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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 논평] 주체 없는 주체성 ?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4007, 2002.05.28 15:20:13
  • 황용연의 <악화는 양화를 어떻게 구축하는가 - '신학적 운동'으로서의 '민중'에 관해서>를 읽고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글은 민중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을 불온시한다. 불온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기'라고 단정한다. 아예 집단적 주체로서 '민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결론적 문제제기에서 시사하듯이 '민중'이라는 악화는 '소수자'라는 양화를 구축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물론 발제자는 이와 같은 평에 한편으로는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판단하기에, 발제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총칭 개념으로서 '민중'이라는 말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는 대안적 개념으로서 '소수자' 개념의 타당성을 지적하는 한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민중이냐 소수자냐 하는 접근 자체가 이미 존재론적 물음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와 같은 대별 도식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발제자의 진의는 '민중'이냐 '소수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냐 '사건'이냐에 있는 것 같다. 민중신학이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민중사건'의 유효성을 인정한다면, 여기에서 '사건'이 갖는 의미를 주목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사건의 변화무쌍성, 곧 변혁성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허구적 집단적 주체를 상정하기보다는 구체적 주체성에 주목하여야 한다는 이야기일 터이다. 흔히 우리가 소수자 운동의 범주로 부르는 몇몇 사례를 예로 들어 그 운동이 갖는 문제성과 가능성을 짚어보는 문제제기 방식을 취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수자 주체성에 관한 주목은, 복잡다기한 현실과 운동을 이해하는 데 그 폭과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그 점에서 두루뭉실하고 애매모호한 '민중'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인 냥 착각하는 인식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민중'과 대별되는 '소수자'를 내세운다고 해서 문제가 자명한 것일까? 물론 발제자는 주체 자체가 아니라 주체성에 주목하고 있다. 곧 소수자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고 그 표면효과에 주목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체성과 주체는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다. 도리 없이 '민중'과 대별되는 의미로 '소수자'라는 말을 채택해야만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보다 세분화된 집단이라는 것이라는 것 외에 어떤 본질적 차이를 지닐 수 있을까? 주체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고 암만 강변해도 그와 같은 개념을 채택하는 데에는 일정한 경계로 구별되는 집단 자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그 대상이 어떻든 일정한 '모집단'을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같이 모집단을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허구이고 사기라면, '소수자의 주체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허구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컨대 '장애자'의 경우를 두고 보더라도 육체적 장애자가 있는가 하면 정신적 장애자가 있고, 육체적 장애자 가운데서도 또한 얼마나 다양한 장애자가 있을 것인가? 결국 어떤 범주이든 주체의 범주를 설정하는 것이 허구라면 결국 개별자의 주체성만 남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끝내는 개별자마저 허구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침내는 '주체 없는 주체성'만, 혹은 '주체 없는 운동성'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주체성에 대한 주목이 필연적으로 모집단으로서 주체에 대한 거부를 함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모집단을 대별하게 하는 현실적 경계를 여전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분화될 수 있다고 해서 그 상위의 범주가 곧바로 허구이거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사기일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는 '사건'의 의미가 필연적으로 주체 자체의 해체를 동반하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사건론은 일상의 생활 영역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우연성, 돌발성 등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우연한 사태가 '사건'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 사건을 의미있게 만드는 일정한 '계열화'를 통해서이다. 우연하고 돌발적인 어떤 사태가 일정한 맥락에 위치지워짐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앞서 사건은 그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일정한 물리적 조건을 전제로 한다. 줄여 말하면 잠재태로 있던 머물러 있던 물리적 조건이 어떤 계기에 의해 작용하여 표면으로 돌출하고 그것이 다시 일정한 계열화의 망에 의해 포착될 때 비로소 의미있는 '사건'이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건의 철학에서 말하는 '사건'의 의미는 이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민중신학의 사건론이 이와 같은 사건의 철학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사건'이라는 언표 자체가 같다는 데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안병무가 즐겨 사용하였던 '화산맥의 분출'로서의 '사건'의 비유는 사실상 사건의 철학에서 말하는 사건론을 상당 부분 적절하게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바로 이러한 사건론에 입각해 볼 때, '모집단'을 거부하고 주체성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본의는 아니겠지만 지나치게 '표면효과'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무쌍하게 형성되는 주체로서 민중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진지하지만, 계급론적 함의를 경시한다든가, 민중의 변혁지향성의 불투명성을 노정하고 있는 점 등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주체성의 발현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거나 경험하고 있는 여러 층의 경계를 매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경계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처럼 거대한 경계일 수도 있으며, 징병제 폐기 이전에 양심적 병역 선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어떤 경계일 수도 있다. 소위 말하는 '총체적' 인식이 갖는 환원주의 내지는 단순화의 우려는 경계해야겠지만, 그것의 무용성을 말하는 것은 섣부르며 오히려 순진하다. 나는 그 자가당착의 함정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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