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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촛불집회를 보는 두 가지 시각(맑스 코뮤날레 3차 워크샾)
  • 제3시대
    조회 수: 4767, 2008.07.01 15:36:13
  • 촛불집회를 보는 두 가지 시각
    : 대중의 두 얼굴과 좌파의 정치학

    박영균(한국철학사상연구회)

    1. 1987년 6.10과 2008년 6.10

    현재 촛불집회를 읽는 가장 저널리스틱한 방식은 87년 6.10과 08년 6.10을 연결하는 것이다. 한편에서 사람들은 08년 6.10을 87년 6.10의 역사적 연속성 위에서 읽는다. 다른 한편에서 사람들은 08년 6.10을 87년 6.10과 차별, 단절이라는 의미 속에서 읽는다. 전자의 시각에서 현재의 촛불집회는 미완의 혁명이자 97년 체제를 만들어왔던 87년 민주항쟁의 연속성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읽는다. 여기서의 쟁점은 형식적 민주주의, 대의제-정당정치의 위기이다. 후자의 시각에서 08년 6.10은 87년 민주항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 새로운 운동세력의 등장이다. 여기서의 쟁점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린 87년-97년의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 주체와 변화된 현실에 근거한 과제, 형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시각의 엇갈림은 똑같이 편향된 이해를 낳는다. 전자는 87과 08년을 단순한 역사적 진보의 과정으로, 민주주의의 확장으로만 읽는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신비화하고 정당정치-대의제의 위기 해결에 방점을 둔다. 이들은 정당정치의 민주화, 대의제의 정상화, 또는 대의제의 보완으로서 참여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민주주의’-제도화된 민주주의적 형식을 신비화한다. 반면 후자는 87년과 06년을 단순 비교하면서 대립시키고 87년을 이미 낡은 운동이자 정치로 읽는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망각하고 현재의 대중을 독특한 것으로 찬양하면서 운동과 정치, 계급정치와 생활정치를 대립시키는 저널리즘과 결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후자에 비해 훨씬 낡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다. 전자의 경우, 시대정신은 퇴행적이다. 그것은 여전히 87년 6.10 이전의 지형 위에 존재한다. 그들은 ‘미완의 민주혁명’이었던 6.10의 ‘미완’을 여전히 붙잡고서 6.10의 계기가 되었던 그 이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베버가 말하는 ‘이념형’은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적 민주주의, 시민 민주주의라는 신화이다. 이들은 한국의 병폐로, ‘천민자본주의’, ‘시민사회 미성숙’, ‘전근대적 봉건성’ 등을 제시한다. 노무현, 최장집을 비롯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과 시민 민주주의자들, 그리고 심지어 일부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좌파들(대표적으로 민주노동당 “제2의 6월 항쟁”)은 87년의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오늘날의 6.10에 투영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 관점에서 오늘날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반제도’적 성격에서 대중들에 대한 공포를 느끼거나(최장집을 비롯한 제도적인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 아니면 대중들의 반제도적 투쟁을 정당-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로 가두거나 수렴하려고 한다(주로 좌파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
    반면 후자는 더 이상 6.10이라는 시대정신 위에 서 있지 않다. ‘미완’은 그 시대와 더불어 지나갔으며 그것은 더 이상 현재성을 가질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정상적 민주주의=서구적 민주주의’라는 이념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의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투쟁 과정 속에서 변화할 뿐이다. 87년 6.10과 08년 6.10은 다르다. 오히려 08년 6.10은 87년 6.10이 만들어 온 체제, 보다 정확히 98년 체제(IMF-신자유주의)가 만들어 온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핵심은 더 이상 ‘형식적 민주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형식적 민주주의, 정당정치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하나의 대립 전선을 축으로 하여 두 가지의 입장이 착종되어 있다. 대립의 대상은 87년 6.10으로 표상되는 구좌파, 또는 계급투쟁적 입장이다. 이것을 축으로 하여 이들은 현재의 촛불집회를 “탈현대적 정치”(김호기) 또는 “정부의 전근대성과 시민의 탈현대성 간의 싸움”(진중권)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핵심은 첫째, 촛불집회가 전통적인 계급사회적 쟁점이 아니라 환경․생명․평화와 같은 ‘위험사회’ 쟁점에서 나온다고 보면서 시민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촛불집회를 제도 또는 정당정치의 보완, 또는 다른 하나의 축(경제적 이해갈등과 국가의 계급이해를 상호 조정하는 제 3자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운동이 계급운동 세력과의 대립을 통해서 발전되어 왔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서구적 시민사회운동을 이념형으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관점은 크게 두 가지의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현재의 촛불집회라는 ‘거리 정치’를 ‘제도 정치’의 위기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 제도 정치로 수렴되어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거리 정치’를 형성하고 있는 ‘운동’ 그 자체의 역능성에 주목하면서 그것의 발전을 통한 시민사회운동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둘째, 새로운 매체의 특성에 주목하면서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대의 출현을 제시하는 관점이다. 이들은 “웹 2.0세대”, “탈물질적 가치의 정치, 욕망의 정치에 맞서는 가치의 정치”(김호기), “유비쿼터스”, “물질적 대립을 벗어난 정치적 시위”(진중권) 등과 같이 규정하면서 “자신이 손해를 봐서라기보다는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바탕”(김연수)한다는 점에서 정치경제학적 프리즘을 통해서 해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매체의 특성을 과장함으로써 매체가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적인 오류에 빠지거나 현상적인 집회의 특징을 과장함으로써 각각의 투쟁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맥락-상황을 무시하고 대중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을 반복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환상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삶의 욕망을 ‘인터넷’이라는 ‘탈물질화된 매체’의 특성에 투영시킴으로써 마치 촛불집회 그 자체가 ‘탈물질화된 운동’이며 ‘인정투쟁’과 같은 ‘가치의 정치’인 듯한 환상을 유발하면서 계급정치에 생활정치를 대립시키는 ‘수동적, 반동적 정념’(=기존 정치에 대한 환멸이 유발하는 반동적 정념)에서 나오는 오류를 생산한다.


    2. 촛불집회,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위기

    촛불집회가 ‘탈물질화된 가치의 정치’라고 규정하는 관점은 단순히 87년 6.10에 대립항으로서 현재의 촛불집회를 규정할 뿐, 87년 이후 변화되어 온 한국 지배체제의 변화라는 맥락 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규정은 87년, 특히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90년대 중반 이후 계급정치운동에 대해 대립하면서 분화되어 온 시민사회운동의 자기 정당성 속에서 현재의 촛불집회를 본다는 점에서 당파적일 뿐만 아니라 내성적이다. 물론 당파적인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당파성은 자기 한계와 오류를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사회운동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자유주의 지배블록의 한 축을 형성해 왔으며 계급정치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권의 출현에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계급정치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또한 실패했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촛불집회는 그것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자기 검증이 없기 때문에 촛불집회를 단순히 87년 6.10과 대립시킬 뿐, 그것이 본질적으로 생성되는 정치경제학적 지형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촛불집회는 한국사회 전체의 역동적 움직임 속에서 본다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내재적으로 예고된 것이었다. 가장 큰 표차로 이겼다고 보수언론에서 선전해왔던 이명박 후보가 전체 국민 중에서 얻은 실질적인 지지율(전체 유권자 대비 득표율)은 30.5%에 불과하다. 이것은 87년 이후 대선후보 가운데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노무현 34.3% 김대중 31.9%, 김영삼 34.8%, 노태우 33%). 따라서 이명박 후보가 큰 표차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가 보수화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63%라는 역대 대선 중 가장 낮은 투표율에 있었다. 이것은 결국,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기존의 지배정권에 대한 실망과 소위 민주화된 정부라는 그 권력에 대한 이반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 개혁’ 세력에 대한 실망과 권력 이반은 총선에서도 지속되었으며 48.7%이라는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압승 또한 이런 지속적인 지배체제로부터의 이반에서 나온 것이었다.
    ‘민주냐 독재냐’의 전선축은 이미 해체되어가고 있었으며 ‘정당정치의 위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정당정치의 위기’는 ‘정당시스템’의 문제인가?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위한 노무현정권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회를 민주화하기 위한 시민사회운동 또한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과도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중들은 민주화를 추구하는 이들 정당과 시민사회운동을 배반했는가? 적어도 현재 촛불집회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다면 대선과 총선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이반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현재의 촛불집회가 놓여 있는 역사적 맥락과 구체적 상황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정치경제학이 필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적어도 87년 6.10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형식적 제도화를 통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정당정치의 후진성을 지적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근원은 아니다. 근대적인 정당체제를 만들려고 했던 노사모의 실패는 무엇을 반증하는가? 현재 지배체제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의 실종, 또는 이명박의 독선적 리더쉽, 민주화의 위기로부터 나오는가? 그렇다면 왜 이명박에 대한 지지 철회가 다른 당의 지지로 전화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따라서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형식’, 또는 ‘민주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98년 체제, 즉 형식적 민주주의와 결합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자유주의적 통치체제 그 자체에 있다. IMF 이후 한국의 지배 권력은 ‘민주주의냐 아니냐’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냐 반신자유주의냐’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것은 이번 대선에 나타난 투표 성향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17대와 16대 대선에서의 투표 성향을 보면 신자유주의적 개혁 세력까지를 포함한 개혁․진보진영의 득표율(전체 투표자 대비 득표율)은 16대 48.5%에서 17대 31.8%로 격감했으며 범보수세력의 득표율은 46.1%에서 63.4%로 격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지율을 보면 범개혁세력은 34.4%에서 20.0%로 격감한 반면 범보수세력의 지지율은 32.7%에서 약 40% 정도로 소폭 증가했을 뿐이다. 따라서 보수언론이 선전하는 큰 폭의 격차는 ‘범개혁세력’으로부터 이탈된 기권표에 있었다. 항간에서는 이를 두고 이명박 당선의 최대 공헌자는 노무현이라고도 하고 이번 대선이 미래를 향한 선택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망에 따른 선택이라는 점에서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중적 공분의 본질은 ‘민주정부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미 ‘국가’의 공공성, 외부에 대항하는 민족공동체의 보편이익이라는 외피조차 벗어던지고 ‘지구화된 자본’의 시녀가 되어 버린 국가권력 그 자체에 있다. 이것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며 그것의 본질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이다. 따라서 대중들의 제도정치로부터의 이탈, 체제 이완은 ‘자본의 시녀’가 되어버린 국가권력에 대한 반발이자 저항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대중들은 더 이상 국가권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권력에 대한 반체제적 이탈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애증’의 관계일 뿐이다. 대중들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권력’을 욕구한다. 여기에 대중의 이중성이 있다.


    3.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대중의 이중성

    촛불집회를 ‘탈물질화된 가치의 정치’라고 규정하는 것은 대중들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보인 양태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대중들이 이에 동조 또는 방조했다. 대중들은 황우석 사태가 보여주듯이 ‘국익’, ‘국가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이것은 기간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통해서, 그리고 합리적인 시민사회운동을 통해서 확산되어왔다. 대중들이 대선과 총선에서, 특히 4.9총선에서 한나라당을 비롯한 범보수진영에 개헌이 가능한 203석을 몰아주고 범개혁세력에 96석만을 준 것은 이명박정권의 747공약에 대한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 되세요’, ‘뉴타운 공약’이 휩쓴 것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다름 아닌 ‘잘 살게 해 달라’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대중이 총선 이후 한 달도 안 되어 대규모 촛불집회에 나서게 되었다. 이 갑작스런 반전을 단지 ‘물질적 이해의 정치’에서 ‘탈물질화된 가치의 정치’로의 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것은 ‘탈물질화’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 안에서 형성된 욕망의 반전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호기는 ‘인정의 정치, 가치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생활의 정치’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마치 ‘생활의 정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탈물질적이고 순수한 생명의 욕구에서 나온 것으로, 소비적 욕망과 관계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선-총선에서 나타난 대중의 물질적 욕망이 그렇게 빨리 ‘탈물질적인 가치’로 이동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여기에 논리적 모순이 있다. 오히려 이런 반전은 대중 그 자신이 가진 욕망의 이중성으로부터 해명되어야 한다. 실제로, 대중의 욕망은 물질적 욕망 속에서 이중적으로 존재해 왔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이끈 힘은 ‘국가경쟁력 강화와 합리화의 논리’, ‘국익과 경제’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무한경쟁으로 그들을 내몰았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은 80년대 중반 3저 호황을 기점으로 발전해 온 대중소비사회의 소비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모순의 지점에서 대중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대타자, ‘외설적 아버지’를 요구했다.
    이명박 정권이 성패를 가르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명박 정권은 747공약을 내세웠지만 이미 이런 실패는 작년 말부터 예견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모기지론이 세계 경제를 어둡게 하고 있었다는 점이 예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명박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지구화 그 자체이다. 애초 이명박 정권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747공약을 통해서 대중들의 욕망을 마구 부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풀려진 욕망이 오히려 현재의 국면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그들은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욕망은 그것이 자신의 물질적 소비욕망을 채울 수 없는 한에서 이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명박 정권이 대중들의 소비욕망을 채울 수 있다면, 그리하여 호황을 통해서 시장 만능주의적 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중의 이중성, 대중적 욕망의 이율배반적 성격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운동을 생산하며 대중의 역동적 저항을 생산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을 마치 탈물질화된 새로운 ‘가치’, ‘세대’의 출현인 것처럼 치장하면서 정치경제학와 계급정치적 사고에 대립시키고 대중의 자발성을 신비화하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촛불집회가 대중적 공분과 거대한 흐름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내적으로 형성된 삶의 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5.2일 맨 처음 집회를 시작한 여고생들만 보더라도 쇠고기만의 문제에서 불만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영어몰입교육, 0교시수업 등 교육 전반에 대한 불만이 내재되어 있다가 터져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번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대중의 욕망을 굳이 대립적으로 표현하자면 ‘향유’라기보다는 ‘결핍’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결핍’이 단순한 ‘필요의 욕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인 것’이다. 대중적 욕망의 형성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소비사회의 욕망은 욕망을 상품화하고 자본의 욕망으로 바꾸어놓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욕망을 자본에 저항하는 욕망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정보화’, ‘자동화’와 같은 과학기술혁명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것은 노동의 배제를 낳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불안정노동과 실업, 자영업자와 소생산자들로의 다양한 분화와 갈등, 그리고 전반적인 빈부격차의 확대와 생산의 독점화 강화는 이런 자본의 지배가 낳은 문제들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윤증식은 생산-소비의 이원적 메커니즘의 순환적 패턴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노동이라는 자본의 외부를 필요로 한다. 노동력은 노동의 재생산이며 노동의 재생산은 소득을 통한 소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때 노동의 재생산은 주어진 생산력에 따른 대중적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욕망은 언제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이 각인된 소비의 욕망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욕망 때문에 자본에 대한 저항으로 전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본의 존재양식인 가치증식은 주기적으로 이원적 메커니즘의 순환을 파괴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자본은 대중의 소비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노동력의 가치(임금)를 자본의 가치증식에 종속시킨다. 여기서 노동은 배제된다. 아울러 자본은 고진이 말하는 것처럼 또 하나의 외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연이다. 자본은 가치증식의 욕구를 따라 자연을 착취하지만 생명은 자연의 순환적 메커니즘 안에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생명’ 그 자체까지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자본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반생명적 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지구화에서 자본은 지구화를 통해서 착취의 구조를 세계화하지만 욕망 또한 세계화하며 성적, 인종적, 민족적 차별을 착취의 구조 속에 접합시키며 생활세계-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전화시킨다. 현재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다원적 주체, 하나의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생활’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의 특징은 정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생명-생활적인 반란이 아니라 ‘정치의 일상화’이자 ‘정치의 전면화’라는 점에서 ‘정치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정치의 확장’이 항상 대중의 양가적 욕망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이다.


    4. 민주공화국, 대중의 두 얼굴

    대중의 양가성이 현재의 촛불집회를 만들어왔다. 현재 촛불집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노래는 현재 진행되는 촛불집회에서 대중들이 지닌 두 가지 얼굴을 가장 잘 보여준다. ‘공화(republic)’은 ‘공적인 일’이라는 ‘res publica’에서 나온 말이며 ‘res publica’는 인민을 뜻하는 ‘populus’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공화국이란 주권을 가진 자들이 사적 이해가 아니라 공공적 관점에서 참여와 협력에 의해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공화국은 반드시 민주주의적 지배형식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특정한 개인에 의한 지배가 아닌 주권을 가진 자들, 예를 들어 귀족이나 제후, 시민들의 협력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체제이다. 따라서 공화국=민주주의는 아니지만 ‘공공의 이해’와 ‘주권자들의 협력’에 의한 통치라는 점에서 공동체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주권재민의 원칙에 의해서 각 개인들이 주권을 행사하고 그 주권의 참여와 협력에 의해 통치가 행사하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대중들이 ‘민주공화국’과 ‘권력의 주인으로서 국민’을 내세우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이 국가권력의 주인으로서 민주주의적 주권의식과 참여와 협력이라는 공화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기표’들일 뿐이다. 문제는 이 기표들이 놓여 있는 맥락과 상황이다. 대중들의 욕망은 이 기표를 중심으로 응축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대중들은 ‘민주’, ‘공화국’이라는 ‘기표’를 통해서 ‘인민의 공동체’, 공공적 삶에서의 호혜적 관계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욕망은 ‘민주’와 ‘공화국’이라는 기표에 부착되어 있다. 여기서 민주는 ‘주권재민의 주권의식’으로, ‘공화국’은 공공적 이해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따라서 이것은 ‘국민국가’의 주권의식, 민족국가적 폐쇄성과 일체성, 국가주의적 욕망으로 전화된다. 현재 촛불집회의 대중들 속에서 작동하는 ‘국가주의’적 코드는 ‘대한민국의 주권적 자긍심’으로 표현된다. 그들이 쇠고기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단순히 ‘먹을거리의 안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검역주권’과 같은 권리를 포기했다는 ‘민족국가적 자긍심’, ‘주권’으로 표현되는, 자기 자존의 손상이라는 문제가 함께 걸려 있다. ‘애국가’가 불려지고 ‘대한민국’이 외쳐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국가적 자긍심’이라는 코드에 부착된 국가주의적 욕망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저항적 의식을 생산한다. 하지만 이런 욕망은 제 3세계 국가에 대해서는 ‘차별화’, ‘식민지적 하위주체의 우월성’이라는 형태로 전화될 수 있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현재의 국가가 자신의 이익=민족, 국가의 이익이라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의 국가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시녀가 되어 그들의 욕망, 소비욕망을 포함하는 물질적 욕망이 박탈되는 데에서 출발한다. 만일 공화국이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공적인 일’로서 ‘공화’의 이념은 ‘사적인 이해’에 선행하는 것으로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res publica’는 ‘사사로운 일’이라는 의미를 가진 ‘res privata’에 대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화국에 대한 욕망은 사적인 것에 대항하는 공적인 것의 우위라는 ‘공공성의 신화-억압성’을 또한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적 주권의식 또한 그런 공화의 이념 속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공익=국익이 자신들의 이익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것은 곧장 전체주의적인 권력으로 전화한다. 지난 10년 동안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행해진 ‘민영화의 논리’와 ‘파병의 논리’, 그리고 황우석 사태에서 보여준 광기들은 이를 반증한다.
    촛불집회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념도, 공화의 ‘가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냉혹한 경쟁의 장이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자신의 이기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요구한다. 박정희 신드롬-이명박의 성공신화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이런 대중들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대중들의 욕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욕망은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하며 평범한 욕망이다. 문제는 그 욕망이 ‘공공성’과 ‘타자에 대한 억압’을 생산하는 권력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이런 대중들의 욕망을 파고든다. 관료제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증이 카리스마를 생산하고 무한경쟁의 전쟁터가 죽음본능을 ‘파쇼’로 바꾸어버릴 수 있다. 따라서 대중의 두 얼굴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대중은 양가적(ambivalence)이다. 그들이 외치는 ‘민주’도, ‘공화국’도 그들의 욕망을 따라 양가적이다. 지배권력은 언제나 대중들의 욕망을 특정한 코드로 기표화하고 그런 기표들을 통해서 의미를 생산한다. ‘상상된 공동체’로서 ‘민족’이 그러하며 외부적 공동체에 대항하여 그들의 공적 이해를 사수하는 ‘국가’가 그러하다. 따라서 대중의 욕망은 언제나 이런 대중의 욕망을 포획하는 기표의 체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 기표의 체계가 대중의 욕망을 더 이상 포획할 수 없을 때 기표의 체계는 역전된다. 그리고 이때 대중의 원초적 욕망이 드러난다. 그것은 더 이상 기존의 제도와 체제, 질서와 법을 믿지 않는 것, 자기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직접적인 자기통치’로서 직접행동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현재의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것은 정당제도나 대의제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벗어난, 즉 제도화된 통치의 규칙을 허물고 솟구쳐 오르는 반제도화된 대중의 원초적 욕망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방향은 또 다시 자본과 국가의 권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부수고 튕겨져 나가는 대중의 욕망을 대중의 직접적인 자기 통치 원리로, 대중들의 직접적인 자기 삶의 재구성으로, 반자본과 반국가의 저항적 욕망을 상승시켜 가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가들을 비롯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그들이 두려워했던 대중들에 대한 공포는 다름 아닌 이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 ‘무정부상태’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이념도 가치도 아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체제가 유지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인민 자신, 대중 자신의 권력이 아니라 대중들을 향한 권력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 쟁점이 있을 수 있다. 시민운동이 제도정당과 병렬적 관계를 꿈꾼다면 계급운동은 제도적인 모든 방책들을 전술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며 다중운동은 그런 제도화-코드화를 거부한다. 시민운동은 제도화를 거부하지 않고 여전히 합리성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계급운동이나 다중운동에 대립적이다. 반면 계급운동과 다중운동은 대중의 주체화, 대중 자신의 자기 구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 전술적 방향은 다르다. 오늘날 촛불집회의 진정한 쟁점은 여기에 있다.


    5. 대중의 이중성을 보는 두 가지 시각: 다중과 계급

    현재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방향은 명확하다. 대중들은 그 권력이 무엇이었든 간에 현재의 비루한 일상, 참혹한 경쟁의 장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라는 공동체는 ‘리바이던’이다. 그것은 모든 가치와 이념, 희망을 잡아먹고 크는 ‘권력’이다. 만일 대중들이 그것에 포획된다면 대중들은 그 스스로 지배받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제도로부터 이탈되는 대중들의 원초적인 욕망, 호혜적 관계를 꿈꾸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살려내야 한다.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미 자본주의적으로 코드화되어 있는 대중의 욕망, 상품미학 안에서 ‘소비’의 포로가 되어 버린 자본주의적 문화가 아니라 다른 생성의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 아마도 이와 같은 생성의 흐름에 주목하면서 ‘생명의 약동하는 힘’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들뢰즈와 네그리일 것이다.
    촛불집회는 다중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저널리즘적으로 유통되는 ‘다중’은 대중과의 명백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별 없이 차용되고 있다. 네그리가 사용하는 ‘다중(multitudo)’이라는 개념은 ‘대중(mass)’이라는 개념과 다르다. 대중은 하나의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계급과 대립되며 다중과 유사하다. 그러나 대중은 ‘무차별적인 덩어리’이자 ‘개별화되어 있는 모래알 같은 개인들의 총체’라는 점에서 다중과 구별된다. 다중은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개인들이 아니라 서로 적극적으로 접속하면서 상호 공감을 형성하고 ‘공통감각(common sense)’을 생성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립된 개체, 개인, 또는 자기결정권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의미에서의 개체들이 아니다. 이런 개체들의 합인 대중은 아도르노가 우려했던 것처럼 권력자와의 상상적 동일화를 통해서 지배를 생산하는 자들이다. 반면 다중은 적극적인 상호접속을 통해서, ‘차이의 차이화’, ‘다수성’을 생산하는, 따라서 특정한 권력의 품 안에서 일체화될 수 없는 집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을 찬양하는 것과 다중을 찬양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대중을 다중과 동일시하고 이를 통해서 대중에 대한 찬양과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유포한다. 사실, 대중이라는 개념 하에서 현재의 촛불집회를 본다면 문제는 그것이 ‘무차별적인 대중이냐 아니냐?’, 또는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집단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그것은 특정한 정세, 기존 질서에 대한 대중의 공분과 이탈이 가속화하고 집단적 행동이 나타나는 준혁명적 시기 또는 혁명적 정세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현재의 대중적 흐름을 마치 독특한 현상인 것처럼 침소봉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것은 오히려 대중들에 대한 환상만을 유발하면서 그것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는 스타지식인들의 상품들이 될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들뢰즈와 네그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태도이다. 그들은 대중의 이중성과 극단적 반전, 몰화의 위험성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위험’을 벗어나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중의 이중성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현재의 촛불집회에 모여든 대중들 전체를 ‘다중’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중’이 대중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현행적인 것(actual)’에 사로잡힌 대중과 반대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의 역능을 생산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중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가진 쟁점은 현재의 촛불집회에 모여든 대중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계급적 관점에서도, 다중적 관점에서도 현재의 촛불집회의 주체는 대중이며 이런 대중운동의 방향이 양가적이라는 것은 이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촛불집회의 두 번째 특징으로 제시되는 저항의 양식에서 ‘저항의 놀이화, 축제화’도 쟁점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혁명적 시기에 특정한 공간을 해방적인 공간으로 바꾸었을 때 나타나는 양식이다. 해방구에서 벌어지는 ‘놀이화, 축제화’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체험한 역사, 87년 6.10의 기억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투쟁은 현재 벌어지는 투쟁과 다른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위치하는 투쟁이다. 이 맥락을 삭제한 채, 양자를 단순․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모든 투쟁의 양식은 상호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87년 6.10은 최소한의 의사표현이 봉쇄된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국가권력과의 적대적 대항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투쟁이었다. 따라서 여기서의 투쟁 양식은 물리력이 충돌하는 방식을 띌 수밖에 없었다. 화염병과 각목을 들었던 소위 ‘전조’의 임무는 ‘집회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집회의 공간, 장소를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축제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최소한의 축제를 위한 공간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저항이었다. 80년대에도 대학가에서는 각종의 위트가 넘쳐 났었다. 물론 이것이 어느 사이엔가 익숙한 투쟁의 양식이 되었던 것은 그것이 몸으로 체득된 관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관성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의 촛불집회도 그런 공간이 사라지는 전면적인 대립으로 나간다면 그런 투쟁의 양식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적 관점과 다중적 관점의 핵심 쟁점은 대중의 이중성인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촛불집회가 ‘다중지성’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에 있다. 분명 촛불집회는 이런 성격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형성되는 네트워크는 기존의 전문가들과 대중들의 간격을 무너뜨렸고 새로운 다중지성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도 두 가지의 논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논점인, 현재의 촛불집회의 활성화를 ‘다중적 주체’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는 것과 두 번째 논점인, 촛불집회가 ‘다중적 주체’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보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첫 번째 논점은 현재의 촛불집회를 마치 다중적인 주체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면서 대중의 이중성을 망각하고 대중적 찬사만을 늘어놓는 편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현상적, 가시적 특징만을 보면서 그 이면에서 흐르는 다양한 계급적 갈등과 분화, 그리고 대중적 공분의 정치경제학적 기반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들뢰즈도, 네그리도 정치경제학적 기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물질적 원인에 사로잡힌 대중, 계급까지를 포함한 대중이 몰적 주체로 전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중의 역능성’이 나타나는 것은 ‘물질적 원인을 초과하는 순수 생성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곳, 즉 탈물질화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탈물질화하는 곳, 물질적 원인을 초과하는 곳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노동 형식이 나타나는 곳은 ‘비물질노동의 영역’, 대표적으로 지식-정보노동이 이루어지는 네크워크이다. 그들은 사회적 협력을 통해서 교환되는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새로운 공통적 지식을 창조한다. 이 점에서 이들은 ‘탈물질화하는 곳’에서, ‘잠재적인 것’을 통해서 역능을 발휘하는 ‘다중’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은 단지 그들이 수적으로 감소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이 더 이상 물질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경제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교통과 협력, 삶의 형식을 생산하는 사회적 생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촛불집회에서 형성되는 집단적인 지성을 다중지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레닌은 ‘혁명적 시기에 대중이 전위를 넘어선다.’고 말했다. 현재의 촛불집회에서 대중들은 ‘지도부’를 넘어서며 나름의 전략과 전술들을 만들어낸다. 이점은 적어도 혁명적 시기에 보여주는 대중의 양태를 그대로 닮아 있다. 그러나 ‘다중적 관점’은 이것이 다중의 특성이며 현재의 운동은 이런 다중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발전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대중적인 세력이 하나로 결집되거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중앙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급적 관점’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새로운 주체로서 다중적 가능성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 이전과 다른 집단적 지성의 가능성이 인터넷을 통해서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다중이 ‘물질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다양한 물질적 관계가 생산하는 이해의 망을 근거로 하여 ‘비물질적 세계’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중은 ‘물질적 세계 그 자체’를 벗어날 수 없으며 ‘자본의 포획망’과 ‘자본의 코드화, 영토화’를 벗어날 수 없다. 다중지성 또한 그것이 어떤 현실의 물질적 망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비록 ‘사회적 생산-일반 지성의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은 ‘생산관계’이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마녀사냥’을 보라. 물론 이전 시대와 다르게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는 주체는 다양한 지성들을 연결함으로써 다중지성을 만들어가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성은 여전히 자본의 포획망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사회적 생산-일반 지성의 확대 재생산’이 없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생산이 여전히 자본의 포획망 속에 있는가 아닌가에 있다.


    6. 모순의 증층화와 다중지성의 가능성

    네그리는 ‘다중의 출현 가능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과 연결하고 있다. 하나는 제국주의가 아닌 전세계를 네트워크로 연결하면서 ‘제국적 전쟁’을 유발하는 제국의 출현과 그에 대응하는 인종·민족·지역·성별을 넘어서는 지구적 연대의 형성이며 다른 하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인 직접민주주의로서 다수성과 차이를 특성으로 하면서 전사회적 협력과 인류애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이 매개되는 공통성의 형성이다. 따라서 다중지성을 형성하는 주체의 성장은 생산관계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되는 계급과 달리 ‘지구적 연대’와 ‘공통성’을 생산하는 지성적 능력에 있으며 다중적 관점은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비물질노동에 주목한다. 그것은 물질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이고 생활적인 삶의 혁명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이런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그리고 네트워크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운동의 확산은 계급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운동의 영역과 대중운동 내부에서 형성되는 ‘집단적인 지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과거 ‘계급적 관점’은 ‘자본의 포획망’을 강조함으로써 대중 자신들에 의한 자기 통치화, 자율적인 자기 스스로의 조직화를 과소평가하거나 새로운 운동 영역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경제주의적 관점은 ‘노동자주의’를 유포함으로써 ‘실정성의 정치학’으로 빠져들었으며 ‘코뮨주의’라는 정치학을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이해’라는 ‘경제학’의 차원으로 떨어뜨렸다. 여기서 배제되거나 탈각된 것들은 ‘일반지성의 확대 재생산-사회적 재생산’을 통해서 형성되는 개인들의 주권화, 네트워크를 통해서 형성되는 지성적 흐름과 문화혁명적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적 관점’이 지닌 문제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과대평가하면서 대중 자신이 마치 그들 자신의 힘으로 ‘반자본의 역능’, ‘자본을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건설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시민, 다중, 계급의 세 가지 프리즘이 서로 교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프리즘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펼쳐 놓은 ‘정치의 확장’을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생산-소비의 이원적 메커니즘’, 그리고 문화혁명적인 지성적 네트워크의 형성은 기존의 생산 중심의 운동을 사회 전체 차원의 운동으로 확장시켜 놓고 있다.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조중동에 대한 비판이 불매운동-소비자 주권’으로 발전하고 다양한 기제들을 활용하면서 시민사회 전반을 바꾸어 놓고 있는 것도 이런 ‘정치의 확장’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자본과 노동의 모순’은 다양한 성적, 인종적, 민족적 차이들로 이전되며 중첩적으로 접합된다. 따라서 모순은 다양하게 사회 전반으로 펼쳐지면서 노/자의 단일한 적대의 선은 약화된다. 반면 모순의 중첩성은 다양한 모순들을 특정한 부분에 집중시킴으로써 사회 전반에서의 모순들을 확장시키며 다양한 영역에서 모순들의 폭발을 낳고 있다. 따라서 적대적 모순이 터져 나오는 지점이 반드시 ‘생산관계’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의 ‘계급적 관점’은 이런 모순의 확장과 다층화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으며 이런 정치의 확장을 사회 전체에서의 ‘반자본’, ‘코뮨 운동’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적 관점은 물질적 이해관계만을 고집하거나 각 정세의 구체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생산관계 내부에서만 모순의 폭발지점을 포착해서는 안 된다. 모순의 구체적인 폭발 지점은 다양하다. 현재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폭발성은 그런 모순의 응축성이 각기 다른 지점에서 터져 나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민사회나 다중적 관점이 이런 계급적 관점이 지닌 문제들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맑스-레닌의 관점을 이들과 동일한 것으로 설정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관점을 천박한 노동자주의나 경제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계급적 관점은 노동자계급이 ‘전위’이며 항상 혁명에서 ‘선봉’이었다는 점을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박한 노동자주의일 뿐이다. 아마도 이런 노동자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던 것은 레닌이었을 것이다. 이때 레닌이 비판하고자 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배이데올로기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은 자본과의 협상 상대자이며 자본의 동일성 안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보고자 한 것은 ‘노동자 대중’의 전위적 성격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존재론적 특성이다. 그것은 자본의 외부로서, 자본의 생산 내부에서 항상 양가적이고 모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순 그 자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이다. 이 모순을 통해서 계급적 관점은 현재의 운동을 반자본적이고 ‘호혜적 공동체’인 코뮤니즘의 건설이라는 전략적 목표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노동자라고 해서 대중이 아닌 것이 아니다. 그들 또한 대중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다른 어떤 소수자들보다 체제 내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소수자가 이중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과거 맑스주의 역사에서 좌파들이 이런 대중의 이중성을 ‘대표=재현’의 체계로 전화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대표=재현’의 체계는 맑스-레닌의 기본적인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의 자율적인 권력체인 코뮨’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여기서 권력은 대중 외부에 있는 권력이 아니라 대중들 그 자신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치되는 권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맑스주의적 세례를 받은 모든 좌파들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맑스주의 정당들이 ‘대표=재현’의 코드로 흡수되는 것은 그들이 ‘실정성의 정치학’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와 네그리가 계급적 좌파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주어진 경험들, 실증적 현실들 그 자체를 정치학의 대상으로 삼아 ‘현행적인 것’들 안에서 정치적 행위들을 만들면서 그것을 ‘유물론’이라는 주장해왔던, ‘경험주의’, ‘노동자주의’, ‘경제주의’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실정성의 정치학’은 결국 주어진 ‘자본-임노동’의 동일성 하에서 ‘재현의 정치학’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좌파들은 ‘재현의 정치학’ 안에 갇혀 있었다. 노동자들의 욕망은 대중과 다른 어떤 욕망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으로, 노동자들의 정념과 이해가 곧 계급적 이해와 정념이 되고 ‘미래의 주체’로 이상화되었다. 마찬가지로 국가 또한 계급지배의 도구로 일면화되어 왔으며 전위는 대표(representation)과 동일시되었다. 다중지성은 이것을 파괴한다. 이런 측면에서 다중지성의 출현, 보다 정확히 다중지성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단자적인 개인들에 근거한 시민운동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 또는 사회의 공통적 관심과 결합된 사회운동으로서 다양한 공동체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확장시킨 ‘정치의 영역’ 속에서 대중 스스로 자기 통치 능력을 배양하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생산해 내면서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현실화해 내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쟁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쟁점은 대중운동의 발전과 분화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당파적 세력들의 형성과 더불어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쟁점이 생산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첫째, 90년대 이후 운동의 분화 속에서 형성되어 온 ‘반동적 정념’, 특히 80년대 운동의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적 대립을 벗어나야 한다. 둘째, ‘다중적 관점’이든, ‘계급적 관점’이든 간에 적어도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지닐 수밖에 없는 틈새와 긴장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양자의 전략적 목표가 다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전략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의 판단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현실의 간극은 종종 상호간의 몰이해와 이데올로기적 반목으로 전화된다. 예를 들어 쉬운 비판, 그렇지만 현실에서 나타나는 여러 오류들이 편향적으로 적용되면서 계급적 관점에서는 ‘다중=대중적 주체’로, 다중적 관점에서는 ‘노동자=사회주의적 주체’라는 상투적인 비판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이루어진다. 사회운동과 노동자계급운동, 소수자운동과 다중운동 등 각각의 영역에서 솟구쳐 오르는 반자본의 운동은 새로운 질서와 힘을 만들어가는 생성의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아래로부터는 ‘코뮨’을 건설하기 위한 각자의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각자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상호 간에 시너지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코뮨 운동뿐만 아니라 위로부터의 느슨한 네트워크적 소통, 주기적인 소통의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론적 쟁점뿐만 아니라 각각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들, 창조들을 상호 교류하면서 ‘코뮨’을 건설하는 방향들을 세울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가 논쟁으로 쟁점들을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이 쟁점들을 구체화하는 각각의 영역에서의 활동들을 상호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마주침’의 영역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느슨한 정보 교환과 공동 전선을 창출하기 위한 형태의 ‘포럼’ 또는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함께 공감을 형성하고 최대한 부르주아 권력에 대항하는 전선과 행동을 창출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7. 촛불집회, 그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모순의 정치학

    촛불집회는 다양한 가능성과 대중들의 역동적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뻐하기만 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들의 이중성이 그 역동적 힘을 만들어낸 동력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중은 체제를 벗어나 탈주하고 있다. 이 탈주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다양한 역사적 노력들, 그리고 힘들의 충돌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명확한 것은 대중들의 생명적인 힘이 반자본의 코드화와 영토화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의 구성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이런 투쟁은 반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런 ‘반복’은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반복의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피를 흘릴 것이며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자신의 삶을 잃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촛불집회는 이것을 보여준다. 과거의 운동 세력들이 대중의 꽁무니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는 것은 ‘새로운 주체로서의 다중, 또는 웹 2.0세대’가 출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준비되지 못한, 흔히 말하는 대안 세력을 만들지 못했던 좌파의 무능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언제나 혁명은 ‘준비된 자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의 불씨를 놓는 자들은 대중이다. 현재의 문제는 ‘대안 세력이 없다’는 것. 그것이 현재를 기회이자 위기로 바꾸어 놓는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대중들의 이중성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강력한 권력을 원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직접 행동을 조직했다. 물론 국가권력은 그것을 실현시켜 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대중의 욕망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것을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런 대중의 욕망을 통해서 이 운동을 대중 자신의 ‘자기 통치적, 자기 구성적 힘’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어렵다. 어려운 이유는 그것 자체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는 모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배 권력은 이 운동의 이중성을 본다. 그들은 이 이중성의 틈을 파고들 것이며 운동의 좌초는 이 이중성이 ‘국가권력에 대한 동일시’로 전화할 때 진정한 위험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권력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보다는 국가권력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중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쟁점이 있다는 그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계급적 관점은 이 지점에서 역사의 짐을 스스로 떠맡고자 한다. 어떤 측면에서 다중지성은 말 그대로 하자면 맑스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주체일 수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며 ‘세계주의자들’이다. 또한 개인을 집단 속에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창의성과 잠재력이 호혜적으로 발휘되면서 상호 교통되고 그럼으로써 ‘각인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이 되고 만인의 발전이 각인의 발전이 되는’ 코뮨을 꿈꾼다. 그것은 물질적인 풍요의 세계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문화적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미래는 언제나 현실의 모순들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맑스주의적 이념은 현실과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으며 또 때론 그 현실적 모순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모순의 오물덩어리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오류들이 ‘자본/노동’의 적대성, 모순성을 확장한다는 맑스주의 사상이 정치적 현실로 작동할 때 나타난다. 대표적인 덫이 ‘국가’이다. 따라서 이 코드를 탈코드화한다면 우리는 그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는 것이 과연 현재의 촛불집회를 ‘대중들 자신의 자기 구성, 자기 통치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계급적 좌파는 적어도 여기서 국가를 공격하기보다는 국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대중들의 욕망이 그것에 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순의 정치학은 그 모순 자체를 인정하고 그 모순이 유발하는 역동성 위에서 미래를 창조하고자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계급적 좌파는 국가권력을 ‘아래로부터 해체’해 들어가는 방식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오히려 국가권력 그 자체를 파괴하는 전술도 사용하고자 한다. 최근 볼리비아가 보여주듯이 탈중앙집권화가 반드시 호혜적 관계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문제는 대중들의 욕망에 부합하면서 그들 스스로 ‘자기 통치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국가권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미 사회화된 생산능력, 사회화된 노동은 이런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계급을 해방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물리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볼리바르 공화국’,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국유화’된 석유 자원을 기반으로 대중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가면서 대중들의 정치적 조직화, 자기 통치화, 생활의 자기 조직화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각종 미션과 협동조합 클러스터, 그리고 공동경영에 대한 인센티브 등을 통해서 대중들의 삶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주민자치위원회와 같은 코뮨들을 만들어 대중들을 정치화하고 대중들을 권력의 주체로 만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베네수엘라 혁명은 국가 권력을 배제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위로부터 ‘아래의 혁명을 지원,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혁명이다. 물론 볼리바르안 혁명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성공한 혁명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국가 권력을 경유하면서도 자기를 파괴하는 모순적 운동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변혁운동은 한국 나름의 가능성과 역사성 속에서 탐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도, 검증된 것도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략적 목표 하에서 오늘날 확장된 ‘정치의 영역’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방식의 실험과 모색들을 창출해 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각각의 차이와 관점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연대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논쟁을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인 운동의 진전을 통해서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각자의 노력만이 아니라 서로의 노력들이 교환되면서도 서로의 낯설음이 때론 공감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론 충돌이 되는 과정들, 그러면서도 현재 조성되는 운동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전선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또한, 직접민주적 권리에 기초한 신헌법의 제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중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다양한 법, 제도적 개선, 각종 선거전술뿐만 아니라 대중의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다양한 코뮨적 운동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영역에서의 모색들이 종적이고 횡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교류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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