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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 발제] 민중해방의 정치와 '합류'의 해석학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3696, 2002.12.31 14:31:58
  • 민중해방의 정치와 '합류'의 해석학 -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탐구}다시 읽기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천안살림교회 목사


    1. 민중신학, 방외인(方外人)의 신학

    "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인 민중전통, 우리 역사를 추진시킨 동학 농민혁명, 3ㆍ1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중운동사에 오늘 한국교회의 신학자 몇 사람이 민중론을 써서 보태는 것이 과연 얼마나 그 약속된 영광의 전승을 계승하는 것인지, 생각건대 두려운 마음뿐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이후 60년대는 국사학계에서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과제를 수행했고, 70년대에는 민중사관을 정립, 발전시켰다. 문학도 70년대 초반부터 두드러지게 '민중'이 그 주제로 등장하였고, 70년대 10년간을 통해서 탈춤의 연구회 조직과 공연이 경향각지 거의 전부의 대학에 확산되었다. 사회정치면을 보아도 60년대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야당 정치인들의 주장과 활동이 성황 했던 데 비해서 70년대에는 노동자, 농민의 주체적 역사참여가 활발하였다. 그리고 70년대 전 기간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회의 제반 사회선교활동,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인권선교, 교회의 청년 학생 운동이 온통 '민중'과의 연대 속에서 수행된 기간인데도, 70년대 후반에 가서야 신학자들이 민중을 주제로 한 신학적 성찰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책을 펴냄에 있어서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낀다."

    1982년에 출간된 {민중과 한국신학} 머리말에 나오는 민중신학자들의 고백이다. 이 때 신학자들은 때늦은 신학적 성찰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20년 전 신학자들이 고백하고 있는 사실이 스스로 겸손하게 고백한 것처럼 그렇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 날기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뒤늦게 신학적 성찰을 시작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론으로서의 신학적 성찰 이전에 이미 그들은 민중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이 고백에 담겨 있듯이 70년대 한국 기독교의 여러 활동 가운데서 훗날 '민중신학'의 단초가 되는 어떤 성찰들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이 합의된 개념으로서 '민중신학'이라 불리고, 그 신학이 이전의 신학적 사고와는 명백히 구별된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 70년대 후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식적인 자각의 결과 처음으로 나온 책이 바로 {민중과 한국신학}이었다. 민중신학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독창적인 이론적 성취가 아니었기에, 그 실체를 확인하고픈 여러 신학자들이 함께 엮은 책이었다. 그러나 민중신학 최초의 전거(典據)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탄생은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다. 그 대본이 먼저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에 의해 영어로 출간되어야 했고, 그 이름도 이미 '민중신학'이라 붙여야함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민중과 한국신학'이라고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책들이 금서로 낙인찍혀 금압되는 상황이었고 신학서적으로는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형편이었으니, 민중신학자들은 아슬아슬하게 그 칼날을 피할 묘책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그 책은 금서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막 세상에 얼굴을 내민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고, 따라서 민중신학의 단초가 되는 20편의 글들을 모아놓은 그 책으로는 그 관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 즈음 출간된 책이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탐구}였다. 초판 발행시기가 1983년 11월이니, 그것은 당시 군사정권이 소위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한 직후 우리말로 된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그 시기와 일치한다. 아마도 그 덕에 이 책은 최초로 '민중신학'이라는 표제를 당당하게 걸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그 이름을 최초로 내세웠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풍부한 민중신학적 '영감'과, 그 영감으로 빚어낸 민중신학의 기본 얼개에 있다.
    정말 그렇다! 이 책은 풍부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그 나름대로 체계를 갖춘 본격적인 저술을 의도하고 쓴 책도 아니고, 여기에 실린 글들이 고답적인 학술 논문의 형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의 성격이자 동시에 민중신학의 성격을 밝히는 고백을 의미심장하게 던진다.

    " … 우리의 경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신학자들의 메아리가 민중신학으로 형성되어간다. 신학함의 진정성(眞正性)의 정도를 메아리의 모델로 가늠했을 때 그 신학의 진정성ㆍ민감성이 판명된다고 하겠다. 나는 지금 여기에 모아진 나의 신학논문 신학강연들이 70년대 이후 한국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얼마나 충실한 메아리였느냐고 묻는 것이다.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 어림없는 이야기다. 부끄럽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신학의 한 중요한 규준은 얻는 셈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방외인(方外人)의 신학' '방외신학', 이런 신학이 있을까? 나는 1975년에 대학 캠퍼스를 떠나서, 말하자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연구실, 연구비, 연구시간, 그리고 연구발표지(誌)가 있는 네모가 반듯한 규격 있는 신학 - 이런 신학을 할 수 없는 신세다. '신학의 에콜로지'를 말하는 신학자가 있지만, 나는 그 신학의 보금자리를 잃은 것이다. 연구생활이 지속될 턱이 없고, 연구업적이 나올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내 식대로 하는 신학은 '방외신학'(方外神學)이라 하겠다."(3-4쪽)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로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한 것이니, 사전에 어떤 구상을 전제하고 접근할 리 없었다. 사건 현장에서의 외침에 대한 응답을 서둘러야 했을 터이니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연구실적을 쌓기 위한 글쓰기와 같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신학을 서남동은 '방외신학'이라 이름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민중신학의 탐구}였다. 그 자신은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로서 신학의 임무에 과연 얼마나 충실했는지 '부끄럽다'고 고백했지만, '반듯한 규격'을 떠난 신학은 그의 사유방식과 행동방식의 역동성을 담아내기에 오히려 적절한 틀이 되었다. 이 책에 내보인 그의 신학적 성찰이 논리적 정합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엉성하기 짝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풍부한 영감으로 가득 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연에서 비롯된다.
    민중신학을 하는 이들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서남동의 신학이 급진적이며 동시에 풍부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민중신학을 논할 때 항상 그 정초자로서 안병무와 함께 그 이름을 거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남동의 신학은 그 명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안병무에 비하면 저술 면에서 다작이 아닌 사연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1984년 복직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서거한 바람에 어찌 보면 그의 민중신학적 성찰이 너무 일찍 미완으로 종결되고만 사연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두 민중신학 정초자에 한정해 말하면, 삶의 스타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안병무는 서거(1996년) 전까지도 당신이 중심이 되어 세운 연구소를 통해 집요하게 후학들을 양성하는 면모를 보인 반면 서남동은 어떤 것이든 '규격 있는' 것에는 자유로운 면모를 지녔다. 그는 그야말로 '방외신학자'였다. 이런 삶의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게 형성된 신학적 급진성이 어쩌면 후학들에게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서남동의 신학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진 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을 수 있겠지만, 민중신학자에 대한 전기적 성찰에 해당하는 서술은 이만 줄이기로 한다. 다만, {민중신학의 탐구}에 나타난 서남동의 신학이 급진적 성향을 띤 풍부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확인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영감'이 오늘의 신학적 지평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하려고 한다.

    2. 민중의 발견, 민중해방의 정치

    민중신학을 논할 때 '민중'부터 거론하는 것만큼 구태의연한 접근방식은 없다. 그러나 또한 '민중'을 논하는 것이 민중신학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1970년대 한국 상황에서 전개된 하나의 신학적 조류를 그와 같이 부를 수밖에 없었던 관건이 달려 있으니 '민중'을 이야기하는 것은 민중신학의 핵심에 도달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왜 하필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그 이름을 두고 많은 논란을 벌였다고 한다. 예컨대 '민중의 신학'이냐 '민중을 위한 신학'이냐를 두고 씨름을 하기도 하였는데, 결국은 '민중신학'으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소유격 '의'와 여격 '을 위한'은 단순히 수사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한 수사의 차이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민중의 신학'이라고 하면 지식인인 신학자들이 과연 '민중'이냐 하는 논란이 제기된다. '민중을 위한 신학' 하면, 기층 민중과 동일시할 수 없었던 민중신학자들 자신들의 처지를 해명해주기는 하지만 민중을 대상화하고 만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절묘하게 '민중신학'이라 선택했다 한다. 이와 같은 이름은, 민중과 지식인의 관계에 관한 당대의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모호하게 미봉한 듯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은 오히려 민중과 지식인 또는 더 나아가 민중운동과 신학의 관계를 더 깊이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 절묘한 선택인 셈이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신학'도, '민중을 위한 신학'도, 또는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도 아닌, '민중의 중심에서 하는 신학'이라는 통찰에 이르면 비로소 그 이름의 진가를 실감한다.
    한 노동자(전태일)의 절규와 죽음에서 예수를 보았고 하느님을 만난 신학자들은 이제 신학의 정도(正道)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민중사건의 현장 그 한가운데서 신학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민중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그 민중적 당파성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민중신학의 신학으로서의 독특한 해석학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민중신학은 신의 존재를 규명하려 했던 전통적 신학과 구별될 뿐 아니라, 그 전통적 신학을 일정부분 인간학으로 대체하였던 근대 서구 신학과도 구별된다. 민중신학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민중의 현실에서 신학을 다시 한 것이다.
    민중적 당파성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그 태도나 해석에서는 차이들이 나타나는데, 서남동은 우선 이 점에서부터 매우 단호하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기본 얼개를 내보인 [예수ㆍ교회사ㆍ한국교회]에서, 예수는 고난받고 억압당하는 민중과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공적 생애를 시작했다고 보며, 그 동일화를 '무조건적인 동일화' '절대적인 동일화'라고 본다(11-12쪽). 그와 같은 관점에서, 부자와 권력자는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13쪽). 그와 같은 입장을 열광주의라고 비판한 김형효의 반론에 대해서는 더더욱 단호하게, "모든 대립의 화해는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하지만 부자와 가난한자, 누르는 자와 눌린 자 사이의 화해는 있을 수 없"기에 "부자와 누르는 자에게는 주기도를 드릴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정언적으로 단언한다.(35쪽) 뿐만 아니라 서남동은 "부자는 천당 갈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신의 기본 신념이며 따라서 추호도 양보할 수 없다고까지 한다(195쪽).
    아닌게 아니라 이쯤 되면 정말 극단적 열광주의자 내지는 꽉 막힌 맹신론자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열광주의, 맹신주의로서가 아니라 서남동 신학의 진정한 급진성의 한 면모가 여기에 있다. 이 주장에서 서남동은 지금 도덕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265쪽) 맥락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부자의 마음이 악해서 공장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실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사회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타락한' 체제가 존속하는 현실에서 '부자'가 천당에 간다는 것은 말부터 성립될 수 없는 마치 '둥근 삼각형'과 같다고 한다. 사실 윤리적 교훈이 아닌 제도적 내지는 구조적 변혁의 차원을 문제삼은 것은 민중신학에서 처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신학자로서는 라인홀드 니버와 같은 이가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도 이미 씨름한 문제이기도 했다. 부르주아적 낙관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그 주요논지 가운데 하나는 개인간의 관계는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간의 관계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논점은 이미 서구의 급진적 정치신학이나 남미의 해방신학 등에서도 충분히 개진된 것이다. 서남동 그리고 민중신학에서 독특한 점은 그 문제를 민중적 당파성의 차원에서 분명하게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중신학은 단지 민중을 동정하는 도덕심을 불러일으키는 신학이 아니라 민중해방의 정치를 일깨우는 신학으로서 면모를 분명히 갖추게 된다. 이것은, 천편일률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양심과 회심을 강조하는 신학들과 구별되는 민중신학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신학에서 말하는 '죄'를 개인적 차원 또는 보편적 현상으로 접근하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 체제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인식도 이와 상통한다. 서남동은, "지배자가 약자, 반대자에게 붙이는 딱지"로서 '죄'의 성격에 주목한다. 그래서 추상적 죄를 문제삼기에 앞서 '범죄를 당한 자들' 곧 '억울한 자들'의 현실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와 같은 현실에서 보면 '죄'는 지배자의 언어이고, '한'은 민중의 언어가 된다.(106-107쪽) 그런데 서남동은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일을 당한 민중의 한에서 구원의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메시아의 도래는 고난받는 민중의 신음소리, 한의 소리를 타고 오시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고난받는 이웃, 특히 우리가 구조적인 악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고난받고 있는 이웃의 소리(아픔)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이 시대에 다른 아무 데에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나는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혹은 '한의 속죄적인 성격'이라고 말한다."(119쪽)

    신학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구원행위는, 이렇게 민중을 통해 실현된다. 서남동은 이 점에 대해 더욱 분명히 말하기를, "민중은 태초부터 하느님과의 계약상대자"라고 정의한다. "땅을 정복하고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ㆍ억압되어 천민ㆍ죄인으로 전락"한 민중이,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돌리고 하느님의 공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는 것이다(46-47쪽). 서남동은 아예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라기보다도 민중"이라고 선언하고(53쪽), "민중이라는 것이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기술될 필요가 있을 때 거기에 예수가 나타난다"고 하며 "예수는 민중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본다(187-188쪽).
    민중신학 비판자들은 늘 이 대목을 문제시한다. 도대체 민중신학이 '민중'신학이냐, '민중신'학이냐, 아니면 민중학이냐고 논란을 삼는다. 그러나 서남동의 이와 같은 입장은 기독교 신학의 전통에서 매우 낯설어 보이지만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신약성서}의 이해방식을 새삼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成肉身)론의 현대적 표현인 셈이다. "지금 눈앞에서 전개되는 사실과 사건을 '하느님의 역사개입'으로 알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78쪽). 민중신학은 초자연적으로 만나는 하느님을 말하지 않는다. 나자렛 사람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인식했던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민중신학은 오늘의 민중 속에서 하느님을 인식한다. 그것은 이른바 '민중사건' 안에서의 동일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적 동기가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지배자들이 뒤집어씌운 한계에 갇혀 고난받는 민중이 그 한계를 떨치고 일어서는 자기초월 사건을 구원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은 역사적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만일 신학이 신 존재 증명을 주요 임무로 하는 것이라면 민중신학은 그와 같은 전통적 의미의 신학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민중이 일으키는 자기초월의 사건을 구원의 사건 곧 신적 사건으로 인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설정한 민중신학은 그 자신의 전제에서 가장 진지한 신학이 된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그와 같이 구원론의 새로운 지평을 분명히 하고 있다.

    3. '합류'의 해석학

    민중을 입지점으로 하고 있는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그 나름의 독특한 해석학을 통해 체계적 이론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이른바 '합류의 해석학'이다. 이 합류의 해석학은 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는 것인 동시에 그 풍부한 영감을 담아내는 훌륭한 그릇의 역할을 한다. '두 이야기의 합류'라고 말했던 합류의 해석학의 실마리는 이렇다.

    "기독교의 민중사와 한국의 민중사가 한국 기독교인에게서 지금 합류되고 있다. 이러한 합류 과정을 민중신학은 어떻게 이해하고 실현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신의 선교'에서 이 합류과정은 어떻게 뻗쳐나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 기독교인의 역사적 소명일 것이다."(77쪽)

    이 합류의 해석학이 갖는 파격적 성격은, 그것과 전통적 신학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해명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서남동은 '두 이야기' 곧 두 전통을 '전거'(典據)라는 말로 성격화하며, 그 의미를 '참고서'라고 규정한다. 지금 한국 기독교인에게서 합류하고 있는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은 동등한 전거, 곧 동등한 참고서가 된다. 이 주장은 지금도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신학계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신학의 '규범'을 말하고 그 규범의 근거로 {성서}를 말해왔다. 그러나 서남동의 주장은, {성서}가 증언하는 민중사건과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민중사건, 그리고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민중사건이 모두 동등한 참고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민중신학의 전개는 그와 같은 입장에 매우 충실하다. 이 책에 수록된 그의 대부분의 글들은 한국 민중사와 기독교의 민중사를 종횡무진하는 가운데 번뜩이는 영감을 펼친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성서}가 기독교 전통 또는 신학에서 차지하는 실제적 비중이나 중요성 자체를 무시하는 발상은 아니다. 이 주장의 진의는, 문자로 기록된 {성서}가 신학의 근거로서 배타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고정된 하나의 텍스트가 문자 그대로 진리일 수 없다는 사실은, 사실 장황한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의 생성은 텍스트와 독자 그리고 그 사이에 게재되는 다양한 요소 사이의 상호 작용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 현대 비평학의 상식이다. 그것은 {성서}의 형성과정 자체가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될 만한 순수한 '성서적' 전승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다른 전통들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성서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성서} 자체 안에 이미 다양한 전통들이 교차하고 있고 그 교차의 과정에서 어떤 전통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계승되어, 다른 것들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경계지을 수 있는 전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고착되어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해석자 또는 계승자를 매개로 하여 다양한 전통과 교차하고 다시 그 내용과 형식을 새롭게 한다. 성서 자체가 그렇게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전통 자체가 그렇게 이어졌다. 문자로서 {성서}가 배타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서 형성 그 자체,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역사 자체가 입증한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그 사실을 비로소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서남동은 그와 같은 해석을 스스로 일러 기독론적ㆍ통시적 해석과 구별되는 성령론적ㆍ공시적 해석이라 한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기독론적 해석에서는 이미 주어진 종교적인 범주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는 것이라 주장하고, 성령론적인 해석에서는 지금 현실의 경험과 맥락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밝힌다(78쪽). 기독론적 해석은, 성서가 수미일관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고 보는 해석방식이다. 그러므로 기독론적 해석은 단일한 전제로 성서의 다양한 전승을 짜 맞추는 폐쇄적 해석방식을 말한다. 반면 성령론적 해석이란 어떤 경계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의 활동을 강조한 개념으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식을 의미한다. 또한 통시적이라는 말은 과거 전통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며, 공시적이라는 말은 오늘 여기의 지평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해석의 적합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지금 현실의 경험과 맥락"이다. 이와 같은 기준은, 문자적 전통이든 역사적 전통이든 그 자체로는 항구불변한 진리로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바꿔 말하면 "실천으로서 전통을 잇고, 발전시킨다."(41쪽) '오늘 여기에서의 실천적 문제의식'이 전통의 수용여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말한다.
    서남동은 이와 같은 합류의 해석학의 착상을 결정적으로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사건에서 얻고 있으며, 아울러 1970년대의 김지하의 담시(譚詩)에서 영감 받는다(78쪽). 1970년대 민중운동의 기점이요 기폭제가 된 전태일 사건을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 사건으로서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고, 당대와 과거를 종횡무진하며 민중적 사건을 특유의 입담으로 토해낸 김지하의 담시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것이다. 또한 '두 이야기'가 "한국 기독교인에게서 지금 합류하고 있다"고 밝힌 것처럼, 기독교 신학자로서 그 합류의 해석학을 적극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요인은 1970년대 기독교인들이 민중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합류의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민중신학의 정치신학적 성격을 분명히 해 주는 이론적 장치였다.
    그러나 합류의 해석학은 정치신학적 유용성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합류의 해석학은 가장 독창적인 한국신학의 모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합류의 해석학은 기존의 기독교적 전통과 형식을 고수한 채 그 안에 이질적인 어떤 것을 수용해 용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전통은 다른 전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등한 참고서일 뿐이다. 당대의 관점에서 계승되고 수용된 기독교의 전통은 다른 전통과 합류함으로써 그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적 표현으로 '두 이야기'의 합류일 뿐이지 사실상 더 많은 '이야기들'의 합류를 지향하는 개방적인 합류의 해석학은 여러 다양한 전통들과 동등한 만남을 지향한다. 바로 이 점에서 합류의 해석학은 종교간 대화의 모형으로서도 그 창조성을 평가받는다. 한마디로 합류의 해석학은 소통의 신학을 지향한다. 배타적으로 진리를 담지하는 기독교 신학이 아닌 소통의 과정에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기독교 신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4. '계시의 하부구조'와 반신학

    소통을 지향하는 지향, 그러나 무엇보다 당대의 민중사건을 해석하고 증언하며 나아가 그 사건에의 동참을 지향하는 실천의 신학, 정치신학으로서 합류의 해석학은 보다 구체적인 매개장치를 갖는다. 이른바 '계시의 하부구조'가 그것이다.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의 실천을 통해 합류한다는 합류의 해석학은 '계시의 하부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더욱 구체성을 띤다.
    두 이야기를 합류시키는 실천의 조건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까? 전통적인 신학 개념으로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계시의 하부구조'라는 말은 서남동 민중신학의 진면목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서남동은 평소 스스로 '크리스챤 맑시스트'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시대적 정황 때문에 때때로 맑스주의와 민중신학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지만(197쪽), 그의 신학적 인식은 맑스주의적 인식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오늘의 혁명ㆍ정치ㆍ해방의 신학이 맑시스트의 도전에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맑스주의와의 대화와 경쟁으로 기독교가 잃었던 활력을 되찾아 민중의 종교로 복귀하려고 한다고 말한다(18-19쪽). 그가 신학에서는 생경한 '하부구조' 개념을 서슴없이 자신의 신학적 체계 안의 중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설정한 것부터가 그 영향의 흔적이다. 단순히 용어를 차용하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은 확실히 맑스주의적 인식을 적극 수용한다.
    서남동은 두 이야기의 합류 구조를 밝히는 방법론으로 "사회경제사적 내지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조심스럽게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횡간의 의도를 읽자면 그는 분명히 맑스주의 내지는 유물론을 유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사회경제사적 방법 내지는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제안하는 대목에서 "역사적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넘어서는 교회사의 새 시대경륜"을 말함으로써 그 속내를 비치고 있다. 그는 "지배세력에 대한 민중의 제약조건들"을 분명히 밝히는 방법론으로 사회경제사적 방법을, 그리고 그렇게 해서 "민중의 역사"가 밝혀지면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집단적 영혼, 민중의 의식과 그들의 갈망들"을 밝혀내는 방법으로 문학사회학을 적용할 것을 말한다. 신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각 시대마다 다양한 해석학의 틀을 사용해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 "자기 역사와 운명의 주체가 될 민중의 정체"를 포착하는데 그와 같은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 보고 있다(48쪽). 이에 대한 좀더 분명히 밝히고 있는 대목을 인용해보자.

    "이제 정치신학(혁명ㆍ해방ㆍ민중의 주체들의 총괄적 명칭으로 사용함)이 그 해석의 틀을 사회경제사 내지 문학사회학이라고 했을 때에는 인간의 인격적 실존이 그 틀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조건이 그 틀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과 그 운명을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돋보이게 된다. 교의적 신학과 실존론적 신학이 간과한 사회적 조건들을 정치신학은 그 신학의 틀 내지는 지평으로 삼는 것이다. 기초가 상부구조를 조건짓느냐 그 역이냐, 존재가 의식을 결정짓느냐 그 역이냐, 환경적 조건이냐 그 역(유전적 소질)이냐는 문제에 대해서 인습적인 편견일수록 후항들을 대답으로 택하는 관념론에 빠지는 것이 상례다. 사회과학적인 새 발견들은 보다 전항들에게 편든다고 보겠다. 실제는 전항과 후항의 교호작용이겠지만, 인습적인 편견을 타파하려면 사회적 조건이 인간성을 조건짓는다고 하여 변증법적인 역점을 두는 것이 정치신학의 자세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조건지어지는 인간성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제 집단이다. 곧 종족, 신분, 계급, 계층, 성별, 연령적 세대, 역사적 시대, 지배-피지배의 관계, 소속문제 곧 정체의식 문제 등이 사회를 구성하고 역사를 추진시켜가는 요인들이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인체를 구성하는 무수한 세포를 문제삼느냐, 여러 기관 곧 심장, 호흡기관, 소화기관, 간장 등을 문제삼느냐의 문제에서 전통적인 신학은 세포로서의 개개 인간을 문제삼는 데 대해서 민중신학 내지 해방신학은 여러 기관을 문제삼는 것이라 하겠다."(49쪽)

    서남동은 '사회사적 해석' 내지는 '물질주의적 해석'(378쪽)을 기존 신학의 전제들을 비판하고 분석하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신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인식론으로 삼는다. 서남동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계시' 자체가 물질적 하부구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계시의 하부구조'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크로놀로지칼한 의미에서 계시의 역사적 원점 혹은 '원계시'는 {구약성서}에서는 출애굽에서 시작되는 원 이스라엘의 200여 년간의 신앙과 사회사이며,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3년간의 갈릴리 선교활동이다. {구약성서}의 경우 그 원계시의 구성요소는 유일신 야웨 신앙과 원이스라엘의 사회사이다. {신약성서}의 경우 그 원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교활동의 장인 갈릴리의 민중들이다. 원이스라엘의 사회사, 그때의 갈릴리 민중의 사회사 및 그들의 자의식이 계시를 구성하는 구성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일면은 분명히 '사회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또 되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는 '역사적 계시'이고 그것은 '물질적 계시'다. 다시 말해서 계시의 '하부구조'가 있다. 그것은 원이스라엘의 사회구조, 갈릴리 민중의 경제사다. 원계시의 매체인 택함을 받은 히브리인들의 새 공동체와 그의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은 단순히 계시의 매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계시의 구성적 요소다. 그렇기에 우리가 '역사적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계시)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복음'이다. '가난한 사람'은 복음(계시)의 구성적 요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우리가) 복음(계시)을 갖게 되는 방식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에서만 허락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을 불러일으켜 세웠고 그 가난한 민중들은 일어서서 자기네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된 일련의 사건들이 복음이요 계시다."(378-379쪽)

    이와 같은 착상에서 시작하여 서남동은 "하부구조(몸)에서 유리된 상부구조(이념)만의 전통적 신학은" "유령이요 아편"이라고 단정짓는다(379쪽). 여기서 서남동은 맑스의 종교비판 이후의 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대적 제약 탓에 '사회사적 해석'이니 '사회과학적'이니 또는 '물질주의적 해석'이니 하는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유념하고 있는 것은 맑스의 유물론적 인식이다. 서남동은 신학이 "한 시대의 사상이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은 단순히 유행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관심의 반영"(163쪽)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성실하게 신학하는 사람'으로서 '그 시대의 언어와 사상의 틀'로서 맑스주의적 인식을 수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종교비판 이후의 신학이란 맑스주의에 대립하는 반명제로서의 신학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신학을 의미한다. 그 신학은 거꾸로 전통적 신학에서 이탈하여 그에 대립하는 신학으로서 성격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래서 서남동은 인식론적으로 구별되며 진술 방법상으로 구별되는 그 신학을 '탈(脫)신학' '반(反)신학'이라 이름한다.

    "전통적 신학이 초월적ㆍ연역적이라면 이야기 신학은 귀납적 신학, 아니 반(反)신학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신학은 '지배의 신학'이다. 곧 지배(통치)의 이데올로기에 편입, 흡수되어서 지배질서를 정당화해주고 그것을 축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문자와 서적과 체계적인 신학이 그렇다. 하느님의 초월성, 전지전능, 무소부재, 그리스도의 왕권, 주권을 강조하는 내용이 다 정치적 지배구조 안에서 얻어진 상상(지배자의 언어)이며 그 고정화, 항구화를 기능한다.
    도대체 '신학'이라는 것이 성서적인 계시 이후에 생겨진 사상체계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체계가 발생한 사회학적인 '삶의 자리'는 고대 노예제사회인 그리스와 로마 사회다. 자유시민과 노예, 초월과 천속(賤俗), 물질과 정신의 형이상학적 이원론, 사회적 이중구조가 그 신학이 발생한 모태며 그렇게 유전적으로 구조적으로 생겨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지배의 신학'이다. ... 본래 성서적 계시의 삶의 자리는 노예제 사회에서 탈출한 가나안과 갈릴리 민중들-그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이야기며 그런 의미에서 반신학이다. 통치이데올로기와 지배체제와 그 문화를 비판하고 시정하려는 민중의 이야기는 반신학이다."(306쪽)

    이렇게 반신학은 전통적 신학과의 단절을 분명히 제시한다. '계시의 하부구조'를 신학의 구성적 요소로 인식하는 신학은 필연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적대적 대립 관계의 현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지배자의 편에 선 전통적 신학과 절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의 하부구조를 핵심적인 구성 요소로 하는 합류의 해석학은 탈신학이며 반신학으로서 성격을 갖고 있다.
    '두 이야기의 합류' 구상, 그리고 '계시의 하부구조'에 대한 천착이 시사하듯, 반신학은 전통적 신학과의 절연 대신에 전혀 새로운 신학적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리를 독점한 '천상의 언어'로서의 신학의 성격은 기각되고, 그 신학은 이제 낮은 자리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지상의 언어'로 탈바꿈한다. 땅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서 신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이제 전통적인 형이상학보다는 인간학 또는 사회과학과의 대화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서남동이 자신의 민중신학 방법론을 '사회경제사적 해석' 또는 '문학사회학적 해석'이라고 한 것은 이 사실을 시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은 신학 안에서 학제적 연구의 모형을 제시해준다. 실제로 민중신학은 70년대이래 한국 사회의 다양한 민중담론들과의 대화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러한 신학을 서남동이 신학적 개념으로는 '성령론적 해석'이라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소통을 지향하는 민중신학은, 마치 {신약성서}에 나오는 '성령사건'을 연상시킨다({사도행전} 2장). 여기서 말하는 '성령사건'이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언어사건', 더 정확하게는 '의사소통 사건'이다. 그것은 갈릴리 민중들의 언어를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다 알아듣게 되었다는 데 초점이 있다. 그것은 {구약성서}바벨탑 이야기가 뜻하는 것과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단일한 언어를 강요하며 오로지 저 높은 곳만을 지향하는 욕망이 의사소통 장애와 분열을 낳은 것과는 정반대로 지배체제에서 내쫓긴 민중의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넘어 소통 가능하게 한 사건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성령은 한마디로 소통의 능력을 의미한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이, 스스로 이름했듯이 성령의 해석학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체제가 민중들에게 뒤집어씌운 갖가지 굴레를 벗겨내고 민중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그 언어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민중해방의 사건을 기점으로 형성된 민중신학의 또 다른 이름이다.

    5. 신학의 해방

    민중신학은, 신학을 '천상의 언어'에서 '지상의 언어'로 탈바꿈시키고 지상의 인간들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였지만 신학이 말해 온 '초월'의 영역을 전적으로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남동의 민중신학이 말하는 '초월'은 전통적 신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서남동은 "신의 초월을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부터 미래의 초월로 환원한다"고 밝힌다(19쪽). 여기서 그가 '환원한다'고 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애초 민중의 종교였던 원시 기독교의 종말론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에게서 출발하여 후기 유대교에서 발전하고 예수에게까지 이어졌던 종말사상은 "새 질서를 기다리는 혁명적 사상"(15쪽)이었으며, 그것은 원시 기독교에서 다시 예수 재림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서남동은 이 종말사상이 기독교 역사에서 두 가지 형태로 정형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역사의 궁극적인 종말인 '신국'(神國)과 준 궁극적인 '천년왕국'으로 정형화"되었다는 것이다(15쪽). 이렇게 분리 정형화되면서 신국과 천년왕국은 각기 다른 신앙을 표상하게 된다. 서남동은 이렇게 지적한다.

    "신국은 보다 더 개인적ㆍ내면적인 신앙내용이고, 천년왕국은 보다 더 사회적ㆍ외면적인 신앙내용이다. 그렇기에 교회사에 있어서 혁명신앙의 동력이 된 것은 신국 상징이 아니라 당연히 천년왕국 상징이었다. 천년왕국 신앙은 주후 1세기에는 정통교리였다는 점, 그리고 이중적인 모델이 변질되어서 일방적인 것이 될 때에는 그 본래적인 깊이도 박력도 상실한다는 것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특히 현대 신학에서 역사의 준궁극적인 종말인 천년왕국의 사회적 극이 탈락된 채로 역사의 궁극적인 종말인 신국의 개인적ㆍ내면적인 극(極)만이 논의될 때 종말신앙이 지니고 있는 혁명적인 활력은 거세되고 만다."(15-16쪽)

    역사적으로 교회가 국가의 공인을 받고 제도화면서 신국 표상은 더 이상 종말론의 혁명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곧 신국의 이상을 구현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국은 개인적이거나 내면적인 것, 또는 현세와 상관없는 타계적인 신앙을 표상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반면에 종말론의 혁명적 원동력은 천년왕국 표상에만 남게 된다. 교회가 국가의 공인을 받고 기독교가 부자의 종교로 전화되었을 때, 가난하고 눌린 사람들의 종교는 소종파와 이단으로 전락했다. 이와 더불어 원시기독교 종말론의 혁명적 원동력은 부자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신국에서보다는 가난한 사람들과 민중의 종교인 이단종파에서 내세우는 천년왕국의 표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남동이 신의 초월을 "미래의 초월로 환원"한다고 한 것은, 크게 보면 종말론 신앙의 회복을 말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천년왕국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계승한다는 뜻을 지닌다. 바로 이 점에서, 계시의 하부구조를 강조한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계속되는 일관성을 지닌다.
    그러나 서남동은 궁극적 차원을 의미하는 신국 표상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종말론적 성격을 상실한 신국 표상을 거부할 뿐, 본래 종말론적 지평에서 궁극적 차원의 의미를 지닌 신국 표상을 회복하려고 한다. 서남동은 민중신학과 일반 민중사관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이냐, 또는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구원과 일반 사회혁명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이냐 하는 의문에 대해 신국(하느님 나라)과 천년왕국(메시아 왕국)의 관계 문제로 이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다.

    "봉건주의 체제이든, 자본주의 체제이든, 사회주의 체제이든 그 어떤 체제도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동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체제는 더 가깝고, 어떤 체제는 덜 가깝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메시아 왕국'을 기점으로 한다면 사회경제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체제가 다소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민주사회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모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죠. 그것을 교조화시킬 수는 없으니까요."(196쪽)

    사실 이 진술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다. 서남동의 논조는 전반적으로 '천년왕국'(이 인용문에서 '메시아 왕국'으로 표현한)적 관점을 강조한다. 민중신학은 "지금 시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197쪽) 이 답변에서도 역시 사회주의 체제가 메시아 왕국에 더 가깝다고 말함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제시하고 있고 그 관점에서는 모든 역사적 성취가 그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때 '하느님 나라'는 물론 기독교 역사에서 종말론적 의미를 상실해버린 그 신국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종말론적 지평에서 궁극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인 제한성을 지니게 된다. 궁극적 차원과 역사 안에서의 성취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단절'이 있다. 아니, 거꾸로 말하면 그 '거리'가 있고 '단절'이 있기에 신국의 표상은 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항상 역사 안에서의 성취를 '초월'하는 궁극적 지평이다. 서남동은 그것을 "앞서가시는 하느님"이라는 말로도 표현했다.(47쪽)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 또는 '하느님 나라'는 역사 안에서의 그 어떤 성취이든 '교조화'하는 것을 막아내는 근거로써 역할 한다. 결국 신학이 말하는 궁극적 지평으로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끊임없는 개방성과 가능성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무한히 열린 가능성의 세계를 말한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이 계시의 하부구조를 말한 것은 초월의 지평을 유폐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민중이 자기 스스로를 해방시켜 나가는 그 초월적 능력을 구체적인 역사적 계기를 통해 인식해야 할 필요성에서 주목한 것이다. 순간순간 단절의 마디를 지닌 그 역사적 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을 때, 어느 순간 특정한 역사적 성취가 절대화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진리를 독점한 듯이 도그마를 강요했던 기독교 신학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 주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했던 것과 같은 역사의 완성 또한 그와 동일한 오류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계시의 하부구조는 신학이 말하는 초월의 지평을 유폐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초월의 조건과 가능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이와 같이 역사 피안의 궁극적 지평과 역사 차안의 구체적 지평의 절묘한 긴장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진정으로 역동적이며 개방적인 신학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민중신학은 지배체제와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던 신학을 해방시켜 '계시'의 원자리로 되돌리고 있다. 오늘 '민중'의 시대가 갔느니 말았느니 하는 시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신학으로서 진가를 지닐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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