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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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호_시간이 회수하지 못한 기억-어느 민중신학자의 삶과 신학 이야기
  • 김진호
    조회 수: 5976, 2009.09.23 18:26:37
  • 대화문화아카데미. 삶과 신학 콜로키엄(2009.09.18)

    시간이 회수하지 못한 기억
    어느 민중신학자의 삶과 신학 이야기


    _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입문

    1980년대 중반, 심한 ‘정신의 공허감’ 속에서 신학을 시작했고, 그 빈 곳을 채운 것이 민중신학이었다. 전투적 복음주의자에서 민중신학도로의 느닷없는 전환은, 선배 민중신학자들의 그것처럼 역사적 현실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내적 자의식의 실패를 계기로 인한 것이었다. 직접체험에 앞서 인식의 반전이 일어나는 사유의 경로는, 선구자들의 반제도적 인식의 기록이 레퍼런스로서 남겨지게 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겠다. 그 기록을 통한 간접체험이 기억의 구성에 개입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직접체험의 여정에 들어서는 것은 선배들의 사투에 힘입은 후학들의 특권이다.
    (거시)정치가 모든 담론 형식을 압도하던 시기였다. 일상은 없었고, 개개인의 욕망은 단순히 전체의 부분으로 해석되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폭력은 제국과 국가, 그리고 자본에 의한 폭력의 부분집합이었으며, 희망은 반제국, 반파쇼, 반독점의 제도화,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요컨대 이 시기 민중신학에 입문한 우리의 직접체험이란 이런 기조 아래서 형성되었다.
    지배의 폭압성이 건재하던 시절, 저항은 게릴라적 성격을 지니면서 도처에서 출몰했다 지하로 숨어들곤 했다. 정부의 물리적 통제는 강력했지만 그만큼 촘촘하지는 않았기에, 도처에서 다중적으로 생성 유포되는 저항의 공론장이 충분히 통제되지는 않았다. 수많은 학습동아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치열한 갈등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은 강한 신념과 체제이론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노선간의 확연한 대립선이 형성되었지만, 동시에 저항담론 간의 상호침투와 합의 또한 존재했다. 이런 와중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청년들을 가장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체성’의 문제였다. 저항의 해석들이 왕성하게 논쟁하면서 실천의 가능성을 탐색하던 그 시기에 민중신학을 포함한 저항적 신학들은 다소 지체된 듯한 양상을 띠었고, 새로운 실천의 형식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하여 많은 그리스도교 청년 활동가들이 교회와 기구들을 이탈하였다.
    민중신학의 제2세대는 바로 이 시기에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했다. 그리스도교 청년 활동가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의 형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왕성하게 소비되었다. 한데 인식론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민중신학의 맑스주의적 버전은 이론적으로 너무 난해했고, 실천적으로 너무 추상적이었다. 중간적 요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른바 ‘교재운동’이 1980년대 말경부터 도처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간적 존재를 낳았다.
    나의 공적인 글쓰기는 성서교재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제1성서(구약성서)와 제2성서(신약성서)의 안내서 두 권을 만드는 작업은 세 번에 걸친 팀의 재편성을 거치고 만 2년이 걸렸다.1) 노년의 약사 한 분이 안병무 선생의 󰡔역사와 해석󰡕 출간 10주년을 맞아, 새 시대에 맞는 개정판을 만들어달라고 적지 않은 기부금을 희사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글을 읽기도 쓰기도 어려웠던 선생의 사정 탓에 우리가 그 일을 맡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한국신학연구소 측은 ‘새 시대의 기조’를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서도 담아내고자 했는데, 그것이 교양서에서 ‘교재’로의 전환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연구 성과를 담아내고 학습자들의 현장적 고민을 충실히 반영하는 공동의 학습교재가 그 취지였다. 하여 집필자들은 공동체 운용 감각, 청년단위의 현장 감각, 그리고 새로운 연구성과를 읽어내는 감각 등을 갖춘 이들을 자격요건으로 하여 선정되었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열렬하게 소비되었다. 교재운동이 최고조로 활성화되던 시기에 나왔고 모든 교재들을 대표했으며 가장 큰 혜택을 누리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두 권 이후 이른바 교재운동은 급속히 시들해졌다.
    사실 이 책들은 교양서로서는 성공했지만 교재로서는 실패했다. 대단히 많이 판매되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거의 공동학습용 자료로 활용되지는 않았다. 모니터링 결과, 내용은 새로웠지만 현장 감각이 잘 반영되지 못했다는 평이 압도적이었다. 책을 마무리하며 자축모임을 열던 날 우리는 자발적으로 후속 작업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각자는 자기 현장에서 그 작업을 개별적으로 계속했다. 김경호 목사는 자신이 설립한 강남향린교회(1993)와 들꽃향린교회(2004)에서 지속적으로 성서학당을 열어왔고, 그 십여 년간 교회에서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2007년부터 현재까지 4권을 출간하였으며,2) 총 9권을 출간할 계획으로 있다.
    최형묵 목사는 󰡔뒤집어 보는 성서의 인물들󰡕(한울, 2006), 󰡔반전의 희망, 욥—고통 가운데서 소멸되지 않는 삶󰡕(동연, 2009)을 펴냈는데, 이 책들 역시 그가 담임하는 천안살림교회에서 설립 이래 지속적으로 수행한 수요성서읽기에서 시도한 것의 일부를 다듬은 것이다. 이 책들 역시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의 결핍된 영역인 현장성을 보충하고 있다.
    올해 출간 예정인 나의 두 권의 책 또한 현장 감각을 구체화하고 확장하면서 저술된 것이다. 하나는 성서의 인물들에 관한 것으로,3) 성서 텍스트 속의 은폐 혹은 왜곡된 인물을 포스트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재현하고, 한국 근대성과 대면하게 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에 관한 것으로4) 초기 그리스도교의 반제도적인 아웃사이더의 신학적 문제제기를 한국 근대성의 반제도적 아웃사이더의 신앙 가능성과 연관시키고, 제도적 그리스도교와의 대화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 책들은 각기 내가 담임했던 한백교회 및 기타 강의 기구들에서 수차례 시도되었던 것들을 거듭 보충하면서 쓰인 것이다.
    하여 이 모든 시도들은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의 결핍을, 각기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개입시킴으로써 보충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김경호에게서 현장성이 ‘위기의 한국사회와 대안교회’라는 국면적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면, 최형묵의 책들은 한국 근대성의 위기를 자본주의와 관련시켜 해석하면서 그것을 대안교회라는 국지적 현장과 어떻게 접맥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고 있다. 반면 나는 그리스도교 주변 혹은 외부의 반교회적인 문제의식과 대면하면서, 내가 담임하던 교회의 성격이라 할 수 있는 ‘반교회적 교회’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다.
    얘기가 곁가지로 흘렀다. 다시 돌아가서 교재운동에 대해 좀더 얘기해야겠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교재운동은 제2세대 민중신학과 그 독자인 그리스도교 청년 활동가 사이의 중간적 요소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책들의 집필자들이 처음에는 단순히 중간적 존재였지만, 집필의 체험과 그 이후의 과정에서 담론의 ‘제3의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중간적 존재’라는 설정은 한국 근대에서 주체의 조건이 아니다. 가령 ‘좌와 우’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던 해방정국에서 중간적 존재는 ‘회색인’이라는 ‘난민적 존재’, 곧 주체임을 박탈당한 유랑민에 다름 아니었다.5) 또한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권위주의 정권은 전근대와 근대의 극한적 이원대립의 틀을 대조시킴으로써 압축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성장을 위한 동맹의 이탈 가능성을 제어하는 주된 사회적 통제장치였던 반공규율사회적 요소는 반공 대 용공의 이원대립의 틀을 전제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성장담론에 대해 ‘민주 대 반민주’, 좀더 전위적인 영역에서는 ‘서구 근대성 대 동구 근대성’이라는 이원도식을 통해 저항담론이 형성되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시사되고 있듯이 이 시기 가족 혹은 개체 대 국가 사이의 중간자로서의 ‘가장(家長)’의 존재는 국가의 의지로 환원되지 않는 시민적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의) 장’(國長)의 뜻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곧 국가의 발전이 나의 발전이라고 믿는 종속된 주체로서 이념형화된다.6) 중간적 존재는 이렇게 상위의 주체에 귀속됨으로써만 이름을 부여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이원대립의 틀은 군부세력을 거세시키고 등장한 민주정부들에서도 지속된다. 다만 과거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이원대립의 틀을 공유했다면, 이후에는 다중의 사회 형성적 주체들이 제각기 나름의 이원대립적 사유를 통해 민주적 제도화에 끼어들려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획자이자 필자의 하나로 참여했던 󰡔우리 안의 이분법󰡕7)은 이러한 이원대립적 인식틀이 비단 정치적 제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적 내면성으로 견고히 자리잡고 있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그것의 너머를 상상하고 있다. 하여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중간적 존재가 주체화될 여지를 소진시키는 강력한 요인을 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2세대 민중신학도 유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민주 대 반민주’,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틀이 ‘현존하는 교회와 새로운 교회’, ‘낡은 신앙적 정체성과 새로운 (유물론적) 정체성’의 대립을 통해 이른바 맑스주의적 민중신학 담론이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악과 선’이라는 가치와 일대일 대응함으로써 양자 사이에서 다른 내용의 개입을 제약하는 요소를 내장하고 있었다.
    교재운동의 집필자들도, 적어도 그 책들이 쓰이던 때까지는, 단순한 매개자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예컨대 집필자들에게 요구된 가장 단순한 과제는 민중신학자들을 포함한 진보적 신학자들의 난해한 텍스트를 활동가 대중이 독서할 수 있는 책으로 번안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독서행위와 글쓰기 행위는 해석과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글’은 이미지, 소리 등에 비해 행위 수행 중에 여운이 많이 남는 매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문자는 ‘보다 더 해석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재운동의 참여자들은 문자의 매체적 속성으로 말미암은 수행적 효과를 체감하게 된다. 즉 글쓰기의 수행 과정에서, 그리고 책이 대중에게 소비되는 과정에서 해석적 주체로서의 자아가 형성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시기의 교재운동이 중간적 존재의 주체화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왜냐면 중간적 존재는 교재운동에 참여한 우리가 유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적지 아니 있어왔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시기에 중간적 존재들이 글쓰기를 통해 주체화되었는가를 시대 맥락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매우 해석적인 매체 행위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억제하는 우리사회 특유의 문화적 코드, 즉 중간적 행위자의 해석적 자율성을 제어하는 무의식적 내면성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중간적 존재들이 주체화되는 데는 다른 요인들에 관한 해명이 필요하며, 그것을 시대성(contemporarity)과의 연관성 속에서 주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로, 식민지 시대 이래 한국사회는 뿌리 깊은 탈전통(de-tradition)의 맥락 위에 있다. 이것은 아비에 대한 부정(否定), 범사회적인 ‘고아의식’(orphan consciousness)으로 나타나곤 한다.8) 조선의 귀족이나 양반의 전통은 이제 고전 산책의 대상물에 지나지 않으며, ‘자수성가’한 통치자, 기업가, 목사 등이 지도자의 전형처럼 인식된다. 사회 곳곳에서 존경의 체계는 이러한 ‘기반 없는 성공’과 맞물려 형성되었다. 그런데 고아의식이 언제나 일관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국면마다 보다 활발했던 시기가 있었다. 가령 해방 직후, 한국전쟁 직후,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 해체기가 그렇다.
    1980년대 말, 특히 1990년대 전반기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이른바 ‘학술운동’이라는 새로운 지식운동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로 국내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들이 그 주역이었는데, 1980년대 초부터 활발하게 일어난 소규모 공부모임의 중간지도력으로 활동했고, 또한 일종의 출판운동으로 펼쳐졌던 이른바 ‘사회과학 출판사’와 ‘사회과학 서점’들이라는 1980년대적 변혁 담론의 생산 유통 체계가 급속도로 활성화되면서 번역, 교재생산, 대안적 이론 형성 등에 왕성하게 헌신했던 이들의 학문적 활동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저에는 이른바 ‘과학성’이라는 학술운동 주체들의 학문적 자기 규정의 요소가 기성의 학문제도 속에는 부재하다는 중간적 청년 연구자 집단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9) 하여 제도권에서 전수되는 학문과의 과격한 단절, 그리고 대안적 학문활동에의 헌신이 이 시기 ‘학술운동’의 주된 양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종종 대학이라는 학문 제도권에의 진입 자체를 거부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이것은 이른바 재야학문제도로서의 연구소 등을 낳기도 했다. 요컨대 이 시기는 학문영역에서 활동했던 중간적 존재가 ‘학술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적 주체로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둘째, 1992년 대선의 실패, 그리고 동구 사회주의권 체제의 몰락이 겹쳐지면서, 동독 소련 등의 맑스주의 이론에 크게 빚지고 있던 1980년대적 비판담론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든다. 이러한 사정은 1980년대적 학술운동 활동가들의 해석의 준거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준거를 발견해야 하고, 1980년대의 실패를 설명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민주 정부 하의 국가가 주도하는 학술진흥 시스템 내에서 진보적 지식의 공간이 열리게 되면서 진보적 대항담론이 권력과 융합하며 제도화된다.10) 이제 중간적 존재들은, 대학 제도 안으로 들어가든 협소해진 ‘밖’에 남아 있든, 변화를 설명해야 했고 진보 담론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했다. 하여 이들은 다른 담론 형식과 내용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해석의 주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말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산업구조상의 급속한 변화와 얽히면서 제도화된다. 즉 내구소비제산업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한국사회는 빠르게 ‘소비사회’로 변모하게 된다. 이것은 시장의 성격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폐된, 금단의 지식을 생산 유통 소비하는 것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던 시대에 그것의 생산 유통에 종사하던 ‘사회과학 출판사’와 ‘사회과학 서점’들은 점차 (정치가 아니라) 시장의 논리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대중의 독서 취향이 다중화되는 현상도 이와 맞물리면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결국 대중에게 독서의 재미를 주는 쾌락의 원리에 덜 적응한 지식생산자들의 담론은 협소한 공간에서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시장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정부주도 학술진흥 시스템의 장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어떻게 해서든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대안적 지식의 공론장을 만들고 활동해야 하는 새로운 담론 형식과 내용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상의 사회 문화적 변화가 1990년대 이후, 1980년대적 대안지식의 매개자인 중간적 존재들을 새로운 담론의 주역으로 주체화하는 배경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도 이러한 한국사회의 비판적 지식 현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로 교재운동의 일원으로 비판적 지식운동을 시작했던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민중신학 입문은 이렇게 선배들이 이룩한 성과로부터 독자적인 담론의 장으로 옮겨가게 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 그러한 변화의 추동자로서의 자의식으로 주체화되었다.  

    역사의 예수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의 집필진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중에 나는 대학원을 졸업했다. 만 4년 반만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졸업이 지연된 가장 결정적 이유는 석사학위 논문에 관한 계획이 난항을 거듭했던 탓이다. 논문계획서를 보고 안병무 선생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고 호기를 부린 대가로 2년을 지불했다. 2년째 되는 초겨울, 천여 장에 달하는 메모노트를 뒤로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대략 6개월간, 애초에 계획한 9장 중 하나를 택해 논문을 썼다.11)
    예수 자신이 벌인 예수운동을 1세기 팔레스티나 민중운동의 하나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사회운동 특히 고대의 민중운동에 관한 이론들을, 그것들 각각의 인식론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잡다하게 활용했고, 그러한 민중운동들이 일어나던 사회 구조를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인류학을 빌어서 도식화했다.
    문제는 ‘역사의 예수’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에 있었다. 안병무 선생의 명제가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주객도식’ 너머로 예수를 보자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모든 예수 연구의 방법론적 전제인 ‘개체로서의 예수’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사람들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얽힌 사건이 기억을 통해 재현된 것이 바로 ‘역사의 예수’다. 요컨대 ‘역사의 예수’는 기억 주체에 의한 ‘예수 기억’(Jesus-memory)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단 하나의 역사적 진리로서의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억하는 이’와 ‘기억되는 이’ 사이의 시공간적인 상호대화 속에서 예수 사건이 재현될 때 그것이 다름 아닌 ‘역사의 예수’라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진정한 예수 기억이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마르코복음」을 통해 찾고자 했다.
    「마르코복음」은 가장 오래된 복음서일 뿐만 아니라 구술적 문서이다. 구술문학은 저자의 문학적 창작성이 제약되고, 대중의 집합적 기억의 검열을 통해 구성되는 텍스트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는 예수기억을 발견하기에 용이한 텍스트다. 이때 이 복음서의 기억 주체는 ‘오클로스’다. 즉 「마르코복음」은 오클로스의 예수 기억이 문헌화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마르코복음」의 예수 기억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다.
    허술하고 산만하지만 나는 이 논문에서 독자적인 접근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마르코복음」의 예수 기억이 내포하고 있는 운동의 국면적 공간의 변화12)를 하나의 축으로 하고, 「마르코복음」의 예수 기억 속의 운동 참여자들의 역할상의 분류13)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연계시켜 예수운동 참여자들의 사회학적 해석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을 다른 하나의 축으로 하여, 이 두 축의 연결지점에서 예수운동의 사회운동적 의의를 발견하려는 것이다.
    학위논문, 그것도 석사학위 논문이란 대개 그 주제로 공부를 시작하는 이의 고민을 흔적을 보여준다. 그 고민의 농도는 깊지만 대개 수준은 형편없는, 입문자의 서투름이 배어있다. 그럼에도 이 출발선상의 흔적은 종종 그자의 평생을 이끄는 물음의 축이 되곤 한다. 내게서 ‘역사의 예수’에 관한 문제의식이 그렇다.
    애초에 기획했던 것의 1/9을 떼어내어 석사논문으로 제출했을 때, 나머지 8/9은 평생 조금씩 채우겠노라고 생각했다. 의욕이 넘치던 시절, 그것만으로도 10년은 족히 걸릴 거라고 생각했고, 아직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정신적 미성년자인 당시의 내게 10년이란 전 생애에 대응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채 1년도 못가서 그 계획은 천여 장의 메모노트와 함께 폐기처분 되었다.
    졸업 직후 학위논문을 조금 쉽게 풀어,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하고 그 원고를 수차례 다듬으면서 최종 원고를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예수운동의 혁명성 연구󰡕14)로 펴내는 호기(豪氣)만 넘쳐나던 때에 이미, 단지 논문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나를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파국’의 국면이 찾아와 버렸다. 부실하고 불안정한 방법 같은 부차적 문제가 아니라, 역사 인식에 관한 보다 근원적인 회의에 빠져든 것이다.
    역사의 예수에 관한 공부를 시작할 때, 그러니까 1987년 경, 그 생각의 발원지는 안병무 선생이었다. 그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어댔고, 생각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할 때, 영어권 학계의 저널들을 통해 나의 눈길을 끄는 연구들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사회학, 인류학 등과 교류하면서 저술된 글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러한 새로운 학제간 시도들을 집중적으로 담아낸 저널 Biblical Theology Bulletin은 당시 서강대학교에서만 볼 수 있는 잡지였는데, 아무도 읽은 흔적이 없는 것이 많아 괜한 자부심에 젖어 탐독하곤 했다. 그런데 이 모든 예수 역사학적 논의들이, 그것들 덕분에 남보다 앞선 정보를 가졌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나의 생각의 자산들이, 20세기 초에 저술된 루돌프 불트만의 저술들을 정독하던 1990년과 1991년 즈음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역사학의 위기’라고 알려진 실증사학의 좌초에 관한 문제의식을 불트만의 글 속에서 비로소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말 북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연구의 바람도, 근대 역사주의의 한계에 관한 역사철학적 물음을 회피한 채 전개되고 있다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책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그러한 한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롭게 셋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한번 안병무는 실마리가 되었다. ‘사건’이라는 용어를 다시 주목하면서, 실증주의적 역사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제틀로의 사유가 시작되었다.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사건, 안병무의 사건, 그리고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의 사건론 등에 머리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던 1990년대 중반, 북미의 예수 연구사를 소개하고, 그것을 민중신학적으로, 즉 사건론적으로 독해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나의 해제가 포함된 엮음집을 펴냈다. 󰡔예수 르네상스―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15)은 이렇게 출간되었다.
    새롭게 셋팅한 나의 예수 탐구 기획의 두 번째 책은 저술이다. 이제 민중신학적 사건론을 중심으로 나 자신의 예수론을 쓰겠다는 것이다. 주머니에는 차비도 없었으니, 책을 살 생각은 꿈도 꿀 수 없던 때였다. IMF 재앙에 직격탄을 맞아 무려 20%가 넘는 은행 이자로 매달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벌이가 바닥까지 강탈당하던 시절이다. 그 무렵 한국신학연구소를 퇴사하고 출판사를 시작한 이정희 선생이 연구비를 주겠으니 책을 써보라고 한 것이 생각나 터무니없는 나의 기획안을 얘기했고, 나만큼이나 세상 이치를 모르던 책벌레인 이정희 선생은 경제성이 전혀 없던 이 기획을 위해 선뜻 50만원을 내주었다. 작은 금액이었지만, 이것으로 하루하루가 막막하던 시기에 한 달은 숨통 트고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곤 했던 원고를 최종 검토하여 낸 책이 󰡔예수 역사학. 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이다.16)
    이정희 선생은 내가 넘긴 원고의 원제와 부제를 뒤바꿔놓았는데,17) 이유는 너무 과격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내용은 상당히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예수에 관한 하나의 기억의 계보인 「마르코복음」에서 재현된 예수를 통해서 ‘교회의 예수’와 ‘역사의 예수’ 전체를 야유하고자 집필된 책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너무 과하게 난해한 내용 덕택에 거의 독자가 없었고, 따라서 비평도 없었다. 게다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려한 이론들의 남발로, 일부에선 그 지적 허영 덕에 전문가 취급을 해주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나의 세 번째 기획은 역사책을 쓰려던 것이었다. 페르시아 시대부터 예수 당대에까지 이르는 일종의 ‘민중 형성사’적 역사인데, 󰡔예수 역사학󰡕에서 시도된 민중(오클로스)의 예수 기억을, 보다 광범위한 민중사적 맥락을 통해서 점검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작업은 시작도 못했고, 아마도 끝내 못하고 말 것 같다. 과거와 같은 열정이 식어버린 연구조루증 탓에,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작업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두 번째 책에 대한 불만족 때문에 상당부분을 고치고 보완해서 개정판을 만들겠다고 허세를 부려댔으니, ‘그 너머’를 구상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과제다.
    그 무렵 저술된 나의 세 편의 논문18)은 탈교회적 관점에서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해 메타적 비평을 공세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한데 논의 과정에서 점차 그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되돌아왔다. 󰡔예수 역사학󰡕, 그리고 이 책의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하고 있던 세 편의 논문들이 서구의 역사주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음에도, 서구 중심적 역사주의의 유령이 나의 글 도처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예수 역사학󰡕의 개정판은 불가피한 숙제처럼 내게 부과되었다. 그 무렵 예수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를 만들어 책을 수정 보완한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절반 정도는 초고 형태지만 완성되었다. 이 강의 수강자들에게 개정본이 완성되면 종이 출판물 대신 웹에서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공개하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제도권 밖의 연구자들은 그때그때 제기된 테마, 특히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당면 문제를 중심으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시의성이 약한, 보다 장기적인 연구 계획은 기회 닿을 때마다 관련된 강의를 만들어야 간헐적으로 조금씩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게다가 책을 구입할 여력은 없다. 그러니 인터넷을 뒤적이며 자료를 구해야 하고,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것만 참고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구하여 참고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한 것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해서, 나의 작업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한데 이제까지 대개 그랬듯이, 이렇게 오랫동안 진행하는 작업은 완성될 때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필자인 나 자신에게 말이다.
    그런 우려가 최근 현실화되고 있다. 탈식민주의적 문제의식이 새로운 변수로 나의 생각을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주관하는 ‘트랜스내셔널인문학대회’에 ‘역사의 예수 담론의 영토성: 서구 근대주의와 그 제국적 담론의 정치’라는 주제로 응모하여 발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글을 준비하던 중에 심원 안병무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제1회 심원콜로키엄’에서 같은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포스트콜로니얼 관점에서 예수 연구사를 메타비평하는 작업의 시론 형식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포스트역사주의적 문제의식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으니,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던 나의 개정본 작업은 다시 재개정되어야 하는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그러는 중에 나의 예수 연구를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형식으로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예수의 독설󰡕19)이 그것인데, 이 책에 수록된 대개의 글이 한백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초고로 한다. 내게서 설교는 많은 경우 글의 출발점이다. 설교에서 출발하기에 글들은 대체로 시대적 문제의식과 맞물리게 되고, 설교가 연행되는 현장의 특성을 고려하게 된다. 또한 그 연행 과정에서 교인들과 교류하고, 넷 공간에서 설교의 또 다른 독자들과 교류한다. 때로는 신랄한 비평에 접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무거운 침묵만을 되돌려 받게 되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의 생각은 훨씬 발전할 기회를 얻는다. 아무튼 신학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의 근저에는 ‘역사의 예수’가 있고, 그 출발점에는 부실한 석사학위 논문이 있다.

    제3세대

    졸업 직후, 당시 학술운동의 한 극단적 전형을 따라, ‘학문 제도 밖’을 선택한 제자를 선생은 한국신학연구소로 이끌었다. 연구소의 ‘천안행(行)’에는 비판적 신학의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전문적 연구공동체를 의중에 둔 것이었다. 내가 입사하였을 때에는 땅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비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연구터와 생활터의 토대를 마련하는 비전을 담은 그곳에서 제도권 밖의 학술운동을 꿈꾸는 삶을 시작해보라는 것이겠다.
    하지만 현실에서 말단 평연구원이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이란 없었다. 읽을 만한 책을 구하는 것도, 돌아가는 세계를 살필 여건도 척박했고, 청년의 조바심을 채워줄만한 현장 개입적 접촉점도 제한적이었다. 경영 상태를 알 수는 없었지만, 막연히 종일의 업무인 번역을 벗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기묘한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일터는 쉬는 공간이었고 집은 일터가 되었다. 돌아보면 3년 6개월간 원 없이 공부했다. 밤에 잠을 잤던 기억은 거의 없다. 잠은 연구소에서 짬을 내서 잤다. 물론 주어진 업무수행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불성실하고 이기적인 직장생활은 뜻밖에도 적지 않은 기회를 주었다. 무명의 연구자 지망생은 과분하게도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 두 권의 공동저자가 될 수 있었고, 문턱 높은 󰡔신학사상󰡕에도 여러 차례 글을 쓸 기회를 얻었다. 게다가 석사논문을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신학계 당대 최고의 출판사에서 말이다.
    한데 이 제안은 엉뚱한 곳으로 눈이 번쩍 뜨이게 했다. 몇 사람과 ‘작당’하여’, 개신교와 천주교의 소장 연구자와 활동가 일단을 모아, 1991년 동인모임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이 출범했다. 출판운동을 함께 벌이자는 것이 출범 당시 취지였다. 흥미롭게도 이들 거의 모두는 ‘함께 읽는 성서’를 포함한 각종 교재들의 집필자들이었다.
    그 무렵 한국사회에는 우리와 비슷한 연구 집단이 제도권 외부 혹은 주변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등에 청년 연구자와 활동가가 다수 모였다. 이 세 모임을 포함한 5개 그리스도교 단체가 결속하여 ‘기독교학술연대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여기서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학술운동 여건을 나누고 사적 친밀감을 확대하기 위해 공동 워크샵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김영삼 정부가 정책화하고 있던 세계화 문제를 신학적으로 점검하고 대중과 생각을 나누기 위해 공개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했다. 중간적 존재들은,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시도들로 좌충우돌하며, 신학적 자기 정체성을 모색했다.
    이 연대모임은 훗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 우리신학연구소(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 그리고 참여불교재가연대가 중심이 된 네트워크 연대조직인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로 발전하는 인적 경험적 토대가 되었다.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으로 엮인 우리는 매달 한 번씩 모여 연구발표회를 갖고 밤새도록 속내를 털어 놓으며 이야기하는 대화마당을 벌였으며, 매주 공부모임을 가졌다. 한편 출판운동을 벌이자는 의도에 따라 개인 단행본 형식의 연속간행물 ‘함께 보는 민중신학 시리즈’를 다섯 권까지 펴냈다.20) 또 동인무크지 형식의 책 󰡔시대와 민중신학󰡕을 발간하여 현재 10호까지 펴냈다.21) 비록 의도와는 달리 출간되자마자 희귀본이 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지만, 이러한 독자적인 기획과 저술의 경험은 해석의 주체로서, 우리 특유의 신학적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96년 동인모임이 연구소로 확대 개편되어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출범하게 되면서, 우리는 연구자적 자의식을 담아내는 나름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7년 6월 9일, 연구소 창립기념 심포지엄에서 나의 난해한 발제글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지향하며」22)에서 ‘제3세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23)
    세대별 민중신학 간에는 언술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보다는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 것처럼 보이지만,24) ‘신학하는 태도’에 있어서 중대한 유사성이 있다. 세대론 외부의 민중신학이 대체로 현대 서구의 신학들과의 선택적 대화를 통해 신학담론을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면, 세대론적 민중신학 경향은 동시대 비판담론과의 선택적 대화가 더욱 중요했다. 하여 민중신학의 주소를 전자가 현대 신학이론의 지형학에서 찾고자 한다면, 후자는 동시대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지형학에서 찾는다. 이렇게 세대론은 한국사회의 위기에 대한 민중신학적 저항담론 간의 계보학적 연속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세대’라는 분류학(texonomy)적 용어는 신학자의 분류가 아니라 ‘신학하는 태도의 분류’인 셈이다. 하지만 ‘세대’(generation)라는 표현은 시선을 (앞과 뒤 사이의) ‘누구인가’의 문제로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하여 나의 분류법은 끊임없는 오해를 낳았고, 심지어 갈등의 심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곤 했다. 단순히 편의상 사용되던 용어를 개념화하려는 순간 뜻하지 않게 수많은 연구자들을 민중신학의 경계 밖으로 밀쳐버린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 제2세대의 정신적 후손이었지만 단순히 중간적 존재, 대중과 연구자 사이를 중계하는 단순한 매개자에 지나지 않던 우리의 자의식을 주체화하기 위해, 제2세대와는 다른 ‘제3세대’라는 용어가 필요했던 것인데, 민중신학의 정통성을 놓고 주도권을 선점해 버리려는 권력담론으로 해석된 것이다.
    아무튼 제3세대 민중신학은, 위의 글 부제 속에 포함된 ‘문화정치학’이라는 표현처럼, 사회적 갈등과 권력화가 문화적인 형태로 재현되는 1990년대적 문제의식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1980년대와는 변별된 입지점을 갖는다. 일상의 재현을 둘러싼 담론의 정치를 민중신학적 현실 이해의 주된 요소로 살피겠다는 것이다.
    나의 용어로 말하면,25) 1990년대 한국사회 변동의 키워드는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란 전체주의적 체제를 해체하고 시민 개체의 주권을 확대하려는 정치 사회적 제도화 과정을, 그리고 ‘소비사회화’란 시민적 주권이 소비의 형태로 실현되는 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소비의 주체란 자본주의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주체의 자의식이 구성되는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이 두 키워드는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등장’과 ‘(소비사회적) 일상의 대두’라는 경험적 현실에 관한 지시어와 직결된다.
    이러한 현실 이해에 기초하여, 민중신학은 ‘시장화된 개인’, ‘소비사회적 일상과 그 욕망’이 사회적으로 ‘낯선 것(존재)에 대한 배타성’을 제도화하고 있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배제의 시스템이 ‘제거’(elimination)를 작동원리로 하였다면, 민주화 이후는 ‘망각’(forget)을 통한 배제의 체제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26) 그것은 낯선 것에 대한 배제가 폭압적 정부나 야비한 자본의 기획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동의(consensus)와 공모(conspiracy)를 수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민사회에 대한 비평은 ‘적과 우리’라는 전통적인 저항담론의 이분법적 틀을 가로지르면서 ‘성찰이 결여된 당파성’을 자기비판한다. 제2세대 민중신학 담론을 펼친 연구자들은 이 시기 민중신학을 ‘변혁의 신학’ 혹은 ‘운동의 신학’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앞에서 시사했듯이, 민중신학의 텍스트가 그리스도교 청년단위의 운동을 위한 직접적인 지침서 역할을 했던 사정을 전제한다. 여기서 민중이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적 계급연합’으로 재규정되면서 반제국 반파쇼 반자본 운동적 실천이론이 구성되었다.
    더 앞으로 가서 1970년대 민중신학이 스스로를 ‘증언의 신학’이라고 이름 붙였을 때도 사정은 유사하다. 이 시기 민중신학의 주요 소비대중은 조직화되지 않은 지식인 대중이었다. 그들은 권위주의 체제가 서구의 민주주의를 결핍한 발전주의임을 비판하면서, 그 야만적 체제가 내장하는 이중의 ‘제거의 정치’(politics of elimination)를 폭로하고 은폐된 현실을 증언하였다. 이중의 ‘제거의 정치’란 시민권을 박탈당한 시민과, 시민권을 박탈당한 민중의 탈주체화의 정치적 장치를 의미한다. 전자를 가리켜 나는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27) 이들은 자기의 꿈과 욕망을 ‘대주체’인 통치자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존재, 즉 통치자에 예속됨으로써 주체가 구성되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들에게는 ‘제거’라는 폭력의 기재가 ‘예감’됨으로써 작동한다.28) 반면 시민권을 박탈당한 민중의 탈주체화는 제거가 물리적으로 실행됨으로써 작동한다. 아무튼 이 둘, 곧 국민과 민중은 공히 국가폭력에 직면하여 탈주체화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시기 민중신학 담론에서 국민과 민중은 상호 연결된 혹은 연결되어야 하는 주체였고, 그 반대편에는 폭압적 독재정권이 있었다.  
    요컨대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중신학은, ‘적’과 ‘우리’를 서사화하는 방식이 시대적 특성에 따라 달라졌음에도, ‘적 대 우리’라는 이분도식의 틀을 지님으로써 실천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 제3세대가 그런 방식의 실천이론을 모색하는 것은 넌센스다. 민중신학 텍스트를 읽으면서 운동을 꿈꾸는 주체는 이제는 거의 부재하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운동 없는 운동의 신학’을 펼쳐야 했다.

    탈(脫)과 향(向), 하나—교회

    민중신학을 참조하는 운동이 부재하게 된 시대, 이제 민중신학의 새로운 실천 형식이 요청되었다. 그 하나가 ‘교회’라는 담론 공간을 매개로 하는 새로운 실천이다.
    민중신학의 제3세대 연구자들 다수는 각기 ‘전형 없는’ 교회의 가능성을 찾는 모험에 발을 들여 놓았다. 김경호의 강남향린교회(1993~)와 들꽃향린교회(2003~), 최형묵의 천안살림교회(2000~), 정혁현의 한살림교회(1992~) 그리고 나와 양미강의 한백교회(김진호<1994~2002>, 양미강<2002~>) 등이 그렇다. 김경호는 그것을 ‘민중신학에 토대를 둔 교회’라고 명명하였는데,29) 확실히 이 교회들은 ‘더 민중신학적’이다. 전통적으로 구축된 틀이 교회의 전형으로서 전제되고 그 위에 민중신학이 어떻게 덧씌워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신학을 통해 교회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해보려는 시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와 ‘교직자 중심주의’, 이 두 교회적 권위구조의 전형이 되는 요소를 해체하고 어떻게 새로운 것을 찾아낼 것인가의 문제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나 또한 1994년 계획에 없던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함께 했던 교회에서 그 동안 내가 했던 것은 열성적 청년 신자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한데 어느 순간 교회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교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손님 같이 소극적 방관자였던 20대 청년들 외에는 남은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안이 생길 때까지 임시목회자가 되기로 했다.
    삼십대에 갓 들어선 ‘철없는’ 목회자는 ‘준비 없는’ 혹독한 여행길로 교인들을 초대했다. 이십대 청년 몇과 의논하여 내놓은 교회의 비전은 ‘소유의 해체’, ‘권위의 해체’, ‘장소의 해체’라는 ‘탈교회적 교회’의 모델 아닌 모델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2년간 우리는 ‘유목민’처럼 교회를 꾸려나갔다. 끊임없는 실험과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점차 비전은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 아닌 현재를 이해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양적인 발전은 없었고, 질적인 즐거움은 넘쳤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안병무 선생의 호출을 받았다. 선생이 교회에 출석한다는 조건으로 교회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한 기부자 애기를 하셨고, 당신은 나를 목회자로 지목하면서 교회 공간 구입비의 1/3을 교인들이 책임지게 하라는 제안을 하셨다.
    애초에 선생은 1년만 목회를 하라고 권하였다. 몇 달 뒤 나는 목사가 되겠다고 했고 선생은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나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하여 전임전도사에서 담임목사가 되었고, 유목민 공동체의 교역자에서 정착민 공동체의 교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청년 교인들은, 유목민과 같은 삶을 ‘준비 없이도’ 선택할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서, 삶의 정착지들을 향한 인생의 도정에 막 진입하는 시기를 맞았다.
    선생은 이러한 이행을 ‘목회’라고 표현한 듯하다. 나는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지 않고, 계속 목회자로서의 자의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은 그것을 구분하고 있었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목회’를 했지만 ‘목회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정쩡한 중간자로서 경계 위에서 일관성 없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동요하며 서 있었다. 하여 나는 목회자이면서 목회자가 아니었다. 또한 교회 역시 교회이면서 교회가 아니었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1년 계획이 무려 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대안을 발견했다. 양미강 목사가 취임한 것이다. 7년, 전임전도사 시절부터 계산하면 9년, 이 시간은 경계선 위를 휘청거리며 걷는 발길이 그리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나는 여전히 경계 위를 걷는다. 하지만 그 불안정함은 더 이상 동요의 조건이 아니다. ‘탈(脫)과 향(向)’은, 유목민적 삶과 정착민의 삶은 서로를 긴장하게 하면서 동시에 성찰하게 한다. 나는 그러한 배움, 신학적 성찰을 7년, 아니 9년간의 ‘교회살이’로부터 얻었다. 그것은 새로운 실천의 형식이며, 나아가 존재의 형식이다.
    한편 청년기를 지나 인생의 정착지를 확보하는 경쟁에 매진하며 살아가게 된 교인들, 그네들은 유목민에서 정착민으로 이행하는 인생의 방황기를,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살았던 교회와 함께 보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삶의 전형을 보여준 게 아니라, 함께 새로운 전형을 향하는 방황의 여정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7년/9년, 목회자로서의 나의 성찰처럼, 교회도 교인들도 경계에 선 존재의 삶의 방식을 발견해갔다.
    ‘탈교회적 교회’라는 한백의 자의식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나의 후임 목회자인 양미강 목사는 그러한 경계에 선 교회를, 그러한 자의식을 제도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취임한 이후 7년이 지난 지금, 한백교회는 새로운 신앙의 전형을 꽤 성공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가령, 교역자나 신학자의 고유영역에 일반 교인들이 참여하는 폭을 넓히고 또 그 반대로도 영역의 상호침투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가령, 예배를 모니터링하고 기획을 주관하는 평신도 모임이 교인들의 다양한 참여를 조직하게 한다. 또 소모임들은 예배를 주관하여 설교까지도 담당하는 실험예배를 모색한다. 한편 교인들이 스스로 찬송집을 주도하여 만들고 수차례 개정하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의 성찰에 개입하는 노래가 아니라면 어떤 노래도 찬송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신앙적 신념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 또 최근 ‘하늘뜻나누기’라는 이름의 설교가 끝난 뒤에 30분 정도의 토론이 이어지는 관행이 제도화되었다. 이것은 설교자가 ‘하늘 뜻’을 완결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그 뜻이 완성된다는 취지이다. 하여 네 명의 설교자들 각자는 사회를 해석하는 입장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비판적 옹호론에서 급진적 해체론까지 다양하지만, 교인들과의 명시적인 대화를 거치지 않는 어떠한 주장도 선험적인 당위성을 가질 수 없다. 오직 회중의 검증을 통해서만 그것은 설교로서 존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탈중심적이고 탈권위적인 교회의 신앙적 모색들은 음성파일이나 문서파일 형식으로 넷 공간에 공개된다.
    한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 연구 용역을 주어 나를 포함한 5인의 연구자들이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를 공동저술하게 하였다.30) 집필과 출간 사이에도 한백교회 교인 대상의 토론회 5회, 제3시대그리스도교와 공동주관한 공개 토론회를 1회를 시행하여, 저자들의 독백이 아닌, 독자의 참여를 통한 대화로서의 책의 출간을 의미화하고자 했다.
    또한 김경호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31)(들꽃향린교회)나, 최형묵의 󰡔뒤집어 보는 성서의 인물들󰡕, 󰡔반전의 희망, 욥󰡕(이상 천안살림교회)과 같이, 교회의 프로그램 때 활용된 텍스트를 수정 보완하여 책을 출판한 것처럼, 나의 책 󰡔예수의 독설󰡕, 󰡔성서 속의 인물들󰡕(삼인, 근간, 가제), 󰡔요한복음과의 낯선 여행󰡕(동연, 근간, 가제) 등도 교회에서 설교, 강의 자료 등으로 사용됐던 것을 다듬은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제3세대 민중신학은 교회를 매개로 교회 밖 ‘익명의 대중’과 대안교회 혹은 ‘탈교회적 교회’를 소재로 하는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요컨대 이들 교회들은 교인들의 공동체라는 의미를 넘어서 대안교회 혹은 탈교회적 교회라는 의미의 하나의 담론으로 유통되고 있으며, 하여 민중신학을 참조하는 그리스도교 운동이 부재하게 된 상황을 맞아, 민중신학적인 새로운 삶의 양식이자 운동의 양식으로 시민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다.

    탈(脫)과 향(向), 두울—비평의 발견

    한백교회의 목사직은 계속하더라도 신학연구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자 했다. 제도권 밖의 공간에서 연구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막막했던 탓이다. 여건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좋았던 시절은 없었다. 그보다는 버티는 것이 힘에 부치게 되었다는 게 옳다.
    다른 변수가 있다면 필경 경제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IMF 재앙을 맞아 누구나 어렵던 시절, 나도 몹시 힘겨웠다. 고리대금 수준의 은행금리는, 경제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존재의 여력을 앗아갔다. 또 하나 이유를 들자면, 1998년 민중신학자 대토론회를 정점으로 그 전후의 민중신학자들과의 극한적 갈등 상황에서 공부에 대한 심한 자괴감에 빠진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시기 나는 신학을 포기할 뻔했다.
    그리고 1998년 반전의 계기가 있었다. 그 무렵 󰡔계간 현대사상󰡕의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라는 기획 시리즈에서 10명의 아웃사이더 지식인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어, 그 잡지 7호(1999-1)에 대담과 글이 게재되었고,32) 그보다 앞서 출간된 같은 잡지의 특별중간호 󰡔1998 지식인 리포트. 한국 좌파의 목소리 편󰡕에 글이 실렸다.33) 그 어간 글을 발표할 매체를 상실했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던 중인데, 한꺼번에 두 편이, 그것도 그리스도교권 밖 새로 막 부상하고 있던 계간잡지에 실리게 되었으니, 적지 아니 고무되었다. 새로운 지면이 열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두 기획은 모두 꽤 성공한 것이어서, 그리스도교 영역 밖 담론 공간에선 순식간에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아웃사이더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IMF 재앙은 사회 전반에서 구세대의 발언력을 심각하게 훼손시켰고, ‘국민의 정부’가 집권하면서 구태스럽고 허위에 찬 ‘구지식’에 대하여 이른바 ‘신지식’을 향한 사회적 열망이 한껏 부풀던 때였다. 󰡔현대사상󰡕의 발빠른 기획은 ‘낡은 세력’인 그리스도교를 향한 시민사회적 비판의식에 부합하는 그리스도교 지식인 하나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유사한 기획이 잇따랐고, 어느덧 쉽사리 찾아지는 반그리스도교적 신학자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문화반란의 기수들’, 󰡔한겨레신문󰡕이 기획한 ‘인문학데이트’에서 연속 그리스도교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그리스도교 지식인으로 선정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34) 또 무크지 󰡔현실과 과학󰡕(1988~1991), 계간지 󰡔이론󰡕(1992~1997)을 잇는 한국좌파의 정론지 󰡔계간 진보평론󰡕이 1999년 가을에 창간호를 펴내게 되었는데, 이 책의 편집위원으로 6호(2000 겨울)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에는 ‘비평’(critic)이 폭증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비평이란, 언술의 논리적 정합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이론’(theory)에 비해, 평하고자 하는 ‘텍스트’(문헌적이든 사건적이든)의 담론적 효과를 주목한다. 이때 그 논리적 배후나 보편적 의의는 대개 생략된다. 하여 이론이 일종의 ‘주석’(commentary)적인 언술 형식을 지니는 데 반해, 비평은 ‘에세이’적 형식을 띤다. 그것은 이론이 이론 전문가 집단과의 대화와 논쟁을 지향하고 있고, 비평이 시민사회와 대면하고자 제기되는 것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비평은 평하고자 하는 텍스트 발화자의 주장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이의 말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며, 말하지 않은 것에서 말을 발견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러한 비평적 에세이는 그 텍스트 저자를 넘어서 텍스트의 효과를 해석해냄으로써 시민사회의 감춰진 부조리함을 드러내고 ‘성찰’(reflexibility)을 촉구한다.
    이것은 지배적인 말/텍스트의 표층적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에서 ‘국민’을, 지배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하는 집합적 주체로서 규정하면서, 이것이 권위주의 시대 시민성의 한 내용이라고 했는데, 반면 민주화라는 시대의 기조는 그러한 지배자의 말/주장을 자기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교섭하고 협상하는 존재, 그러한 자존적 주체인 ‘시민’의 대두와 맞물려 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민주화 시대 시민은 지배자의 말/텍스트의 표층적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독자적인 해석자로서 읽는 존재이다. 그럼으로써 ‘해석자-시민’은 시민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화 시대의 시민은 이론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읽고자 하는 ‘독자’로서 탄생한다. 바로 그들에게 ‘비평’이라는 레퍼런스적 텍스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 혹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시민사회는 해석적 개입을 원했고, 시민사회를 향해 제출된 비평이 을 위한 담론의 장이 형성되었다. 나에게 한국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쓸 수 있는 지면이, 계간지, 격월간지, 월간지, 주간지, 일간지 등 다양하게 생기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과 관련이 있다. 수많은 매체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평적 에세이를 쓰는 저술가들을 찾았고, 뜻밖에도 나는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비평가의 하나가 되는 행운을, 얼떨결에, 얻은 것이다. 종종 제도는 제도권 밖의 떠돌이를 원한다.
    이 시기 나의 비평들은 주로 그리스도교 담론 속에 내장된 서구중심주의가 한국그리스도교에서 발현되는 양식을 폭로하고 문제제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하여 한국그리스도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서구적 제국의 논리가 서로를 규정하며 공존하는 자기증식논리인 이른바 ‘승리주의’를 발본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뼈아픈 자기 해체의 과정이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유의미한 종교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계간 당대비평󰡕의 특집 ‘우리 안의 파시즘’에 기고된 「승리주의를 넘어서, 예수의 복원을 향해」35)는 이 기획의 엄청난 성공과 함께 나의 활동에서 중대한 기회를 선사했다. 편집위원으로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당시 우리사회의 어느 계간지보다 ‘기획’이 강화된 매체에 기획자의 하나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비평가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시민사회의 담론 지형에 개입할 수 있는 지면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평가들의 비평을 기획하고 조직할 수 있는 위상, 즉 에디터로서 사회적 담론 형성에 끼어들 수 있게 된 것을 뜻한다.
    󰡔당대비평󰡕 13호(2000 겨울)부터 20호(2002 가을)까지 8권을 만들었고, 이어서 21호(2003 겨울-봄 합본)부터 이 잡지가 종간되는 28호(2004 겨울)까지는 편집주간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편집위원이던 때 한 권,36) 편집주간이던 2년 동안에 무려 6권의 특별호 혹은 중간호 형식의 단행본을 만들었다.37) 종간된 이후에는 단행본 기획모임으로 전환하여 현재까지 세 권을 펴냈고,38) 다른 한 권은 올해 말경에 출간 예정에 있다.
    편집위원이라는 역할, 특히 편집주간의 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에 한정된 비평가 혹은 기획자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동시대 한국사회를 읽어내는 안목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비평이라는 장르는 미시적인 문제들을 주목하고, 거기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보였던 현상들 간을 연계고리를 읽어내며 그것에서 보다 넓은 차원의 위기를 해석해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긴 시간 동안 신학 영역 안에서만 생각을 펴왔던 자로서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표현도, 사람도, 생각의 방식도 낯설었다. 신학이 얼마나 고립된 섬 안에 갇혀 있는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독서를 했던 기간 중 하나가 바로 이 시기였다. 실은 독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현장을 보고, 그것에서 읽을 것과 생각할 것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 한 해에 4권의 책을 낸다는 것은, 게다가 특별호나 중간호 같은 단행본까지 펴낸다는 것은, 늘 시간의 부족 속에서 생각하고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여 매호를 펴낼 때마다 무엇을 했는지 어리둥절한 상태였고, 늘 사후에 그 기획의 의의를 어렴풋이나마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얼떨결에 잡지의 편집위원과 주간이 된 것처럼, 4년간의 지식 기획자 생활도 얼떨결에 지나갔다.  
    이 4년간 잡지는 두 번 이사를 했다. 내가 관여하기 전에 한 번의 이사 경력이 더 있다. 잡지의 이력치고는 희귀한 경우다. 대개 잡지는 자금력이 없이는 발행하기가 쉽지 않다. 비용은 많이 드는데, 판매 단가가 일반 단행본보다 낮으며, 시장에서 순환하는 시간도 짧다. 해서 대개는 경제적 어려움이 생기면 발행처를 옮기기보다는 공중분해되는 게 상례다. 게다가 󰡔당대비평󰡕은 소설 같은 시장성 있는 글을 실은 적도 없다.
    더욱이 이 계간지의 가장 대표적인 기획자는 문부식 선생이다. 탁월한 기획자이지만, 그의 학력은 고졸이다. 그를 이어 주간직을 맡은 나 또한 박사 학위가 없으며, 그나마 한국사회의 각종 논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신학 경력의 소유자다. 지식 담론의 한 가운데서 소비되는 잡지의 주간이 번듯한 학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잡지를 지탱해줄 출판사 또한 영세하다는 것, 이런 여건은 󰡔당대비평󰡕이 살아남기 위해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기획력 외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당비스럽다’라는 말이 종종 사용되었는데, 그것의 함의는, 한국사회의 보수든 진보든 제도화된 것, 사람들의 몸에 잘 안착되어 거의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것에서 이질감을 드러내고, 낯설고 잊어버린 것에서 친숙함을 발견하려는 담론의 스타일을 말한다. 󰡔당대비평󰡕이 하고자 했던 기획의 기조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해서 󰡔당대비평󰡕은 내내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잡지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비’가 우리 사회에 남긴 기록은 ‘탈(脫)’의 이야기다. 그것은 변화하는 세계의 가능성에 관한 수많은 ‘향(向)’의 물결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자들의 기록이고, 삭제된 자들의 감추어진 흔적이다. 물론 ‘향’ 외부의 ‘탈’은 존재할 수 없다. 그 외부는 비존재이며,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여 ‘향’의 흐름 속에서, 그 끝의 경계 위에서 ‘탈’은 발버둥하며 흐름에 거스르려 바둥거리는 것, 그것이 ‘당비’인 것이다. 또한 바로 나 자신이 그러한 존재, 비존재의 존재인 것이다.
    지난 2005년 1월, 파란만장했던 저널북(저널+단행본) 󰡔계간 인물과 사상󰡕이 33호를 마지막으로 종간을 선언했다. 그 의미를 두고 지식사회는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다. 조금 먼저 종간된 잡지 주간의 한 사람으로서 내게도 논평의 요청이 왔다. 「‘인물과 사상’ 이후의 글쓰기는 가능한가?」39)에서 나는 강준만을 종이문자 시대에서 디지털문자 시대로의 매체 환경 변화의 마지막이자 시작을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한 바 있다. 그 유명한 ‘강준만 파일’은 바로 종이스크랩의 산물이다. 그의 파일에는 우리사회 지배층의 위선을 ‘성역 없이’ 폭로하는 신랄한 정보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강준만 식 글쓰기는 대중에게 희열을 선사했고, 나아가 대중이 권력과 지식의 영역에 개입하고 감시할 근거를 제공해주는 일종의 ‘감시의 문서고’였다. 한데 바로 이러한 대중의 감시는 디지털전자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커다란 진전을 이룩하게 된다. 즉 ‘강준만 파일’은 넷공간을 통해서 회자되면서, 무수한 정보가 덧붙여지고 해석되면서 ‘확대 강준만 파일’을 만들어낸다. 즉 강준만의 실제 문서고는 넷 공간 속에서 ‘위(quasi-) 강준만’인 무수한 대중에 의해 ‘상상적 문서고’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강준만이 󰡔인물과 사상󰡕의 종간을 선언하며 그 문서고로부터 퇴장하자, 이제 대중은 스스로 넷공간의 자기의 문서고를 만들고, 다른 대중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 어간 각 일간지들은 속속 ‘계간지 리뷰’면을 없애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계간지는 담론 형성적 지위를 상실해갔다. 사람들은 계간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대중미디어 기자들도 사회의 의제를 말하기 위해 계간지를 참조하지 않게 되었다. 바야흐로 계간지의 시대는 급속도로 저물고 있었다.
    󰡔당대비평󰡕을 복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사실은 마지막 권인 28호에서도 ‘종간’ 대신 ‘휴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러 자산가들의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구 ‘당대비평’ 편집위원들은 모여서 계간지 대신 단행본을 만드는 기획모임으로 재편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세 권의 책을 펴냈고, 이제 1년에 두 권씩 내기로 거의 정례화되었다.  
    이제 다시 신학 영역으로 복귀했다. 2006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나를 연구실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3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는 거액 후원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무실도 생겼고, 기초설비들이 꽤 잘 갖춰졌다. 그리고 함께 상근하는 동료들이 생겼다. 하지만 내게는 이제까지 해보지 못한 역할이 부여됐다. 아니 그 역할이 무언지 알 수 없지만, 달라져야 한다는 안팎의 압박이 있었다. 누구도 그 상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이만한 기구의 운영자들에 관한 전제된 이미지들이 나를 규정하는 틀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전력과 스타일을 아는 동료와 선배들은 여러 형태로 그런 변화에 익숙하지 못한 자를 돌보아주면서 무난한 운영이 가능하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하지만 1년 만에 그 후원자는 떠나갔고, 다시 우리만 남겨졌다. 나는 다소 독선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익숙한 방식대로 되돌리려 했다. 소액의 회비를 내는 회원들을 모집했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경계를 걷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선택했다. 18년을 버텨온 전력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적지 아니 있다. 지금은 바로 그것을 하고자 애쓰고 있다.
    하나 더, 이제 민중신학의 내일을 맡아줄 후배들에게 줄 것이 조금 생겼다. 연구소도 그 중 하나다. 나의 목표는 두 명의 상근자가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남겨주는 것이다. 지금은 꽤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아웃사이더로 살아가기,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아니 될 수 있을 것 같다.

    고통의 현상학

    후배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또 한 가지는 제3세대 민중신학의 의의가 선배들의 그것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평가받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독보적 의의를 ‘고통’을 신학화하는 데서 본다. 우리사회의 어느 분야의 비판 담론보다도 고통의 현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깊은 통찰을 담아내는 신학의 발견이 나의 목표다.
    ‘고통’이라는 주제를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한 계기는,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이 되고 나서 야심을 갖고 시작한 기획인 ‘연속기획: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14호(2001년 봄)부터 시작해서 27호(2004년 가을)까지 총 12 주제로 46편의 글이 실렸다. 기획 취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배제가 작동되는 현장을 ‘중층적으로 치밀하게’ 읽어본다(thick description)는 데 있었다. 감추어진 편견과 차별을 발견하는 데 초점이 있었고, 그 현장의 증언, 현장 연구, 그리고 좀더 큰 차원에서 사회적 체계의 시각에서 읽어내는 연구 등을 엮어낸다는 취지였는데, 현장 연구가 거의 없는 우리사회 지식의 현황에서 해당 주제에 맞는 연구자를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어떤 것은 아예 연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해서 가장 많은 공이 들면서도 대체로 완성도는 높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기획은 내게 중요한 신학적 과제에 직면하게 했다. 즉 ‘고통’을 ‘치밀하게 중층적’으로 읽지 않고서는 민중신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고통을 다양하게 서사화한다. 이 많은 서사들 속에서 고통은 종종 ‘낭만화’되어 있다(romanticized). 진보적 성향의 이데올로기에서 고통은 종종 ‘성화’(sanctification)된다. 그런데 이 기획을 진행하면서, 지식인들과 시민사회가, 아니 나 자신이 고통을, 낭만화하든 성화하든, 너무 쉽게 서사화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것의 고통’(raw pain)이라는 표현의 실재, 그 말의 현실에 다가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해야 했던 것이다.
    고통은 종종 언어를 왜곡하고, 기억을 왜곡하며, 관계를 왜곡한다. 하여 고통은 흔히 다른 것으로 전이되어 표현되며, 자기 학대나 타자를 향한 공격으로 나타나곤 한다. 혹은 민족주의든 반공주의든 공적인 언어로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다단하게 왜곡된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치밀한 중층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과 폭력의 피라미드 최말단의 존재들은 그 누적된 고통과 폭력의 체험을 묘사할 언어를 상실하였다. 이런 체험의 재현 불능 상태를 사회적 실어증(social aphasia)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민중을 이야기하는 주요 지점이 바로 여기라는 것이다.
    나의 글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민중신학의 당대성 모색」40)은 고통의 치밀한 중층적 읽기가 신학의 핵심적 요소임을 제기하는, 일종의 개론적 글이다. 여기서 ‘현상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데올로기를 전제하지 않고 체험을 언어화할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고통의 민중신학적 언어화’를 안병무 선생의 용어로 말하면 ‘증언’이다. 곧 고통과 폭력의 현상학은 우리시대의 문제의식으로 표현된 증언의 신학인 셈이다.
    󰡔당대비평󰡕 23호(2003년 가을)의 특집 ‘무능력, 가능성의 재앙에 대한 보고서’는 고통과 폭력의 현상학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구성된,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장 많이 가는 기획이다. 그 어간 ‘노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우연히 어느 노숙자의 개인사에 다가서게 되면서 문제의식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프랑스의 한 연구에서 얻은 착상에서 ‘무능력’이라는 키워드로 우리사회를 읽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나의 글 「‘카인 콤플렉스’와 무능력자 담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무능력’은 한 번도 우리 사회를 읽는 시선의 핵심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능력이라는 기표는, 그것이 사용되는 형식은 매우 유의미한 동시대적 징후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 기획은 그야말로 난항의 연속이었고, 필자들의 생각을 견인하는 데도 실패했다. 누구도 말해보지 않은 주제인데, 그것으로 한국사회의 동학을 이야기하고 고통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려 하니 모두들 글의 방향을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여 이 기획은, 나의 판단으로는 우리시대의 의제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지만, 의제화하기엔 너무 낯선 것이었다.
    무능력 담론을 살펴보면, 행위수행능력을 결핍한 무능력과 행위수행능력을 갖춘 이가 직면한 무능력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가 주목의 대상인데, 그것은 최근의 담론에서 특히 많이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고, 시민사회가 전통적인 무능력자인 전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사회적 망각의 메커니즘이 바로 이 두번째 무능력자 담론 속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민주화에 과잉 경도된 시민적 주체를 ‘참여’로서 담론화하려는 정책적 기조에서 ‘비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의 결핍을 제기한 바 있다. 21호(2003년 겨울-봄 합본호)의 머리글 「‘국민 참여' 시대의 비국민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이 짧막한 문제제기를 보다 깊게 다룬 것이 「카인 ... 」이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두 민주정부 시대에 소득 양극화는 현저히 악화되었고, 이러한 양극화의 가장 주된 요인인 비정규직의 비중도 급속도로 커졌다. MB 정부의 출범은 한국의 민주정부가 토대를 놓은 비시민 배제의 메커니즘을 현저히 악화시킬 것이 예상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정부-MB정부는 서로 정적(政敵)이면서도 동시에 공유하는 감각체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 발표한 나의 글 「5.18 기억의 정치화와 민족—지구화 시대 민주화와 선진화 담론의 감각 체계」41)는 바로 이러한 공유된 감각체계를 권력엘리트와 시민사회의 지식기반사회적 지향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의 사회적 망각의 메커니즘은 (시민권이 아닌) ‘인권’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시민사회에서 배제의 공간, 곧 비시민의 일상공간에서 벌어지는 과잉폭력 상황에 대해 시민사회는 그 고통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것은 포섭된 자와 배제된 자의 ‘담론 공간의 분리’가 보다 분명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담론적 공간의 분리가 발달할수록 물리적 공간의 분리는 불필요해진다. 해서 권위주의 시대의 배제주의가 선호한 ‘제거와 격리의 정치’는 점점 불필요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담론적 공간 분리’가 보다 명료해졌다는 것은 근대국가의 내부에서 또 다른 국경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강상중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권을 둘러싼 일본사회의 동화와 포섭의 메커니즘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용어를 빌어, ‘내적 국경’이라고 말한 것42)을, 한국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외적)국경 내부의 담론적 공간분리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니다. 근대국가는 국경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감성적 동일자의식을 만들어냈다. ‘도덕공동체’(moral community)라는 칸트의 용어는 바로 이러한 동일자의식이 내포하는 상호책임의 감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데 미국의 신실용주의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도덕공동체적 동일자의식이 실종되는 공간에서 인권의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담론공간의 분리 과정에서 내적 국경의 외부로 밀려난 이들에 대해 시민사회는 민족적 혹은 국민적 공조감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여 오늘 우리 사회의 인권의 문제는 민주화 이후 형성된 담론적 공간 분리와 연동된 사회의 배제 메커니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국경들 너머의 짐승들 혹은 인간들—오늘의 인권 문제와 비판신학1: 내셔널리티」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43)
    한국사회는 급속도로 양극화되고 있다. 빈곤층은 단지 경제적인 결핍만으로 충분히 규정할 수 없는 ‘빈곤의 문화’라는 그로테스크한 영역으로 재편되고 있고, 시민사회는 과거 개발독재 시대의 천민적 시민의 사회 규정적 힘이 서서히 약화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른바 교양층으로서의 시민사회의 문화가 대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미학화, 교양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가 점차 신사화(gentrification)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그런데 도심 재개발을 뜻하는 ‘신사화’라는 용어가 함축하고 있듯이, 이러한 징후는 시민사회라는 진공포장된 ‘이데올로기적 영역’ 외부의 배제를 더욱 견고히 하는 미학적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사회의 미학화로의 이행이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되는 곳이 교회이다. 특히 내가 ‘후발대형교회’라는 이념형적 실체로 규정한 현상은 일부 대형교회에서 일어나는 자기갱신운동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에서 나는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이른바 교양층의 자기 서사화, 특히 종교적인 서사화를 본다. 영화 <밀양>에 관한 신학적 평론인 「왜 교회는 그녀의 고통을 읽지 못 할까」44)에서 나는 소설 「벌레이야기」와 다른 영화의 서사에서 교양층으로서의 시민사회의 등장을 한국기독교라는 은유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가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한 이의 자기파괴, 그 깊은 고통의 심연에 다가갈 수 없는 시민사회적 교양층의 문화를 읽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45)를 포함한 일련의 연구들은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의 재편 가능성, 그리고 보수주의적 미학화의 디스토피아적 우울함의 시스템을 분석하고 있다.

    사회의 보수주의적 미학에 심취할 수 없는 이는 새로 조성된 광화문 광장 벤치 언저리를 서성인다. 파리 아케이드를, 그 화려한 자본주의의 장밋빛 환형에 동화되지 못한 채 하릴없이 거니는 플라네르(flâneur)처럼. 상념에 젖는다. 저 광장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인다. 그 앞 홍보대 앞에서 춤추고 있는 자본의 무희들을 흘깃 쳐다보며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외양의 문화를 거스르기가 점점 벅차다.
    하지만 전능한 권력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집은 결국 무너졌다. 그것은 약함 속에서 나오는 힘이고, 패배 속에서 드러나는 저력이다. 아무도 진혼곡을 부르지 않아도 죽음은 산 이들에게 진혼곡을 부르도록 호출한다. 「타인의 고통으로 지은 체제는 오래 지속된다고 해도 그 죽음의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46)에서 제기한 민중신학적 역사관은 이렇다.    
    이 멜랑꼴리한 공간 저편, 어느 칙칙한 곳에 사람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경계선상의 존재 리플리컨트가 잠입해 들어왔다. 전능한 권력이 회수하지 못한 리플리컨트가 그 칙칙한 공간에서 찾고 있는 것은 ‘기억’이다. 전능한 권력이 심은 위조된 기억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간직되는 몸의 기억이다(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1990년대 이후, 민주화와 지구화의 시대, 시간은 민중신학의 지반을 붕괴시켰다. 모든 것은 그 시간에 의해 눈처럼 녹아버렸다. 하지만 아직 회수되지 않은 자들이 있다. 그 중에 민중신학도 끼어 있다. 시간이 회수하지 못한 한 민중신학도는 그 시간의 경계 위를 걷는다. 유랑자가 되어 휘청거리며 뒤뚱뒤뚱 걷는다. 고통과 폭력의 현상학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곧 모래로 뒤덮일 사막 위에 기록을 시작한다. □


    [주]

    1) 󰡔함께 읽는 구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 1991), 󰡔함께 읽는 신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 1992).
    2) 󰡔야훼 신앙의 맥—오경,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1󰡕(평화나무, 2007), 󰡔새 역사를 향한 순례—역사서,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2󰡕(평화나무, 2007),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왕국시대 예언자,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3󰡕(평화나무, 2008), 󰡔위기 속에서 대안을 찾다—포로기와 그 이후 예언자,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4󰡕(평화나무, 2009)
    3) 이 책은 삼인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에 있다.
    4) 동연, 2009년 출간.
    5) 김남석,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난민의식 연구―최인훈 작품 세계와 연구(2)」,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34(2007 봄) 참조.
    6) 나의 글 「‘성화된 양심’은 없다―우리 시대 ‘양심의 도구화’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 󰡔황해문화󰡕 51(2006 여름), 40~43쪽 참조.
    7) 이 책은 내가 편집주간으로 일하던 󰡔계간 당대비평󰡕이 펴낸 단행본 시리즈 ‘당비생각’의 제1권으로 출간되었다(생각의 나무, 2002).
    8) 김현정, 「서정주 시에 나타난 아버지의 의미」, 󰡔어문연구󰡕 55(2007 12); 허문영, 「홀로 남겨진 소년들을 떠나보내며」(http://www.piff.org/kor/html/webzine/02_view.asp?article_id=4000000015&essey_code=3) 참조.
    9) 김동춘, 「학술운동의 현황과 전망」, 󰡔현상과인식󰡕 45(1989 봄) 참조.
    10) 김원, 「1987년 이후 진보적 지식생산의 변화―진보적 지식공동체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77(2008 봄) 참조.
    11) 「지지자들을 통해 본 예수운동 연구—마르코복음서를 중심으로」(한신대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12) 베레아 지역(세례자 요한이 주도한 운동의 일원으로 참여_제1단계)⇒갈릴래아 촌락 회당 내부(제2단계)⇒갈릴래아 촌락 회당 외부, 특히 ‘호숫가’(제3단계)⇒예루살렘(제4단계)
    13) 역할에 있어 예수운동의 참여자들을 역할에 있어서 추종자 집단 중 ‘내적 집단’(inner-circle, ‘열둘’), ‘그밖의 추종자 집단’(‘제자’), 그리고 주변의 대중, 이렇게 셋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해석할 때에 마지막 주변의 대중은 다시 ‘촌락 안의 대중’과 ‘촌락 밖의 대중’(=오클로스)으로 나누었다. 한편 「마르코복음」의 구성에 따르면 예수운동의 주요 대중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는 계기에 촌락회당에서 바리사이와의 갈등이 게재되어 있다.
    14) 도서출판 나단에서 1992에 펴낸 책이다.
    15) 한국신학연구소 1996년 출간. 이 책에 수록된 나의 해제는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이다.
    16) 다산글방 2000년에 출간.
    17) 내가 작명한 책의 제목은 ‘예수로 예수 넘기’이고, 부제는 ‘예수 역사학의 새로운 전망’이었다.
    18) 「‘탈교회적 주체’의 신앙을 향해―‘역사의 예수’ 담론의 정치성」(󰡔진보평론󰡕 7<2001 봄>); 「‘역사의 예수’ 담론과 교회주의 비판」(󰡔신학사상󰡕 116<2002 봄>);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팍스크리스티나아―역사의 예수 연구의 정치성에 대하여(재론)」(󰡔세계의 신학󰡕 58<2003 봄>).
    19) 삼인출판사에서 2008년에 출판되었다.
    20) 제1권: 정연복의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무엇인가󰡕(1991); 제2권: 최형묵의 󰡔사회변혁운동과 기독교신학󰡕(1991); 제3권: 김경호의 󰡔해방을 위한 사랑의 선한 싸움󰡕(1992); 제4권: 김진호의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예수운동의 혁명성 연구󰡕(1992); 제5권: 서재경의 󰡔예수라 불렀다󰡕(1993).
    21) 󰡔시대와 민중신학󰡕은 한국에서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 책이지만, 하버드 대학에 전 권이 소장되어 있고, 일부가 소장되어 있는 학교, 새롭게 주문하겠다는 비공식 제안이 있는 학교 등이 있어, 의미 있는 한국학 자료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2) 이 글은 󰡔시대와 민중신학󰡕 4호(1997)에 수록되었다.
    23) 이것은 1998년 한국신학연구소가 주최한 민중신학자 대토론회에서 발표된 나의 글 「한국사회의 근대성과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에서 보다 체계화되었다.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2001년 2월 포럼에서 다소 수정 보완되어 재발표되었고, 󰡔시대와 민중신학󰡕 7호(2002)에 같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24) 실제로 제1세대와 제2세대 민중신학을 논하는 이들은 거의 언제나 이 둘을 대립시키면서 제2세대를 격하시키곤 한다.
    25) 나의 글 「낯설음에 대한 은폐된 폭력,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우리 안의 이분법󰡕 참조.
    26) 나의 글 「국경들 너머의 짐승들 혹은 인간들—오늘의 인권 문제와 비판신학1: 내셔널리티」, 󰡔시대와 민중신학󰡕 10(2007); —, 「5.18 기억의 정치화와 민족—지구화 시대 민주화와 선진화 담론의 감각 체계」, 󰡔5.18 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2009) 참조. ‘망각(잊어버림)의 정치’라는 용어는 정건화 박배균의 논문 「세계화와 "잊어버림"의 정치: 안산시 원곡동의 외국인 노동자 거주지역에 대한 연구」,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0/4(2004)에서 빌려온 표현이다.
    27) 나의 글 「민주화 시대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 당대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웅진 지식하우스, 2007) 참조.
    28) ‘예감’은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의 책 󰡔전장의 기억󰡕(이산, 2002)과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에서 빌어온 개념이다.
    29) 김경호, 「민중신학에 토대한 교회」, 󰡔시대와 민중신학󰡕2(1995) 참조.
    30) 삼인출판사에서 2006년 발행.
    31) 주2) 참조.
    32) 김성기 김진호, 「대담: 역사 속의 예수를 찾아가는 연구 노숙자」와 「단(斷)과 공(公)의 변증법: 지구적 자본 시대의 위기와 민중신학적 희망의 원리를 찾아서」, 󰡔현대사상󰡕 7(1999-1).
    33) 「IMF 시대의 민중신학―오늘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1998 지식인 리포트: 한국 좌파의 목소리󰡕 (민은사 1998.9)
    34) 「문화반란의 기수들 11: 3세대 민중신학자 김진호. ‘교회 해체’를 외치는 급진파 목사」(󰡔경향신문󰡕 1999.6.24); 「인문학 데이트 10: 김진호 편」(󰡔한겨레신문󰡕 2000.7.27).
    35) 8호(1999 가을). 이것은 다시 단행본 󰡔우리 안의 파시즘󰡕(삼인, 2000)에 재수록되었다.
    36) 김창엽 외,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다양한 몸의 평등한 삶을 꿈꾸며󰡕 (삼인, 2002).
    37)  박노자 외, 󰡔‘탈영자들’의 기념비. 당대비평 특별호󰡕 (생각의 나무, 2003); 슬라보예 지젝 도정일 외,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당대비평 특별호󰡕 (생각의 나무, 2004); 김동춘 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생각의 나무, 2005); 권용립 외, 󰡔우리 안의 이분법. 당비생각1󰡕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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