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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 발제] 악화는 양화를 어떻게 구축하는가-'신학적 운동'으로서의 '민중'에 관해서 [카테고리]
  • 황용연
    조회 수: 3644, 2002.05.28 14:05:26
  • 1.
    "유감스럽게도 2500만 유권자들의 자구적 정치 개혁 운동은 그 시작부터 낡은 정치권의 권위주의적 독단과 낡은 편견과 부딪히고 있다."(2000년 총선시민연대, [정치개혁시민선언문] 중에서, 강조는 필자)

    "한국 사회의 정서가 공공선 혹은 애국 문제에 관해서 허용하는 경계가 어디까지입니까? 지금은 공공선의 전제를 달 경우 용납되고 이해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왔지만, 여전히 "나 가기 싫어서 안 가"라고 얘기한다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공적인 담론으로 뒷받침될 수 없는 행위나 오로지 개인의 양심에 기대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는 거지요."({당대비평} 19호 좌담 ['양심적 병역 거부'의 자유는 있는가-'여호와의 증인', 유승준, 대체 복무제] 중 신윤동욱의 발언)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시민운동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 비판은 시민운동이 시민들의 참여보다 전문가나 조직 간부들의 힘으로 굴러간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시민운동가들 스스로도 이 비판에 일정하게 동의하면서 시민운동의 갱신을 위한 성찰의 실마리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은, 시민운동에 적대적인 입장에서는, 앞의 의미를 넘어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경우 이 말은 이런 의미가 된다. '시민들의 진정한 뜻과는 동떨어진, 심지어 반대되는 일까지 '시민'의 이름으로 하는 시민운동'. 물론 '시민들의 진정한 뜻'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이지만, 그렇다면 '시민운동'은 과연 이런 비판에서 논리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지.

    '2500만 유권자들'이라는 말은 '4천만 민중'이나 '천만 노동자'라는 말과 많이 닮아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2500만 유권자들' 모두가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에 참여 혹은 지지를 했을까. 그렇게 됨으로써 '2500만 유권자들'의 단일한 의지가 '낙선운동'으로 모아졌을까. 이 질문에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2500만 유권자들'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든간에 일정한 정도로 '사기'가 된다는 말이리라. 물론 '4천만 민중'과 '1천만 노동자'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정도로 '사기'가 될 것이다. 이런 '사기'가 존재한다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란 말이 갖고 있는 함정에, 시민운동은(그리고 '민중운동'도) 일정하게 빠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더 뜯어본다면, 그런 '사기'가 있을 수 있는 근원에는 어떤 집합명사로서의 '모집단'. '시민'과 '민중'의 '모집단'으로 상정되는 어떤 '관념'이 존재할 터이고, 그 '관념'은 아마도 자연스럽게 '국민'으로 연결될 것이다.

    참여연대는 '핸드폰 요금 인하' 운동을 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제도 마련' 운동도 하고 있다. 전자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이 후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연대의 운동에는 양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시민운동을 일반적으로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정의한다면, '핸드폰 요금 인하' 운동은 '공공선'이라는 말을 붙이기 쉽다. '상당수의 동의'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운동에 '공공선'이라는 말을 붙인다면, 그것은 '도덕적 이데올로기'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운동은 일정하게 '시민운동'의 범주를 이탈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운동은 '민중운동'의 범주에는 쉽게 들어갈 수 있을까.

    2.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여성운동에 대한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째, 여성운동은 여성이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평등성을 획득하기 위한 개혁운동이고; 둘째, 우리의 현실에서 성차별주의적 억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지배와 종속' 구조를 근절시키고자 하는 급진적인 평화운동이다."(강남순, {페미니즘과 기독교} 중에서, p. 246)

    "가령 노동운동이 '인간이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목표로 삼는다거나 환경운동이 '계급적 착취가 근절된 사회'를 지향하기로 한다면? 혹시 이것이야말로 저들 운동이 미리 설정하고 있는-적어도 당연히 설정해 마땅한-궁극 목표를 달리 표현했을 따름이 아닌지?"(백낙청, {창작과 비평} 100호 특집, [IMF 시대 우리의 과제와 세기말의 문명 전환]의 [보론 2] 중에서)

    여성운동에 관해서 논하는 텍스트들에서 앞에 인용한 강남순의 글과 같은 문장은 심심찮게 발견되는 편이다. 물론, 이런 구도의 문장은 비단 여성운동에 관해서만 통용되는 문장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여성운동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종류의 '지배와 종속' 구조를 근절시키고자 하는 급진적인 평화운동'이 여성운동이라면, 그런 운동에 굳이 '여성운동'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강남순의 글에서는 이 앞에 '성차별주의적 억압을 포함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긴 하지만, 설마 그런 수식어가 붙고 안 붙고의 문제는 아닐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그 밑에 인용한 백낙청의 글의 구도처럼, 예컨대 여성운동이 '계급적 착취가 근절된 사회'를 지향하고, 노동운동이 '성차별주의적 억압이 없어진 사회'를 지향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상상력(실제로 백낙청은 같은 글에서 그런 상상력을 펼친다)을 펼친다면, 저 질문의 설득력은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예컨대 (시간은 좀 지났지만) 장아무개씨 같은 경우에서 백낙청의 상상력은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백낙청의 상상력은 운동의 목표들이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은 다시 운동의 목표들이 '상호 교환'이 가능할 정도로 동질적이라는 말이 되는데, 장아무개씨의 경우를 보건대 적어도 환경운동과 여성운동 사이에 그런 '상호 교환'이 가능하리라고는 아직은 믿기에 성급하겠기에.

    '여성 노동자'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노동자'라는 지평에서 보면 '여성'이 수식어가 된다. '여성'이라는 지평에서 보면 '노동자'가 수식어가 된다. 즉, '여성 노동자'라는 말은 '노동운동'에서는 '여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운동'에서는 '노동자'의 문제를 제기하는 말인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노동운동'의 지평에서 생각해 보자. '여성 노동운동'은 단순히 '노동운동'의 '여성 지부'가 아니다. '여성 노동'이라는 지평에서 바라보게 되면, '노동' 자체가 성차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정리해고를 하기 위해 사내부부 중 '아내'가 당연히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강요가 통하고, 비정규직의 고통을 '여성 노동자'가 더 많이 당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아예 성 매매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노동('도우미'나 '나레이터 모델'을 생각해 보자)까지 생기고 있다는 문제까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는, 더 나아가서 '여성운동'과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의 관계는, 단순한 '겸손한 연대'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노동운동' 안에서, '보편적 인간해방운동' 안에서, '여성'이라는 문제틀을 설정해 내는 것. 그래서 '노동운동'과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에 '여성'의 색채를 물들이는 것. 오히려 이런 문제의식이 더 적당한 것이 아닐까. 물론, 앞에서 말했던 대로 '여성 노동자'는 '여성운동'의 지평에서는 '노동자'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역방향으로 '여성운동'에 '노동'의 색채를 물들이는 것도 당연할 것이리라. 그것이 '여성'이라는, '노동'이라는, 그리고 이 둘이 결합해서 좀 더 구체화되는 '여성 노동'이라는,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수많은 주체성들이 존속하고 확장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3.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엔 징병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지고, 모병제 논의도 안 될 수 없을 겁니다"(오태양씨의 양심적 병역 거부 강연회 중에서)

    "장애인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고, 봉사와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전문가 '프로'가 필요하다. 우리가 여성 문제를 말하고 풀어 나아가고자 하는 조직을 '여성 봉사 동아리'라고 이름붙이지 않으며, 노동자 문제를 대변할 때 "노동자 사랑합시다"라고 떠들지는 않지 않은가?"(김형수,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당대비평} 2001년 봄호) 중에서)

    만약에 누군가 "동성연애자의 인권도 보장받아야지"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동성애자 운동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그렇게나 '동성연애'라고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데 이게 웬 말이냐'라고 생각할까. '그래도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한 명 늘었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할까.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는 '소수자 운동'이라는 운동 방식이 새롭게 등장했다. 어떤 특정한 주체성에 가해지는 편견과 차별을 해결하자는 운동이 소수자 운동이라고 할 때, 이 소수자 운동에 대한 윤리적인 해결책으로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같이 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상호 존재 인정'이라는 기본 논리 하에서,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를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해결책이 나온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논리의 유효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상호 존재 인정'이라는 말은 소수자의 존재도 인정하지만 '다수자'의 존재도 인정한다는 말이 될 수 있는데, 혹은 현재의 제도 중 소수자를 차별하는 부분만 시정하면 현재의 제도가 유지 가능하다는 말이 될 수 있는데, 과연 그게 얼마나 가능할까.
    예컨대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만 인정하면서, 나머지는 현재의 징병제를 유지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까.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어떤 나라도 하다 못해 복무 기간 단축이나 병력 감축이라도 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징병제를 어떻게든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누가 군대 가겠냐'라는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셈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군대 가는 것보다 더 힘들게 하면 된다'라는 흔히 하기 쉬운 말이 아니라, 오히려 '군대 갈 사람이 없을 것이니까 징병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상호 존재 인정'이라는 말은,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이, 공중에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앞에서 인용한 김형수의 글을 생각해 보자. 장애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라. 그리고 장애인을 사랑해야 하고 그들에 대한 봉사가 필요하다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김형수의 글은 바로 그 지점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인 문제를 은폐하는 지점이라고 공박하고 있다.
    사실 소수자 문제를 편견과 차별의 문제로 파악한다면 이미 거기에는 '은폐'의 문제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 '은폐'의 성질과 관련해서도 김형수의 글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은페'란 일반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드러나는 것을 막아서 생기는 문제라고들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김형수의 글에서는 오히려, 장애인 문제는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페'되는 문제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드러나 있기 때문에' 은폐되는 문제라고. 이미 그 '드러남' 자체가 이 사회의 표상구조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 '특정함'의 영역 바깥은 은폐될 수밖에 없다고. 다른 예를 들어 본다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환경운동가 장아무개씨'의 경우도, '성차별'에 관한 문제의식이 이런 식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은폐되는' 현상을 겪고 있다는 하나의 예가 되지 않을까. 설마 장아무개씨 정도 되는 사람이 '성차별이 선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았을 테니.
    이렇게 '표상되기 때문에 은폐되는' 문제로 시야를 확장하게 되면, '소수자 주체성'의 문제는 현재 '소수자'라고 지칭되는 특정한 주체성의 문제만이 아니게 된다. 예컨대, 흔히 '소수자 운동'과 대척지점에 서는 것으로 보이는 '노동'의 문제도, 그 '노동'은 사실은 '여성 노동', '이주 노동' 등의 수많은 '소수자 주체성'의 결합인데, 그러한 결합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노동 일반'으로만 다루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이는 앞에서 '여성 노동'의 문제를 다루면서 암시되었던 바이기도 하다).

    4.
    "편견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시각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자기 진단에 불과하다. 나는 편견을 느껴 본 적이 없다. 편견을 느끼기 전에, 타인들이 '편견'을 가지기 전에 나는 내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목발을 짚고 파도 타기를 하고 집회에서 목발꾼다운 '사수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요 자유니까."(김형수, 앞의 글 중에서)

    "세계 안에는 우리가 사유하게끔 강요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 어떤 것은 재인식recognition의 대상이 아니라, 근본적인 '우연한 마주침rencontre'의 대상이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중에서, 여기에서는 서동욱, {차이와 타자} 중에서, 강조는 필자)

    앞에서 '소수자 주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본다면, '소수자 주체성'은 아마도 '전복'과 '은폐'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소수자 주체성'은 사회적 표상체계에 의해서 '은폐'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성'으로서 운동하고 있다. 하지만 '은폐'되어 있기에 기존의 사회적 표상체계에는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소수자 주체성'이 사회에 드러나는 과정은 곧 사회적 표상체계 자체가 전복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사회적 표상체계와 사회적 존재론이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면, 그 전복의 과정은 곧 변혁의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서동욱에 따르면 들뢰즈(그리고 레비나스도)의 핵심 주장 중의 하나는 '사유는 표상체계 바깥의 무엇에 의해 상처받음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다(서동욱, {차이와 타자} 참조). '상처받음으로써'라는 말에서 짐작을 할 수 있듯이, 이런 주장에서 사유는 능동적 사유가 아니라 수동적 사유가 된다. 이러한 수동적 사유에서는 기존의 표상체계의 힘이 무력화되고, 오직 '상처' 자체를 어떻게 해명해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적 사유를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당연히 상처를 준 '그 무엇'의 힘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느냐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서동욱은 이러한 수동적 구조를 가진 사유의 본성을 '계시'라는 신학적 단어로 읽어내게 된다.
    이러한 서동욱의 주장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소수자 주체성'의 문제는 바로 서동욱이 지적하는 '계시'의 문제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계시'의 근원이 되는 '상처를 주는 그 무엇', 표상체계 바깥의 '그 무엇'이 바로 '소수자 주체성'이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것이 상처를 줄 수 있는 이유는 '소수자 주체성'이 그 자체로 '주체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앞에서 인용한 김형수의 글로 돌아가면, '목발꾼다운 '사수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애인이라는 '주체성'이 선행하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이야기이다.

    '소수자 주체성'의 개념은 앞에서도 보았지만 어떤 특정한 주체성에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다. 하물며 어떤 특정한 '인격'에게만 한정되는 개념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기에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는 더 이상 어떤 특정한 '주체성'이나 '인격'에 의해서 독점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계시'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구조를 가진 사건이 존재할 뿐이며, 그 사건을 구성하는 '소수자 주체성'의 운동이 존재할 뿐이다.

    "민중신학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진원적 시기는 1970년이라는 시점부터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970년 11월 13일이었습니다."(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중에서, 강조는 필자)

    전태일 사건은 민중신학을 열어 주는 근원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태일 사건은 민중신학자들에게, 그리고 한국 사회에, 하나의 '계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이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담보하고 있는 '바른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는 의미라기보다, 그 사건이 민중신학자들에게, 그리고 한국 사회에, 하나의 '상처'를 주고, 그리하여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기존의 '근로자'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끔 '강요'했다는 의미에서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사건'을 이야기한다. 그 '민중사건'의 의미는 바로 앞에서와 같은 '계시'를 일으키는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다시금 민중신학은 그 '계시'의 원동력이 되는 여러 '소수자 주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이라는 말로 연결될 것이고, 민중신학에서의 '민중'의 의미는 '소수자 주체성'의 문제를 그 핵심으로 한다는 말도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민중'이라는 말을 (집합)명사로 사고하는 방식은 민중신학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그 대신, '소수자 주체성'의 운동'들', '계시'적인 구조를 가진 운동이기에 '신학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운동들을 중심으로 '민중'이라는 말을 파악하는 방식이 필요하리라. '민중사건'이라는 개념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한다.
    또한, '민중사건'을 '계시'의 문제로 바라볼 때, 그 '계시'가 '상처받음'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면,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가, 민중신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영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5.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잘 알려진 말이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 있는 이유는 악화가 불순물이 섞이거나 함량이 떨어지더라도 양화와 똑같은 가치를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건, 일단 한 번 '불순물'이 섞여서 '악화'가 되면, 악화와 양화가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선, 과연 어떤 '불순물'이 섞여서 어떤 '악화'가 만들어지고, 어떤 '양화'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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