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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회] 이정희 <교회 건축과 빛의 정치학(heliopolitics)> [카테고리]
  • 제3시대
    조회 수: 4857, 2007.11.28 15:47:32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제104회 월례포럼                                                                 2007.11.26

    교회 건축과 빛의 정치학(heliopolitics)

    _이정희 | 성공회대 외래교수.
    본 연구소 운영위원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사도행전 1,11)
    신은 윤곽인가? 만약 신이 빛이라면,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일 것이다. 즉 우리들의 어정쩡한 실루엣은 신의 완전함이 지닌 뉘앙스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만약 신이 어두운 밤이라면?(펠릭스 가타리, 윤수종 옮김, 『정신분석과 횡단성』, 율력 2004, 229)


    1
    이 글은 교회 건축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다. 그러기에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학 혹은 미학의 공간에서의 신학적 개입 정도일 것이다. 전문적인 건축 담론 공간에 개입하기에는 공부가 미흡하다. 교회를 디자인하는 건축가나 그것에 대한 비평가가 전문 신학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전문 건축학자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결국 존 폴킹혼의 말 뒤에 숨어 겨루기로 해본다. “학제적 작업은 말 그대로 위기(危機)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완전히 숙달치 못한 주제일지라도 말해야 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위(危)이고, 결국에 가서 지식은 하나이기 때문에 기(機)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지적인 모험을 감행해야만 하고, 무엇보다도 서로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러면서 상호적 관용과 인정을 베풀어야만 한다.(존 폴킹혼, 이정배 옮김, 『과학시대의 신론』, 동명사 1998, 95)
    서구 건축사에 등장하는 교회 도판들에서 두드러지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빛이다. 그 도판들은 마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술 발전의 역사, 빛의 성전의 건축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여기서 건축의 기초가 되는 것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교회 건축과 빛의 관계를 다시 질문해보려고 한다. 서구 건축사에서 논구되고 있는 건물은 대부분 돌과 벽돌로 축조된 것이다. 빛은 그러한 재료를 투과할 수 없다. 빛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다. 공간의 내부에 빛이 필요한 것은 물론 낮 시간이다. 낮에 내부 공간에서 밝음이 필요한 것은 자연 속에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지배자들, 노동에 기식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연의 빛을 상징적 권력으로 철저히 착취했다. 라캉이 분석하고 있는 주인[지배자] 담론은 이 빛의 정치학(heliopolitics)을 끈질기게 확대재생산해 왔다.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교히를 짓는다는 것은 빛의 성전을[아니, 빛의 신전, 태양 신전]을 짓는 것이었다. 교회 건축에서 그러한 교회짓기의 건축이론적, 신학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 근거의 정당성을 가름하는 잣대는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서구 예술사든 건축사든 그 영역의 전문 연구를 읽으면서 거의 예외 없이 부딪치는 아포리아는 논구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어떤 부분에 대해 ‘씌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 비잔티움 제국의 천 년 문화 속에 나타난 비잔티움 예술은 황제의 권위와 국가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포괄하는 예술이었다. 로마 제국에서부터 비롯되는 비잔티움 제국의 공식적인 예술 전통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공인됨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전개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종교 예술적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허버트 리드는 비잔티움 예술을 ‘기독교가 경험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종교 예술’로 정의한다.(이덕형,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6, 176)

    비잔티움 예술은 그리스도교의 세계관과 신플라톤주의 철학, 그리고 비잔티움 황실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전례 예술의 성격을 지닌다.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경향을 내포하던 궁정 예식과 교회의 전례 의식이 동시에 거행되던 공간으로서의 교회는 비잔티움 예술 발전의 중심축이었다. [...] 교회는 성스러운 우주와 세계 질서의 조형적인 공간이었다.(위의 책, 191~192)

    비잔티움 예술은 신으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은 황제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대함, 신비로운 위엄 등과 같은 위계적이고 의례적인 요소들과 헬레니즘적인 동방 문화의 요소들을 그리스도교의 성스러운 이미지들과 결부시키려는 상징적 예술의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위의 책, 199)

    [...] 교회 모자이크에 나타난 우주의 지배자인 그리스도는 황제의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옥좌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근엄하고 엄숙한 표정은 황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법의 공포자로서 황제의 이미지를 그리스도의 형상에 부여한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교황주의’와 ‘정교합일주의’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위의 책, 200)

    이러한 도상해석학적 언술에 따른다면 비잔티움 예술이란 결국 정치-종교 이데올로기적 아이콘 이외에 어떤 가치를 갖는 것일까? 아니, 비잔틴 예술이 반영하고 있거나 재현하고 있는 것들이 예수-포이에시스[예수의 삶; 예수의 진리 생산 공정]에 의해 생산된 진리가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허버트 리드는 비잔티움 예술을 ‘기독교가 경험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종교 예술’로 정의한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이 ‘순수한 형태의 종교 예술’일까?

    2
    빅뱅 이후,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생명은 빛과 생극론적(生克論的)으로 자기생산(autopoiesis)해 왔다. 빛은 생명을 생성시키는가 하면 소멸시키기도 한다. 집의 역사는 빛과의 생극론적 관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우주의 빛이(달의 반사광이 아니라) 어느 날 인간으로부터 신성(deity)을 부여받았고, 태양은 지배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지배자는 태양의 자손이라는 상징적 족보를 토대로 땅을 다스렸다. 태양은 달처럼 이지러짐과 가득 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이 없으며, 눈으로 직시할 수 없으며, 감히 도달할 수 없으며, 세상을 밝히는 빛이었기에 신적인 것이었고, 지배자는 그 신적인 것을 장악하고 있기에 신의 아들이었다.
    태양은, 그 빛은 지배자의 눈이었고 감시의 눈빛이었다. 잠을 자야 하는 지배자들은, 태양의 빛이 없는 밤을 감시하기 위해 파수꾼들을 사육하였다. 그들의 밤의 눈은 곧 잠든 지배자의 뜬 눈이었다. 반역자들, 도망자들은 빛으로부터 도주한다. 두더지들이 된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그리스도인-되기는 두더지-되기였으며, 그러기에 카타콤 속으로 도주하고 또 카타콤을 팠다. 그곳이 교회였다. 그들은 그 제국의 도시 한복판의 지하 무덤에서 교회를 파들어 갔다. 그들의 암호, 상징은 물 속의 두더지, 물고기였다. 물고기-두더지들, 그들의 땅파기, 그들이 파들어 간 카타콤이 마침내 제국의 주춧돌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그들의 메시아는 태양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메시아를 빛으로 상징화할 때에도 그 빛은 지배자의 태양이 아니라 암흑을 밝히는 정의로서의 빛이었을 뿐이다.
    태양이 콘스탄티누스의 군기(軍旗)에, 전사의 방패에 그려진 십자가의 후광으로 떠오르면서 그리스도교는 태양신교가 되었다. 그들의 신과 메시아는 더 이상 카타콤을 파고 물고기로 자신들의 정체를 표현하는 두더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박해받는 집단에서 박해할 수 있는, 박해하는 집단으로 환골탈태하였다. 그들의 갈구하던 어둠을 밝히는 의로움의 빛은 이제 지배 권력의 빛이 되었고, 두더지들을 태우는 빛이 되었다. 그 두더지들은 그 지배자의 태양 빛의 신은 자신들의 메시아가 아니라고 도주하는 자들이었다.
    니체의 『아침놀』을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시작된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없이 전진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 그는 자신이 [결국] 무엇에 도달하게 될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즉 자신의 아침, 자신의 구원, 자신의 ‘아침놀’에 도달하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긴 암흑과 이해하기 어렵고 은폐되어 있으며 수수께끼 같은 일을 감수하는 것 아닐까?” 그는 니체 자신이기도 하다. “나는 깊은 곳으로 내려갔고 바닥에 구멍을 뚫었으며, 우리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신봉해온 낡은 ‘신념’을 조사하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이 신념이 가장 확실한 지반인 것처럼 그 위에 [철학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건축물은 거듭 붕괴되었다.”(니체, 박찬국 옮김, 『아침놀』, 책세상 2004, 9, 10~11) 나는 니체가 말하고 있는 아침놀을 향해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질 들뢰즈는 이런 인물을 ‘개념적 인물’이라고 한다]에게서 예수를 깨닫는다.

    3
    건축가는, 건축비평가는, 건물으로서의 교회 공간에 대한 선이해 없이 교회를 지을 수도, 비평할 수도 없음은 자명하다. 건축가는 교회라는 건축물에 대한 자신의 건축적 사고를 구축할 것이고, 비평가 역시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구축된 교회를 비평할 것이다. 예를들어, 함성호는 한 교회 건물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회중석 전체의 지붕은 모두 투명한 유리로 덮혀 있다. 보통 어둠과 빛의 이분법적 구도로 드라마틱한 신성을 강조하는 방법과 달리 유걸은 하나의 빛으로 그노시즘적 지(知)를 추구하고 있다.”(함성호, 『건축의 스트레스』, 문학과지성사 2004, 44) 나아가 그 교회에서 건축가가 “죽음의 의지에 이끌리고 있다”고, 그럼에도 죽음에 무한히 접근해갈 때, 그 근접이 주는 공포를 견디는 방편으로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그 건축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이 욕구는 때로는 착란으로 때로는 생의 다른 이면으로 인간을 천착하게 한다.”(위의 책, 45) 함성호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건축적 이미지와 느낌에 대한 시적 상상력까지를 따질 것은 없다. 내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건축가/건축비평가의 관점에서 종교 건축에서의 “이상화된 공간”(위의 책, 220)에 대한 구성력과 상상력의 표현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함성호의 분석대로, 종교가 죽음에 접근해 가는 삶의 공포로부터의 구원 위에 존재한다고 할 때, 그 구원의 추상적 표현인 빛이 예배실을 장악하게 한 것, 어둠을 완전히 소멸시킨 것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상징 체계에 비추어 본다면 문제삼을 것이 없다. 그런데, 죽음의 근접이 주는 공포를 견디는 방편으로서의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에 수반되는 ‘착란’이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함성호의 비평을 실마리로 하여 교회 건축과 ‘빛’의 상징 체계의 ‘전통성’ 혹은 ‘전형성’ 그 자체에 대해 질문하려는 것이다. 함성호는 “어둠과 빛의 이분법적 구도로 드라마틱한 신성을 강조하는 방법과 달리 [...] 하나의 빛으로 그노시즘적 지(知)를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일관하여 그 신앙 행태는 그노시즘의 역장(力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것은 근원과 불멸에 도달하려는 인간 정신의 본질적 운동, 인간의 종교적 본성의 한 표현 양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둠과 빛의 이분법적 구도”가 “드라마틱한 신성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마니교적 이원론의 폭력으로(말하자면 정통과 이단, 초월과 내재,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등등) 홀로코스트에서 절정에 이른 역사를 우리는 눈감을 수 없다. 나아가 “하나의 빛으로 그노시즘적 지(知)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초대 그리스도교가 그노시즘과 길항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고투해 온 것을 이해한다면, 어떤 교회 공간을 ‘그노시즘’이라는 개념으로 구축하거나 인식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둠과 빛의 이분법’도 ‘그노시즘적 일원론’도 그리스도교 본질[그 뿌리라는 의미에서]에서 빗나가거나 왜곡한다.
    ‘빗나감’ 혹은 ‘왜곡’의 뿌리는 물론 그리스도교에서의 은유로서의 빛, ‘빛의 은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착취로서의 ‘빛의 정치학’(heliopolitics)에 있다. 임철규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는 직/간접적으로 눈과 빛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행태에 대한 역사적 세밀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여러 문명에서의 태양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면서 그리스도교 역시 ‘태양숭배의 종교’였다는 주장이 무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예수가 죽은 후 로마에서 태양으로서의 예수 숭배가 유행했음을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는 태양의 날(부활절 주일)에 다시 살아난 것으로 공포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일요일, 즉 태양의 날에 예배에 참석했으며,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얼굴은 동쪽, 즉 태양이 떠오르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Wolf Liebesschuetz; 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46에서 재인용) 그리스도교 신학은 ‘진리의 빛’의 은유일 뿐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 군대의 방패와 군기에 십자가가 각인된 이후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빛의 은유에서 빛은 ‘절대 권력’(한스 블루멘베르크,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 in 데이비드 마이클 레빈 엮음, 정성철/백문임 옮김, 『모더니티와 시각의 헤게모니』, 시각과 언어 2004, 55)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알고 있으나 ‘씌어지지 않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그것 가운데 하나가 ‘빛의 정치학’이다.

    4
    『신약성서』 속에서 태양과 관련된 빛을 뜻하는 단어 ‘헬리오스’는 사용되지 않는다. 오직 ‘포스’만을 사용한다.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fw'")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fw'")이 비치었다.”(마태 4,15~16)[“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어둠의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이사 9,1~2)](favo"; h{lio")

    “너희는 세상의 빛(fw'")이다. ...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태복음 5,14~16)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누가복음 1,78~79)

    “그 안에서 창조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fw'")이었다[“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깨닫지/받아들이지] 못하였다. [...] 그 말씀은 참 빛이었으니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한복음 1,4~5・9) “나는 세상의 빛이다(ejgw eijmi to; fw'" tou' kovsmou).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fw'" th'" zwh'")을 얻을 것이다.”(요한복음 8,12)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2,46)

    『신약성서』에서, 그것도 상당히 후대의 작품에서 겨우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빛’이라는 메타포적 개념은 그노시즘적 혹은 신비주의적인 ‘내면의 빛’도 ‘태양’과도 무관하다. 그 빛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의 ‘생명과 평화’의 메타포였다. 빛과 어둠은 신적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에 대한 메타포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인 빛과 어둠의 갈등을 그노시즘적/마니교적 인간 내면의 갈등으로 종교화했다. 함성호가 분석하고 있는 그 교회의 건축가는 바로 그 종교현상을 물질적 공간으로 구축한 것일 수 있다. 나아가 함성호는 바로 그것을 읽어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의 빛의 은유가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
    위에 인용한 성서 본문에 비추어 교회 건축에서의 빛에 대해 질문해 보자. 신적 빛이 비추어질[비추어져야 할] 그 공간은 어둠의,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인가?[아니, 원죄에 의한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가득찬 공간? 아니면 ‘비도덕적 사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은 신자들로 가득찬, 그러기에 어둡고 그늘진 공간?]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사제/목사가 축수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하듯이 태양 빛이기는 하지만 신적 빛으로 변화된 빛인가? 자연의 룩스(lux)가 신적 루멘(lumen)으로 메타모르포시스되는 것인가? 아니 교회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봉헌’된 건축물[작품]이기에 그 속의 빛은 자연스럽게 성스러운 것인가: “봉헌한다 함이란, 작품적으로 세워내는 가운데 성스러움이 성스러움으로서 열려보여지고 신이 그의 현전성의 열린 장 안으로 불리워 들여진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성스럽게 함’을 뜻한다. 봉헌함에는, 신의 품위와 광채에 대한 찬양으로서의 찬송함이 속한다. 품위와 광채란, 그것들과 나란히 또는 그것들의 배후에 그밖에 또 신이 서 있는 그런 속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품위 속에서, 광채 속에서 신이 현전한다.”(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in F. -W. 폰 헤르만, 이기상/강태성,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문예출판사 1997, 585~586) 교회 공간 안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평화와 생명의 길을 걷는가? 도대체 건축가들은 왜 교회를 디자인할 때 자연의 빛이 아니라 신적 빛의 메타포에 관심하는 것일까? 어둠=[원]죄, 빛=은총이라는 교리적 이원론을 건축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인가? 오늘 교회 건축의 구조에서 창조되는 빛(루이스 칸)은 ‘생명의 빛’이 아니라 ‘빛의 정치학’, ‘정치적 빛’(political helios)일 뿐이다.

    5
    리차드 세넷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신은 ‘공간의 신’[장소의 신]이라기보다는 ‘시간의 신’이며, 정주의 신이라기보다는 방랑[유랑]의 신이라고 그 독특성을 갈파하고 있다. 그는 유대-그리스도교의 시간 지평에서의 신 인식과 신앙에 어떻게 ‘장소’와 ‘건축’이 침입해 들어왔는가를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을 정초한 오리게네스의 빛에 대한 언술로 접근한다.[그러나 그는 오리게네스의 언술을 상당히 거칠게 다루고 있다].[오리게네스의 『켈수스를 논박함』에서 논박되고 있는 켈수스의 저술 『진리』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니 켈수스라는 사상가가 실존 인물인지조차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스도교를 변증하기 위해 오리게네스가 창조한 사람일 수도, 가상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진리』가 전승되거나 보존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철저히 소멸시켜버린 것일 수도 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한다.(사도행전 17,18) 오리게네스도 켈수스를 에피쿠로스 철학자로 보면서 논쟁한다. 그러한 논쟁 속에서 오리게네스는 철학적 신학, 형이상학적 신-존재론을 태동시켰고, 점차 관념화된 신-그리스도가 역사의 예수-사건[예수-포이에시스]을 지워나가게 된다. 지식인 그리스도인의 아테네 아카데미아와의 논쟁이 그리스도교 [신학적] 사유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이후 지식인의 공간에서 그 신학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나아가 교리화되면서(예를 들어 삼위일체) 그리스도교 사유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예수의 역사적 흔적의 망각 혹은 봉인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포이에시스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망각되고 봉인되는데, 그것이 ‘종말론’이라는 신학적 패러다임이다. 예수는 그것을 갈릴리 선포에서 집약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 1,14) 예수의 삶은 이 선포의 역사적 실천이며, 나는 그것을 ‘예수-포이에시스’로서의 진리 생산으로 이해한다. 종말론이란 다름 아니라 ‘도래하고 있는 것’[메시아 사건]과의 마주침에서 사는 삶의 행태다. 그러기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아르케(arche)가 아니라 텔로스(telos)[리쾨르는 이것을 ‘목적론’이 아니라 ‘목적인’으로 바꾼다]를 중심으로 세계를, 역사를, 삶을 사유한다. 리쾨르에 따른다면, “오직 텔로스를 가진 주체만이 아르케를 가진다.” “앞쪽을 향해 자신을 넘어서도록 이끄는 통합 운동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폴 리쾨르, 양명수 옮김, 『해석의 갈등』, 아카넷 2001, 189, 190) 예수는 신적 아르케에서 자신의 삶의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고 있는 텔로스로서의 하느님의 주권을 근거로 실천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거는 도래하고 있는 하느님의 주권으로서의 텔로스를 바탕으로 한 예수-포이에시스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아르케는 그리스 철학적 아르케가 아니라 예수-포이에시스이며, 그 텔로스는 도래하고 있는 하느님의 주권이다.
    오리게네스를 읽을 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대 수사학[글짓기 방법]에서, 나아가 변증적 언술에서 언술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어떤 전승된 자료에서 그 문맥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보장하거나 강화시킬 수 있는 단어나 문구, 나아가 문장들을 끊임없이 단장취의(斷章取義)한다. 오리게네스는 켈수스가 인용하고 있는 “어떻게 내가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신에게 가는 길을 경험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당신은 나에게 신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어둠 속에 앉아’ 있고 그 속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화가나 조각가가 만든 나쁜 작품들에 빠져 있으며, 또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눈에 보이는 것들과 육감적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무시하지 못하고 그것들에 매여 있으며, 빛이신 창조주에로 향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말씀이라는 빛나는 광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불확신과 불신앙과 무지 속에서 하나님 대신에 그 초상화를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말씀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전능한 하나님에게로 인도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민족이, 곧 이방 민족이 한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한 빛이 비추었기 때문입니다.(마태 4,16; 이사 9,2) 그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입니다.”(오리게네스, 임걸 옮김, 『켈수스를 논박함』, 새물결 2005, 141)

    리차드 세넷은 오리게네스의 빛 이해가 교회 건축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빛은 어디에나 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실체 없는 하느님이 어디에나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어디에나 있고, 보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새로운 신학이 그 실체 없는 결론에 이른 듯했을 때, 물리적 세계가 침입했다. 바로 빛은 어디에나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건조물, 건물,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리차드 세넷, 임동근/박대영/노권형 옮김, 『살과 돌』, 문화과학사 1999, 140~141)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통한 순례여행’을 할 수 있는 장소를, 공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상의 공간이 아닌가?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스도인의 순례 여정을 말한다: “카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도성을 세웠다고 했다. 아벨은 나그네로서 도성을 세우지 않았다. 성도들의 도성은 위에 있다. 이 도성은 비록 현세에서 시민들을 낳고, 그 왕국의 시대가 오기까지는 시민들에 에워싸여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몸으로 부활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한데 모으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약속한 왕권이 주어지면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군주이며 세기의 임금인 분을 모시고 끝없는 시간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역주, 『신국론』(제11~18권), 분도출판사 2004, 1546~1547) 지상의 도성이 하늘 도성에 이르는 시간의 순례여행을 위한 임시거처라면, 교회는 왜 그렇게 대규모의 견고한, 온갖 장식을 붙인 건물을 끈질기게 지었을까?
    종교의 역사에서 우리는 한 종교가 지배 이데올로기적 종교, 말하자면 국가 종교가 되었을 때 그 현상형태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서구 건축사에서도 불멸의 건축으로 꼽히는 ‘하기아 소피아’는 그 변화의 실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의 건축에 대한 비판에서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 건축 자체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그리고 그것을 건축할 수 있었던 인간의 역량을 굳이 폄하할 것도 없다. 나의 물음은 하늘의 도성을 향한 시간의 순례여행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그런 건물이 필요했는가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향해 몰려들던 병들고 배고픈, 소외된 사람들(오클로스)이나, 바울이 말한 비천하고 멸시받는 사람(고전 1,28)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종교다. 교회는 황제 대관식의 공간이다. 그러한 그리스도교의 정체를 눈에 보이게 하는 길은 그에 걸맞는 건축을 하는 것이다. 이제 건축으로서의 교회는 단순히 에클레시아를 ‘위한’ 건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에클레시아가 된다. 아니, 신체(神體)를 건축한 것 아닐까? 임석재는 하기아 소피아를 다음과 같이 읽는다:

    “하기아 소피아는 하느님이라는 비육신적 존재를 상징했다. 하기아 소피아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아름다움은 눈에 안 보이는 초월적 정신상태로 정의되었다.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이런 비물질적 정신상태를 건물이라는 물질적 물리체를 통해서 표현해야 하는 새로운 요구사항이 주어졌다. 부유공간은 이것을 만족시킨 처리방식이었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부유공간은 기하에 빛작용을 더해 얻어졌다. 기하는 물리적 구조체로 번안되면서 건물이 되었다. 여기에 빛이 더해지면서 다시 형이상학적 숭고미로 승화했다. [...] 돔은 마치 빛에 의해 지지되어 공중에 떠 다니는 듯했다. 물리체인 돔의 물질성이 비물질화되었다. 이것은 곧 이 땅 위에 하느님이 존재하심을 증명하는 건축적 증거였다. 기하와 빛이 어우러져 기독교의 신비주의를 찬양했다. 기하에 빛이 더해지면서 성스러운(하기아) 지혜(소피아)가 완성되었다.”(임석재, 『서양건축사 2: 기독교와 인간』, 북하우스 2003, 370~371)

    나는 임석재의 하기아 소피아 읽기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의 물음은 단순하다. 하기아 소피아 어디에 정치권력이 십자가에 처형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의 삶이 있는가? 이 물음은 서구 건축사에서 연구 대상이 되는 모든 교회 건축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임석재의 읽기가 타당한 것이라면 하기아 소피아는 물신의 건축이다.
    바울은 아테네의 신상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ceiropoihtoi" naoi")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4~25) 로마서에서는 ‘범신론적’인 언술이라고[물론 범신론과는 달리 ‘범재신론’으로 접근하지만] 할 수도 있는 말을 한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로마서 1,19~20) 그런데 오늘 그래도 진보적 성향을 갖는 신학적 담론으로 사유되고 구성되고 있는 ‘신학적 미학’에서조차 바울의 말을 구부린다: “신학적 미학은 하나님의 ‘이해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무한하고 비물질적인 하나님을 감각적 표상과 언어에 묶여 있는 유한한 인간 지성이 알 수 있는가의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종교적 표상이나 상상력의 문제는 보다 포괄적인 아날로지에 대한 인식론적 논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리차드 빌라데서, 손호현 옮김, 『신학적 미학』, 한국신학연구소 2001, 126) 오늘 최첨단의 자연과학에서도 우주와 생명의 신비에 대한 앎의 한계 앞에서 겸손해진다. 인간의 앎의 한계 너머의, 그러나 우주 바깥이 아니라 내재하는, 내재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우주를 우주이게 하는 그 그루터기를 달리 말할 수 없어 ‘신[적인 것]’으로 말한다. 350년전 스피노자는 우리 ‘몸’의 역량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기에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이 창조한 만물에 내재한 만물의 역량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과, 하느님의 ‘이해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은 다르다. 우리가 오늘 신학 전통에서의 교리적 특수성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지만 시대착오적 시비걸기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성서』와 신학으로서의 교리를 독점하고 있던 도그마크라시가 다음과 같이 분석되는 교회를 건축할 때, 신의 계시로서의 말씀이라고 주장한 바울의 말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건축물의 형상화는 어떤 선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로크의 건축물들은 주지하다시피 제후의 권력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위한 선전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형상화의 수단은 무대 바깥에서 은밀히 기능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도취의 극장이었다. 도취하게 만드는 극장은 어떤 임의성을 마치 기적처럼 예술 속에 혼합하려 했던 것이다.(에른스트 블로흐, 박설호 옮김, 『희망의 원리』(3), 열린책들 2004, 1448~1449)

    6
    빛은 건축가에게 꿈이자 악몽이다. 건축한다는 것은 빛과의 전쟁 없는 전투다. 그러나 빛은 빛일 뿐이다. 더욱이 빛이 없다면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 태양, 그 빛은 지구의 생명에게 베푸는 우주적 은총이다. 자연 그 자체도 은총이다. 루이스 칸은 말한다: “빛은 모든 존재의 증여자로서, 물질이 소모된 빛이다. 빛에 의해 그림자가 생기고, 그림자는 빛의 일부분이다. 빛에서 침묵으로, 침묵에서 빛으로 이어지는 경계선상에서 영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곳에서 존재의 욕망과 표현의 욕망이 교차한다.”(루이스 칸, 김경준/김홍용 편역, 『깨달음과 형태』, 시공문화사 2001, 75) 우주적 자연의 운동과 생성에 의한 ‘거저줌’으로서의 빛이라는 은총 그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건축 작품으로 혹은 예술로 표현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칸이 “구조는 빛의 창조자이다”(위의 책, 78)고 할 때, 구조를 통해 빛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하는 건축가(혹은 건축주)의 욕망은 어떤 욕망인가? 그것은 순수한 예술적 욕망일까?
    건축가가 건축하기 위해서는 ‘악마와의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다(프랭크 게리)는 건축가의 감추어진 분노가 교회 건축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지오 폰티는 악마와의 계약을 넘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지어진 교회 건축을 읽는다: “반들거리는 현대 교회를 잡지에서(혹은 직접 대하여) 볼 때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들이 종교의 본질인가? 교회가 ‘흥미거리’로 흐른다면 건축가는 악마에게 유혹된 것이 아닌가? 악마에 빠져 건축가는 교회를 자신의 예술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또는 더욱 나쁘게는 하나의 실험을 위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동기가 성당을 맡고 있는 신부들을 악에 물들게 하고 비종교적인 것으로 기울게 하지 않는가?”(지오 폰티, 김원 역, 『건축예찬』, 열화당 1986, 258~259) 폰티의 말에는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본질을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건축가에 대한 비판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을 전혀 모르는 건축가가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잘못 알고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전문 신학자가 아닌 건축가는 적어도 교회 건축의 역사와 이론을 통해 교회 건축을 이해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 건축의 전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건축가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 건축이 그리스도교의 뿌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특수한 교리에 근거한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교회 건축의 전형성이 역사적인 특수한 교리에 근거한 것이지만, 오늘 그 교리가 오히려 반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비판되고 폐기되었거나 새롭게 사유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 건축가가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교회(건축주)의 건축에 대한 앎이 그 뿌리를 왜곡시키고 있는 교리적 이데올로기라면 어쩔 것인가? 교회(건축주)와 건축가는 지으려고 하는 건물이 종교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건물을 하이데거가 말하는 ‘봉헌’된 건축이기를 욕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여기서 예수의 삶을 생각해보자. 광야에서 예수는 신[신적 세력]으로부터 도주한다. 어떤 신적 능력도 자신의 정체성과 삶에 대해 개입하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신은 예수로부터 얼굴을 돌린다. 칼 바르트를 따른다면, 예수는 “마치 그의 절친한 자나 후원자 또는 그의 고문이나 교섭자인 체” 하기를 거부하며, 하느님이 자기의 필요성의 중심에 맞추어 방향을 결정하도록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거룩성을 낚아채 자신의 척도[인간의 진리]에 알맞게 치수를” 맞추려 하지 않으며,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이면 우상이 판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칼 바르트, 조남홍 옮김, 『로마서 강해』, 한들 1997, 30~32)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산을 통해서 정의하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들간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신이지, 그 역은 아니다. 내가 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들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 나는 위대하고 전능한 존재의 현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 신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은 인간적 상황을 명백하게 해 불 수 없는 관념이다. 반대로 인간적 상황이 신이라는 관념을 명확하게 해 준다.”(E. Levinas, “Transcendance et hauteur”, C. Chalier & M. Abensour eds., Emmanuel Levinas, Paris: Editions de Herne, 1991, 110.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사상과 그 원천』, 민음사 2002, 60, 각주 32에서 재인용) 예수와 하느님이 마주치면서 일어난 유일한 사건, 그것은 보이지 않으며, 예수 자신도 알 수 없게, 그러기에 그 사태가 신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사건’, 그 사건은 ‘빈-무덤’일 뿐이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빛은 바로 그 사건으로서의 ‘빈-무덤’에서 터지는 것 아닐까? 그 빛이야말로 ‘생명의 빛’이 아닐까?

    [모리스] 블랑쇼에 의하면, 세계를 밝게 비추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예술은 세계의 기초가 되는 모든 빛이 차단된 황량한 지하의 세계를 일깨운다. 예술은 우리의 거주에, 그리고 사막에서의 오두막의 기능을 하는 우리의 건축물들의 찬란함에 추방의 본질을 되돌려 준다. 고전 미학과는 달리 블랑쇼에게도 하이데거에게도 예술은 세계 배후의 이상적인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빛이다. 하이데거에게 이 빛은 위로부터 내려와 세계를 만들고 거주처를 구축하는 빛이다. 반면 블랑쇼에게 이 빛은 지하로부터 올라온 밤의 어두운 빛으로 세계를 해체하고, 그 세계를 기원으로, 되풀이됨으로, 중얼거림으로, 끊임없이 딸각거리는 소리로, 어떤 ‘깊은 옛날, 아주 먼 옛날’로 인도한다. 비현실에 대한 시적 탐구란 실재의 맨 밑바닥을 탐구하는 것이다. [...] 하이데거적 세계는 비참하고 곤궁한 인간 조건을 초월한 영주들의 세계이거나 그러한 영주들에게만 눈을 돌리는 노예들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적 세계에서 행동은 영웅주의적이며, 거주처는 보호처이기 이전에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왕자의 궁궐과 신들의 신전이다. 신들의 방문과 그들의 위대함을 위안삼는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들의 삶.(에마누엘 레비나스, 박규현옮김,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동문선 2003, 31~32)

    빛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운동의 극한을 넘어서면서 폭발하며 터져 나온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이 마리아의 자궁 속으로 잉태될 때, 예수가 불의하고 고난에 찬 삶의 현실과 교전[개입]할 때, 예수의 주검을 가둔 무덤의 돌문이 열릴 때, 그리고 예수가 다시 갈릴리로 향할 때,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그 빛은 “지하로부터 올라온 밤의 어두운 빛”이 아닐까? 그 빛이야말로 ‘빛의 정치학’을 위해 포획되거나 착취될 수 없는, 낮은 곳에서 솟는 생명과 평화의 빛, 구원의 빛이 아닐까?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야 말로 빛에 가한 구조적 폭력, 구조화된 빛에 의한 폭력의 전형이다. 십자가 형태로 뚫린 벽 한복판을 뚫고 들어오는 빛, 빛의 십자가는 한 칼에 미망을 자르는 선(禪)적 사무라이, 사무라이 선(禪)의 정신을 보여준다. 고통과 광채를 결합시킨 빛의 십자가는 사도-마조키즘적이다. 십자가는 권력에 의한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성상파괴를 위한 투쟁, 즉 낡아빠진 광휘로 신체와 사물들을 둘러싸는 일에 한창 논쟁을 벌이고 있다. 594년 테오들린이 남편 토리노 공작에게 선사한 그 유명한 ‘강철 왕관’은 금도금한 강철 테이다. 권력은 위선적인 광채 밑에 속박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 관을 쓰는 자에게 보여주는 왕관이라고 사람들은 확신했다. 빛나는 아우라는 바라보는 자의 인식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 신격화된 황제의 얼굴, 예수와 성자들의 얼굴을 감싸는 망망 허공의 빛, 후광들이 다 그렇다.(폴 비릴리오, 김경온 옮김, 『소멸의 미학』,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136)

    루이스 칸은 말한다: “자연을 깨닫는 것이 형태이다. 형상은 형태의 표현이다. 형태는 꿈이나 믿음을 실현하려는 욕망에서 생긴다.”(루이스 칸, 위의 책, 78) 교회 건축에서 교회와 건축가가 빠지는 함정 혹은 아포리아는 자연을 탈자연화 혹은 탈물질화하려는, 성화(聖化)하려는 욕망에 의해 건물을 물신화하는 것이다. 폴 틸리히는 그것을 ‘악마적인 것’(the demonic)이라고 비판한다. 교회 건축일수록 자연의 깊이, 그 잠재력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자연의 빛을 건축적으로 성화하려는 것보다 생태건축적 관점에서 빛에 접근하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 신앙에 이르는 바른 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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