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로그인

407
yesterday 678
visitor 681,678
  • [6월 논평] '백치들'의 신학 : '근대성'의 세계에서 더욱 더 '백치짓'을 하기 위하여 [카테고리]
  • 황용연
    조회 수: 3874, 2002.07.18 01:47:32
  • 논평을 쓰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관련 서적들을 뒤지다가 {라틴 아메리카 백치 열전}이라는 책이 있다는 소리를 접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은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유명한 작가고, 그의 아들은 이 책의 공저자라고 한다. 책의 내용은 과거 자신들의 사상과 행동을 '백치짓'이었다고 참회하고 신자유주의 만세를 부르면서 여전히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백치짓'을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백치짓'을 하는 사람들의 명단에는 구티에레즈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남섭 교수의 글은 바로 그 '백치짓'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또한 과거에 누렸던 주목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결실을 꾸준히 맺어가고 있음을 알려 주는 글이다. 그런 점에서 또다른 공간에서 열심히 '백치짓'을 하고 있는 민중신학에도 반가운 글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동지'(?)들이 '백치짓'이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한다는 것은, 90년대 이후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담론들의 자리가 그만큼 좁아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해방신학도 민중신학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좁아진 자리에서 해방의 주체를 어떻게 생산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모두에 과제로 자리잡게 될 것이며, 이러한 과제의 핵심에는 '근대성'의 문제가 놓이게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영향 속에서 분명해진 사실 하나가 있다면, '근대성'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사회구조와 일상생활,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세계관 등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조직 방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성'의 문제는 곧 '주체'가 조직되는/'주체'를 조직하는 문제와 '구조'를 변혁하는 문제를 동전의 양면으로 연결짓는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체'의 문제를 그 핵심에 놓는 '신학적 성찰'의 여지가 발생하게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90년대 해방신학의 가장 큰 성과로 꼽히는 것은 경제신학의 모색이다. 이남섭 교수의 글에서도 일정하게 암시되듯이, 경제신학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부정적인 딱지만을 붙이는 작업이 아니다. 경제'신학'이란 이름이 붙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삶 그 자체를 조직하고 있으며, 그 조직의 결과 민중들이 '시장'과 '소비'와 '경쟁'을 자연스럽게 '숭배'하게 되는 '주체'로 형성된다는 지점과 맞부딪치는 논의라는 점에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근대성의 핵심이 자본주의라면, 경제신학의 모색은 그 자체로 '근대성'에 대한 대응의 문제가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비슷한 현실의 90년대에, 민중신학은 '권력 해체적인 방향에서의 민중 담론의 개방화/다양화'의 길을 걸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해방신학의 논의와 비교해 본다면, 민중신학은 해방신학보다 좀 더 '원론적'이라고 비판받을만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 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논의와 해방신학의 논의는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상호보완'이란 말은 어떤 지점에서의 장점과 어떤 지점에서의 단점을 의미하리라.

    '근대성'의 문제는 계속 암시되었듯이 궁극적으로 '일상성'의 문제이다. 이는 저항의 주체인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하며, 어떤 문제를 제기하든지 간에 성찰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 단락에서 다룬 '경제신학'의 문제와 '민중 담론의 개방화'의 문제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이주/추방'을 전면화한다는 특성을 가진다. 이는 동시에 세계의 어느 지점이든지 간에 그 지점에서의 '일상성'은 다양한 집단과 다양한 색채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지니게 된다. 애시당초 유럽의 정복으로 그런 색채의 사회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라틴 아메리카라면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고, 어느덧 이주노동자의 독자적 노동운동의 싹까지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다.
    해방신학의 '원주민' 문제의 모색은 이 점에서 그 '다양한 색채'로 조직된 일상성에 대한 성찰의 실마리로 유의미할 수 있다. 특히 '이식된 근대성' 그 자체인 라틴 아메리카 교회의 산물이라는 '원죄'를 갖고 있는 해방신학의 경우 이 문제는 더더욱 절실할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와 같이, 비교회적이고 원주민 전통을 해방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원주민 운동의 출현은, 이 문제에 대한 해방신학의 한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글을 맺으며 푸념 한 마디. 이남섭 교수의 글에서 느껴지는 해방신학의 학문적 깊이와 넓이는 정말 부러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리고 해방신학의 이런 모색이 '신학'이라는 게토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비판인문사회과학 전반의 논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징후가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부럽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교회'라는 것이 사회의 한 다수 집단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도 아닌가 싶은.

댓글 0 ...

http://minjungtheology.kr/xe/45411
번호
분류
제목
닉네임
184 카테고리 관리자 5519 2002.02.08
183 카테고리 최형묵 3858 2002.02.08
182 카테고리 최형묵 3757 2002.02.26
181 카테고리 황용연 6466 2002.03.12
180 카테고리 이경재 3570 2002.03.26
179 카테고리 헌책방쥐 3932 2002.04.30
178 카테고리 백면서생 3528 2002.05.02
177 카테고리 황용연 3612 2002.05.28
176 카테고리 최형묵 3918 2002.05.28
175 카테고리 기광 3954 2002.05.28
174 카테고리 이남섭 5720 2002.07.02
카테고리 황용연 3874 2002.07.18
172 카테고리 조현범 4671 2002.07.30
171 카테고리 리민수 4262 2002.09.01
170 카테고리 미선이 4052 2002.09.03
169 카테고리 백찬홍 3856 2002.10.01
168 카테고리 황용연 4163 2002.11.10
167 카테고리 황용연 5105 2002.11.10
166 카테고리 최형묵 3662 2002.12.31
165 카테고리 정강길 3894 2002.12.31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