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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3회] 양희송 <개신교 선교의 구조적 무책임성에 대한 고찰-개신교 선교에는 위기가 없다> [카테고리]
  • 제3시대
    조회 수: 5819, 2007.11.06 16:38:03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제103차 월례포럼                                                2007.10.29


    개신교 선교의 구조적 무책임성에 대한 고찰
    개신교 선교에는 위기가 없다



    _양희송 | 청어람아카데미 기획자


    ‘때 늦은’ 비판적 평가

    언제나 때늦은 고백은 비루하다. 이미 고발이 시작된 마당에 슬그머니 면피를 위한 몇 마디를 얹어놓는 것은 비겁하다. 고백이 늦어지는 것은 딱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니, 성찰 자체의 결핍이 그 하나요. 그 성찰의 결과를 과감히 내놓을 용기의 결여가 그 둘이다. 고백이 가능한 시기가 지나고 나면, 고발의 시대가 온다. 그때는 대안이 없다. 고백은 섬세할 수 있으나, 고발은 거칠기만 하다. 고백은 진정성의 떨림을 동반하고 오지만, 고발은 정신 차릴 수 없는 매질의 연속이다. 한국 기독교는 확실하게 때를 놓쳤다.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란 적기를 환골탈태의 기회로 쓰지 못하고 엉뚱한 기념잔치를 벌이며 허송했다. 이랜드 사태와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만이 아니다. 몇 년에 걸쳐 교계는 이익집단으로서 유감없는 정치적 선택을 했고, 그 결과 이제 ‘사회적 왕따’ 신세가 되었다. 신정아에서 시작해서 연예계, 예술계를 돈 가짜 학위 폭탄은 이제 신학교와 목회자들을 최종 목표물 삼아 날아오고 있다. 대파국은 불가피하다. 그런 와중에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복기하며 교훈을 찾자고 글을 쓰고 있자니 스스로 비참하다. 상한 살을 한참을 헤집고, 뒤적여서 사인을 규명해내는 검시관들의 자괴심이 그런 걸까? 똑같이 의학수업은 받았으되 그들에게 맡겨진 과업은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니 ...
    이 글은 일차적으로 2007년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초래한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을 ‘내부자적 관점’에서 돌아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한국교회 내에서 선교운동은 단선적으로 진행되어 오지 않았기에 다층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 자체의 동원논리와 호소력, 국내외의 밀고 당기는 요소들(push-pull factors)이 좀 더 적절하게 자리매김 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이 분석은 ‘비판적 관점’을 동반해야 한다. 그간 한국의 선교운동을 논하는 내부자들의 글에서 결여된 부분은 이 지점이다. 용기의 부족으로, 혹은 잘 될 것이란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계속 유보되었던 비판적 평가가 오늘의 상황을 초래했다.

    10년 묵은 불안

    첫째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도의 조직이나, 지원 체제나, 전문성을 갖추지도 않은 채 무조건 현지에 선교사를 보내어 숫자만 증가시키면 된다는 사고는 선교의 저해요인이 된다. ... 둘째로, 선교사의 준비가 급선무이다. 아무리 선교가 긴박해도 선교사가 적절한 훈련을 받지 않고 선교지에 갔을 때 선교지 주민에게 축복보다는 저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 ... 우리는 긴박하다는 구실 아래 질적으로 떨어지는 선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태웅,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그 이론과 실제󰡕, 20~21쪽)

    한국 선교가 계속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첫째로, 계속적으로 선교기관과 교단 선교부들이 훌륭한 선교사들만 철저히 심사하여 보냄으로써 선교지의 문제를 최소화해야 되겠다. 초기 선교사들의 경우 충분한 선교 훈련 없이 나가서 현지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선교에 임함으로써 여러 가지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런 문제는 비단 아시아권만 아니라 서서히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는 모슬렘권 선교, 창의적 접근지역 선교에서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이태웅,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그 이론과 실제󰡕, 26쪽)

    국내의 대표적 선교사훈련기관인 한국선교훈련원(GMTC) 원장, 한국해외선교원(GMF) 이사장을 지낸 선교학자이자 현장운동가인 이태웅의 10년 전 지적에서는 지금도 그대로인 한국선교의 문제를 고스란히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사용한 표현들, ‘무조건 숫자만 증가시키면 된다는 사고’, ‘아무리 선교가 긴박해도 ... 축복보다는 저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 ‘훌륭한 선교사들만’, ‘철저히 심사하여’ 등은 지금 상황에서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한국 선교사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일로에 있던 1997년에 보여준 이런 유보적 진단은 이 문제가 해묵은 것이고, 구조적으로 해결이 곤란한 사안이란 점을 시사한다.

    누가 한국의 선교사인가?

    한국선교연구원(KRIM)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6년 말 현재 14,905명의 한국선교사들이 168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타문화권 선교사 수를 놓고 보면 미국(64,084명), 인도(46,381명)에 이어 세계3위에 해당한다. 국외로 파송한 숫자만 놓고 따지면 인도를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선다. 이 자료는 2005/2006 기간의 선교사 증가율이 전년 대비 15.8%로 나타나 1990년대의 평균 35% 증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미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 한국 개신교의 성장세가 꺾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선교사 파송은 점차 감소추세를 그릴 것으로 예상된다.
    흥미로운 것은 각 단체별 선교사 파송 순위이다. 장로교 합동 측의 세계선교회(GMS)가 1,835명으로 1위이지만, 2000년대 들어와 조직이 둘로 나뉜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와 국제대학선교협의회(CMI)의 수를 합하면 2,024명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한다. 규모만 놓고 본다면, 사실상 장로교 합동 측과 범UBF 계열이 상호 수위를 다투는 각축을 보이고 있는 양상이다. 순위 외에 주목할 부분은 평신도 선교사(63.4%)가 목사 선교사(36.6%)에 비해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선교사가 동질 집단이 아니라, 전통적인 ‘교단 파송-목회자 중심’ 선교사들과 ‘초교파단체 파송-평신도 중심’ 선교사로 양분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데, 한국 선교의 자원이 어디서 어떻게 공급되고, 관리되는지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일정 정도 수정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선교사 훈련과정, 선교이론과 정책, 지역교회와의 관계, 장단기 사역기간, 선교비 수준, 사역 양상에서 상당히 다른 양태를 보인다. 짐작하건대 상위 10개 파송단체들 간에 비교연구를 해본다면, 뚜렷한 편차가 드러날 것이다.

    한국 선교, 진입장벽도 없고 보호막도 없다

    한국 선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려면 선교의 수행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단순히 ‘한국교회’ 전체를 책임성의 주체로 불러내는 것은 불특정한 다수 혹은 흔히 교계지도자로 불리는 이들에게 추상적 책임만 묻게 되기 때문에 한없이 공허한 분석이 되고 만다. 그런 지적에 통렬하게 반응할 ‘주체’는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철저히 개교회적이다. 교단이나 교계 연합체가 개교회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이란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대체로 간접적이다. 선교활동은 이에서 더 나아가 선교사 각각에 거의 전적으로 위임되어 있다시피 하다. 지역교회나 교단 선교부는 선교사에 대한 재정 모금 및 행정 지원 역할을 넘지 못한다. 사실은 선교비의 모금이나 기도편지를 쓰는 일도 대부분 선교사 자신의 주요 관심사에 속한다. 선교부에서는 안식년이나 은퇴 후, 질병치료, 자녀교육 등에 대한 구상과 준비가 미비하다. 이를테면 선교사란 그 자체로서 재정조달, 선교활동, 자기관리, 목회 등에서 ‘자기충족적인 선교기관’이 되도록 요구 받고 있다. 물론, 이런 식의 묘사가 전체 선교사들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은 잘 안다. 그러나 선교에 있어 ‘어떤 결정을 결국 누가 하는가,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는가?’를 물어보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선교사 개인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선교사의 출발에서부터 관철되는 원리이다. 개신교 선교는 근본적으로 자발적 운동(volunteer movement)이다. 선교소명을 갖게 된 후보자를 교회가 파송 단체를 통해 선교지로 내보내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교회가 후보자를 선발하여 지원을 결정하지만(church-initiated mission), 사실은 선교사의 청원을 교회가 들어주는 방식(missionary-initiated mission)이 된다. 파송 책임의 중요한 부분인 재정후원은 한 교회가 다 감당하는 단독 파송과 여러 교회를 묶어주는 협력파송이 있는데, 실제로 이 과정은 선교사 개인의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로 자비량(self-supporting) 선교사 개념이 확산되면서 열의만 있다면 굳이 복잡한 선발과정을 요구하는 교회나 단체를 피해서 최소한의 자격요건과 재정후원 확보만 되면 선교사로 파송해 줄 수 있는 단체를 찾을 수 있다. 선교사가 되거나 선교지로 나가는 데 진입장벽은 사실상 거의 없는 셈이다. 교회로서는 재정후원의 부담은 적고,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명분은 얻을 수 있는 이런 좋은 제안이 널리 확산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책임성의 부재’가 선교부흥의 비결이다

    문제는 진입장벽이 없는 만큼 보호막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평상시 무한대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효율적 전략이지만, 위기상황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큰 재앙으로 변한다. 이라크에서 김선일의 죽음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듯 위험지역에 이미 들어가 있는 수많은 한국 선교사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들에 대한 책임성(accountability)은 일순간 공중분해 되고 만다. 그나마 김선일의 경우 온누리교회, 아프간 사태의 경우 샘물교회 등 중대형교회가 버티고 있었기에 이나마 수습이 되었다면, 훨씬 미약한 단체나 교회를 통해 파송된 경우는 그 뒷감당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6년 2월 24일 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에 필리핀 주재 한국 선교사의 현지 소녀 성추행 의혹을 보도하는 기사가 떴다. 2005년 11월 필리핀 바콜로드 시에서 활동하던 장로교 통합 측 교단 소속의 김모 선교사(50)가 자신의 교회 소속 필리핀 미성년자 4명을 성폭행 및 성추행한 혐의로 현지 검찰에 고소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선교사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현지 한국인 사업가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해결하지 못하고 사이가 벌어지게 되자 2006년 2월초 무장한 현지인을 동원해서 이 사업가를 습격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지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여 지역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같은 해 5월16일 MBC PD수첩을 통해 방영되면서 한국의 해외선교활동이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던지는 충격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교계는 똑같은 전철을 처음부터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나마 공신력 있다고 자부하는 통합 측 선교부 산하에 있던 이 선교사가 일으킨 사건은 그보다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는 단체들에게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더욱이 교단 선교부가 현지 조사까지 했으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결국 언론에 제보되어 대형사건으로 키워졌다는 점에서 선교부의 통제력이 극히 미미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는 동떨어진, 자기 선교사에 대한 온정주의의 발동이나 우발적 사건화 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비판 여론을 희석하려는 식의 미봉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도무지 유사 사건의 재발가능성을 낮게 볼 수 없게 만든다. 실제 사건 당사자인 김 모 선교사는 “다시 현지로 돌아가서 사역을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어이없지만 이런 선교사 파송 구조라면 그가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서 선교사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선교사가 문제를 일으켜도 교단 선교부는 문제해결을 선교사 개인의 손에 전적으로 맡겨두는 등 파송기관으로써의 책임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다. 선교부가 이런 책임성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 선교사도 선교부에 별다른 책임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선교는 ‘교회의 사역’이 아니라, 선교사 ‘개인의 사역’이 되고 만다. 대한민국 선교사들은 대체로 ‘자영업자 의식’에 충만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책임성이 부재한 구조에서 어떻게 선교운동이 활성화 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사실은 역설적으로 ‘책임성의 부재’(absence of accountability)야 말로 선교운동의 활성화를 설명할 핵심인지도 모른다. 책임지는 주체는 없지만, 중심을 비워놓고도 모든 이들을 연대시킬 수 있는 ‘네트워크적 대중운동’이 한국 선교운동의 성공비결이었던 셈이다. 위기관리 부문에 전혀 투자를 하지 않음으로써 일방적이고도 환상적인 시나리오만 유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물적 토대였다.

    ‘운동으로서의 선교’와 그 이후

    이 전체 네트워크를 가동한 것은 수십 년간 축적되어온 선교 담론의 신앙적 호소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에 의한 선교’(mission of movement) 전략이 ‘기관에 의한 선교’(mission of institution)를 전적으로 눌렀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선교)신학과 선교운동이 단절되어 있는지를 명확히 설명해 준다. 한국의 선교운동에 주요 신학교 선교학 교수들이나 선교학자의 참여는 극히 적었다. 대신 이 자리는 매우 실용적인 선교전략이나 정보의 전달로 대치되었다. 주요 전략가는 선교실천가들(mission practitioners)이다. 그간 선교한국대회를 통해 널리 유통된 ‘미전도종족’(unreached people), ‘미완성과업’(unfinished task), ‘10/40창문’(10/40 window), ‘단기선교’(short-term missionary), ‘전문인선교’(tent-making mission) 등의 개념은 과도하게 한국선교의 방향을 규정했다. 그 결과 한국의 선교운동은 그간 서구선교가 축적한 역사적, 신학적 시행착오를 학습을 통해 차단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는 선교학 영역의 주요한 이슈들에 대한 이해도를 현저히 떨어뜨리고, 자신들의 선교수행에 대한 성찰을 무력화하고, 실용적 전략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선교학을 통해 걸러진 논의를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정규 신학교에 진학한 이들로, 주로 목회자 신분을 갖고 파송된 장기선교사들로 국한된다. 대중적 선교운동을 주된 경로로 삼아 파송된 이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의 (선교)신학 교육을 이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은 파송 단체의 선교훈련이 신학훈련의 거의 전부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운동에 의한 선교’란 교회 외부에서 대중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쳐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70년대 식의 경건주의적 예배는 1980년대 회중들에게 점점 더 호소력을 잃어가던 중이었고, 빌리 그래함을 위시한 초대형 집회들을 통한 전도운동도 독재정치가 지속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던 1980년대 후반 경에 한국에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신앙적 유형이 대중적으로 등장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학시절 대학생선교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경험이 있는 세대가 이제는 사회적 중견이 되어 자신들이 받아온 신앙교육에 부합하는 자신들의 목회적 모델들을 갖고 등장한 것이다. 1987년부터 예배갱신을 들고 ‘경배와 찬양’ 운동이 1990년대 중반까지 전국을 휩쓸었는가 하면, 1988년에는 선교한국대회가 시작되어 매2년마다 수천 명의 청년대학생들에게 선교 메시지를 전했다. 장외에 크게 무대를 만들어 놓고 성공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인프라를 갖게 된 것이다. 굳이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도 대중운동을 펼쳐갈 장이 선 것이다. 한국에서 선교운동은 기성교회의 정체된 선교관과 선교의지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기성교회 구조 바깥에 대중적 선교운동을 조성함으로써 성공적 확산을 이루었다. 이는 끊임없이 운동적 계기와 구조를 재생산해내어야 할 과제를 안겨주는데, 선교한국대회 이래 선교운동가들은 장기헌신과 충분한 훈련의 부담을 덜어주는 ‘단기선교운동’, 평신도의 참여를 대대적으로 승인하는 ‘전문인선교운동’을 적절히 제시함으로써 대대적인 호응을 끌어내었다.

    성공 자체가 문제이다

    운동의 성공은 그 핵심 신앙의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강화시켜주었다. 선교는 이제 최종심급의 소명이자 절대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필리핀 선교사의 경우에서도 교계와 선교계에서는 문제 자체를 덮고 가자는 분위기가 우세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에 주어진 이 고귀한 소명을 훼손하거나, 한국교회에 가까스로 조성된 선교중흥의 분위기를 거스르는 행위는 반신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조적 문제는 일부 몰지각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고,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기회비용 정도로 처리되곤 했다. 때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혹은 끈질기게 제기하는 경우는 ‘사탄의 종 노릇’을 자처하는 것이 되곤 한다. 필자가 경험했던 한 교회는 인도나 러시아 등지에 대규모 단기 선교팀을 보내어 ‘사영리’ 등의 간단한 복음 소개지를 현지어로 읽어주고, ‘예, 아니오’만 물은 후 동의를 얻어내면 ‘예수를 영접’한 것으로 간주해서 귀국 보고회에서 ‘1000명에게 복음을 전해서 800명이 영접했다’는 식의 엉터리 보고를 하기도 했다. 거기에 직접 참여했던 대학생과 청년들 가운데 이를 견디다 못해 이의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는데, 담당 부서 목사로부터 ‘사탄의 종 노릇’ 운운하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런 현실에서는 결국 성공 그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되어 버린다. 성공의 절대화는 성공신화로 이어지고, 대안은 그 우상을 깨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언제나 옳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미숙함이나, 오류는 수정하고 극복할 일이다. 더 나쁜 일은 시행착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 일이다. 한국 선교는 서구 선교의 시행착오로부터 배우지 않는다. 입으로는 서구 선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비판하지만, 몸으로는 더 나쁜 종류의 제국주의 선교를 수행한다. 이들은 서구가 뼈아프게 깨우친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 교회가 과거 제국주의 선교의 죄의식(guilty-feeling) 때문에 제대로 선교 사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 일을 더 ‘세고, 강하게’(hard & strong)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로 삼는다. 서구 선교가 수백 년간 해온 시행착오를 제대로 분석하여 극복의 대안을 만들려는 노력 없이 우리는 너무 수월하게 대안세력, 차기 주자를 자임해왔다. 선교운동이 힘을 받아갈수록 나는 이런 부분이 너무 불안했다.
    한국 선교운동은 스스로의 시행착오로부터도 배우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감이 과도한 탓이거나, 실수에 지나치게 관대한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와 이슬람권 선교에서 몇 번 긴장이 빚어진 적이 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뒤섞여 유포되고 있는 2006년 ‘아프가니스탄 평화축제’가 그것이고, 그보다 더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한번, 실크로드 상에서 한번 평화축제가 있었다. 다 동일한 단체가 주관한 행사였고, 현지 선교사들이 이례적으로 극심한 반대를 한 가운데 행사가 강행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전과 이라크전이 진행되는 와중이었고, 한국은 파병국가였다는 점에서 좀 더 조심했어야 할 일이었으나 ‘이슬람권이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는 좋은 인식을 갖고 있다’며 ‘현지 정부의 협조 아래 진행되고 있어서 안전문제는 없다’는 등 친미정부와 내전을 불사하는 반정부 세력이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한 채 아전인수격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행사가 치러졌다. 이 행사는 안팎으로 심한 파열음을 내었고, 선교계 내에서는 이슬람권 선교 노선과 행사진행 과정에서 드러난 마찰로 첨예한 대립을 경험하였다. 이번의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도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반복되었던 셈이다. 이번 사건은 사안 자체는 ‘우발적 사고’임에 분명하지만, 긴 흐름 속에서는 ‘예고된 재난’이었고, 한국 선교계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선교학적 선경험과 지식의 습득을 통해 개선되지 않는 한 흔히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부르는 것은 서구 선교에서나 한국 선교에서 반복적으로 발현된다. 제3국에 가서 군림하는 한국 선교사의 태도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서구 선교사를 대해온 태도와 방식의 재적용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아예 선교의 DNA 자체에 아로새겨질 정보를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결론이다. 지금의 DNA를 그대로 지니고 가는 한 그에 수반되는 형질의 발현은 필연적이란 점에서 우리는 단순한 외과수술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체질 자체를 바꾸자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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