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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4회] 문화선교와 기독교 문화운동 [카테고리]
  • 최형묵
    조회 수: 3240, 2005.09.02 01:58:01
  • 문화 선교와 기독교 문화운동

    정혁현(기독교연상문화연구소 케노시스 대표 / 한살림교회 목사)


    들어가는 글
    한국 기독교는 그 선교 초기부터 서구문화의 일부로서 그 근대적 충격과 함께 수용되었다. 특히 한국에 전래된 개신교는 의료, 교육 등 민중의 의식을 근대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을 그 선교의 바탕으로 삼았다. 따라서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 보다 한국에서 기독교의 선교는 그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선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선교’라는 문제가 새삼스럽게 제기되는 상황은 이와 다른 맥락에 있다. ‘문화선교’의 문제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부터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한 한국의 자본주의적 상황과 이에 따르는 의식과 제도 및 관습의 급격한 변화와 맞물려있다. 특별히 이러한 변화는 한국 기독교에 성장의 정체와 젊은층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이탈과 같은 위기의 양상을 띠고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선교’는 그간 한국교회의 초고속 성장을 가능하게 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지키기 위한 수세적인 실천인 동시에, 새롭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모색의 일환으로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에서 ‘문화 선교’라는 개념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사회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후기 또는 탈산업사회적 경향에 대한 기독교의 다양한 대응 양상을 포괄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문화 선교’라는 개념은 일종의 기독교적 유행어로서 아직 엄밀한 신학적 검토를 거치지 못한 채 사용되고 있다. 이 글은 ‘문화선교’라는 개념의 내용과 실제를 검토하면서 그것이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기독교의 적절한 대응을 지시하는 데 타당한 용어인지를 물을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 기독교가 문화적 대응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사회적 상황의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문화선교’라는 개념을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시대의 주요 개념들은 결코 사전적인 의미로만 소통되지 않는다. 개념의 사전적인 의미는 주어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섬세하게 변용되면서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를 반영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개념 그 자체가 다양한 집단들의 갈등과 타협의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선교’라는 개념을 검토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다양한 기독교적 대응 양상들이 갖는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이 글의 진정한 목적이다. 특히 유행하는 개념들은 주어진 사회 현상을 이해 혹은 수용 가능한 것으로 가공하기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어떤 용어는 그것을 선호하는 집단들의 바람직한 변화를 이끄는 반면, 다른 경우에는 전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나는 ‘문화선교’라는 개념이 사회적 변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대응에 여러 가지 혼선을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1. 이른바 ‘문화 시대’라는 상황
    한국사회에서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은 대전환의 시기였다. 1980년대가 10.26 사건을 계기로 노출된 사회적 모순들을 ‘종말론적’으로 변혁 80년 대 한국 사회 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 중의 하나는 사회적 모순의 완전한 지양을 목표로 하는 종말론적 성격이다. 이는 운동의 이념을 무엇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의존했던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려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한다면,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상황은 몇 가지 요인으로 인해 급격히 변화된다. 80년대 말부터 극적으로 전개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90년 대 초반 이른바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민주화 요구가 어느 정도 해소된 상황이 그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의 문화적 변화에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탈산업사회적 성격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 탈 또는 후기 산업사회적 환경의 전개
    1990년 대 초반 한국사회를 이끄는 주요 이슈가 ‘세계화’와 ‘정보화’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이러한 이슈들은 국가 차원에서 한국사회를 소위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이행시키기 위한 선전의 일환으로 강조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국가적인 실천은 이미 경제의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던 모종의 이행을 정치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다니엘 벨은 경제 발전의 단계 모델을 제시하면서 전산업사회는 농업이, 산업사회는 제조업이 지배적이라면, 세 번째 단계에서는 서비스가 지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니엘 벨, 정보화 사회의 사회적 구조, 이동만 옮김, 한울, 2002의 제1장을 참조하라.
    탈산업사회를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회적 생산에서 서비스업의 생산이 제조업의 비중을 능가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벨에 의하면 탈산업사회의 추동력은 지식과 정보 원리로서, 이는 주요 노동의 종류를 변화시키고, 직업구조를 변화 시키며, 주요 구성 계층의 변화를 야기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서 과거의 것은 ‘육체노동’이며, 새로운 것은 ‘지식노동’이다. 또한 벨은 이러한 이행의 과정에서 “한편의 경제적 효율성과 신중함이라는 프로테스탄트적 가치가 다른 한 편의 물질적 풍요로움에 의해 침식당하는, 탈산업주의 하에서의 경제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 사이의 구조적 탈구” 존 앨런, 탈산업주의와 포스트 포드주의, 스튜어트 홀 편, 모더니티의 미래, 전효관 긴수진 외 옮김, 현실문화연구, 1999, 223쪽.
    를 말한다. 이는 한국 기독교 일반이 탈산업사회적 현상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제공한다.
    한편 탈산업사회적 변화의 양상은 정보와 서비스의 증대라는 측면 외에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포드주의가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생산하는 체제라면 포스트포드주의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용어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컴퓨터로 제어되는 생산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소비 욕구를 포함하여 사회의 주요 부문이 탈중심화되고 다원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사회에서는 88올림픽을 전후하여 이와 같은 탈산업사회적 경향이 문화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강남의 대단위 고급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시작된 소위 ‘오렌지 문화’ 등의 소비자본주의적 문화 행태는 1990년 대 초반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목전에 두었다는 장밋빛 환상과 함께 전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경향에 대한 인문사회학계의 반응이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으로 나타났다면, 기독교에서는 종교다원주의 논쟁으로 가시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탈산업사회 양상은 IMF 관리체제에서 이루어진 사회 경제적 구조조정으로 거의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IMF 관리체제는 폭력적인 양상을 띤 탈산업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결코 소비자본주의의 후퇴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의 유연화는 산업생산의 노동력을 대거 서비스업이나 비노동의 상황으로 이동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탈산업사회적 성격을 확립시켰던 것이다.
    탈산업사회는 소비주도형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에서 기업의 최대 관심은 생산의 효율성에서 소비자들의 기호라는 유동적인 실체로 넘어간다. 한편 소비 사회에서 상품은 단순히 욕구 충족의 대상을 넘어 ‘의미를 만드는’ 기호로서 문화적으로 소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문화는 그 자체로 문화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산업적 체계이기도 하지만, 탈산업사회적 소비 사회의 산업 생산 전반에 다양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2) 대중문화의 대두
    신세대의 등장은 곧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난 세대들의 등장이기도 하였다. 대중문화는 근원적으로 문화 생산물을 대량으로 복제, 유통, 소비하는 기술과 사회 체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대량문화(mass culture)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인쇄서적이 대량생산된 최초의 문화생산물이라 할 수 있지만, 근대적인 대중교육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소수 지식인의 몫이었을 뿐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대중문화의 맹아였던 문화 생산물은 신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되는 문화생산물은 전자미디어에 의해 가능하였다. 특히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간에 비치되어 시각과 청각 이미지를 의사소통의 주요수단으로 사용하는 텔레비전의 대중적 보급이야말로 본격적인 대중문화 시대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대중문화”라는 표현은 이미지 매체인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하는 시대가 대중문화의 중요 양상 중의 하나인 탈근대적 성격을 꽃 피우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전자 매체는 근대적인 의미의 시공간을 해체하여 ‘지구화’ 혹은 ‘세계화’라는 개념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자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고 나서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대중문화를 ‘대량문화’ 표현하는 배경에는 단지 양적인 고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표현에는 문화의 개념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대중문화를 폄하하는 사고가 깔려있다. 대중문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태도는 부르주아 고급문화의 지지자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의 결과로 평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대중문화의 발흥은 자본주의의 발흥을 반영하는 동시에 재생산한다. 문화의 대중화는 거대한 집단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외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문화적 생산과 소비를 촉발시킴으로써 이윤율 저하 경향을 제어하는 기능을 한다. 테어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2 참조. 또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중문화 비판은 벤 애거, 비판이론으로서의 문화연구, 김해식 옮김, 옥토, 1996을 참조할 것. 이 책은 좌파의 문화연구 흐름을 검토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재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성과를 담고 있다. 그러나 번역은 많은 문제가 있다. 특히 이 팩에서 ‘민중문화’라고 번역하는 ‘popular culture'라는 용어는 ’대중문화‘로 번역되어야 한다.

    대중문화가 대량으로 공급되는 싸구려 문화라는 오명을 벗고,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경합하는 공간으로 진지하게 취급되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는 기독교 문화운동이 문화적 건전성을 모토로 예방주사 예방주사 이론은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 교육적 용어로서 교육의 목적을 미디어 소비자들에게 미디어의 오염을 막을 항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삼는다. 이는 일단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대중문화를 ‘오염원’으로 바라봄으로써 대중문화에 비판적인 특정한 입장을 드러낸다.
    유형의 운동에 국한되는 상황을 극복하고 보다 적절하고 적극적인 문화적 대응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사항이다. 로버트 보콕에 따르면 ‘문화’라는 개념은 크게 다섯 가지 서로 다른 이해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로버트 보콕, 현대사회의 문화적 형성, 스튜어트 홀 외 지음, 현대성과 현대문화, 전효관, 김수진, 박병영 옮김. 현실문화연구, 1996, 337-340쪽.
    우선 가장 원시적인 의미의 문화는 토지를 경작하고 곡식, 가축을 기르는 인간의 행위를 지칭한다. 두 번째 개념은 ‘경작’이라는 행위가 인간의 정신에 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이 때 문화는 대개 세련된 교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문화는 인간의 고상한 정신, 곧 여러 인문학과 음악, 문학, 회화, 조각, 연극, 영화 등 예술이나 이를 감상하는 능력을 지칭한다. 이러한 문화 개념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고수한다. 문화에 대한 세 번째 이해 방식은 고급문화/대중문화라는 이항대립을 문명과 야만으로 확대시킨다. 특별히 서구의 제국주의 시대에 발생하여 오늘날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이해 방식은 서구를 문명으로 비서구를 야만으로 본다. 이런 도식에서 문화화는 서구화와 동일시된다. 네 번째 이해 방식은 인류학적 연구화 함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는 어떤 면에서 가장 원시적인 의미의 문화라는 개념을 회복하는 상대주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즉 인간과 사회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나 문화가 존재하며, 그 우열을 따질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는 태도이다. 여기에서 문화는 각각의 집단에 ‘공유된 가치와 믿음, 그리고 독특한 생활방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 18세기 독일의 사상가 헤르더에 의해 전개된 이와 같은 문화의 이해를 통해 다양한 차이를 갖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각각 특정한 관점을 가진 접근이 필요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섯 번째 이해 방식은 문화의 상징적 차원에 주목하여 ‘문화가 무엇인가’라는 정태적 관심에서 벗어나 ‘문화가 무엇을 하는가’라는 동태적 관심을 환기한다. 인간의 행위는 의미를 벗어나서는 사회적인 실천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사회적 행위 자체가 상징적인 차원을 가지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문화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 방식에서 문화적 실천은 의미생산의 실천, 즉, ‘의미를 만들기 위해 기호와 상징을 이용하는 실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서태지만 의미를 만드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환호하는 대중들 역시 실천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서태지 현상은 서태지라는 개인과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에게 환호하는 다양한 개인들과 집단들의 ‘의미화하는 실천’ (signifying practice), 나아가 이를 매개로 다양하게 개입하는 여러 집단들의 교섭의 총체가 된다. 또한 문화운동은 이러한 문화현상에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실천행위가 될 것이다.
    이러한 문화 이해에 입각하면, 대중문화/고급문화라는 이분법은 의미를 잃게 된다. 대중문화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며, 또한 문화 산업에 의해 대량생산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는 사회 집단들 중 어느 한 부문이 통제할 수 없다. 대중문화 자체가 다양한 세계관과 가치관들이 서로 갈등, 타협, 연대하는 일종의 경기장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하면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는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현재 한국의 대중문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특정 시기 한국 사회 자체를 표상하지만, 이는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들의 교섭의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어느 부분도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에서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전히 대중문화를 멸시하고 폄하하는 집단들이 존재함에도 물구하고, 그러한 비판행위 자체가 대중문화의 일부를 형성한다. 정치권력이 대중문화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으며, 문화산업이라고 그 흐름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선교는 근본적으로 대중문화라는 구도 위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으며 그 효과 또한 대중문화 안에서 실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이러한 대중문화의 속성을 바탕으로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행위여야 할 것이다.

    3) 매체변동
    마샬 맥루한 등을 중심으로 하는 매체결정론자들은 매체의 변화가 사회제도의 인간의 의식 전반에 걸친 변화를 야기하여 결국 ‘문명 변동’이라할 수 있는 거시적인 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매체가 다른 사회적 부문과의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문명변동을 일으킨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인 과장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언제나 주어진 사회의 맥락 속에서 수용되거나 거부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매체 자체의 고유한 속성은 그 매체 테크놀로지를 수용한 사회의 변화에 주요한 작인으로서 그 성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월터 J. 옹은 문자 이전 시대와 문자 시대의 차이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구술성에서 쓰기에의 이행은 지금까지 이미 언급한 이상으로 많은 심리적, 사회적 발전과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다. 식료 생산, 교역, 정치 조직, 종교 제도, 기술적 숙련, 교육 실천, 수송 수단, 가족 제도 그 밖의 인간 생활에 걸려 있는 가지각색의 영역에 있어서의 발전은 모두 저마다 다른 구실을 맡는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들은 종종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의 이행으로부터 대단히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이기우 임명진 옮김, 문예출판사, 1996, 260쪽.


    이러한 변화가 문자시대에서 전자매체 시대 혹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주축으로 하는 멀티미디어 시대로의 변화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미디어의 속성은 쌍방향적이며 탈중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탈중심성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함의를 갖는다. 멀티미디어 매체 자체가 기존 매체들을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통합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 환경에서는 과거에 단일한 미디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체성 관념이 해체되고 다양한 이질적 정체성들이 결합하는 혼성성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출현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예는 90년 대 초반 한국의 문화계를 풍미했던 ‘X-세대’ 논란이다. 이들은 한국에 텔레비전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1970년 대 이후 출생된 세대들로서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형태의 영상 커뮤니케이션 매체인 텔레비전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행위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던 1990년 대 초 그들의 의식과 행위 양상은 문자매체 세대의 규준이나 정체성으로는 규정불가능한 “신인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문자 매체 시대의 규준에 입각한 권위와 정체성은 쉽게 의문시되며, 이에 입각한 설득 역시 일방적인 강요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특히 젊은층의 대거 이탈로 두드러진 90년 대 초반 한국교회의 성장 정체를 주도한 세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매체 세대들에게 한국교회의 설득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러한 매체생태학적 관점은 개신교라는 종교의 성격 자체를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명하게 해준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기독교인을 탄생시킨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인쇄 매체 시대를 개막한 구텐베르그의 활판인쇄술을 최초로 적용한 사회문화적 운동이었다. 따라서 개신교는 가장 인쇄매체적인 종교인 동시에 인쇄매체와 함께 형성된 서구의 근대성에 적합한 종교로서 태동,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전 세계적인 탈세속화 경향 속에서도 유독 주류 개신교만이 퇴조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현대적 변화가 종교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삐에르 바뱅은 각 매체 시대의 종교가 전달되는 방식 자체가 달랐으며 그러한 차이가 종교성의 차이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구전 문화에서 신앙의 전달이 침잠(immersion), 즉 건축과 사회제도 그리고 공유된 세계상이라는 환경 자체에 둘러싸이는 것이었다면, 인쇄 매체시대의 종교 전달은 교리교육으로서 특히 지적 의식의 차원에 집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멀티미디어 시대는 시청각적 방식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종교성 자체가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양상을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삐에르 바뱅, 종교 커뮤니케이션의 새 시대, 유영난 옮김, 분도출판사, 1993, 참조.
    아무튼 우리는 1990년 대 이후 한국 기독교 성장의 위기라는 문제를 이와 같은 매체변동의 측면에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문화선교의 현황

    1)문화선교의 현황
    문화선교연구원에서 엮은 문화선교의 이론과 실제: 문화와 함께 호흡하는 새로운 교회선교 전략 문화선교연구원 엮음, 문화선교의 이론과 실제: 문화와 함께 호흡하는 새로운 교회선교 전략,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이라는 책은 현재 한국교회에서 문화선교라는 틀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천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검토하고 있다. 특히 2부에서는 현재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수행되는 문화선교의 항목들을 각각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에 포함되는 항목들은 다음과 같다.

    전통문화(제사 문제와 국악 찬양), 영상문화(모니터 운동), 사이버 문화, 만화, 문학, 찬양(‘경배와 찬양’), 직장 문화.

    이러한 항목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문화선교는 대개 문화적 ‘형식’을 가진 선교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화선교와 관련된 다양한 파생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문화선교연구원 엮음, 위의 책, 199-200쪽 .
    이 책에 의하면 우선 ‘문화선교’는 전략적 개념이며, 그 외에 ‘문화운동’과 ‘문화사역’, ‘문화선교사역’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전술적 개념이다. 전략으로서의 문화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명령을 실천하여 하나님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문화운동은 “주로 사회를 변혁의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된 대상이거나,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그 영역은 “주로 의식 변화”에 관한 것이다. 한편 문화사역은 “주로 교회 내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참여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그 영역은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서의 문화”가 된다. 이와 같은 용어상의 정리는 현재 한국교회에서 ‘문화선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실천들을 실정적으로 분류한다는 점에는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분류는 근본적으로 신학적 전제에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즉 ‘청지기 명령“이라고도 하는 ”문화명령“은 창조신학에 근거하고 있는데, 창조신학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으로‘ 확장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신학 자체가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문화선교’라는 기독교적 실천행위는 그 바탕에 교회/세속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관행적으로 ‘문화’라고 인정되는 형식적 차원의 영역에 국한되어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 ‘문화선교’로 행해지는 실천들의 현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한국교회가 파송하는 해외 선교사들의 임무가 ‘문화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해외선교는 현재 ‘기독교 세력의 확장’이라는 흐름과 ‘인류학적 연구’에 입각한 상대주의를 바탕으로 현지인들의 다양한 삶의 문제에 개입하는 흐름 사이에서 진자운동하고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 시민단체의 문화관련 부서의 활동을 들 수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나 한국기독교총연맹과 같은 교회 단체들의 문화관련 부서의 활동, 특히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문화관련 부서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민단체의 성격을 갖는 연합 단체들의 문화관련 활동은 그 정치적인 입장이 매우 상이한데 반하여 대체로 보수적이다. 물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정치적 진보를 표방하는 단체들의 문화적 입장은 문화적 보수주의와 90년 대 이후 대중문화 담론의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 사이에서 분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대 사회적 문화운동으로 대중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그 강한 보수적 태도 때문에 문화관련 시민사회운동과 상당한 마찰을 빚은 바 있다. 세 번째로 개 교회, 특히 90년대 이후 문화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개체 교회들의 활동이 있다. 창천교회의 ‘문화 쉼터’, 영락교회의 ‘문화사역팀’의 활동 그리고 새벽교회의 ‘문화교실’이 대표적이다. 대체로 대형 교회들인 이들의 문화적 활동은 교회 성장의 새로운 영역을 시험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의 문화적인 이해가 보수성을 벗어나지 못해, 이윤의 일부를 사회로 돌리는 대기업의 ‘문화사업’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규명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회들의 ‘문화선교’가 한국교회 전반에 선교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야기하는 하나의 촉매 구실을 할 수 있다는 평가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네 번째로는 문화 전문 단체들의 활동을 들 수 있다. 1990년 대 초반 문화적 상황에 대한 한국교회의 신경증적 입장을 대변했던 ‘낮은 울타리’, 90년 대 중반 이후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진보적인 입장에 열린 태도를 보여주는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에 문화연구(cultural study)를 도입하여 기독교 문화운동의 진보적 가능성을 실험한 ‘영상문화연구소 케노시스’ 등이 그것들이다. 현재 다른 단체들에 비해 문화선교연구원이 그 중도적인 미덕으로 활발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 문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는 제도적인 신학교육의 일부로서 연구되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뚜렷하게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문화적 변화를 교회공동체에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보다 젊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실험적인 움직임은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와 문화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신앙적인 삶 자체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다양한 교회적 양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소규모 교회에서 교인들의 적극적인 이해와 참여를 바탕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뚜렷한 흐름으로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곧 교회와 신앙 자체를 새롭게 규정하는 사건으로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2) 문화선교의 개념적 이해
    임성빈 교수는 문화선교를 “문화의 모든 영역을 복음의 정신과 실천으로써 변혁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선교적 실천” 임성빈, 21세기 문화와 기독교,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47쪽. 이 글은 ‘기독교 문화의 내용’으로 은혜, 인간의 존엄성, 하나님의 나라, 생명중심의 생태학과 공동선, 사랑과 정의 등의 신학적, 윤리적 개념들을 열거한다. 53-59쪽 참조.
    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식의 ‘신학적’ 정의는 엄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일단 이 정의 속에서 문화는 복음의 대상이 된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문자주의적 태도를 조금만 벗어나도 이러한 입장은 의문시 된다.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언어로, 곧 문화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으며, 역시 문화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 일반에서 ‘복음’이 갖는 의미야 말로 대중문화적 구성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성장이나 개인적인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 곧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선교’의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둘러싼 해석적인 갈등 자체를 문화선교의 대상으로 포함해야 한다. 복음을 둘러싼 해석상의 대립 자체를 문화선교의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선교신학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입장에 의하면,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 전체를 구하기 원하신다” 게오르크, 하나님의 선교, 대한기독교서회, 1993.
    는 것이다. 선교는 이제 “교회가 주체가 되는 포교활동”이라는 의미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교회와 세계가 함께 참여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선교신학에서 이 개념의 의의는 선교의 영역을 교회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개념의 급진성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대상이라는 의식을 열어낸 데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복음,/문화, 교회/세계의 이분법은 해체된다. 장성배 교수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입장에서 선교의 개념을 해명하면서, 선교(mission)는 말 그대로 ‘사명’이며, “상황(context)과의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서 고백된다”고 주장한다.

    ‘상황’과 ‘말씀’과 ‘사명의 발견’은 상호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이것을 문화선교적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교회는 자신이 처해있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물어야만 한다고 할 수 있다. 장성배, 문화선교의 ‘문화성’을 어떻게 확보할까?: 신학적 근거와 실천 방안, 문화선교연구원 엮음, 앞의 책, 35쪽.


    물론 주체는 정체성 없이 상황을 인식할 수 없다. 근대 이후 기독교의 정체성은 지상명령 지상명령은 마태복음 28장 19-20a의 말씀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표준새번역).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인류의 기독교인화를 기독교인의 사명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에 근거하여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지상명령은 ‘청지기 명령’ 청지기명령은 창세기 1장 28절,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하셨다”를 의미한다.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이 구절은 최근에 와서 모든 피조물들의 창조적인 샬롬의 관계에 관한 명령으로 이해된다.
    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퀜틴 슐츠, 거듭난 텔레비전, 김성웅 옮김, IVP, 1995, 31쪽.

    근대적 주체의 위기 이후 이 청지기 명령은 인간에게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물의 샬롬의 관계에 대한 사명/은사가 주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청지기 명령은 인간에게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라는 탈주체적 명령이다. 탈주체적 가능성은 타자와 대면하는 주체의 위기를 주체구성의 일부로 포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교라는 탈교회적 입장에서 문화선교의 과제는 ‘타자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성의 회복은 교회의 자기 인식, 곧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무시되고, 억눌리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져 왔던 하위주체(subaltan)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그들과 대화와 공존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신학에 의거하며 문화선교의 과제를 구성한다는 것은 인간과 교회의 뜻에 의해 침묵하였던 것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의해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문화선교는 침묵하였던 피조물들로 하여금 말하고 노래하게 함으로써 만물들의 노래로 충만한 창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창조한 자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에 의하면 문화선교는 ‘문화를 도구로 하는가 아니면 대상으로 하는 것인가’라는 논란은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문화선교적 실천은 임성빈 교수의 정의에서처럼 단계적으로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교회가 수행해왔던 모든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선교가 문화 콘텐츠 물신주의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문화선교가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단계적 방식으로 실천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심각한 교회의 자폐증은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이 마음을 연 자에게 오늘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내리듯이, 문화선교는 그 핵심적인 의미에 있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어떤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신학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들의 능력은 단지 억압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타자성의 회복’이라는 과제는 교회가 탈근대적인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상황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기도 한다. 따라서 문화선교의 문화정치학적 지평을 열어주는 입장이기도 하다.

    글을 마치며: 전망과 제안
    지금까지 ‘문화선교’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탈산업사회적인 문화의 변화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이라는 전제하에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몇 가지 검토를 통해 사회의 문화적 변화에 비해 교회의 대응은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음을 보았다. 대개의 교회의 반응은 문화적 변화 속에서 기존의 정체를 지키기 위한 수세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90년대 이후 교회의 전반적인 보수화와 이에 상응하는 ‘기독교-보수’라는 대중적인 인식의 증가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일 이러한 양상이 변화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한국 기독교는 그 사회적인 의의를 상실하고 ‘탈현실’적인 종교로 게토화하고 말 것이다.
    다행히 기독교 일각에서 주어진 문화적 상황을 교회의 자기 개혁과 적극적인 사회적 연대의 기회로 파악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희망의 빛으로 구실하고 있다. 사실 ‘문화선교’의 본령은 형식적인 문화 분야에 참여하는 차원을 넘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수준의 교회개혁운동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문화선교’라는 용어보다는 ‘문화운동’이라는 용어가 주어진 과제를 포괄하는 데 더욱 적합한 개념일 것이다. 만일 ‘선교’가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이 부여하는 임무에 응답하는 행위라면, ‘선교’는 기독교의 모든 실천을 지칭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실천을 지칭하는 개념은 사실 어느 것도 지칭할 수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언중(言衆)들에게 선교는 대체로 개종과 포교라는 정복주의적 패러다임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문화선교’라는 용어는 문화 자체가 갖고 있는 급진적인 성격을 ‘선교’라는 용어가 기독교 대중들에게 통용되는 의미로 무마하는 매우 혼종적인 개념이라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나는 우리 시대 문화적 임무가 교회의 신앙적 실천을 ‘타자성’에 개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타자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매우 낯설고 곤혹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부정되고 배제되어야 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아야 평화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교회가 직면하는 선교적 난제들이 전통적인 정체성에 자기 성찰 없이 안주해 온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문화선교’는 뼈를 깎는 자기성찰 속에서 기존의 정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실 ‘문화선교’는 ‘문화운동’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개혁과 사회적 위상의 재설정을 위해 교회 안팎으로 의식적 태도로써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기독교 문화운동’은 전문적인 문화 엘리트들이 특정한 문화 형식적 분야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형식적인 의미의 문화가 가시적으로 두드러지는 대중문화 시대의 특성에 맞게 전문적인 연구와 실천이 병행되어야 하겠지만, 신앙의 실천 자체가 문화적인 것으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는 근본적으로 ‘의미화의 실천’이며 신앙이야 말로 기존의 삶과 세계의 의미를 하나님과 함께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의미화 실천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 그 자체에 근거한다면, ‘문화운동’은 모든 신앙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기독교 문화운동 역시 ‘부흥’을 꿈꾸지만 이는 결코 기존 기독교의 재부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근 절정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영화산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영화의 사회정치적 중요성을 인식한 문화운동 세력이 풍부한 연구를 바탕으로 영화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제고하면서 영화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대하며 제도적, 인식적 장애들을 꾸준히 제거해 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영화의 ‘부흥’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 산업의 영역을 넘어 사회 전반의 민주화 과정, 다국적 문화 기업에 대응하는 민족적이며 국가적인 수준의 대응까지 포괄해야 한다. 영화는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 사회의 특정한 부분들과 함께 변화 발전해 온 것이다.
    한편 시민사회 문화운동은 시민 문화 교육이라는 수준을 넘어 이제 제도적인 교육 과정 자체를 개혁하는 성과를 이루고 있다. 각종 제도 교육에 문화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교육 관료들의 현실적인 인식, 즉 미래의 인재들이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인식은 시민 사회 문화운동의 꾸준한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시민사회 문화운동이 기독교 문화운동에 제기하는 과제는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문화운동은 기독교 교육운동 없이는 불가능하며,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새롭게 전개되는 사회적 흐름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신학운동이 활성화되지 않고서는 모래 위의 집과 같은 형국을 보일 수밖에 없다. 문화의 신학, 특히 대중문화의 신학은 시급히 제도적 신학교육의 일부로 구성되어야 한다. 한편 교단의 관련 부서는 문화에 대한 이론적 교육과 병행되는 문화 실천 프로그램을 다양한 수준에서 조직해야 할 것이다. 과거 개인의 천재적인 감수성을 통해 해명되었던 창조력은 최근에 그 근본을 지식과 인식력에 두는 ‘지적 창조력’으로 제시되고 있다. 문화적 창조력은 상징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므로 개인과 사회의 다양한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형식으로 메시지를 구성하는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양한 교육현장에서 이러한 역량을 배출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구전 문화에서의 신앙 전달- 침잠을 통해 얻는 신앙, 인쇄 매체 시대-교리 교육, 전자 매체- 시청각적 방법

    맥루한에게는 전체의 시스템을 부분들의 상관 관계와 더불어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구조의 머릿돌이 바뀌면 전체적인 구조가 변하고 각 부분의 의미가 바뀐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자 매체가 소개되면서 우리의 모든 문화적 관행의 의미가 바뀌었고 종교적 관행과 신학적 개념을 포함한 우리의 사고 구조의 모든 면이 바뀌었다. 삐에르 바뱅, 21쪽.


    사회적 상황을 검토한 후에는 이에 대한 기독교의 다양한 대응 형태를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돌아볼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문화적 대응이 여전히 소극적이거나 자족적인 차원에 머물러, 보다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을 지니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을 구성하는 대중문화에 적합한 ‘문화’의 개념을 찾는 과정에서 제시될 것이다. ‘문화’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나, 그 실질적인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그것은 이 용어 자체가 매우 복합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변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를 갖는 ‘문화’ 개념을 선택하여 문화적 현실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결정적인 사항이다.
    이러한 관점은 ‘선교’라는 신학적인 용어를 살펴보는 과정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의 개념 역시 교회사와 함께 장구한 변화의 과정을 거처 왔다. 특히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용어의 언중(言衆)이라 할 수 있는 대다수 교인들에게 선교란 포교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선교’라는 용어가 문제가 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문제의 대안으로 ‘기독교 문화운동’이라는 용어를 제안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작업은 곧 오늘날의 문화 상황에 적합한 기독교적 대응이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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