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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의 대안공동체라는 물음은 타당한가--박태식의 「이들이 나의 가족입니다―예수의 공동체」에 대한 논평
  • 제3시대
    조회 수: 4825, 2008.09.26 09:42:51
  • 우리산학연구소 2008년 3월 월례발표회 때 박태식 신부님의 글에 대한 논평글입니다. 잊고 있다가 얼마전 한 분이 얘기해줘서 이제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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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대안공동체’라는 물음은 타당한가
    박태식의 「이들이 나의 가족입니다―예수의 공동체」에 대한 논평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을까?” 저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글에서 ‘그(박태식)는 왜 공동체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을까?’를 묻는다. 그의 대답은 “한국교회 안팎으로 공동체 의식을 부르짖는 때”라는 ‘시의성’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공동체 논의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공화제’(Republicanism)에 관한 논의다. 이것은 ‘민주제’가 실험되어온 지난 20년간의 모색에 대한 성찰의 맥락에서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제 문제는 건국 이래 지난 40년 남짓 지속되어온 권위주의적 제도화의 청산에 관한 바람을 담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부적절한 것의 제거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권위주의 체제가 줄곧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수행해온 ‘제거/배제의 정치학’(Politics of Exclusion)이라는 정치 패러다임은, 역설적이게도, 민주제 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포용의 정치학’(Politics of Inclusion)은 민주적 제도화의 20년 동안에도 여전히 ‘낯선 것’이었다. 공화제 논의가 제기되는 정치 패러다임적 발생 맥락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때 포용의 정치를 위한 정신적 자원을 어디에서 찾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공공선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느냐의 논의와 연결된다. 여기서 전통적인 사회적 결속체인 혈연공동체(가족)나 지연공동체 등은 바로 이러한 시민적 덕성이 새겨져 있는 제도적 장소일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하여 공화제 논의는 공동체주의 담론의 하나로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른바 박세일이 주장한 ‘공동체 자유주의론’(Comunitarian Liberalism)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주장은 이른바 뉴라이트 담론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신좌파(뉴레프트)적 성향의 공화제 논의와는 반대편에 있는 공동체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이 가정하고 있는 위기의 현실은 ‘부적절한 개인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즉, 신자유주의 공세 아래서 ‘국가의 실패’, 곧 국가가 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더욱 심화시키었던 현상의 주된 이유는 부적절한 개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박세일이 제시하는 개념이 (부적절한 개인이 아니라) ‘공공선을 추구하는 개인’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를 그는 가족이나 지역사회 등의 전통적인 공동체 속에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사회가 급속도로 양극화된 것은 집단 이기주의에 물든 부적절한 개인 탓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지표를 토대로 하는 연구들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사실인 소득양극화가 사회양극화를 추동하고 있다는 점과는 공유점이 전혀 없는 독창적인 과점이다. 하여 이 공동체적 자유주의론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통적 공동체 속에 내장된 개인성에서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가 주장하는 ‘신앙공동체론’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 사이에는 공동체 신앙에 있어 서로 연관되면서도 분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앙공동체의 구성적 주역을 ‘성도’라고 부른다면, 전자를 ‘권위주의적 성도공동체’라고 규정할 수 있고, 후자는 ‘자유주의적 성도공동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여기서 두 성도공동체는 모두 신앙공동체의 전통 속에서 공공선의 가치를 발견하려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양자는 중대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돌진적 성장 시대의 도시개발 현장 한 가운데서 성장한 선발대형교회는 두 가지 유형의 성도 규율담론이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위로의 담론’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개발의 담론’이다. 전자가 발전주의적 성공주의에 대해 일종의 도피성(逃避城)의 역할을 하는 담론이라면, 후자는 목적 지향적 성취주의라는 특성을 지니는 담론이다. 한편 이와는 달리, 강남(권)의 전형적인 신앙공동체인 후발대형교회에서는 자기 개발 담론이 신앙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압도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요소는 목적뿐 아니라 과정 자체도 중요시하는 성취담론으로, 이른바 명품성취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이른바 ‘긍정의 힘’ 담론인데, 이는 실패를 혹은 실패 가능성의 상황을 위한 신앙의 자리를 남겨놓지 않는 성도적 신앙의 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공동체론들 가운데 어느 입장에서 생각하든, 현재의 위기를 넘어서는 길을 전통적 공동체들 속에 체화된 기억들 속에서 발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들 모두는 같은 관점을 공유한다. 다만 공동체적 기억에서 추출한 공공적 덕성의 내용은 각기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제 다시 박태식의 글에 대한 나의 질문에로 돌아가보자. 그가 대답한 ‘시의성’은 공동체적 기억에서 추출한 공공적 덕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인식이 넘쳐나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예수가 만들고자 했던 공동체의 내용을 이야기함으로써 이 논의에 개입하고자 한다. 한데 여기서 과연 ‘예수가 만들고자 했던 공동체’라는 말은 자명한가? 최근 ‘역사의 예수’ 연구에서 예수의 말과 행동을 ‘아이러니’로서 성격화하려는 시도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주장은 예수의 대안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그가 해체하고자 했던 공동체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묻는 데 초점이 있다. 오히려 대안은 그이를 승계한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집단에 대한 물음으로 적합하다. 반면 예수에게서는 ‘대안’은 비어 있고, ‘비판’은 넘쳐난다.
    여기서 박태식의 예수 이해의 시각이 조금 좁혀진다. 그는 예수운동을 아이러니의 시각에서 보지 않고, 대안공동체 운동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대안공동체란 무엇인가? 우선 그는 예수운동의 구성원을 규정한다. 열두제자(사도), 그밖의 제자들(출가제자), 여인들(출가한 여성 추종자들), 죄인・병자・이방인・군중, 종교지도자 등. 그는 애써 예수공동체에 포괄될 수 있는 이들의 분류를 ‘색깔 없이’ 묘사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공동체의 포용과 배제를 주도하는 집단(hegemonic group)이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주도하는 집단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가? 혹은 아무 의미 없이 가능한 구성원을 단순히 열거한 것뿐인가?
    만약 저자가 주도집단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면 권력구조 없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인가?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어떤 공동체론도 권력구조 없는 공동체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현실의 공동체가 아니라 꿈의 공동체일 테니 말이다. 또 주도집단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권력구조가 자명하다는 뜻일 텐데, 이 경우 대안의 의미보다는 인습적인 권력구조를 답습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여기서 무얼 말하고자 했을까. 궁금할 따름이다.  
    공화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합리적 합의’에 의한 제도보다는 ‘갈등의 제도화’를 강조한다. 그것은 갈등의 해소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 합의 모델이 있다는 전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인식론적 태도를 가정한다. 그리고 갈등의 제도화는 늘 주도집단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결속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가 글 머리에서 말한 교회 안팎의 공동체 논의들은 대개 구체적인 제도에 관한 논의일 텐데, 얼핏 그의 공동체 구성원에 관한 열거 속에는 그런 구체성이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저자가 말하는 예수의 대안공동체의 성격은 다음 세 가지로 묘사된다. 평등공동체, 자유의 공동체, 가족공동체.
    ‘평등공동체’ 논의에서 핵심은 예수는 낮은 계층 중심의 평등을 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제3의 길 논자들이나 북미의 신좌파적 공동체주의자들이 시사하는 ‘기회의 평등’ 개념과는 다소 갈등적이다. 가령 이 논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산적 복지’와는 다른 함의를 지니는 평등이다. 이는 생산적 복지가 노동 가능 계층 중심적인 복지이며, 그런 점에서 노동 불능계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를 내장하는 제도적 체계일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하여 저자의 낮은 계층 중심의 평등은 제3의 길 논자나 북미의 신좌파적 공동체론자들과는 다른 함의를 강조하고 있다. 근데 여기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유럽의 케인즈주의적 복지체계의 실패에 대해 예수의 공동체가 제도적 대안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둘째, 자유의 공동체 논의에서 핵심은 ‘규범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현대의 공동체 논의는 대체로 시민적 덕성의 발견을 전통적인 공동체적 제도들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론들의 한계는 성공적으로 시민적 덕성을 발견할 때조차, 그 속에 내장된 편견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규범으로부터의 자유 담론은 공동체론의 한계지점을 드러내주는 데 있어 적절한 지적이다. 한데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예수의 대안공동체는 과연 무엇으로 제도화를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현대의 공동체론들 속에 함축된 현실주의는, 공공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장이 공동체라는, 자기 한계와 편견이 내포된 기억 결속체임을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적 공동체들이 저장하고 있는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 예수의 자유라면, 그것은 제도화가 가능한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대안인가?
    마지막, 예수의 대안공동체는 친밀성이나 연대성의 모델을 가족에서 발견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비로서 그는 공동체론자들과 합류할 수 있는 대안제도적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친밀성의 문제는 예수의 공동체를 유사가족으로 해석할 때 빛을 발한다. 한데 여기서도 가족에서 무엇을 모방하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분명 실재하는 가족은 결코 평등하지도 규범으로부터 자유스럽지도 못한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친밀성이나 연대성에 관한 대안제도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열거한 예수공동체의 다른 특성들과 진지한 조율이 필요하다. 한편 의사가족으로서의 공동체 모델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다소 위험스럽다. 권위주의 체제들이 한결같이 가족모델로서, 즉 가족이라는 친밀성과 연대성을 강조하면서 구성되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가족공동체 모델은 좀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이상에서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대안공동체로서의 특징들 중 앞의 두 가지는 대안적이라기보다는 아이러니적 요소로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그것은 기존의 공동체적 제도화에 대한 전복이고 해체이지, 대안공동체의 모델로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동체 모델은 그것을 대안제도로서 해석할 때 부정적인 요소를 불식시키기가 쉽지 않다. 더 많은 해명과 보충이 가미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글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 시대의 공동체 논의들의 현장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면서 예수의 공동체에 관해 고민하도록 이끌고 있다는 데 있다. 나 자신도 이 글 덕에 우리 사회의 공동체론들과 예수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논의를 심화시켜 생각하려면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에게 감사하면서 아쉬움을 전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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