학과 신앙의 근본 요소인 자기 부정과 자기 긍정의 일치 지점으로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학의 자리를 찾는 의미에서의 ‘신학적 위상학’이 되기도 하지만, 신학의 고유성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는 의미에서의 ‘신학적 위상학’이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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