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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회] 포스트 황우석, 포스트 민주화, 그리고 민중신학(황용연)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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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5243, 2006.01.24 10:18:07
  • 포스트 황우석, 포스트 민주화, 그리고 민중신학

    황용연/본 연구소 운영위원, 성공회대 신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대학부장

    1.
    얼마 전 <한겨레21>에 황우석 교수의 연구와 관련된 난자 채취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에서는 이 여성을 “가족 중에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없고, 경제적 이유로 난자를 팔아야 할 사정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난자 기증을 결심했던 이유는 오직 황우석 교수가 참여한 <나의 생명 이야기>라는 책에 감동을 받아, 황우석 교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연구’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들은 특히 그 논란의 과정에서 이른바 ‘33조’로 표현되는 ‘국익’의 이미지로 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사회적 논란도 주로 그 ‘국익’의 이미지를 놓고 벌어졌다. 그러나 ‘국익’의 이미지의 다른 한 편에는 ‘강원래’로 표현되는 ‘고통받는 생명’과 그를 치유하는 ‘성스러운 과학자’의 이미지도 깊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황우석 교수의 사회적 위력은 이 ‘성스러움’과 ‘국익’이 긴밀하게 결합할 때 사회적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그 결과 PD 수첩의 보도가 있기 전까지 황우석 교수에 대한 이의제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거의 유일하게 알려지다시피 한 ‘생명윤리’를 둘러싼 이의제기는, ‘수정 후 14일’로 대표되는 논쟁의 추상성 때문에도 발언의 자리를 확보하기 힘들었지만, 그 이의제기의 주된 주체가 (특히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또라이 집단’으로 낙인찍혀 버린 한국 개신교였다는 점에서도 더더욱 발언의 자리를 확보하기 힘들었다. 난자 채취가 여성의 몸을 산업자원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음을 경고하던 여성주의자들의 목소리 또한 PD 수첩의 보도 이전까지는 거의 공론화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니 PD 수첩의 보도가 있은 뒤에도, 난자 채취에 관련된 이의제기는 ‘진달래꽃길’과 ‘협박취재 사과’ 앞에서 무력했다. 오직 ‘소장 과학자’들이 제기한 ‘사실’에 대한 이의제기가 받아들여지고 난 뒤에야 황우석의 신화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황우석 신화의 전개과정을 이렇게 돌이켜 본다면, 황우석 신화에는 발전에 대한 소망/믿음과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긴밀히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발전을 추동하려는 그 어떤 현상도 정당성에 대한 자기 주장을 결합하지 않는 경우가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황우석 교수의 경우처럼 그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이어서 내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이 지점은 동시에 길게는 1987년 이후, 짧게는 ‘IMF 이후’의 한국 사회에 내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욕망-‘정당성을 동반한 발전’이라는-이 작동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심지어 ‘포스트 군사정부’라고 해야 할 노태우 정부조차도 이 소망이 일정하게 작동하는 환경 속에서 성립할 수 있었으며,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적어도 대중은 그 정부의 성립과정에서 정당성에 대한 소망과 발전에 대한 소망이 점점 더 잘 결합한다고 느껴 왔다. 그리고 황우석 교수가 ‘유능한 과학자’를 넘어선 ‘대한민국의 희망’과 ‘세계의 희망’이 되었던 시점은 바로 그렇게 정당성의 소망과 발전의 소망을 결합시켜 당선된 대통령인 노무현이 “마치 마술과도 같다”는 감탄을 내뱉었던 시점과 맞물린다.
    그러므로 황우석 신화에 대한 비판은 황우석의 ‘거짓말’을 밝혀 내거나 황우석을 두둔했던 사람들의 ‘폭력성’을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한정될 수 없다. 문제는 ‘정당성을 동반한 발전’이라는 우리 시대의 욕망이 과연 그 ‘폭력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한국에서 ‘정당성’을 추구해 왔던 활동인 ‘민주화’가 현재 어떤 사회를 만들도록 작용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이다.

    2.
    앞에서 간단하게 짚었듯이 노무현 정부는 정당성에 대한 소망과 발전에 대한 소망을 결합시킴으로써 집권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집권 과정을 지배한 것은 정당성에 대한 소망의 극대화였지만, 이미 그 정당성에 대한 소망 안에 발전에 대한 소망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의 한 편에는 ‘발전’의 물꼬를 ‘한나라당’이 아니라 ‘노무현’이 틀 수 있다는 기대가 존재했다는 것이며, 다른 한 편에서 ‘민주화’의 문제의식을 주로 하여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발전’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간다면, 노무현 정부의 자기 호칭인 ‘참여정부’에는, 이제는 ‘발전’을 위해서도 ‘민주화’의 문제의식을 구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의식이 담겨 있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 이후에 내세운 ‘발전’ 담론들인 ‘동북아 중심국가론/허브론’, ‘행정수도 이전을 비롯한 지방분권/경제구역 조성’, ‘참여 패러다임의 전면 확산을 통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협치(協治)론’ 등은 모두 노무현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규정하는 ‘민주화’의 문제의식에 중요한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은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민주화의 소망을 모아 집권한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기술관료적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지적을 계속해 오는 지점과 맞물린다. 예컨대 노무현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주도하여 ‘반부패’라는 ‘민주화’의 입장에서 시도한 ‘정치개혁’은, 사실상 정치를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축소하는 것이 좋다는 원리에 의해 집행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 과정에서 정치의 ‘효율성’은 강조되었을지 모르나 정치의 근본적 필요성인 ‘사회기층의 대중적 삶의 요구들에 대한 참여/대표’의 기능은 거의 망각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예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 생산레짐을 보장할 수 있는 경제관료의 손에 경제정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견제할 동력 자체를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약화시켰다는 것이 최장집 교수의 더 깊은 함의이기도 할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지적에 상응하는 다른 예를 들어 본다면, 최근 노무현 정부가 ‘협치’의 성공사례로 들고 있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경주 건립 사례를 들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립 문제는 노태우 정부 이후로 어느 정부도 해결하지 못한 사회적 난제엿으며, 노무현 정부 초기에도 군수의 단독 신청으로 건립부지로 선정된 부안군 거주민들의 상당한 사회적 저항을 불러 일으키며 한 번 실패로 돌아갔던 적이 있다. 그런데 부안군민의 저항이 있은 지 2년 후, 노무현 정부는 ‘주민투표’ 방식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3천억원’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혜택을 약속하고 ‘자발적 신청’을 받은 후 이 신청지들 모두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해 가장 찬성률이 높았던 경주(약 89%)에 ‘원전센터’-노무현 정부는 이 '원전센터‘라는 명칭도 ’공모‘를 통해 선정된 ’참여‘의 작은 예라고 자찬하고 있다-를 짓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전센터 건립‘은 앞서 말한 것처럼 노무현 정부에게 어느 정부도 해결하지 못한 사회적 난제를 ’참여‘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해결해 낸 ’협치‘의 성공사례가 되었다. 주민투표 과정에서 ’부재자투표 40%‘로 대표되는 상당한 부정적 사례가 존재했지만, 사실은 그런 부정적 사례가 없었다고 해도 이미 ’가장 주민투표 찬성률이 높은 지역 고르기‘라는 방식은 그 자체로 각 지역의 ’충성경쟁‘을 불러 일으키기 딱 좋은 방식이다. ’부재자투표 40%‘ 등은 그 ’충성경쟁‘이 구조화된 상태에서의 ’일어날 만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핵심 구호인 ’참여‘는 이렇게 기술관료적 문제해결의 근간을 지탱해 주는 훌륭한 도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황우석 교수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노무현 정부의 기술관료적 문제해결 경향이 극단화된 한 예로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 보면, PD 수첩 이전까지 황우석 교수의 성공은 ‘난자’ 이외에는 어떤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황우석 교수의 성공은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민주화’의 가치에 잘 들어맞는 ‘깨끗한 성공’이었기도 할 것이다. 이 지점이 아마도, 황우석 교수에 대해서 서두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적이어서 내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간다면, 황우석 교수의 성공과 그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특히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는 한 사회적 욕망과 상당히 상응하는 것임을 짚어 볼 수 있다. ‘33조’가 ‘거대한 국익’의 이미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거대한 국익’을 보장할 수 있는 ‘세계 제일’의 이미지이기도 했다면-그리고 지금에야 주목받고 있듯이 현재 ‘세계 제일’이 맞다고 하더라도 ‘33조’로 가는 길이 아직은 멀기만 한 것이었다면-, 황우석 교수에 쏟아졌던 대중적 기대는 특히 노무현 정부 이후 ‘반미’의 정서가 한국 사회에 논쟁적으로 전면화되면서 그 밑에 깔리는 한국 사회의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고모리 요이치)이 극대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근대화는 식민화를 항상 동반하게 마련이어서, 늦게 합류할수록/합류당할수록 트라우마를 남기게 마련이다. 거기에다가 물리적 식민지와 전쟁/학살 경험이라는 요소까지 결합되어, 한국의 근대화는 미국이라는 타자를 깊이 모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미국은 한국 사회의 ‘식민지적 무의식’의 중추인 것이다.
    ‘식민지적 무의식’은 언제나 그것이 남기는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한 ‘식민주의적 의식’을 동반한다. ‘식민주의적 의식’의 층위는 끊임없이 자신이 식민화할 수 있는 타자를 생산하는 층위이고 그 타자를 실제로 식민화하는 층위이다. 당연히 이 ‘식민주의적 의식’이 표면화되기 위해서는 식민화를 실제로 시도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노무현 정부 이후의 ‘반미’ 정서와 그 전까지 ‘민주화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던 ‘반미운동’이 ‘반미’의 정서를 공유하면서도 일정하게 구별되는 지점이다. 노무현 정부 이후의 ‘반미’ 정서에는 방금 지적했던 것과 같은 ‘힘’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소유하게 되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노무현 정부 이후의 ‘반미’ 정서의 대중적 시초인 ‘촛불시위’는, ‘2002년 6월 월드컵 4강’을 이룩하면서 ‘대~한민국’을 실컷 외치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노무현 정부 이후의 ‘반미’에 대한 논쟁적 상황은, 이러한 자신감을 위험하게 여기는 '식민지적 무의식‘의 발동으로 인한 보수세력의 반발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황우석 교수의 성공은 식민주의적 의식을 작동시킬 수 있는 힘을 ‘대한민국’이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적어도 지금부터 만들어 갈 수 있다는-증표이기도 했다. ‘섀튼 교수’는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이 최초로 꿈꿀 수 있었던 ‘식민화’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이후의 ‘반미’ 정서는 동시에 한국의 식민지적 트라우마를 ‘미국’이라는 타자에 모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해소하려는 움직임을 동반한다. 작년 하반기의 강정구 교수 논란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이 논란의 시발점이 된 매체는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는 여론 생산을 주도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 창립 1주년을 맞아 단독 인터뷰를 해 주기도 한 매체였다. 즉, 강정구 교수의 ‘미국 개입 없었으면 1만명만 죽고 끝’ 논리는 노무현 정부 지지자들의 ‘반미’ 정서와 일정하게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란의 양상은 결국 강정구 교수 측이 한국전쟁의 죽음에서 ‘미국’의 책임만을 부각해 ‘남한’과 ‘북한’이라는 ‘우리들’의 책임을 망각하는 방향을 지향했다면, 그 반대측은 ‘북한’의 책임만을 부각해 ‘남한’과 ‘미국’이라는 또다른 ‘우리들’의 책임을 망각하는 방향을 지향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애시당초 ‘우리들’의 책임을 망각했던 ‘보수세력’의 경우는 둘째 치고라도, ‘민주화’의 입장에 서더라도, 아니 ‘민주화’의 입장에 섰기 때문에, 또다른 지점에서 ‘우리들’의 책임을 망각하게 되었다는 비판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점을 상기한다면, 황우석 사태의 전개 양상에서도 비슷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서두에서도 지적했듯이, PD 수첩 방영 이전까지 황우석 교수에 대한 이의제기 중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생명윤리’ 논쟁이었다. 그런데 이 논쟁은 물론 상당히 추상적으로 전개되기도 했지만, 이 논쟁이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아무런 제어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이 논쟁을 주로 ‘개신교’가 제기했던 탓이 컸다. 노무현 정부 들어 ‘식민지적 무의식’에서 출발한 가장 강력한 ‘반정부 세력’이 되어 버린 한국 개신교가 그 ‘식민지적 무의식’의 노골적인 노출-‘시청 앞 기도회의 태극기와 성조기’-과 언제나 존재했던 여러 윤리적 문제들 때문에 ‘또라이 집단’으로 낙인찍혀 버린 집단이었다는 것이, 그 개신교가 제기한 문제의 가치 자체를 평가절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민주화’에 ‘또라이같이’ ‘딴지를 건’ 집단이 제기했다는 이유로 그 문제가 평가절하당했다면, 이 지점에서도 ‘민주화’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민주화’를 추구했기 ‘때문에’-그래서 ‘민주화의 적’을 열심히 공격했기 ' 때문에‘-황우석 교수에 대한 이의제기의 실마리를 막아 버렸다는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황우석 교수의 성공이 ’난자‘ 이외에는 어떤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은 다른 희생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 아니 보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결과이며, 그 무의식의 한 원인이 ’민주화에 대한 지지‘였음을 지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황우석 사건의 경우만이 아니라, ’지율 스님‘을 비롯해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모든 사회적 이의제기를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는 정부에 대한 딴지‘로 치부해 온 ’민주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특징의 문제이기도 하다.

    3.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성에 대한 동시대적인 저항은 잘 알려진 대로 ‘민중’이라는 개념과 함께 전개되었다. 성소수자 사회학자로 잘 알려진 서동진은 이 ‘민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를테면 과거의 민주화 투쟁의 시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민중이란 개념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주류 사회학자들은 무익하고 또 우스꽝스럽게도 그것을 다양한 사회집단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객관적인 실체로 정의하려 애썼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민중이란 개념을 사용했던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이 사회의 각 부분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사회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민중이란 현재의 사회를 정상적인 유일한 사회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과 그들의 저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을 사회의 부분들의 집합으로 환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민주주의는 현재의 사회 그리고 그것과의 단절이라는 그 틈새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의 조정이라거나 각 부분의 민주화란 생각보다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 각각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민주주의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일상의 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의 정치로”)
    이런 지적의 관점에서 본다면 안병무/서남동의 “민중을 정의할 수 없다/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언명은 ‘민중이 사회의 각 부분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사회학적인 개념이 아님을 아는 본능’이 가장 극대화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능’은 민중신학을 비롯한 제반 민중론이 한국의 식민주의적 근대성과 그 위에 구축된 근대적 인문학/사회과학 담론에 저항하는 탈식민적 담론이었다는 속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터이다. 이 지점에서 민중신학이 가장 강경하게 주장했던 ‘서구 학문의 해체’는 물론 일정하게는 주류 학문 담론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며, 식민주의에 대한 단순 반동의 성격을 가짐을 부인할 수 없기도 하지만, 사실상 ‘토착화신학’이나 ‘3선개헌 반대’ 등 이미 ‘서구 학문’의 구조 속에서 생기고 있던 비판 담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탈식민적 담론으로서의 1970년대 민중신학은 주지하다시피 ‘증언’의 신학이었다. ‘증언’의 신학이라는 의미는 한국의 식민주의적 근대성이 ‘잘 살아 보세’로 대표되는 일정한 사회적 욕망을 창출하면서 전진하는 동안, 사실은 민중의 희생과 고통을 낳으면서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신학이었다. 당연히 이 때 ‘증언’이란 ‘탈은폐’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의 대척점에 놓이는 이제는 흔히 ‘2세대’ 민중신학이라고 칭하게 된 1980년대의 민중신학이었다. 이 시기의 민중신학과 민중론에서 민중은 더 이상 ‘사회의 각 부분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사회학적인 개념이 아닌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데에는 사회운동과 상응하지 못한 ‘선도적 지식’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민중은 그 ‘선도적 지식’에 기반을 두고 구성된, 이른바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이라는 ‘주력부대’와 함께 하는 ‘동반부대’를 갖춘 군사주의적 집단으로서, 군사주의적 정서에 걸맞게 구체적 계기에 대한 정치적 행동보다는 ‘변혁의 승리’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 걸맞는 집단으로 상상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민중 개념은 이제 탈식민적 개념이기보다는 오히려 또다른 차원의 식민성을 담지할 위험이 너무나도 높은 개념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선도적 지식’으로의 마르크스주의 도입 이전에도, 민중이 ‘민주화운동’과 같이 가는 한 그런 식민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잠재해 있었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김원이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에서 지적하는, 조화순 목사와 도시산업선교회가 동일방직 노조를 ‘민주노조’로 만들기 위해 지지할 노조 지도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다른 노조 지도자를 ‘어용’으로 희생양삼는 과정이라든지, 권진관 교수가 지적하는, 원풍모방 노조가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명령을 받은 후의 장기투쟁 과정에서 영등포산업선교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실상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축출되고 역사적 기억마저 거의 망각되어 버리는 사례가 그 예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민주화운동’과 동반했던 민중신학도 일정하게 그 식민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심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사회는 굳이 좌파적 입장에서가 아니더라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나 ‘양극화’를 걱정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양권석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 시대의 가난은 복지 수혜의 대상은 될지라도, 이 시대의 실상을 고발하고, 시대의 지배적 논리에 도전하는 목소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 간격 어딘가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주로 ‘신자유주의’를 ‘적’이라고 상정하는 비판이며 그러기에 어떻게 피하거나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비판이거나, 혹은 그런 비판에 대한 반동으로 어떻게 적응하고 주도하며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담론들만이 존재한다는 지점이 있을 법 하다. 정작 ‘신자유주의’ 자체가 도대체 우리의 삶 자체와 어떻게 구조적으로 피드백하는지라는 물음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아직도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와 ‘가난’의 문제는 정치적 사유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정치적 사유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민주화’를 추구한다는 세력과 그 반대 세력이 함께 키우고 있는 ‘발전에 대한 욕망’이다. 그와 더불어, 이제는 ‘정당성’을 담보한다는 ‘민주화’ 세력이 바로 그 ‘정당성’을 가지고 ‘발전’을 시키려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는 점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 합의가 더욱 튼실하고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범위’가 그만큼 단단히 확정되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그 범위를 벗어난 존재들은 어떤 일을 겪는가 하는 한 생생한 예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라고 해도, 그 ‘공감’이란 것이 ‘정치적 공감’이 되고 있지 못하며 그러기에 어쩌면 ‘공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양권석 교수의 지적의 함의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학자인 정희진은 최근 <한겨레신문> 기고에서 황우석 사건을 두고 정말 놀랐던 것은, 사람들이 황우석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거나 황우석의 논문 조작을 수치스러워할 줄은 알아도, 그 사건을 두고 상처받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더라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황우석 사건이 대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존재 방식에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성찰하려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그리고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정치적 사유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세어지고 그 ‘공감’에서 정치성이 박탈되어 가는 시대라는 이 글의 진단이 적절하다면, 민중신학은 정희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황우석 사건’을, ‘민주화’를 추구하고 ‘민주화’의 ‘적’들을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민중신학과 비판 담론이 넘어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존재 방식이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밖의 고통을 은폐하고 고통에 대한 공감을 시혜로 전락시키며 그것이 다른 흐름들은 물론이고 ‘민주화’라는 정당성을 동원함으로써 오히려 굳어진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창설될 때부터 가졌던 ‘증언’과 ‘탈은폐’의 문제의식을 다시 읽어낸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민중신학이 이러한 입장에 설 때 민중신학은 자연스럽게 ‘소수자성’에 입각한 신학이 될 것이다. ‘소수자성’은 언제나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포섭되거나 혹은 ‘다수자성’의 근거없음을 끝까지 폭로하여 사회의 존재 방식을 근원적으로 소환하는 두 지점 사이에서 요동하게 마련이다. 물론 각각의 ‘소수자성’은 하나의 지점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언제나 각각의 지평에서 각각의 방식대로 사회의 존재 방식을 근원적으로 소환한다.
    끊임없이 기존의 ‘소수자성’을 ‘다양성’으로 포섭하려 하며 동시에 그 포섭을 ‘시장효율성’ 등의 이름으로 새로운 ‘소수자’를 만들어 내는 합의의 동력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 현 시대의 특징이라면, 민중신학은 ‘소수자성’을 사회의 존재 방식을 근원적으로 소환할 수 있는 끊임없는 정치성으로 살려 나가는 담론이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소수자성’의 지평은, 그것을 수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수자성’과 자신의 ‘다수자성’을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는 존재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민중신학은 이런 입장에서 더 이상 ‘민중이 누구냐’를 질문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어느 지점에서 민중이고 어느 지점에서 민중이 아닌가’를 질문하게 될 것이다.

    글을 맺으며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 카톨릭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을 역임하고, 당내 성소수자들의 항의에 관심을 가지다가 자신의 동성애 성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어 지금은 당 성소수자위원장을 하고 있는 여성이 있다.
    경력상 필자의 직장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는 이 분이 언젠가 NCC 중견 실무자인 목사의 이름을 대며 알고 있느냐고 물어 왔던 적이 있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니, 이 목사에게 NCC에서 성소수자 인권 관련 행사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대답은 자기는 성소수자에 대해서 납득이 가는데 NCC에서 그런 행사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단다. 하기야, 그 분과 같은 지역에 살며 당 활동을 함께 했던, ‘통일운동’에 열심인 다른 목사는, “성서에 동성애가 금지되어 있는데 어떻게 동성애를 인정하냐”라고 했다니, 그 목사보다는 NCC 쪽 목사가 그래도 나은 건 사실이다.
    과연 NCC에서 성소수자 관련 인권 행사를 주최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또한, ‘민주화운동’ 혹은 ‘교회개혁운동’을 한다는 목사/기독교인 입에서 “성서에 동성애가 금지되어 있는데...” 운운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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