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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논평] 한국교회의 건전한 재정운영을 위하여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3903, 2002.02.08 13:43:40
  • 한국교회의 건전한 재정운영을 위하여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상임대표 / 천안 살림교회 담임목사)

    1.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아마도 한국교회에서 가장 널리 읽혀지는 성서 본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 처럼 공허한 말이 또 있을까? 교회 자체로 보나 교회를 구성하는 신도들 개개인을 보나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망각된 지 오래인 것 같다.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나 그 교회 안에서 물질의 축복을 간구하는 신도들을 보면 도무지 재물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교회 교인들은 사실상 재물을 통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당 전면에 "○○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이 되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제목을 서슴없이 내건다 거나, 그것이 낯간지러운 일이라 생각될 경우 교묘하게도 "십일조를 0,000,000원 하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제목을 서슴없이 내세우는 이들에게서 하나님은 재물의 신 곧 맘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빈번하게 낭송되는 까닭은, 사실 모든 문제를 교회중심적 질서 안에 편입시키기 위해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의 체질화된 속성 때문일 것이다.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재물을 바치는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은 없기 때문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모든 것을 바쳐라!', 이 말은 재물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라는 뜻으로보다는 더 큰 보상을 해줄 하나님께 확실히 투자하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여기서 교회는 그 투자의 확실성을 보증해주는 독점적인 '영혼주식회사'가 되는 것이다.

    2.

    이와 같은 현상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곳곳에서 누차 지적되어 왔다. 또한 오늘 발제 논문(강인철, "종교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적 동조와 종교의 산업화")은 종교사회학적 차원에서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 사회구조적 압력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강인철은 그러한 현상이 단순히 우발적인 비리 또는 일부 돼 먹지 않은 성직자들의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종교의 이데올로기적 '동조' 및 종교의 자본주의적 '변형'이라는 구조적 추세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나는 우선, 종교적 신앙과 재물과의 관계 혹은 종교와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관한 구조적 지평을 드러내 준 발제에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그와 같은 객관적 분석에 거의 전폭적으로 공감을 한다. 그러나 종교내적 차원에서 볼 때 객관적 조건은 피할 수 없는 구조적 요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선택적 조건이라는 점에 유의하고자 한다. 이 점은 강인철 역시 종교와 자본주의와의 여러 관계 유형을 제시한 데서 시사하고 있다.
    객관적 조건을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조건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선별하는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학적 관점이다. 성전 지배체제와 율법 지배체제가 운명적 조건과 같이 주어졌던 상황에서도 예수는 그것을 거부하고 타파했다. 우리가 지향하는 신학적 관점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은 종교와 권력의 폭력에 대항한 반폭력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화려한 성전이 표현하고 있는 모든 권력에의 욕망과 재물에의 욕망을 근본에서 뒤흔들어 놓은 사건의 성격이다. 성전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나눠야 할 권리와 물질과는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성전은 그 모든 것을 독점함으로써 누구에게든 헌신을 강요하는 체제를 대변하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으로 치장된 성전에의 헌신 요구를 민중들은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을 숙명적으로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헌신을 통한 더 큰 보상의 기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에 바쳐진 헌신은, 성전 자체의 영화를 위하여 소진되거나 그 체제를 이끌고 있는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부와 권력의 독점으로만 귀결될 뿐이었다. 또한 그나마 '헌신'의 기회를 누릴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사람들은 영원히 성전의 영화 저 너머 성문 밖의 죄인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예수가 동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을 내몬 것은 요즘 말하는 '잡상인 출입금지' 조처가 아니다. 십일조의 명목으로 혹은 속죄제의 명목으로 받쳐진 동물과 금전의 본질 자체를 문제시한 행위였다. 그것이 자발적 헌신의 표현이었다면 그것을 문제시했겠는가? 지배체제가 강요한 일방적 수취체계로서의 '제물'을 부정함으로써 성전체제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그 수취체제가 사라지면 성전은 허황한 건물로만 남을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그렇게 성전을 허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민중을 체제가 만들어낸 숙명의 악순환 고리에서 해방시켰다.
    오늘날 온갖 종교적 재화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순종과 헌신을 강요하고, 그 결과 자기 규모를 키우기에만 급급해하는 교회와 예수 시대의 성전이 과연 어떤 차이를 지닐 수 있을까? 아마도 '교회당'을 굳이 '성전'이라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상 오늘의 교회와 예수 시대의 성전은 다를 바 없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의 의의는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의를 지닌다. 권력에의 욕망 재물에의 욕망, 그것을 부추기고 구조화하는 체제가 빚어낸 숙명의 악순환을 끊는(斷) 사건으로서 성전정화 사건은 오늘 교회의 지표를 설정해준다. 교회는 그 체제가 빚어낸 숙명의 담장을 뛰어넘어 성문 밖의 '죄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

    3.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새로운 지표를 설정하는 신학적 원칙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오늘 교회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대안을 수립했다고 할 수 없다. 사회적 실체로서 교회는 엄연히 여러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향을 주고받는 그 관계 안에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것은 신학적 입장을 윤리적으로 구체화하는 차원에 해당한다. 특히 오늘의 교회들이 소공동체형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대부분의 교회들이 규모에 상관없이 제도화된 교회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요건을 고려하는 것은 더더욱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구조적 압력의 요건을 인식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문제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속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돈의 문제, 재정의 문제는 회피할 수 없는 사안에 해당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성격상 비영리 기관인 교회의 재정의 기초는 헌금이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신학적 정당성을 지닐 뿐 아니라, 사회적 실체로서 교회의 현실적 존립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헌금 수취의 성격 그리고 헌금의 용도에 관한 것이다.

    3-1.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 감사의 표현으로서 헌금이라면 그 종류나 액수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물량주의와 성장주의에 따른 욕망의 표출 기제로서, 또는 강인철의 표현처럼 '규모의 경제'와 그로 인한 '규모의 이익' 추구 메커니즘의 필수 요소로서 헌금이라면 그것은 이미 '헌금'으로서 정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교회편에서는 양적 성장을 확실하게 가시화하는 방편으로 헌금을 사실상 강요하고, 헌금을 하는 신도의 입장에서는 보다 큰 보상을 기대하며 하는 헌금이라면, 그 헌금은 소위 '영혼주식회사'에 대한 투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서 '은혜'에 대한 감사의 미덕으로서 헌금의 의미는 상실되며, 또한 더불어 '나눔'의 구체적 실천으로서 헌금의 의미 또한 상실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우리는 헌금수취의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헌금의 종류와 명목에 대한 검토를 해야 할 것이다.
    3-1-1. 먼저 교회의 헌금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십일조의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십일조는 대부분 교회 재정 수입의 60%에 해당할 만큼 중요하고 기독교인은 교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교회의 십일조의 기원에 해당하는 구약성서에서의 십일조는 일관된 본질과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이에 대해서는 천사무엘, "십일조의 의미와 기능" 『신학사상』102호. 1998.가을 참조). 고대 이스라엘에서만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다른 문화권에서도 종교적 관습으로 행해졌던 십일조는 시기별로 사회적 형편에 따라 다소 다르게 그 의미와 기능이 규정되어 왔다. 신약성서에서는 규정되지 않았지만, 구약성서에서 등장하는 이 십일조는 대체로 성전의 유지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적으로, 또는 성전순례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대체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기독교인의 헌금의 표준으로 간주되었고, 종교개혁자들도 이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경사회의 소산으로서 국가와 종교제도가 분리되지 않던 상황에서 조세의 성격마저 지니고 있던 십일조를, 국가와 종교가 분리된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는 많은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종교적 관습들에 대해, 오늘날의 교회는 많은 부분에서 이미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그 형태를 변용시키고 있다. 성서시대로부터, 그리고 오랜 기독교 역사에서 헌금의 표준으로 간주된 십일조 문제 역시 그런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 감사의 표현으로서 헌금의 표준이 되는 의의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하겠지만, 그것의 준수 여부가 종교적 '범죄'의 여부를 판가름할 수는 없다.
    3-1-2. 교회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명목 헌금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 같은 입장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널리 행해진 관행이기에 합리적인 교회 예산을 편성하기 위해 그 명목을 범주화해 구별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각종 명목의 헌금이 강요되어야 할 어떤 신학적 이유도 없다.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삶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 이치,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그리고 구체적인 나눔의 실천으로서의 헌금의 의의만이 정당한 신학적 이유일 뿐이다. 그 의의를 따라 이뤄지는 헌금이라면, 그 종류나 규모의 문제는 헌금을 드리는 신도의 자발적 헌신과 판단에 맡겨지는 것이 옳다.

    3-2. 헌금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그 은혜를 나누는 구체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그 헌금을 나누는 명목과 비중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언급은 생략한다. 교회재정의 70%를 선교비로 지출하여 헌금의 정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웅변적으로 환기시켜 주는 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 전주 안디옥 교회) 도 있어 모든 교회의 귀감이 되고 있지만, 지출 비중 이전에 어째서 한국교회의 헌금이 구체적 나눔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3-2-1. 한국교회 현실에서 무엇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재정운영의 투명성 문제다. 개신교의 경우, 그나마 상대적으로 공개화된 지표들이 많아 그 규모와 용도를 추정해볼 만한 근거들이 많기는 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리고 특히 전형적으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대형교회의 경우 재정규모나 운용이 오리무중의 상태인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교회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사정은 교회 외적으로나 교회 내적으로 마찬가지다. 교회 외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지표는 교단 총회에 보고되는 내용이 그 근거이지만, 널리 지적되고 있다시피 실제와 일치하는 보고라기보다 상납금을 줄이기 위해 축소 보고를 하는 것이 통용되는 현실이기에 정확하게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특히 대형교회의 경우에 목회자나 소수의 재정위원들 외에 대부분의 신도는 그 용도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폐쇄화된 재정운영이 빚어내는 병폐들을 여기에서 새삼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내부화된' 재정운영의 병폐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문제다. 우선은 교회 내부에서의 각종 공식적 절차를 통한 자정과 책임적 참여의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 재정운영의 문제가 교회 내의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루는 과제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아울러 세간에서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외부 감사제도의 도입 등도 검토해볼 만하다. 물론 이 문제는 복잡한 여러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교회 현실에서 결코 만만치 않다. 교회로서는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지만 교회 자체의 자정에 한계가 있다면 최소한 교단 내부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라도 어떤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개별 교회의 범위를 넘어선 교회 자체의 상급 기관(예컨대 교단 총회) 수준에서 어떤 기준과 제도가 마련된다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수준에서 제시하는 평균적 기준이 비합리적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있다. 어쨌든 이와 같은 제안을 하면서도 이와 같은 제안이 얼마나 공허한 외침에 불과한 것인지를 금방 느낄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도대체 어찌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재정 운영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대책은 끊임없이 모색되어야 한다.
    3-2-2. 재정운영의 투명성을 전제하고서야, 비로소 헌금으로서의 바람직한 용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헌금의 용도를 말한다면, 장황한 언급이 필요 없다. 나눔을 구체화하는 방법 이외에 대안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사회적 실체로 존재하는 교회의 운영을 위해 필수불가결의 지출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원칙적으로 그 용도를 제외한 헌금은 전적으로 나누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원칙은 교회의 헌금이 교회 자체의 규모를 키우는 데 투여되거나 목회자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에게서 교회세습이 별 거리낌없이 인정되는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 그 요인으로 목회자 개인의 욕망이나 '성직자주의'도 문제이겠지만, 부의 배타적 세습이라는 측면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세간에서 문제삼는 교회세습은, 청빈한 목회자의 대물림이나 소위 영세한 교회의 세습이 아니다. 나눔의 성격을 상실하고 소통의 성격을 상실한 채 자기 규모만을 키워온, 그래서 사실상 '타락한 재물'을 다시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준다는 데 교회세습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교회세습의 실체는 '성직'의 계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규모를 추구해 온 교회의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독점하려는 데 있다.
    3-2-3. 한국교회는 이뿐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의 규모를 키우는 일에 민감할 뿐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효과, 특히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에 대해 둔감하다. 예컨대 규모를 추구하는 논리는 헌금을 통한 주식투자 행위도 아무런 제약 없이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 안에서 주식투자 행위 자체까지를 과연 부도덕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예를 들어 교회가 중심이 되어 상호부조를 원칙으로 운영하는 신용협동조합 같은 형태도 있기에, 이자 수익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복잡한 여러 차원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교회 존립근거 자체가 영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경우에 따라 불가피하게 이뤄지는 주식투자라도 그 투자 기준이 있어야 할 터이다. 개별교회에 단위에서 건축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는 교회연합기관의 운영이나 연금과 같은 기금을 운영하기 위하여, 교회의 헌금으로 주식투자를 하는 것은 이미 낯선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교인들의 정성으로 모아진 헌금이기에 손실이 없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며, 따라서 투자를 할 경우 수익성을 따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투자 대상이 되는 기업의 사회적 공익성 문제를 따져 본 적이 있을까? 만일 수익성만 앞세운 나머지 공익성을 고려하지 않고 대량살상무기를 제조하는 군수산업이나 그 밖의 사회적으로 유해한 결과를 미치는 기업에 투자한다면, 그것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누가 16:9) 격이 아니라 '선한 헌금으로 불의한 친구를 사귀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교회는 사회적 책임투자의 규준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개별 신도들에게까지도 권유하여야 한다.
    3-2-4. 자기과시적 성장일로를 달려온 한국교회 안에 나타난 현상으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사안은 금권선거 문제이다. 금권선거에 투여되는 돈의 성격이 전적으로 공식적인 교회 헌금이라 할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 교회 재정과 무관할 리 없고, 또 설령 전적으로 교회 직분자(목사, 장로)의 사적 자금이라 할 경우라도 돈과 관련한 한국교회의 윤리불감증을 드러내주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는 사실 어떠한 근거로도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말해서 부끄럽기만 한 문제 아닌가? 이를 근절하기 위한 교회내의 윤리관의 재정립과 교단 차원의 선거제도 등의 정비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교회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이를 또 어찌할 것인가? 교회가 내세우는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이니 외부적 규제장치에 의존하여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난망할 뿐이다.
    3-2-5. 이제 끝으로 교회 헌금에 대한 조세 문제를 생각해보자. 교회재정의 경우 특수한 영리사업 수익을 제외하고는 비과세의 원칙이 적용된다. 교회는 스스로 이 원칙의 정신을 존중해야 한다. 종교 고유활동이 사회의 공익에 기여한다는 취지 때문에 그 활동에 필요한 재산과 자금에 대해 과세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그 정신에 충실할 때 비과세의 특권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환기해야 한다. 목회자 내지는 성직자 개인의 수입에 대한 과세 문제 역시 크게 봐서는 같은 맥락에서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 개인의 수입은 그것이 이미 사적인 수입으로 전환된 것임을 감안하면 비과세의 원칙이 정당한 것인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천주교의 경우처럼 그 실효성이 의문이라 하더라도 과세 기준치를 넘는 수입이 있는 성직자에게는 교단 안에서 공식적으로 납세를 권유하는가 하면 개신교의 일부 목회자들이 자진 납세하는 경우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성직자 개인의 납세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볼 수도 있다. 성직자 납세의 경우, 교회 내의 제도나 규칙상 이미 국가법상의 조세에 해당하는 상납금(예컨대 한국기독교장로회처럼 목회자 십일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의무적으로 생활보장제헌금으로 납부하도록 한 경우)과 같은 부분을 감안하여 엄밀한 과세 표준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교회 및 성직자 스스로가 시민사회의 동등한 일원임을 자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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