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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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7회] 한국 보수교회의 정치참여 (박득훈)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4301, 2004.12.07 11:30:06
  • 선진화와 중도통합, 기독교NGO의 목표로 적절한가?
    <기독교사회책임>의 정치참여를 평가한다

    박득훈(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 언덕교회 담임목사)

    최근 2년 어간 동안 한국보수교회가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보수교회의 지도층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말 효순·미선 사건으로 촉발된 SOFA개정 촉구 촛불집회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강한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보수교회지도층 인사들은 한기총을 중심으로 해서 2003년 1월부터 북한 김정일 정권을 강력히 규탄하고 미국 부시 정권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수한 구국기도회라며 한국사회의 정치적 보수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올해 10월 4일에 이르러선 노골적으로 반핵반김국민협의회 측과 손을 잡고 구국기도회와 국가보안법 수호대회를 나란히 주최하였다. 또한 이들 한국교회보수세력은 로잔언약을 신학적 기초로 내세우면서 한국기독당을 창당하여 정치권진입을 시도했다. 기대와는 달리 22만8천여표(1.1%) 밖에는 득표하지 못해 정당이 자동해산되는 수모를 겪었다.
    한편 지난 11월 22일에는 언론의 깊은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기독교NGO인 <기독교사회책임> 준비위가 출범되었다. 그 주축세력은 역시 로잔언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국보수교회이다. 하지만 한기총 중심의 정치참여운동과는 달리 대체적으로 그 동안 존경과 신망을 받아온 교계 명망가들과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가 손을 잡았다. 한기총 중심의 정치참여에는 극히 소수 대형교회와 전쟁세대 외에는 별 관심을 보여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여파는 사실상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독교사회책임>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한국개신교회와 정치의 상호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에 <기독교사회책임>이 주장하는 바를 분석하고 평가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I. <기독교사회책임>의 주장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사회책임>은 그 단체 명에도 잘 나타난 것처럼 로잔언약의 제 5항인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신학적 근거로 삼고 있다. 로잔언약은 과거 복음주의 기독교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등한시 한 것에 대한 참회를 담고 있다. 로잔언약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간 사회 전체에 정의와 화해를 실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형태의 소외, 억압 그리고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함의하기 때문에 악과 불의가 어디에 존재하든지 이를 탄핵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됨을 주장한다. 그 궁극적 기준은 하나님나라의 정의이다. 하지만 로잔언약은 '모든 종류' 혹은 '모든 형태'라는 포괄적 단어를 사용할 뿐 소외, 억압 그리고 차별에 대한 사회과학적 정의를 내리지는 않는다. 정치적 해방과 하나님나라의 정의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가 결합된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기독교사회책임>은 로잔언약을 새롭게 수용하면서 한국교회가 일제시대는 민족운동으로 7,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으로 민족의 희망이 되어 왔지만 요즘은 역사참여의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참회의 심정을 토로한다. 로잔언약의 정신을 한국사회현실에 적용하는 시도로 한국사회를 분석·평가하고 그에 근거하여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기독교사회책임>이 태동하기 직전 대부분의 보수언론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하게 될 <자유주의 연대>와 묶어서 <기독교사회책임>을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으로 같이 분류하였다. <기독교사회책임>측은 출범기자회견 자리와 공식 홈페이지에선 이를 부인하고 '중도통합'으로 자신의 노선을 정리했다. 하지만 김진홍 목사가 그 후에도 '뉴라이트'라는 성격규정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사회책임>의 공식문건들을 살펴보면 그 실질적인 주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 <기독교사회책임>은 현재의 시국을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가?

    1. 시국 인식
    <기독교사회책임>은 그 출범의 현실적 당위성을 한국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있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 위기의 본질을 4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 잠재성장력이 정치논리와 관치, 기형적 재벌구조와 전투적 노조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기업의 투자회피와 노동자의 이기주의로 집약되는 한국병을 앓고 있다. 중산층의 몰락, 절대빈곤층의 급증, 대규모 청년실업이 그 결과다.
    둘째, 국론분열과 좌우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하다. 이는 정부가 국민통합과 민생안정을 염원하는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그리고 정략적으로 개혁과제를 밀어붙인 결과다.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강경진보세력의 등장과 함께 정부가 좌향좌하고 있다는 인상을 보이면서 국민들은 국가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불안 가운데 우향우를 하게 되었다.
    셋째, 지나친 평등주의와 지나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나라 살리는 개혁이 지장 받아 후진국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넷째, 정부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안보를 위한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가에 국민들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돈독한 한미관계, 북한의 인권문제 그리고 탈북자의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야당 역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절망을 극복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시민단체도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정부를 맹종하는 그룹과 극단적 비판만 일삼는 그룹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렇게 어디서도 사회통합과 합리적 대안모색의 노력을 찾을 수 없다는 시국인식을 기초로 해 <기독교사회책임>은 다음과 같이 당면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2. 당면목표
    <기독교사회책임>의 핵심적 운동목표는 한국의 선진화 즉 선진국 대열 진입이다. <기독교사회책임>의 공식자료에선 선진국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하게 정의하지 않고 있다. 다만 단순히 물량주의적 사회로서의 선진국이 아니라 기독교정신에 합당한 선진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일차적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만 경제성장, 사회적 형평, 환경보존과 절제, 정신적 성숙, 영적 충만 그리고 나눔운동의 활성화가 다같이 충족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를 자유주의 연대의 핵심인물인 신지호 업코리아 논설위원의 선진화 개념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신지호는 '선진화는 산업화와 민주화 양 흐름의 장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단점을 극복한 노선'이라고 정의한다. 이 점에서 <기독교사회책임>의 서경석 목사와 권영준 교수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나라당의 박세일 의원과도 맥이 통한다.
    신지호는 선진화의 구체적 특징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시장주도형 경제체제로서의 자유주의이다. 즉 산업화시대의 중상주의적 경제발전전략도 배격하고 분배와 복지를 위한 정부개입을 선호하는 민주화 세력과도 거리를 둔다. 청부를 권장하고 빈부격차가 아닌 빈곤해소를 추구한다. 둘째, 절차적 민주주의를 뛰어 넘어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참여정부의 포퓰리즘의 함정에서 벗어나 전문가정신을 존중하는 성찰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셋째, 관용과 상생의 정신을 발휘하는 문화다원주의와 질서의식을 갖춘다. 이 3대 축을 관통하는 사상은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되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와의 조화를 도모하는 공동체 자유주의(communitarian liberalism)이다. 신지호는 흥미롭게도 이를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선진화는 보수와 진보, 좌와 우를 불문하고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배격하는 실사구시의 중도개혁노선이다'. 이는 국민통합의 대도이며 기존의 1차원적 보수-진보 구도로는 자리매김 될 수 없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뛰어넘는 3차원적 공간개념이다.
    그러면 <기독교사회책임>의 공식입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핵심목표인 선진화를 이룩하기 위한 첫 번째 당면목표는 역시 신지호와 박세일 의원이 강조한 것처럼 국민의 중도통합이다. 좌우 양극화와 편가르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경쟁력 강화와 사회적 형평, 환경보존과 개발의 조화를 추구하고, 자주적 세계화와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한다. 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한다면 <기독교사회책임>은 결국 반노(反盧) 운동도 친노(親盧) 운동도 아니다. 참여정부가 잘하면 밀어주고 잘못하면 비판할 것이다. 그 동안 <기독교사회책임>의 주도세력이 친한나라당의 보수성향을 보였다면 이는 현 정부가 지나치게 좌로 치우쳤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보수여론을 등에 업고 보수강경으로 회귀하면 반한나라당으로 비쳐질 가능성도 크다.
    둘째, 경제위기 극복이다. 과도한 평등주의와 포퓰리즘적 문제해결을 거부하고 창의와 자율이 보장되는 공정한 자유시장경제를 적극 지지한다. 부패와 특권의 척결을 통한 경쟁력 강화, 투명한 경영과 노동자의 이기심 억제를 통한 기업의 희망 창출 그리고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나눔운동을 통한 민생문제 해결에 힘쓴다.
    셋째, 한반도의 평화와 사회 안정을 추구한다. 우호적 한미관계와 평화적 남북관계를 동시에 추구하며 남북협력문제와 북의 인권문제를 함께 중시하고 안보와 평화가 분리하지 않는다. 아울러 법치와 질서, 가정중시와 노인공경, 인터넷 언어폭력 척결을 통한 자유로운 의사발표를 통해 건강한 공동체 회복에 앞장선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머물지 않고 밝은 미래를 위한 비전제시에 총력을 기울인다. <기독교사회책임>은 이러한 당면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전략과 과제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3. 행동전략 및 과제
    1) 예언자의 자세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중도통합과 개혁을 위한 바른 목소리를 낸다. 특히 한국교회가 NCC-한기총으로 나뉘어져 사회통합에 기여하기 보단 양극화에 기여했던 병폐를 해소하고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합일을 추구한다.
    2) 솔선수범하여 생활개혁에 나선다. 부패, 특권의 척결과 정직운동, 자원절약과 알뜰소비, 재활용 등의 절제운동, 가난한 이웃과 가난한 나라와 및 북한동포 돕기 등 국내외적 나눔운동에 적극 나선다.
    3) 목회자와 평신도, 기독청년학생을 위한 사회교육활동을 적극 전개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인적역량을 양성한다.
    4) 사회정의실현과 사회봉사를 위한 기독청년운동과 기독학생운동을 새롭게 모색한다.
    5) 지역사회에서의 초교파적 사회봉사활동을 통한 한국교회연합을 추구한다.
    6) 앞서 간 기독교사회운동의 미흡한 점을 극복한다. 즉 목회자보다 여성, 청년, 일반 전문인 등 평신도가 중심이 되도록, 서울보다 지방이 활발하도록,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함께 열심을 내도록 한다. 개인과 단체가 함께 회원이 되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영성에 대한 관심 모두를 소중히 여긴다.
    7) 정권창출을 목표를 하지 않지만 <기독교사회책임>운동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선진국을 지향하는 세력이 성장하여 선진국을 지향하는 정권이 자연스럽게 탄생할 것을 기대한다.


    II. <기독교사회책임>에 대한 평가
    1. 긍정적인 면
    많이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복음주의적 개신교회의 주요인사들이 로잔언약을 공적으로 수용하고 적극 지지함으로써 교회와 기독인에게 사회참여의 사명이 있다는 점을 천명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더구나 사회참여가 사회적 약자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단순한 사회봉사뿐 아니라 시민운동에 참여해서 정치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그에 따라 기존체제를 바꿔나가는 정치적 행동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점도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 동안 보수교회 안에서 이러한 사명의 당위성을 확신시키는 것조차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열심히 성경적·신학적 근거를 제시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 정서적 장벽이 무척 두터웠다. 이제 그 정서적 장벽을 허무는 것이 한결 수월해 졌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성경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치참여의 비전과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남은 과제가 되었다.
    2. 부정적인 면
    1) 반성과 참회가 결여되어 있다
    우선 과거 보수교회가 사회참여에 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국가를 위한 순수한 기도회 혹은 정부에 대한 복종이라는 미명하에 실질적으로 독재정권을 지지했던 것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준비위 출범 선언문을 보면 한국교회는 7,80년대는 민주화운동으로 민족의 희망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는 대부분 진보진영의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기독교사회책임> 인사들 중에도 일부 민주화 운동 대열에 참여했던 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한국교회의 대부분이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이런 식으로 슬쩍 넘어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직한 태도라고 볼 수가 없다. 한국교회는 사회참여의 최전선에 나서기 전에 먼저 국민 앞에서 과거에 대한 진정한 참회를 해야 한다.
    이는 정권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략적 과거청산과는 거리가 멀다. 그야말로 자발적이고 순수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한국교회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독재에 저항할 용기가 없어서 성경과 정치현실을 왜곡시킨 부끄러운 과거를 통절히 참회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고 또 다시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형태로 정치현실과 성경을 왜곡하는 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이 이런 공적인 고백과 참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로 덥석 사회참여에 나선다면 어떻게 일반 국민들이 그 진정성을 인정하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는 교회중심그룹이 반독재투쟁을 두려워하니 같이 침묵하다가 지금은 바로 그들이 세상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니 그대도 같이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다면 어떤 대답을 줄 수 있겠는가?
    2) 선진화, 신학적 정당성 확보 어렵다
    선진화는 기독교NGO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로서 그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물론 선진화가 물량주의적인 선진국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형평, 환경보존과 절제, 나눔운동, 정신적 성숙, 영적 충만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출범선언문은 미묘하게 우선 순위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잘사는 나라가 되지 않고서는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없다'. 이는 성장이 먼저고 분배가 나중이라는 산업화세력의 논리와 맥이 통한다. 여기서 많은 경제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성장과 분배를 똑 같이 중시한다고 해서 경제가 절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경제적으로 매우 이기적인 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장에 우선권을 둘 때, 대체적으로 보다 더 빨리 총량적인 면에서 경제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문제는 성장을 우선 시하면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미국과 영국경제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뉴라이트운동이 빈부격차가 아닌 빈곤의 해소를 목표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연 기독인은 그런 세상을 비전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총체적 성장을 위해 분배를 희생시키면 절대적인 수준에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향상될 수 있을지 모르나 빈부격차가 어느 수준을 넘어 더 심화되면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진 사람들은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객관적인 조건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놓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품지 말라고 하거나 그래도 떳떳하게 살라고 강요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정의론의 대가인 존 롤즈는 정당화할 수 있는 시기심(justifiable envy)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선진화는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전제로 하고 있는 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물론 나눔의 정신과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은 최대한 국가의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더 옳고 바람직하다. 사회적 약자를 단순한 구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하여 기본권을 청구할 수 있는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셨다(렘 5:28; 사 10:2). 단 사회복지제도가 지나치게 방만해지면 서구복지국가가 경험한 것처럼 개인의 자발적 노력을 쇠퇴시키고 의존성을 높이는 부작용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이를 걱정할 단계가 아직은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지출이 GDP 대비 10%수준에 있는 데, 과거 선진국들이 1만불 소득이었을 때 그 비율은 15%였다.
    더 나아가 권영준 교수가 희망하는 것처럼 현재의 세계화 구조에서 한국이 월드컵 4강에서 경제 4강으로 성장하는 것이 신앙적 입장에서 자랑스러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책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는 강대국들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경제적 성장을 달성한 다음 사다리를 걷어참으로 다른 후발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불공정한 구조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경제구조를 좀더 정의로운 구조로 바꿔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이미 경제총량적인 면에서 세계 12권에 진입한 우리만 경쟁을 뚫고 선진국으로 진입하겠다는 것은 기독교가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걸맞지 않는다. 땅 끝을 하나님나라 선교의 지평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정의로운 경제구조를 추구하고 그 구조가운데 성실하게 노력하는 나라는 가능한 한 고루 잘 사는 세상을 꿈꾸고 그 방향으로 정진해야 한다.
    3) 중도통합, 모호하고 함량미달이다
    중도통합의 개념이 매우 모호할 뿐 아니라 자기포장(包藏)과 오도(誤導)의 여지가 있으며 기독교NGO의 목표로서의 정당성을 갖기가 어렵다. 우선 <기독교사회책임> 준비위 출범선언서에 설명되어 있는 중도통합의 의미는 무책임하다고 할 정도로 모호한 개념이다. 현실 사회와 정치에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반된 가치와 개념들을 짝지어 동등한 위치에 놓고 함께 추구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떤 기준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정치현장에서 좌우로 스펙트럼이 나뉘는 것도 바로 현실적으로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가치들 사이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출범기자회견 자리에서 기자들은 <기독교사회책임>의 정체성을 보다 정확히 알고 싶어 4대 개혁입법에 대한 입장, 참여정부를 평가하는 기준 등에 관한 구체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기독교사회책임>측은 대답을 유보했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진보와 보수라는 고정된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물론 내부조율이 충분히 안 되어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현장을 바꾸겠다는 책임의식을 지닌 단체를 출범시키는 중요한 마당에 이렇게 모호한 선언과 입장을 제시하는 것은 책임있는 자세로 보이지 않는다.
    중도통합이란 말은 책상에 앉아서 듣기에는 매우 좋은 말이다. 정치현실의 역학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인들의 마음을 사기에도 좋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모두 아우른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가? 이념의 양극화를 피해서 좋고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어서 좋지 않은가? 그러나 상반된 가치가 정치현실에서 서로 충돌하게 될 때 우선 순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정하느냐의 문제는 막연한 중도통합이라는 개념 만으론 결코 해결이 될 수가 없다. 제 삼의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의 성격에 따라 그 노선의 이념적 자리매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 기준을 분명히 내세우지 않는다면 중도통합이란 개념은 결국 기득권에 집착한 자의적 판단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든지 아니면 은밀한 이념이나 가치를 포장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출범기자회견에서 서경석 목사가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현재 한국정치의 지형이 좌로 이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국인식이 보수적으로 보인다고 하니 더 그러하다. 시국관과 관련해서 <기독교사회책임>측은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보수진영과 어떻게 다른지 그들은 충분히 증명하지 못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역시 중도통합 노선을 제창하는 박세일 의원의 설명은 좀더 명료하다. 하지만 그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포장과 오도의 과실을 범하고 만다. 그 또한 중도통합이란 좌 ·우를 존중하면서도 그 가치를 상대화함으로써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둘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도통합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그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가치라고 칭한다. 즉 보수적 독재이든 진보적 독재이든 독재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의 상반된 가치들은 a) 나라의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b) 나라의 크기에 따라, c) 다루는 정책과제에 따라, d) 그 나라가 처하여 있는 시대의 문명사적 발전단계에 따라, d) 혹은 국민들의 의식과 문화 전통에 따라 적절하게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이런 기준에 의거해 결합된 결과가 모두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박세일 교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만 변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위의 정황에 따라 어떤 결합이 이루어지던지 그 결합은 일정한 성격을 띌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어서 박세일 의원이 든 결합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경제발전단계나 나라의 크기와 관계없이 어는 경우든 20세기 산업화 시대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는 국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시장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세계화가 경제적으로 약한 나라의 시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 있는 말이다. 세계화가 심화되면 경제력이 약한 나라일수록 무한경쟁을 버텨내지 못하고 더 추락할 가능성이 많고 그 나라의 가난한 노동자들과 서민은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국가에 있는 데 국가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고통을 외면하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박세일 의원이 절대적 가치로 내세운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이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박세일 의원이 말하는 중도통합의 이념적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박세일 의원이 이해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란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소극적 자유 즉 '타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서 강압 당하지 않는 상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소극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한 경제적 빈곤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법적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만 있으며 됐지 어느 아파트 혹은 허름한 반지하 빌라에 마저 입주할 돈이 없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철학적으로 보수 혹은 우파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다. 그러나 진보일수록 소위 적극적 자유 즉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제로 성취하거나 얻어낼 수 있는 경제적 힘을 자유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아무리 소극적 자유가 넉넉하다고 해도 경제적 힘이 없어 그 자유를 사용할 수 없다면 그에게 그 자유는 실질적 가치가 별로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박세일 의원은 중도통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좌·우의 가치를 상대화하고 초월적인 입장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도달한 입장은 우의 중요한 한 가치만을 절대화하고 그 외 모든 것은 상대화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편향이 되고 만 것이다. 중도통합 노선을 택하면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궁극적인 면에서 주관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순간 순간 결정하던지 아니면 좌-우의 넓은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을 택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사회책임>은 이 점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좀더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자니 중도통합이 아니라 보수라는 공격을 받을 것이 우려되고 두루뭉실 넘어가자니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 염려되는 것이다.
    결국 중도통합이라는 개념 그 자체 때문에 다른 입장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다거나 중도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입장이 통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객관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언어 상 호감이 갈 뿐이요 좌우의 다른 입장들과 평등한 입장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사회책임>이나 박세일 의원이 제시한 중도통합이란 개념은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기준으로선 함량미달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NGO는 박세일 의원이 독재를 거부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제시했듯이 어떤 가치에 최고의 우선권을 둘 것인지를 결단하고 그를 중심으로 입장을 정립해나가야 한다. 필자는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사회적 약자의 총체적 권리를 최우선적으로 보호할 것을 명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기독교NGO의 중심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사 1:16, 17). 그리고 그 정의란 개념으로 자유, 평등, 공동체성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를 정치철학적으로 고민해야 하고 그렇게 결합된 가치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정치경제제도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런 성찰을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약자의 신음소리에 귀기울여 듣고 그들의 절규에 응답하는 실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맺음말
    <기독교사회책임>이 로잔언약에 충실하고자 새로운 기독교NGO를 결성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를 계기로 과거 사회참여를 등한시했던 교회의 과오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참회운동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울러 선진화와 중도통합이라는 슬로건이 기독교NGO운동의 목표로는 적합치 않다는 점을 모두 깨달았으면 한다.
    민주사회에서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미국의 경우에도 지난 대선에서 국민이 거의 정확히 양분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이 미국의 경쟁력을 잠식하거나 나라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국론이 양분되는 것 자체가 결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진영들이 치열하면서도 열린 자세로 대화와 토론에 임함으로써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그래도 결판이 안 나면 민주적 투표를 통해 결론을 맺고 거기에 승복할 줄 아는 성숙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한국의 경우 미국보다 양 진영의 이념적 간극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새로운 노선과 입장을 내놓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 될 일이다. 단순히 다른 입장들이 극단적 대립을 하고 있으니 피하고 중도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인 주장이 되질 못한다.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입장 중에서 한 쪽이 더 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사회책임>이 표방하는 중도통합을 포함해 지금까지 제시된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이 그 기준에 가장 근접해있느냐이다. 기독인들 사이에 하나님나라의 정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이 더 치열하게 일어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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