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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발제] 한말 개신교의 문명화 담론 [카테고리]
  • 조현범
    조회 수: 4714, 2002.07.30 19:13:41
  • 한말 개신교의 문명화 담론에 관한 연구

    조현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 서론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 근대 한국 사회에서 절대적인 과제로 등장한 것은 이른바 '문명화'와 '자주 독립'이었다. 특히 문명화의 사명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구 제국의 정체를 밝히고 근대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짓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당시 한국의 종교들도 문명화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 유림층의 유교개혁운동이나 동학의 천도교 개신 등은 바로 한국 사회의 문명화와 근대화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 정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당시 막 전파되기 시작한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문명화와 근대화의 문제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한국의 개신교는 선교사, 특별히 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파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서 문명화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한국 사회의 문명화 또는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다는 논리는 사회적으로 널리 보편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형성하였던 문명화 담론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또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 그다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논의들이 보다 더 풍부하게 검토되어야만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개신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점검할 수 있고, 또 나아가 앞선 시기에 도래한 천주교와 비교할 때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 무엇인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 연구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유력한 지식인 신자들이 남긴 책자와 신문, 기타 자료들을 통해서 개신교 진영에서 논의되던 문명화 담론을 분석하고자 한다. 즉 과연 그들이 문명화에 관련한 용어나 개념, 논리를 사용할 때 어떤 내용과 방향성을 함축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이 근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2. 선교와 문명

    한말 개신교 진영에서 논의되던 문명화 담론을 다루기 앞서서 먼저 개신교 문명화 담론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선교사들에 대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종교적 관점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자신들의 세속적 활동인 교육 의료 활동과 개신교의 조선 전파라는 종교적 사명을 어떻게 결부시키고 있었을까 하는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93년에서 1983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개신교 선교사는 1,952명이며, 그 중 약 1,710명이 미국인인 듯하며, 미국인 가운데 637명이 해방 전 한국에 입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교파별로 보자면, 미국 북감리교의 일본 주재 선교사였던 맥클레이(R. S. Maclay) 목사가 1884년 6월에 조선을 방문한 이래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스크랜튼(W. B. Scranton),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헤론(J. W. Heron), 마펫(S. A. Moffett) 등이 1885년 무렵에 입국하였으며, 1892년과 1896년에 다시 미국 남장로교와 미국 남감리교의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0년대 초에는 안식교와 성결교 및 미국성서공회 등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한편 미국을 제외하고 선교사를 파송한 서구의 개신교 교파들은 영국 성공회와 구세군, 캐나다 장로교 및 호주 장로교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선교사의 숫자나 선교 지역 확보의 측면에서 미국계 선교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 가운데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미국인 출신의 선교사들이며, 특히 미북감리교, 남감리교, 미북장로교,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후 한국 개신교의 성격을 규정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입장과 선교 정책, 그리고 근대 서구 문명에 대한 태도 등이 한국 개신교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을 확신케 한다.
    그러면 그들의 신앙적 성격은 어떠하였는가? 우선 신학이나 성서비평학에 대해서 완고한 보수적 입장을 취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을 고수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엄격한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교파를 초월하여 경건주의 색채가 강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중생(重生)의 체험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중시하며, 그리고 선교와 사회구제를 연결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강조하였다. 또한 초기 선교사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며, 프로테스탄트적 신앙 원리를 지향하는 복음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선교사들은 18세기말부터 일어난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대각성운동은 미국에서 여러 선교회와 대학, 신학교가 창립되는 데 큰 자극을 주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1880년대에 미국 신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선교부흥운동이 일어나 '전국신학교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에 온 초기 선교사들 중에도 이런 선교열에 자극을 받아 선교 활동에 지원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논자에 따라서는 그들의 초기 선교활동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교육과 의료 활동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본래적인 의도에서는 벗어난 것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활동이 조선의 근대화에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한국인들의 영혼 구원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선교와 문명의 두 갈림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개신교 신앙의 전파와 서구 문명의 전파라는 두 개의 길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대로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근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반근대주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는 종교적 성향을 지녔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한국에 입국한 초기에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의 길을 선택하였는가? 이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당시 조선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 선교활동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면 타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장로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대 문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조차도 배재학당을 운영하는 등 오랫동안 교육사업에 주력했음에도 선교 우위의 관점을 감추지 않았다. 1884년 아펜젤러는 미국의 선교본부로 보낸 연례보고서에서 "맥클레이 박사는 궁극목적인 복음화를 숨기지 않은 채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믿고 있다. 학교는 환영받을 것이고 병원은 필요하다. 이런 수단들을 지혜롭게 도입하면, 동양의 다른 선교국에서는 아직 시도해 보지 않은 이 분야에서의 성공은 분명히 기대될 수 있을 것"라고 말하고 있다. 즉 본격적으로 개신교 신앙을 전파하기 앞서서 조선인과 조선 정부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임시적인 수단으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그 뒤 선교와 신앙의 자유가 일반화된 후인 1898년에 열린 조선감리회연회에서 아펜젤러는 그러한 선교 우위의 관점을 더욱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학생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학생들은 기독교인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은 예외없이 크리스쳔이다. 이것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도 만족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있으며, 우리가 가르치는 자들이 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근거해서 일하고 있는 기본 원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은, 학생들이 예수께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학교가 어둡고 사악한 이 도시에서 횃불이 되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 교회의 커다란 영적인 힘이 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입장은 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가졌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서 보다 더 잘 드러난다. 1891년부터 알렌의 뒤를 이어 제중원(濟衆院)의 책임을 맡았던 의료 선교사 빈톤(C. C. Vinton)의 경우가 그러하다. 열정적인 보수주의자였던 빈톤은 1893년 장로교 선교공의회에서 의교사업을 '전도용'으로 국한시켜 그 활동을 제한하려 하였으며, 제중원도 종교 기관으로 구조를 변경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병원 구내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것도 반대에 부딪치자 한 때 병원 문을 닫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1892년부터 자기 집에 진료소를 꾸며 의료활동과 개신교 신앙 전파를 동시에 추진하다가 제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 사업에는 손을 끊었다. 빈톤의 입장은 "조선 어디에서나 우리들의 의료사업은 충실한 기독교적 교훈과 영향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898년 {세계선교리뷰}지에 기고한 "조선에서의 의료 사업"이라는 글에서 한국인 신자들 중에서 의료 사업을 통해서 입교한 사람은 거의 없으며, 조선에는 다른 나라와 달리 의료 선교사의 수가 성직(聖職) 선교사의 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의료 선교사들의 임무는 조선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건강을 돌보는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록 이들이 선교활동을 의료나 교육 활동을 통한 서구 문명의 전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겼을지라도, 조선 사회가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개신교 신앙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 개인들 그리고 그들을 조선으로 가게 만들었던 세계선교붐도 역시 근대 서구 사회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궁극적 과제는 비서구 조선을 '회심'시키고 '문명화'하여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길러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심'시키려는 욕구는 그 자체가 이미 서구에서 근대 이전부터 형성되어온 기독교 중심주의의 배타적이고 지배욕에 차 있으며, 팽창적인 속성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회심(기독교화)'과 '문명화'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기독교 우월주의를 서구 중심주의와 곧바로 결합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인종주의적이고 진화론적인 근대성의 신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비서구인들이 '계몽의 결핍'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기독교 우월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의 결합 이외에도 당시 선교사들의 의식 속에는 계몽주의 정신과 개신교 신앙을 어느 정도 적절하게 융합시킨 미국주의(Americanism)가 숨어 있었다. 미국주의는 "미국이야말로 인간이 꿈꾸는 가장 완전하고 이상적인 나라이며, 하느님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미국인을 선택하였다"는 신념을 표방한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에게는 "세계선교는 하느님이 미국을 훈련"시키기 위해 내린 선물이며, 이를 통해서 미국이 "확장되고 번영하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이고 신앙"이라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선교를 우선으로 할 것이냐 의료나 교육 사업과 같은 문명 전파와 병행할 것이냐는 논쟁은 방법론적인 문제였을 뿐이고, 개신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과 근대 서구 문명을 전파하는 것은 결국 동의어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3. 개신교 문명화 담론의 구조

    여기서 개신교 문명화 담론의 구조를 살펴본다는 말은 곧 한말 개신교 측에서는 조선을 문명화한다는 것을 어떤 입장에서 사고하였는지, 그리고 이를 어떤 언어로 표현하였는지를 분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개신교 선교사들의 의식 속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떤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문명화와 짝을 이루는 어휘인 비문명 혹은 야만의 상태가 어떤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개신교 문명화 담론이 생성되고 운위되는 기본적인 토양을 파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 선교사들과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던 유력한 조선인 신자들이 문명화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또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1) 조선에 대한 인식

    조선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 사회를 문명의 발달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야만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크게 다섯 가지, 즉 ① 일반적인 인상, ② 정치적 측면, ③ 사회적 측면, ④ 문화적 측면, ⑤ 사상적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일반적인 인상을 말하자면, 조선의 거리 환경이나 생활 환경의 측면에서 불결하며 비위생적이고 빈곤하다는 것이 그들의 첫인상이었다. 아펜젤러는 조선에 입국한 직후인 1885년 8월에 미국 선교본부로 보냈던 첫 번째 연례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울 거리는 좁고 불결하기 때문에 늘 오물이 널려 있습니다. 빈민들의 집은 매우 원시적으로, 진흙으로 지어져 있으며 작고 낮으며 음침하고 불결합니다." 또한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s)도 조선의 빈곤 상태를 지적하였다. 특별히 그의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조선의 빈곤이 전반적인 비문명적인 관습과 더불어 인구 정체의 원인이라고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조선에 입국하였던 선교사들과 기타 서양인들은 조선의 상태를 문명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야만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위생의 관념도 전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관습에 얽매어 빈곤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역으로 생각하였다.
    둘째,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을 비문명 또는 야만적인 국가라고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특별히 조선의 사법제도였다. "아직도 조선을 반야만적이라고 낙인을 찍기에 충분할 만큼 이 나라에는 고문에 관한 어휘가 많다. 가엾은 피고에게 고통을 주는 야만적인 옛 법들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불명예스러운 死刑 制度가 남아 있어서 그 잔혹함은 야만의 근성을 풍겨주고 있다." 즉 그들은 조선에서의 피의자 심문 과정이 고문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에 크게 경악하면서, 신체형(身體刑)을 통해서 범인의 자백을 받아내는 제도에서 야만성의 전형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이 점은 19세기 전반기와 중반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천주교 선교사들의 인식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의 사법제도를 후진적인 것 또는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효과를 갖고 있었는데, 미국이나 서유럽의 사법제도가 문명의 정신에 더 철저하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개항 당시 서구 제국들이 불평등 조약의 일환으로 영사재판제도를 강요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셋째, 사회적 측면에서 조선을 비문명의 사회로 인식하게 만든 근거는 바로 노비제도와 여성 차별이었다. 특히 그리피스는 조선의 노비제도를 조선의 전근대성, 봉건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파악한다. 즉 조선의 노비제도는 봉건 사회의 농노제도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제도 하에서는 정치적 또는 사회적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넷째, 선교사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사람들은 매우 미신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분명히 상류 사회에는 일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는 듯 한데, 일반 민중의 삶에서는 교육도 문화도 찾아볼 수 없으며, 이 때문에 더욱더 조선 사람들은 미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선교사들이 미신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일반적인 민간신앙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는 유교나 불교도 똑같은 미신에 불과하였다. "과학의 확신이나 순수 종교의 능력이 제공하여 주는 삶의 보장이 없기 때문에 땅과 공기와 물 속에 빽빽이 들어박혀 있는 악마나 귀신들에 대한 끝없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엉으로 덮은 초가집이나 흙바닥의 오두막집은 물신(物神)들의 박물관이다." 그리고 "유교와 불교는 미신의 총결집체를 이루고 있다."
    다섯째, 사상적 측면에서 본다면,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에게서는 현재의 용어법으로 말하자면 민족국가의 관념이 부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애국주의를 발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민족이나 국가라는 단위 대신에 문벌이나 가문, 친족집단이 더 중요한 단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의 개인주의도 찾아볼 수 없다고 보았다.

    조선은 자신이 대부분의 문화적 요소를 빌려온 중국에 대하여 모든 면에 있어서 너무도 철저하게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숭고한 의미로서의 애국주의가 없었다. 대체로 백성들은 세금을 물고 방백 수령의 환심을 사고, 법망을 피하는 문제만으로 전전긍긍하였다. 지배자들의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한 가엾은 두려움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으며, 매사를 현상 그대로 유지하려는 욕망이 변화에 대한 무기력한 두려움과 혼합되어 있었다. 국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라든가 자기의 조국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는 의지, 이러한 것은 거의가 긴 안목을 가진 소수 애국자들이 제시하는 신사상에 불과하였다. 조선의 사회적 정신적 진보에 있어서 현재 그들의 윤리적 수준은 집단, 종족, 또는 친지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의 관념은 아직 개인주의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러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은 천주교 선교사들의 경우와는 약간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조선의 총체적인 상황을 비문명 또는 야만으로 규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타자를 대하면서 그들 자신을 새롭게 성찰하는 기회를 만들기보다는, 문명이라는 가치를 절대화하여 문명과 야만의 양분법으로 서구와 조선을 분할하는 사고 방식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아의 무한한 확장으로서 사물과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아마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의 개신교가 서구의 계몽주의 정신과 개신교 신앙을 적절히 융합시켜 미국적 가치의 세계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미국주의와 세계선교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2) 문명화의 내용과 방향

    일반적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문명화한다는 관념은 외국 특히 서구 제국과의 무역과 국내 실업의 진작을 통해 국가적인 부를 증대시키는 것과, 법과 문물 제도를 서구식으로 정비하여 근대적인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수립하는 것, 그리고 근대적인 신지식을 보급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근대적인 인간으로 거듭 나는 것 등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개신교 진영에서 주로 생산하던 문명화 담론이다. 그들의 담론 속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문명화 문제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삶의 질서, 새로운 사회적 원리 혹은 규범의 도입을 문명화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논의들이다. 이런 논의들은 ① 문명적인 생활 습관, ② 정교분리의 원칙, ③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근대적 관념, ④ 정신적 문명화 등에 관한 것들인데, 한말 개신교 진영에서 문명화의 내용이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① 문명적인 생활 습관

    개신교 문명화 담론에서 문명화된 삶의 척도로 제시하는 것은 생활 습관과 의식의 개조이다. 1903년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던 제19차 조선감리회 연회에 미국인 선교사 벙커가 제출한 "절제와 사회개혁(Temperance and Social Reform)"이라는 보고서에서 우리는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생각하던 문명적인 생활 습관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① 주일성수(主日聖守), ② 술의 사용, ③ 결혼, ④ 도박과 노름, ⑤ 담배와 궐련의 사용, ⑥ 노예 소유의 여섯 항목으로 된 이 규칙에서 우리는 한말 개신교가 규칙적인 생활을 권장하고 술이나 담배, 도박을 철저히 죄악시하는 청교도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아울러 노예 소유나 과부 매매를 전근대적이면서 야만적인 범죄 행위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게 된다. 물론 이것은 종교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개신교 신자들의 교회 생활 규칙으로 제시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선교사들이 서구 문명의 관점에서 조선인들에게 권고하는 새로운 삶의 자세이자 생활의 규칙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개신교에서는 문명화되지 못한 조선 사회의 폐단을 나태와 놀고 먹으려는 태도, 흐릿한 시간 관념 때문이라 보고, 근면과 저축, 절약하는 생활 태도를 강조하였다. {죠선크리스도인회보}에 실린 "사설: 시간을 아낄 것", "부지런함과 저축함"과 같은 사회적 계몽성을 짙게 담은 글들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근면과 절제, 금욕 등의 윤리적 삶을 강조하는 것은 개신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성리학적 질서에 따라 엄격하고도 절제된 삶의 규범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 문명화 담론에서 강조하는 문명적인 생활 습관에는 독특한 점이 들어 있다. 그것은 모든 가치를 철저하게 수량적으로 계량화(計量化)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시간을 아껴야 하는 것은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지런함이라는 것도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근면이 아니라, "잠자기 전 1, 2시간을 공부에 투자하거나" "월급의 10분지 2, 3을 저축하는 것"과 같이 수량적으로 계산된 근면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우주론적 구도(cosmological scheme)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윤리적 규범으로 제어하려는 노력과는 판이한 것이다. 오히려 근대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인간의 행위적 측면을 수량적으로 환산하여 평가하려는 태도이다.

    ② 정교분리의 원칙

    정교분리의 원칙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개신교 문명화 담론에서 독특하게 등장하는 내용이다. 주로 이것은 서구 문명 국가들의 사회적 원리로서 강조되는데, 특별히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주 동원되는 논리이다. 즉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반문명된 국가들은 모두 고대 유럽의 세계처럼 교권 국가"로서, 종교와 국가가 하나로 통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들 국가에서는 국민에게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국민들을 박해한다." 그러나 정치는 "인민의 유형(有形)한 사실을 총괄하여 입법과 행정과 사법의 권리를 그 나라에 베푸는 것"인 데 비해서, 종교는 "백성의 무형(無形)한 정신을 감화시켜 자기와 남과 신에 대한 이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정치는 나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거 천주교 선교사들은 "국가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감추고 속이면서 상복으로 가장하여 조선에 입국하여" 불법적인 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한다는" 궤변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하던 그 날부터 국법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도덕적 순수성을 고수하면서 활동하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교분리의 원칙이야말로 문명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지켜야할 중요한 사회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 속에는 문명화 담론에 내재한 근대적 세계관의 원리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문명'과 '자연', '정신'과 '육체', '공(公)'과 '사(私)'의 이분법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치와 종교는 각기 다른 영역 속에 할당되며 양자의 기능과 역할은 각각 정해진 한계 내에서 제한되어야 하고, 서로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개신교 문명화 담론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그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고 상호 간섭함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을 문명화의 지표로 삼게 되는 것이다.

    ③ 개인의 자유

    문명화의 또 다른 지향점으로 거론되는 것은 개인이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이다. "자유라 하는 것은 무슨 일든지 좋아 하는 것은 마음대로 행하고, 굴복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어 악한 일든지 선한 일든지 임의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유하는 권리는 빈부 귀천이나 강약에 따른 차등 분별이 없으며, 만승 천자의 위엄과 일만 백성의 힘으로도 한 사람의 자유하는 권리는 빼앗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자유에 속하는 권리는 "① 신명의 자유, ② 재산의 자유, ③ 사업상 자유, ④ 회 조직하는 자유, ⑤ 종교의 자유, ⑥ 말하는 자유, ⑦ 명예의 자유" 등이다. 문명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자유의 권리를 신장하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교육이 없으면 자유하는 권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문명한 학문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며 법률로 백성의 권리를 보호하여야 그 나라가 보전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국가적인 단위의 문명화는 바로 "백성들 각자가 부지런히 일하고 살아가면 부지중에 저절로 달성된다"는 것이 개신교 문명화 담론의 기본 지향이었다.
    여기서 자유의 권리를 담지하고 있으면서 이를 행사하는 주체의 단위는 "각 사람" 즉 개인(個人)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개인이라는 용어는 근대 서구사회에서 사용하던 '나뉘어질 수 없는 독립된 개체'라는 의미의 '인디비쥬얼(individual)'을 번역한 것으로, 엘리아스의 표현을 빌면, "폐쇄적 인간(homo clausus), 즉 바깥의 커다란 세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신만의 조그만 세계, 또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여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자신의 핵심, 본질, 원래의 자아" 등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개신교 문명화 담론에서 모든 사회적 행위의 단위이자 자유할 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을 설정하는 것은 가족이나 가문, 지역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사회적 관계망 자체를 주체로 설정하는 것과는 판이한 원리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④ 정신적 문명화

    개신교 문명화 담론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할 사실은 정신적 문명화 또는 내적 문명화를 진정한 문명화의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을 바로 하고 행실을 진실하게 하는 것은 구미 각국 도학의 근본이요 큰 것이며, 병함을 제조하고 철로를 건설하는 것은 각국 정치의 말단이요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은 숭상하지 않고 다만 기계의 편리함만을 취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화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육군이나 군함을 많이 두는 것보다 교회와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야 그 백성이 점점 개명되고 그 나라가 장차 진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윤리적 내면적 변화가 개인에게서 성취되면 그것이 스스로 외연으로 나타나 사회의 정돈, 자유, 부강 등 문명화가 자연스럽게 실현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 조선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하고 문명과 부강의 새 시대를 전개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동력이 바로 개신교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이었던 릴리아스 언더우드(Lillias Underwood)는 그녀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서양 문명에서 최선의 것들, 사람의 내재한 힘을 분발시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동력이 바로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기독교의 원리, 그리고 이 원리가 실천되는 곳, 이 정신이 숨쉬는 곳, 거기에 문명은 생성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4. 개신교 문명화 담론의 효과

    이상에서 우리는 개항기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벌였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의 현실 속에서 구상하고 있던 문명화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먼저 선교와 문명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문명화의 내용, 즉 당시 조선의 사회상에 대한 인식, 문명화의 기본 내용과 방향에 대한 태도를 검토하였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문명화 담론이 구한말의 조선 사회에서 어떤 효과를 발생시켰는지, 그리고 이런 담론적 효과들이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검토할 차례이다.
    여기서는 개신교의 문명화 담론이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조선을 문명화한다는 것과 조선에서 개신교가 융성한다는 것을 동의어로 간주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기존 조선 사회의 가치체계와 새로운 개신교적 가치체계를 날카롭게 대비시키면서 새로운 가치체계의 장점을 진정성, 내면성에서 찾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전 시기 내한한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들의 문명에 대한 태도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문명화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즉 정치, 경제, 기술, 사회생활에서는 근대 문명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무신론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나 농촌사회의 공동체적 관행을 파괴하는 개인주의를 유포한다는 점 등 때문에 근대 문명을 인간성의 타락으로 간주하는 태도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개신교 선교사들은 문명화의 방향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어떠한 거리감도 두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근대 문명이 가지고 있는 사유의 원리와 개신교가 친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곧 내면적 진정성의 원리이며, 정신 우월의 원리이다.


    1) 문명화와 기독교의 동일시

    개신교 문명화 담론이 생산한 첫 번째 효과는 문명화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일반화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개신교 진영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이나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도 널리 확산되어 있던 태도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직접 쓴 책이나 신문 기사,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조선인들이 쓴 글들을 보면 개화, 문명 진보, 부강, 독립 자주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기독교를 꼽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문명화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더라도 그 논리는 두 가지 층위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문명화된 나라들은 모두 기독교를 숭배하고 있다는 현상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문명화와 기독교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구체적인 종교별 세계 인구 통계를 제시하면서 문명 진보를 이룬 나라들 중에는 "구세주의 교회를 존숭하는 나라들"이 가장 많다는 주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문명국에서는 대개 기독교를 숭상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지금 서양 각국에 제일 문명하고 제일 부강한 나라를 보라, 그 나라들이 무슨 교를 숭상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나, "그 교를 받드는 자의 사업의 발달함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오늘날 이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숭봉하는 국민이 성취한 사업과 다른 교를 믿는 국민이 성취한 사업을 비교하여 보라, 이전에 보지 못하던 기계를 발명한 것과 학술이 진보한 것과 교육의 제도와 문명의 정도와 모든 인류 사회에 유익한 것은 다 그리스도교를 받드는 국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널리 확산되면서 문명화를 달성하는 데 기독교가 필수적인 요소라는 인식이 성립한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독립신문} 같은 데서는 "지금 세계 각국의 문명 개화한 나라들은 다 구교나 야소교를 믿는 나라이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문명 개화하는 데 긴요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조선의 문명화과 부국강병을 급선무로 생각하던 지식인들 사이에도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김옥균이나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과 같은 급진파 지식인들은 문명화를 위해서 개신교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신교 문명화 담론에서는 문명화와 기독교를 현상적으로 일치시키는 논리를 넘어서 기독교를 문명화의 근원적인 동력이자 문명화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논리도 존재하였다. 이것은 개신교 문명화 담론이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문명화보다는 정신적 문명화를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태서 각국이 기독교를 존숭한 후에 그 백성이 한번 변하여 자유하는 마음과 용진하는 기운을 발달시켜 오늘날 저같이 문명 부강하였다고 하거나, 거짓말, 도적질, 도박, 과음, 사회악 등이 만연한 조선에서 문명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기독교적 훈련을 통해 새로운 행동의 동기와 정신적 자세 등을 획득할 때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외면적 문명화와 내면적 문명화를 구분하고 내면적 문명화에 더 큰 가치를 두는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2) 새로운 종교성의 출현

    개신교의 문명화 담론이 창출한 두 번째 효과는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과거와는 판이한 새로운 종교성(religiosity)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친척 나아가 가문이라는 사회적 관계의 연결망이 종교적 심성을 생성시키고 종교적 실천들을 수행하는 중심축이자 주체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행이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와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의 종교성은 구분할 수 없는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타당하고 적절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종교적 성향을 강화하고 종교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문명화의 원리가 도입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가치 체계와 세계관이 성립하게 되었다. 즉 종교적 성향을 담지하는 종교 생활의 기본 단위이자, 이런 종교적 성향을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내는 주체는 더이상 사회적 관계의 망이 아니라 외부적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면서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으로 상정된 것이다. 그리고 자아 구성의 원리도 변화하여 의례적 실천과 같이 외적인 형식으로 표상되는 측면들은 가변적이면서 동시에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요소로 분류되고, 이와 대비하여 인간 활동의 내적인 측면으로 인식되는 정신이나 감정이야말로 종교적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리하여 개인을 단위로 하면서 일체의 외적인 형식과는 무관한 내면적인 것을 진정한 종교 생활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종교성의 모델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종교를 믿는 주체를 개인으로 설정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행위가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에 입각해야만 진정한 종교라고 보는 시각은 이미 개항 이전의 조선 사회, 19세기 전반기와 중반기에 천주교 신자들에게서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기해교난이 한창이던 1839년 5월 24일에 참수형을 당한 이소사는 남편과 아들이 모두 천주교 신앙을 부정함으로써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한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해 죽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 같은 시기에 조선 천주교회의 유력한 신자였던 유진길은 체포된 뒤 여러 형제들과 친척들이 찾아와 배교할 것을 설득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때문에 당신들이 겪을 고초를 생각하면 대단히 마음이 괴롭고 당신들의 처지를 동정합니다. 그러나 천주를 안 후에 그를 배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골육의 사정을 돌보는 것보다 먼저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이아가다라는 처녀는 형리들이 그녀의 부모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고 거짓말을 하자, "우리 부모께서 배교를 하셨든지 안하셨든지 우리의 알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항상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들로 보건대 19세기의 천주교 신자들에서부터 이미 종교를 믿는 것은 가문이나 형제, 친척 등의 인간관계의 망에서 저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결단을 통해서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인 단위의 사고가 일반화된 것은 한말 개신교가 수용되고, 근대 서구 문명이 밀려들어오면서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와 신앙의 단위가 집단에서 개인으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을 개인이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직 설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말 개신교의 수용과 더불어 발생한 내면성의 출현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완결될 것이었다. 따라서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새로운 종교성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전체를 걸쳐서 진행된 사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면성을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것은 내적인 것이며, 내적인 것이야말로 고유한 것이고, 외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본질이다라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서 신체보다 정신이 우월한 것이며, 정신을 잘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발생한다. "건전한 정신이 건전한 신체를 조성한다는 것은 만고에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수양하는 것이 만가지 일의 실마리가 된다. 태서의 물질적 문명과 정신적 문명이 다 크리스도교 청년들의 활발하고 완전한 정신을 수양한 결과이다."
    이러한 내면성의 강조는 종교의 장에서도 새로운 종교성을 형성시켰다. 즉 의례와 같은 외적 형식은 순수한 내면적 신앙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주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보다 본질적이고 진정한 신앙은 인간의 내면, 마음 속, 내부에 있는 사람에게 존재한다. 이것을 모르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다 헛된 일이다. "바울이 가로되 성신이 마음 속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 강건케 한다 하였으니 이 말씀이 옳다. 사람이 마음에 성신이 없는 고로 우리 정신이 강건치 못하고 우리의 정신이 강건치 못한 즉 능력이 없어 모든 일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종교를 내면의 문제로 보고, 내면적인 종교야말로 진정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특히 조선인 개신교 신자들의 개종담에 잘 나타나있다. 대표적인 초기 개신교 신자이며, "한국 기독교의 개척자"라고 일컬어지는 서상륜(徐相崙)은 자기 고백에서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외모로는 공맹자(孔孟子)의 도를 숭봉하며 문벌을 자뢰(自賴)하고 안으로는 교만과 궤휼과 거짓과 간음과 탐냄을 품"었다고 술회한다. 또한 1882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개신교로 개종하고 성서 번역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던 이수정(李樹廷)은 일본의 전국 기독교도 대친목회에서 신앙 고백을 하였다. 이 기록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신앙 고백서로 남아있다. 여기서는 "단지 세례만 말하며 남을 의지하여 생각하게 되고 중심에 진실된 믿음이 없으면 성도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도 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준거가 바로 내면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종교를 내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는 윤치호, 신석구, 천세봉, 양전백을 비롯한 이른바 초기 개신교 신자들의 개종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이 종교나 신앙이라는 것을 인간의 내면에 뿌리를 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개신교 진영에서 문명화의 장애요인들로 지목한 유교나 불교와 같은 전통 종교들과 민간신앙을 공격할 때 사용하였던 내면적 진정성의 원리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즉 기존 신앙들은 외적인 형식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허황한 것이고 그래서 미신인 반면에, 개신교 신앙은 실질을 숭상하고 신앙의 내면적 변화를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진정한 종교이자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의 터주나 걸립, 성주, 부군 그리고 부모의 제사는 다 헛된 것"이며, 혼례와 상장례에 택일을 하는 관습도 음양 술수의 허탄한 것을 공연히 믿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한 불교에서 숭배하는 관음보살과 도교에서 숭배하는 옥황상제도 역시 그 내력을 따져보면 과거에 살았던 사람인데, 지금에 와서 사람들이 실질을 숭상하지 않고 허무한 일과 황당한 말만 추구하여 이를 숭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개신교 문명화 담론이 발생시킨 효과로서 종교의 본질을 내면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종교성의 모델은 점차로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통념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내면적인 것이 진정한 것이라는 모델은 종교적 실천의 형식적 측면에 대한 거부감을 양산하여, 광범위한 의례 혐오(ritual boredom)의 종교 현상을 낳았다. 목사의 설교만 강조하는 개신교 의례의 형해화(形骸化)가 그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측면은 교회사학자들이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서술할 때 일관되게 유지하는 견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한국 민족 교회의 정신적 역사"가 시작된 것은 한국인 신자 개개인의 내적 회개와 종교적 경험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통해서였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어쩌면 개신교 문명화 담론의 영향력은 여전히 현재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5.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한말 개신교에서 조선의 문명화와 관련하여 사용하던 용어, 개념, 표현, 묘사, 진술 등을 문명화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 보았다. 먼저 담론의 주된 생산자였던 개신교 선교사들의 존재, 그들의 출신, 신앙, 선교와 문명에 대한 견해 등을 살펴보면서 근본주의적이고 반근대주의적인 신앙을 중시하던 그들이 비문명 국가인 조선에 와서는 어떻게 근대 서구 문명의 전달자를 자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개신교의 문명화 담론에서 조선은 어떤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렇게 표상된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또 조선의 문명화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문명화의 내용과 방향으로 근대 서구의 가치관을 삶의 규칙으로 삼을 것을 권유하는 생활 습관과 정교분리의 원칙, 근대적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 정신적 문명화에 대한 강조 등이 설정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신교 문명화 담론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회적 종교적 효과를 양산하였는가? 문명화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한편, 기독교를 문명화의 본질이자 정수로 파악하는 태도가 사회적으로 일반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 점은 조선에 대한 인식 태도와 더불어 개신교 선교사와 천주교 선교사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부분이었다. 또한 개신교 문명화 담론은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종교성을 출현시켰다. 바로 종교의 본질을 인간 활동 중에서 내면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내면적인 것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면서 동시에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종교성의 모델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처럼 종교성을 인간 의식의 내면에서 찾으려는 모델은 신체와 정신, 자연과 문명, 형식적 외면과 진정한 내면을 분리시키는 근대 서구의 세계관이 한국 사회에서 출현하여 그 영향력을 전사회적으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인들의 종교 생활도 역시 한말 개신교를 통해서 전파된 문명화 담론의 문화적 지형 위에서 표상되고 가치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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